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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ghal Empire | |||||
무굴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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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 아우랑제브 황제 시기의 최대 판도 |
1. 개요[편집]
무굴 제국은 약 330여 년 동안 인도 반도에 존재했던 왕조다.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인도 아대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제국의 최고 전성기에는 서쪽의 인더스강 외연부와 북서쪽 아프가니스탄 북부, 북쪽의 카슈미르에서부터 동쪽의 현재 아삼 고지대와 벵골 일대, 남쪽 데칸 고원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영토를 아우르며 남아시아 전역을 지배하였다.
무굴 제국의 건국은 일반적으로 1526년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일대 출신의 수장 바부르가 델리 술탄국의 이브라힘 로디를 제1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물리치고 인도 북부 평야로 진격하면서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바부르는 주변의 사파비 왕조와 오스만 제국의 도움을 얻어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북인도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였다. 다만 무굴 제국의 제도적 기반과 제국 구조는 그의 손자인 악바르 대제의 통치기인 1600년경에 정립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무굴 제국의 정치 체계는 악바르 시기를 기점으로 중앙집권화되고 표준화된 행정 체계로 진화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1720년 아우랑제브 황제 사후까지 지속되었으며, 그의 재위기에는 제국의 영토가 최대치에 도달하였다. 이후 제국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하여 1760년경에는 올드 델리 일대에만 실질적인 권한이 남았고, 1857년 인도 대반란 이후 영국령 인도제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무굴 제국은 군사 정복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피지배 민족과 문화에 대해 강압적으로 억누르기보다는 새로운 행정 기법과 다양한 출신의 통치 엘리트를 활용하여 이들을 포용하고 통합하려 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보다 효율적인 통치 체계로 이어졌고, 농업 기반 세금 제도가 제국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특히 악바르 시기에는 생산량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세금이 은화로 납부되었으며, 이는 농민과 장인 계층이 보다 넓은 시장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17세기 대부분 동안 유지된 상대적 평화는 인도 경제의 확장을 촉진하였다. 인도양을 무대로 한 유럽 세력의 확대와 인도산 원자재 및 가공품에 대한 수요 증가는 막대한 부를 무굴 왕실에 집중시켰다. 이로 인해 회화, 문학, 직물, 건축 등의 예술 분야에서 눈에 띄는 후원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샤 자한 황제 시대에는 타지마할을 포함한 다양한 건축 유산이 남겨졌다. 이들 가운데 아그라 성, 파테푸르 시크리, 델리의 붉은 성, 후마윤 능, 라호르 성, 샬라마르 정원, 타지마할 등이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제국의 명칭과 관련하여 공식적인 국호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아인 이 악바리』에는 제국이 '힌두스탄'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무굴 제국 행정 기록에는 '힌두스탄의 영토', '힌드의 나라', '알힌드 술탄국'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는 자국을 '힌도스탄의 땅'이라 지칭하였으며, 동시대 중국 기록에도 '힌두스탄'으로 표현되어 있다. 반면 서구권에서는 황제와 제국 모두를 '무굴'이라 불렀다.
무굴 왕조의 자칭 명칭은 '구르카니얀'으로, 이는 자신들이 몽골계 정복자 티무르의 후손임을 강조한 호칭이다. '구르칸'은 칭기즈칸 계열 공주와 혼인한 사람에게 붙는 명칭으로, 티무르는 이를 통해 정통성을 부여받았다. '무굴'이라는 단어는 원래 '몽골'의 인도-페르시아어형으로, 엄밀히 말하면 이 왕조의 초기 구성원들은 몽골인이 아니라 차가타이 투르크계 출신이었다. 이들을 무굴이라 부르게 된 배경에는 델리 술탄국을 지배하던 아프간계 엘리트와 구별하려는 인도의 정치적 맥락이 있었다. 그러나 무굴이라는 명칭의 사용은 오늘날에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일부 학자는 이 왕조를 '티무르 왕조' 또는 '인도-티무르 왕조'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무굴 제국의 건국은 일반적으로 1526년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일대 출신의 수장 바부르가 델리 술탄국의 이브라힘 로디를 제1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물리치고 인도 북부 평야로 진격하면서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바부르는 주변의 사파비 왕조와 오스만 제국의 도움을 얻어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북인도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였다. 다만 무굴 제국의 제도적 기반과 제국 구조는 그의 손자인 악바르 대제의 통치기인 1600년경에 정립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무굴 제국의 정치 체계는 악바르 시기를 기점으로 중앙집권화되고 표준화된 행정 체계로 진화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1720년 아우랑제브 황제 사후까지 지속되었으며, 그의 재위기에는 제국의 영토가 최대치에 도달하였다. 이후 제국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하여 1760년경에는 올드 델리 일대에만 실질적인 권한이 남았고, 1857년 인도 대반란 이후 영국령 인도제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무굴 제국은 군사 정복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피지배 민족과 문화에 대해 강압적으로 억누르기보다는 새로운 행정 기법과 다양한 출신의 통치 엘리트를 활용하여 이들을 포용하고 통합하려 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보다 효율적인 통치 체계로 이어졌고, 농업 기반 세금 제도가 제국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였다. 특히 악바르 시기에는 생산량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세금이 은화로 납부되었으며, 이는 농민과 장인 계층이 보다 넓은 시장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17세기 대부분 동안 유지된 상대적 평화는 인도 경제의 확장을 촉진하였다. 인도양을 무대로 한 유럽 세력의 확대와 인도산 원자재 및 가공품에 대한 수요 증가는 막대한 부를 무굴 왕실에 집중시켰다. 이로 인해 회화, 문학, 직물, 건축 등의 예술 분야에서 눈에 띄는 후원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샤 자한 황제 시대에는 타지마할을 포함한 다양한 건축 유산이 남겨졌다. 이들 가운데 아그라 성, 파테푸르 시크리, 델리의 붉은 성, 후마윤 능, 라호르 성, 샬라마르 정원, 타지마할 등이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제국의 명칭과 관련하여 공식적인 국호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아인 이 악바리』에는 제국이 '힌두스탄'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무굴 제국 행정 기록에는 '힌두스탄의 영토', '힌드의 나라', '알힌드 술탄국'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는 자국을 '힌도스탄의 땅'이라 지칭하였으며, 동시대 중국 기록에도 '힌두스탄'으로 표현되어 있다. 반면 서구권에서는 황제와 제국 모두를 '무굴'이라 불렀다.
무굴 왕조의 자칭 명칭은 '구르카니얀'으로, 이는 자신들이 몽골계 정복자 티무르의 후손임을 강조한 호칭이다. '구르칸'은 칭기즈칸 계열 공주와 혼인한 사람에게 붙는 명칭으로, 티무르는 이를 통해 정통성을 부여받았다. '무굴'이라는 단어는 원래 '몽골'의 인도-페르시아어형으로, 엄밀히 말하면 이 왕조의 초기 구성원들은 몽골인이 아니라 차가타이 투르크계 출신이었다. 이들을 무굴이라 부르게 된 배경에는 델리 술탄국을 지배하던 아프간계 엘리트와 구별하려는 인도의 정치적 맥락이 있었다. 그러나 무굴이라는 명칭의 사용은 오늘날에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일부 학자는 이 왕조를 '티무르 왕조' 또는 '인도-티무르 왕조'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