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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2. 전쟁의 배경 및 각국의 입장
2.1. 고려의 입장2.2. 요나라의 입장
2.2.1. 송나라 압박과 고려의 중요성2.2.2. 고려에 대한 압박과 전쟁의 필요성
3. 송나라의 입장4. 전개
4.1. 양측의 배수진과 대회전4.2. 고려 기병대의 등장과 전새의 역전4.3. 거란군의 패퇴와 고려군의 섬멸전 4.4. 전투의 결과와 고려의 승리
5. 동아시아의 국가들에 끼친 영향
5.1. 고려
5.1.1. 군사적 영향5.1.2. 외교적 영향5.1.3. 정치적 영향5.1.4. 사회·경제적 영향
5.2. 요나라5.3. 송나라

1. 개요[편집]

귀주 대첩(龜州大捷)은 고려 현종 11년(1019년) 2월, 고려군이 거란(요)군을 상대로 거둔 결정적인 승리를 의미한다. 이 전투는 고려와 거란 사이에서 벌어진 제3차 고려-거란 전쟁(1018~1019년)의 마지막 전투로, 강감찬(姜邯贊)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현재의 평안북도 구성 인근)에서 거란군을 대파하며 전쟁을 종결짓는 계기가 되었다.

2. 전쟁의 배경 및 각국의 입장[편집]

귀주 대첩(1019년)은 고려와 요나라(거란) 사이에서 벌어진 제3차 고려-거란 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고려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전쟁을 종결지은 사건이다. 이 전쟁은 단순한 국경 분쟁을 넘어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고려, 요나라, 그리고 송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힌 복합적인 갈등의 산물이었다. 당시 각국은 각자의 정치적·군사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서로 다른 전략을 취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이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2.1. 고려의 입장[편집]

고려(918~1392)는 건국 초기부터 중국 대륙의 송나라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사이에서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며 독립을 지키려 하였다. 고려는 송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문화적·경제적 교류를 지속했으나, 이러한 정책은 요나라의 강한 견제를 받는 원인이 되었다.

고려와 거란의 갈등은 10세기 후반부터 점차 심화되었다. 993년, 요나라는 처음으로 고려를 침공하여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이 발발하였다. 당시 고려는 서희(徐熙)의 외교적 협상으로 전쟁을 피하는 데 성공하였고, 거란이 원했던 송나라와의 단절을 공식적으로 약속하는 대신, 강동 6주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는 이후에도 송나라와 비밀리에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거란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1010년,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요나라가 다시 고려를 침공하면서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요나라는 개경을 점령하고 약탈하였으나, 고려의 지속적인 저항과 보급 문제로 인해 철수하였다. 이후 고려는 국방을 강화하며 장기간에 걸쳐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특히, 북방 방어 체계를 정비하고 군사력을 증강하는 한편, 전략적으로 장기전을 준비하여 거란의 다음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1018년, 요나라 성종(聖宗)은 고려의 친송 정책과 조공 거부를 문제 삼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제3차 침공을 감행하였다.

2.2. 요나라의 입장[편집]

발해를 멸망시키고 요나라를 건국한 거란족은 기동력이 뛰어난 강력한 기병 부대를 기반으로 주변국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점하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요나라의 최우선 목표는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확립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한족 왕조인 송나라를 압박하고, 고려를 복속시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려 하였다. 고려와의 전쟁은 단순한 국경 분쟁을 넘어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요나라의 패권 장악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2.2.1. 송나라 압박과 고려의 중요성[편집]

요나라는 송나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조공을 받아내는 전략을 펼쳤다. 1004년, 요나라 성종(聖宗)은 송나라와 ‘전연의 맹약(澶淵之盟)’을 체결하여 송나라로부터 매년 막대한 양의 은과 비단을 조공으로 받았다. 이 조약을 통해 요나라는 경제적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그러나 송나라와의 관계에서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송나라를 지속적으로 견제하며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자리 잡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고려의 존재는 요나라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와 지속적으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군사적·외교적으로 협력하고 있었으며, 요나라의 남하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요나라가 송나라를 효과적으로 압박하기 위해서는 고려를 굴복시키고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고려를 요나라의 영향권 아래에 두면, 요나라는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후방을 안정시키고 보다 강한 압박을 가할 수 있었다.

2.2.2. 고려에 대한 압박과 전쟁의 필요성[편집]

요나라는 고려를 복속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여러 차례 침공을 시도하였다. 993년 제1차 고려-거란 전쟁 당시, 요나라의 소손녕(蕭遜寧)이 고려를 공격하였으나, 고려의 외교 전략과 저항에 부딪혀 철수하였다. 당시 고려는 형식적으로 요나라와의 관계를 인정하는 한편, 실질적으로는 요나라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유지하였다.

1010년, 고려에서 발생한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요나라 성종은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때 요나라군은 개경을 함락하고 고려의 수도를 철저히 약탈하였으나, 고려의 지속적인 저항과 보급 문제로 인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고려는 요나라의 속국이 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요나라는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채 철수하면서도, 여전히 고려를 압박하고 언젠가 다시 정복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3. 송나라의 입장[편집]

송나라(960~1279)는 한족이 세운 왕조로, 건국 이후 요나라(거란)와 지속적인 대립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요나라보다 열세였던 송나라는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외교적 해결을 모색하였고, 1004년 ‘전연의 맹약(澶淵之盟)’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을 통해 송나라는 요나라에 매년 은 10만 량과 비단 20만 필을 바치는 대신 평화를 유지하는 정책을 선택하였다. 이는 송나라가 요나라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했으나, 지속적인 전쟁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송나라는 요나라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피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고려와의 외교 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송나라는 고려와 문화적·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요나라를 견제하려 했다. 고려 또한 송나라와의 외교를 강화하며 요나라의 압박에 대응하였다. 그러나 송나라는 고려가 요나라의 침략을 받을 때 직접적인 군사 지원을 제공하지는 않았으며, 고려가 요나라와 대립하면서도 완전히 패배하지 않기를 바라는 입장을 유지하였다.

1018년 요나라가 고려를 침공했을 때, 송나라는 이를 예의주시하면서도 개입하지 않았다. 고려가 요나라를 상대하는 동안 송나라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국경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고려가 전쟁에서 버틸 수 있도록 무역과 외교적 지원을 지속하였다. 귀주 대첩 이후, 송나라는 고려의 승리를 환영하며 요나라가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지 못하도록 외교적으로 협력하였다. 그러나 송나라는 여전히 요나라와의 군사적 대립을 피하고자 하였으며, 고려와 요나라 간의 평화 협정을 조용히 지켜보는 입장을 유지하였다.

4. 전개[편집]

1018년, 요나라 성종은 고려가 국경 방어를 강화하고 자주적인 외교 정책을 유지하는 것에 반발하여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감행하였다. 요나라의 명장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은 압록강을 넘어 침공하였으며, 개경을 목표로 빠르게 남하하였다. 이에 고려는 강감찬을 중심으로 전략적인 방어 태세를 갖추고 거란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유격전을 펼쳤다.

거란군은 개경까지 도달하였으나 심각한 보급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고, 더 이상의 진군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퇴각을 결정하였다. 고려군은 거란군을 끝까지 추격하며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4.1. 양측의 배수진과 대회전[편집]

양측은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쉽게 승패가 나지 않았다. 전투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고려군은 전열을 가다듬으며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이때 남하했던 김종현이 이끄는 고려 기병대가 전장에 도착하였다. 동시에 바람이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고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고려군은 이 기회를 활용하여 기세를 높였고, 전열을 정비한 후 거란군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거란군은 점차 하천 쪽으로 밀려났으며, 고려군의 강한 압박에 혼란에 빠졌다.

4.2. 고려 기병대의 등장과 전새의 역전[편집]

양측은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쉽게 승패가 나지 않았다. 전투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고려군은 전열을 가다듬으며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이때 남하했던 김종현이 이끄는 고려 기병대가 전장에 도착하였다. 동시에 바람이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고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고려군은 이 기회를 활용하여 기세를 높였고, 전열을 정비한 후 거란군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거란군은 점차 하천 쪽으로 밀려났으며, 고려군의 강한 압박에 혼란에 빠졌다.

4.3. 거란군의 패퇴와 고려군의 섬멸전 [편집]

강민첨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북을 울리며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거란군은 퇴각을 시도하며 석천을 건너려 하였으나, 고려군이 화살을 퍼부어 요나라의 정예군이었던 천운군과 우피실군 병력 대부분이 익사하였다. 거란 지휘부에서도 여러 장수들이 전사하였고, 후퇴하는 거란군은 반령에서 다시 고려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소배압은 갑옷과 병장기를 버리고 병사들에게 도주를 명령하였으나, 살아서 탈출한 병사는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1만 명 이상의 병사를 포로로 잡거나 처형하였고, 전장을 가득 메운 거란군의 시체와 버려진 무기들이 패배의 참혹함을 보여주었다.

4.4. 전투의 결과와 고려의 승리[편집]

귀주 대첩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로 인해 고려는 요나라의 침략을 완전히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요나라는 더 이상 고려를 침공하지 못하였으며, 고려는 북방 방어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대비 태세를 정비하였다.

귀주 대첩은 고려가 외세의 침략을 물리친 대표적인 승리로 기록되었으며, 고려의 자주성과 군사적 역량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5. 동아시아의 국가들에 끼친 영향[편집]

5.1. 고려[편집]

귀주 대첩(龜州大捷)은 1019년(고려 현종 10년) 고려와 거란(요)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로, 강감찬(姜邯贊)이 이끄는 고려군이 거란의 소배압(蕭排押) 지휘 하의 침략군을 크게 격파한 사건이다. 이 전투는 고려의 군사적 역량을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고려와 거란 간의 외교·군사적 관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귀주 대첩이 고려에 미친 영향은 정치·군사·외교·사회적 측면에서 다양하게 분석될 수 있다.

5.1.1. 군사적 영향[편집]

귀주 대첩은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나아가 전략적으로 대승을 거둔 사례로 평가된다. 고려군은 철저한 전술적 준비와 유리한 지형을 활용하여 퇴각하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섬멸하였으며, 이를 통해 고려의 군사력이 강대함을 입증하였다. 특히, 이전 전쟁(거란의 1·2차 침입)에서 경험한 전술적 한계를 극복하고, 기동력과 방어진을 조화롭게 운용하는 등 군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전투 능력을 한층 강화하였다. 이후 고려는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개경에 나성(羅城)을 축조하고, 천리장성(千里長城) 건설을 추진하는 등 장기적인 국방 체계를 정비하게 된다.

5.1.2. 외교적 영향[편집]

귀주 대첩 이후 고려와 거란 사이의 군사적 대립은 급격히 완화되었다. 거란은 세 차례에 걸친 고려 침공에서 기대했던 성과를 얻지 못했으며, 특히 3차 침입에서의 참패로 인해 고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020년 고려와 거란 사이의 화친이 이루어졌고, 1022년에는 고려가 요나라에 형식적으로 사대(事大)하는 조건으로 안정적인 국교가 수립되었다.

귀주 대첩에서 거란이 대패하면서 고려는 국제 사회에서 군사적으로 강한 국가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였다. 고려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요(거란), 송(宋), 일본, 여진 등 여러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거란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고려가 동북아 국제 질서에서 독자적인 외교적 입지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고려는 전쟁 이후에도 자주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외교적으로 실리를 취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비록 고려는 전쟁 후 요나라에 사대를 표하는 형식적 관계를 수립하였으나, 이는 강압적 복종이 아닌 상호 실리를 고려한 외교적 선택이었다. 고려는 1020년 이후 거란에 조공 사절을 보내 외교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이는 단순한 조공 외교가 아니라 고려의 국익을 도모하는 실리적인 외교 전략의 일환이었다. 고려는 거란과의 형식적인 조공-책봉 관계를 인정하는 대신, 내부적으로는 강력한 자주성을 유지하며 독립적인 국가 운영을 지속하였다.

또한 고려는 귀주 대첩 이후 거란과의 외교적 관계를 활용하여 송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고려는 전쟁 이전부터 송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문화·경제적으로 교류하고 있었는데,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고려는 보다 주체적인 외교 정책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를 통해 고려는 동아시아 국제 관계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강국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이후 거란, 송, 여진 등과의 관계를 조율하면서 안정적인 외교 질서를 구축해 나갔다.

더불어 고려 사신들은 송나라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으며, 이는 송나라의 재정에 부담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송나라의 문인 소동파(蘇東坡, 본명 소식)는 고려 사신들의 행태를 비판하였다. 그는 상소문인 '논고려진봉장(論高麗進奉狀)'에서 "고려 사신 접대를 위해 사관을 짓고, 배를 건조하느라 농민, 어민, 상인들이 병이 날 정도로 힘들어한다. 나라에는 조금의 이득도 없는데, 오랑캐는 엄청난 이득을 얻는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그는 고려 사신들에게 서적을 판매하지 말 것을 청원하며, "고려와의 교역에서 우리나라는 아무 이익이 없다. 오히려 손해가 다섯 가지나 된다. 고려가 요청한 책들과 금박 등은 수매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소동파는 고려 사신들이 송나라에서 수집한 정보가 거란으로 유출될 것을 우려하였으며, 고려와의 교류가 송나라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고려 사신들의 행태를 비판하며, 송나라 조정에 고려와의 교역을 제한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소동파의 비판은 당시 송나라 내에서 고려와의 교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와 송나라의 전반적인 관계는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으며, 이는 고려의 국제적 위상이 높게 상승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요나라를 견제할 수단이 고려 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비판을 송 황제들은 철저히 무시했다.

5.1.3. 정치적 영향[편집]

귀주 대첩은 고려 내부에서도 중요한 정치적 변화를 유발하였다. 고려 조정은 거란의 3차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왕권 강화를 위한 체제 정비에 착수하였으며, 특히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강감찬을 비롯한 군사 지도자들의 위상이 크게 상승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는 국방력 강화와 더불어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보다 공고히 하게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고려 조정은 대규모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의 군사력을 활용해야 했지만, 동시에 이들이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방지해야 했다. 이에 따라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적 체제를 확립하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특히 현종(顯宗, 재위 1009~1031)은 왕권 강화를 위해 정비된 국방 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한 제도 개혁을 적극 추진하였다. 귀주 대첩 이후 고려 조정은 문무 관료의 역할 분담을 재조정하고, 군사적 능력이 입증된 장군들의 정치적 위상을 높였으며, 그에 반해 친거란적 태도를 보였던 일부 신료들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또한, 전쟁을 계기로 국가 운영 체제가 전면적으로 개편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행정 시스템도 재정비되었다.

고려는 군사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국방력 강화를 위한 제도적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개경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 방어력을 증강하기 위해 나성(羅城)을 축조하고, 국경 방어선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하는 등 국가 안보 체계를 확립하였다. 또한, 귀주 대첩 이후 조정은 전쟁의 교훈을 바탕으로 국방과 외교 정책을 재검토하면서 자주성을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전까지 일부 고려 신료들은 거란과의 외교적 타협을 주장하며 사대 관계를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귀주 대첩에서의 대승을 계기로 고려 내부에서는 대외정책에 있어 보다 강경하고 자주적인 태도가 강조되었다.

한편, 고려 조정은 전쟁 후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고 행정 체계를 정비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는 중앙 정부의 정책적 주도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향후 고려가 내부적으로 더욱 안정된 정치 체제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현종 치하에서 시행된 각종 내정 개혁은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이후 고려의 국정 운영이 보다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중요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5.1.4. 사회·경제적 영향[편집]

귀주 대첩을 비롯한 전쟁은 고려 사회와 경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거란의 침입으로 인해 북방 지역이 황폐화되었으며, 고려 조정은 피해 지역의 복구와 국방력 강화를 위한 재정적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전후 복구를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다양한 경제 정책이 추진되었다.

고려 조정은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농업 생산력을 회복하기 위해 토지 제도를 정비하고, 유실된 토지의 경작을 독려하는 한편,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화하는 데 집중하였다. 특히,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지역의 개간을 장려하고, 백성들에게 일정 기간 세금을 감면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경제 회복을 도모하였다. 또한, 귀주 대첩 이후 고려는 장기적인 국방 강화를 위한 군비 확충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국가 재정 운용에서 군사적 투자 비중을 늘렸으며, 이를 위해 공납과 조세 부과 체계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전쟁은 고려 민중들에게 국가 방위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는 전쟁 과정에서 민중의 자발적인 협력을 필요로 했으며, 이에 따라 백성들의 군사적 동원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는 향후 고려 사회에서 군사력 강화와 자주적인 국가 운영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전쟁을 통해 국가의 안보가 직접적인 생존 문제와 연결된다는 점이 강조되면서, 고려 사회에서는 방어 체계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전쟁 이후에는 지방 사회에서도 성곽 건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중앙 정부의 지휘 아래 군사 훈련이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등 사회 전반에서 군사적 경계심이 높아졌다.

한편, 전쟁은 고려의 대외 경제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 과정에서 송나라와의 외교 및 교역을 강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를 통해 전쟁 이후 경제적 회복을 더욱 신속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특히, 전쟁으로 인해 고려 내부의 경제 활동이 위축된 상황에서, 대외 무역을 활성화하여 국고를 보충하는 정책이 시행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고려는 국제 교역망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귀주 대첩을 포함한 고려-거란 전쟁은 고려 사회와 경제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국가 재정과 국방력 강화를 위한 개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후 고려의 정치·군사·경제 구조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고려 사회가 외부의 침략에 더욱 강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5.2. 요나라[편집]

귀주 대첩은 고려뿐만 아니라 요나라(거란)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려 원정을 주도했던 거란군은 심각한 패배를 당했으며, 이는 요나라 내부의 정치·군사·외교적 상황에 다각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우선 군사적으로, 귀주 대첩에서의 대패는 요나라의 국력 소모를 가속화하였다. 거란은 고려를 복속시키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였으나, 3차 침입에서의 참패로 인해 고려 정복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0만 대군이 귀주에서 전멸당하면서 요나라 내부에서는 고려 원정의 정당성과 효과성에 대한 의문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또한, 거란군을 이끌었던 소배압(蕭排押)이 패배하면서 요나라의 군사적 권위에도 타격이 가해졌고, 이를 계기로 요나라 조정 내에서 군사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치적으로는 전쟁의 실패가 요나라 황실과 귀족 세력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고려 정벌을 추진했던 요 성종(遼聖宗, 재위 982~1031)은 전쟁을 통해 고려를 압박하고 세력권을 확장하고자 했으나, 세 차례의 침공이 모두 실패하면서 군사적 위신이 크게 실추되었다. 이에 따라 요나라 조정 내부에서는 원정 실패의 책임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으며, 특히 고려 원정을 강력히 추진했던 세력들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요 성종의 통치력은 흔들렸으며, 중앙 귀족층과 군부 사이에서 정책 노선에 대한 갈등이 지속되었다.

외교적으로는 귀주 대첩 이후 요나라가 고려에 대한 강경 정책을 철회하고 보다 유화적인 외교 기조를 채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를 굴복시키기 위한 군사적 방법이 실패하면서, 요나라는 실질적인 외교적 타협을 고려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020년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서 형식적인 사대 관계가 설정되었으며, 요나라는 고려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줄이고 국경 지역에서의 안정화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는 고려가 실질적인 자주권을 유지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외교적 타협이었으며, 요나라 입장에서는 군사적 실패로 인해 불가피하게 수용한 조치였다.

또한, 귀주 대첩에서의 패배는 요나라의 다른 주변국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요나라는 고려뿐만 아니라 서하(西夏), 여진(女眞) 등과도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고려 원정에서 거란군이 대패하면서 요나라의 군사적 위신이 하락하였다. 이에 따라 주변 민족들은 요나라의 군사력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특히 여진족과 송나라가 요나라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귀주 대첩은 요나라의 군사적 패권에 중대한 타격을 가한 사건으로, 이를 계기로 요나라 조정은 대외 전략을 재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 정복이라는 목표가 좌절된 이후 요나라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새로운 균형을 모색해야 했으며, 이러한 변화는 이후 요나라의 정치·군사·외교 정책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5.3. 송나라[편집]

귀주 대첩은 송나라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고려와 거란(요나라)의 전쟁에서 고려가 승리하면서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변화를 초래하였으며, 이는 송나라의 대외 전략과 외교 정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군사적으로, 송나라는 오랫동안 요나라와 국경 분쟁을 겪고 있었으며, 거란의 군사력이 강력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송나라는 1004년 요나라와 전연의 맹약(澶淵之盟)을 체결하여 거란에 대해 일정한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평화를 유지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러나 1019년 귀주 대첩에서 고려가 거란군을 대패시키면서, 송나라 내부에서는 요나라의 군사적 위신이 크게 손상되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송나라는 요나라에 대한 견제 전략을 재검토할 계기를 맞았으며, 고려와의 외교 관계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외교적으로는 귀주 대첩 이후 송나라와 고려의 관계가 보다 긴밀해졌다. 송나라는 거란을 공동의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고려의 승리를 환영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고려와의 외교적 유대 강화를 모색하였다. 특히 고려가 요나라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것은 송나라 입장에서 거란의 남하 가능성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고, 이는 송나라의 국방 부담을 경감시키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에 따라 송나라는 고려와의 사절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양국 간 무역 및 문화 교류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고려는 귀주 대첩 이후 더욱 자주적인 외교 노선을 확립하면서도, 송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거란에 대한 균형 외교를 유지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경제적으로도 귀주 대첩 이후 송나라와 고려 간의 무역이 더욱 확대되었다. 송나라는 비단과 도자기, 서적과 같은 고급 문화를 고려에 전파하였으며, 고려는 금, 은, 인삼, 특산품 등을 송나라에 수출하는 등 상호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고려는 전쟁 이후 국고를 채우기 위해 대외 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송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경제적 회복을 도모하였다. 송나라 역시 고려와의 교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거란과의 경제적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하고자 하였다.

한편, 고려 사신들의 송나라 방문과 관련된 논란도 있었다. 귀주 대첩 이후 고려의 외교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고려 사신들은 송나라에서 보다 우대받는 경우가 많았으나, 일부 송나라 인사들은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대표적으로 송나라의 문인 소동파(蘇東坡)는 고려 사신들이 송나라에서 지나치게 후한 대접을 받으며 송나라의 재정에 부담을 주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였다. 그는 고려 사신들이 송나라에서 서적과 물품을 대량으로 구매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며, 고려와의 교역이 송나라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송나라와 고려의 관계는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방향으로 유지되었으며, 이후에도 지속적인 문화·경제 교류가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귀주 대첩은 송나라에 군사적, 외교적, 경제적 측면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고려의 승리는 요나라의 패권을 약화시키면서 송나라가 보다 적극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송나라와 고려 간의 교류가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송나라 내부에서 거란과의 관계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는 등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미묘한 변화가 발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