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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웨이브
Bellwave
파일:벨웨이브 로고.jpg
2004년~2009년 로고
파일:벨웨이브 과거 로고.jpg
1999년~2004년 로고
기업명
정식: 주식회사 벨웨이브
영문: Bellwave Inc.
국가
대표
양기곤
설립일
1999년 9월 8일 (법인 설립일)
1999년 9월 9일 (사측 창립기념일)
해체일
2009년 12월 31일
업종명
이동전화기 제조업
기업규모
중견기업[1]
임직원 수
123명
본사
경기 성남시 중원구 둔촌대로 531
홈페이지
파일:벨웨이브 디자인팀.jpg
벨웨이브 디자인팀 구성원들 (2005년)[3]

1. 개요2. 역사
2.1. 배경2.2. 설립 초창기2.3. GSM 본격 진입2.4. LG전자VK모바일을 돕다2.5. 성공적인 중국 시장 개척2.6. 구조조정과 극적인 회생2.7. 내수시장 진입2.8. SK텔레콤의 인수 시도
3. 사건 사고
3.1. 삼성전자 기술유출 누명
4. 문서가 존재하는 출시제품5. 여담

1. 개요[편집]

1999년 설립된 대한민국의 옛 휴대폰 제조사. 전성기 시기에 중국유럽에서 많은 판매량과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하며 무려 한 해 평균 4~6천억원 이상의 매출[4]을 달성하던 GSM 전문 중견규모 제조사였으며, 상당한 수준의 해외 입지를 지니고 있었다. 해마다 중견벤처기업 수출규모 1위를 놓치지 않았던 중국시장 GSM 초일류 회사였지만 정작 국내에는 한 가지 모델밖에 출시하지 않아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설립 4년만에 연 매출 5000억, 텔슨빌딩의 벨웨이브
중국 GSM 휴대전화 시장에서 선전, 벨웨이브
휴대폰, 디자인경영이 파워다. 벨웨이브 디자인팀
파일:벨웨이브 F108.png
벨웨이브의 슬라이드폰 F108
파일:벨웨이브 F208.png
벨웨이브의 슬라이드폰 F208

2. 역사[편집]

2.1. 배경[편집]

파일:벨웨이브 창립기념.jpg
2003년 벨웨이브 창립 제 4주년 기념행사

벨웨이브 창업주인 양기곤 사장은 한국에서 몇 안 되는 CDMA계의 진짜배기로 평가받던 인물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소속으로 재직하며 삼성전자, LG전자, 맥슨전자, 현대전자 등의 업체와 함께 CDMA 기지국 및 단말기들을 개발하며 기술과 경험을 쌓았다.

이후 1994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퇴직하여 코오롱정보통신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97년을 기점으로 팬택으로 이직해 1999년까지 팬택의 연구소장 자리를 맡았다. ETRI를 퇴직하고 타 기업에 옮겨 다닌 이유는 연구소에서 배우고 익힌 기술을 민간 기업에 전파하고 활용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고 하며, 주변 가족이나 친구들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뜻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파일:양기곤 사장.jpg

2.2. 설립 초창기[편집]

1999년 팬택 연구소장 자리를 사임하고 자신의 자율과 창의를 바탕으로 한 일류 회사를 경영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벨웨이브를 설립했다. 2000년대 초반은 국내 이동전화 시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때였기 때문에 벨웨이브는 CDMA 모듈 개발만으로도 적지 않은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이게 어느 수준이었냐면 2000년에는 80억원이었던 연간 매출이 불과 1년 뒤인 2001년엔 무려 270억원으로 대폭 성장했을 정도였으니 더 말이 필요 없다.

2.3. GSM 본격 진입[편집]

하지만 벨웨이브는 국내 CDMA 시장이 아닌 GSM 시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내수 시장인 CDMA 분야는 국내에서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기 때문에 삼성전자, LG전자, 텔슨전자, 한화정보통신 등 메이저 업체들부터 세원텔레콤이나 스탠더드텔레콤을 비롯한 중견/중소기업까지 상당히 많은 업체들이 이미 뒤엉켜 경쟁 중이었던 반면 세계 시장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던 GSM의 경우 당시 국내 기업들은 거의 진출하지 않았거나 진입 초기 단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양 대표는 세계적인 휴대폰 메이커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GSM 사업에 진출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GSM 시장에서는 모토로라, 노키아를 비롯한 세계적인 굴지의 글로벌 기업들이 포진해 있었기에 진입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슬그머니 기회를 엿보던 도중 때마침 아시아 진출을 계획 중이던 미국의 칩셋 개발업체 텍사스 인스트루먼트(통칭 TI)의 관계자를 만나 TI의 아시아 진출 계획을 듣게 되었고, 양기곤 사장은 TI와 파트너십을 통해 중국에 공동 진출할 것을 제안했다. TI는 당시 세계 최대 휴대폰 제조사였던 노키아에 GSM폰 칩셋을 공급 중이었으며, 급성장하는 중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으나 노력만큼 성과가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벨웨이브 양기곤 사장이 TI를 설득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은 사시미(회)를 잘 먹지만 중국 사람들은 사시미를 안 먹습니다. 중국인들은 날 생선은 잘 먹지 않죠. TI의 칩셋도 사시미와 같습니다. 따라서 저희 벨웨이브가 날생선(칩셋)을 훌륭한 중국 요리(휴대폰)로 만들어 주면 중국 사람들이 잘 먹지 않겠습니까?

- 벨웨이브 양기곤 사장 -

아직 중국에서는 휴대폰 자체 개발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개발은 한국에서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말이 통해 TI로부터 400만 달러의 자본을 유치할 수 있었으며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관련 기술을 유리한 조건으로 받게 됐다. 이 일은 향후 벨웨이브가 급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2.4. LG전자VK모바일을 돕다[편집]

벨웨이브의 첫 GSM 고객은 국내 기업인 LG전자VK모바일이었다. LG전자와 VK모바일은 이제 막 GSM 시장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고 발을 들이려던 터라 많은 고초를 겪고 있었기에 벨웨이브는 두 업체를 상태로 기술개발용역(ODE)방식의 사업을 진행하며 전적으로 지원하였다. 이 덕에 LG전자는 훗날 세계시장에 우뚝 설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국내 휴대전화 업체들은 이미 완성된 모듈을 수입해 조립만 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벨웨이브는 TI의 칩을 이용해 모듈부터 완제품까지 자체 개발이 가능했고, 그로인해 그만큼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2.5. 성공적인 중국 시장 개척[편집]

파일:벨웨이브 X100SA.jpg
벨웨이브의 GSM폰 X100SA

양기곤 사장은 그 후 직접 중국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시장 정보도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적합한 고객을 찾기 어려웠다. 잘 알려진 대기업을 찾아가면 역사도 없고 규모도 작다는 이유로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날 북경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허름한 옷차림의 두 사람이 앉아서 휴대폰 사업에 대한 고충을 얘기하는 것을 듣고 합석하게 되었는다. 이들은 당시만 해도 무명이었던 아모이(Amoi)라는 휴대폰 회사의 사장과 부사장이었는데, 이들은 양 사장에게 많은 질문 공세를 퍼부었고 그렇게 휴대폰 사업의 방향성을 놓고 함께 고민을 나누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차츰 양 사장에 대해 신뢰를 갖기 시작했으며 한국 방문을 약속했다.

이 일을 계기로 벨웨이브의 중국 시장 개척에도 가속도가 붙게 되었다. 얼마 뒤 GSM폰 사업에서 아모이가 중국 3대 휴대폰 회사로 급성장하면서 벨웨이브도 그와 협력관계를 체결하며 함께 빠른 속도로 성장했으며, 이후 벨웨이브는 중국 최대 휴대폰 업체인 '닝보버드' 및 '판다' 사와도 비즈니스를 하게 됐다. 2002년 한 해 벨웨이브의 매출은 2천700억원으로 빠르게 증가하였며, 이듬해인 2003년에는 4천100억원을 수출하면서 국내 벤처기업 중 최고 수출액을 기록하며 이때부터 국내 수출벤처기업 1위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업체가 되었다.
파일:벨웨이브 판다 3.png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벨웨이브 판다 3

벨웨이브가 출시한 '판다 3'라는 기종의 경우, 한화로 약 63만원 정도의 당시로선 매우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젊은 층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물량이 모자랄 정도였다. 중고 사이트에서 웃돈을 얹어 거래되는가 하면 재고가 동이 났는데도 계속해서 예약 대기열이 밀려올 정도였다.
2003년에는 중국 전역에 '사스'가 퍼지면서 대기업들도 모두 중국에서 철수했습니다. 이때 벨웨이브 임직원들은 중국에서 목숨을 건 비즈니스를 전개하면서 중국 업체들을 감동시켰죠.

- 한 벨웨이브 관계자의 인터뷰 내용 -

특히 닝보버드와는 휴대폰 단일 모델로는 최고 금액인 7천만 달러의 공급 계약을 체결해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닝보버드에 제공하는 모델은 다른 고객에게 제공하지 않겠다"는 벨웨이브의 전략이 까다로운 닝보버드에게 강한 신뢰감을 심어준 결과였다. 이 공급 계약은 처음 접촉에서부터 최종 계약까지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아 중국인들조차 놀랄만한 기록이었다.

2.6. 구조조정과 극적인 회생[편집]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4년부터 시작된 중국 휴대폰 시장의 과열 경쟁으로 벨웨이브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 휴대폰 기업들이 타격을 입게 됐다.

벨웨이브가 성공적으로 중국 시장에 진입하면서 많은 국내 CDMA 휴대폰 기업들이 GSM 폰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와 함께 그동안 한국으로부터 휴대폰을 공급받던 중국 기업들이 차츰 기술력을 확보해 자체 생산을 늘리기 시작하면서 가격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이는 벨웨이브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4년에는 1천50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으며, 텔슨전자, 세원텔레콤을 비롯해 벨웨이브와 경쟁하던 많은 국내 중견기업들은 부도나 청산, 사업부 매각 등의 몰락을 길을 걸었다. 호황일 때 위기에 대비해야 했으나 뒤늦은 후회였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벨웨이브는 130명의 직원을 구조조정하면서 현금 중심의 경영에 돌입했다. 그러는 중에도 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는 아끼지 않았다. 회사가 어렵더라도 급속도로 발전하는 휴대폰 시장에서 핵심 기술 보유가 유일한 대안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300만 화소 카메라폰, 15mm 슬림 슬라이딩폰 등 고기능 휴대폰과 함께 저가 시장을 타깃으로 한 30달러짜리 휴대폰 개발 등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양사장은 2005년 한해 동안 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선진 시장을 개척하는데 전념했다. 그 결과 벨웨이브는 러시아, 서유럽, 중남미, 중동 등에 휴대폰을 수출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아프리카와 호주를 제외한 거의 전세계를 대상으로 휴대폰 사업을 전개하고 있던 것이다.[5]

벨웨이브는 2004년부터 러시아의 유통업체 복스텔(Voxtel)에 휴대폰을 공급하기 시작했으며 곧 영국의 이동통신업체인 버진(Virgin)에도 납품하기 시작했다.
파일:벨웨이브 BD-38.jpg
벨웨이브가 복스텔에 납품한 BD-38

네덜란드의 KPN 및 중동의 현지 유통업체에도 휴대폰을 공급하고 있다. 또한 2005년 말에는 미국 최대 휴대폰 유통업체인 유티스타컴(UTSTARCOM)에도 휴대폰을 공급해 중남미 7개국에 휴대폰을 수출했다. 그 결과 1천200억원의 매출 실적을 올렸으며 적자폭을 상당부분 줄일 수 있었고 2005년 11월부터는 월간 기준으로 흑자로 돌아섰다.
파일:벨웨이브 아나스타.jpg
벨웨이브의 스위블 휴대폰인 아나스타
파일:벨웨이브 A308.jpg
벨웨이브 GSM 폴더폰 A308

2.7. 내수시장 진입[편집]

중국유럽 시장에서의 성과에 힘입어 2004년에는 내수 시장에도 발을 들인다. SK텔레콤을 통해 출시한 유일한 내수 모델인 벨웨이브 아이키즈(BCL-862S)는 저연령층을 타겟으로 제작된 키즈폰으로, 단축다이얼 및 SOS 경보기능, 간편 긴급전화, 부적절한 문자 메시지 도착 시 미리 설정된 보호자 연락처로 알림 전송 등 많은 특화기능을 갖추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기록하지 못했다.
<height=200>파일:벨웨이브 BCL-862S.jpg<height=200>
벨웨이브의 유일한 내수 모델인 아이키즈

2.8. SK텔레콤의 인수 시도[편집]

2004년 6월경, 해외 GSM 시장에서 고전하던 SK텔레텍이 국내 휴대전화 제조사 중 GSM 기술이 우수한 업체를 인수 및 합병하기로 결정하면서 SK텔레텍의 모기업인 SK텔레콤이 맥슨전자, 세원텔레콤 등 3~4곳의 제조사를 후보로 두고 인수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중견업체인 벨웨이브와 협상이 진행되게 되었고, 벨웨이브 양기곤 사장 또한 자신이 앞으로 운영을 계속해서 잘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며 인수협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초반 분위기와는 달리 이는 8월 8일을 기점으로 결국 백지화되었다.

SK텔레콤은 "자회사인 SK텔레텍을 통해 벨웨이브 인수를 추진해 왔으나 가격, 시장상황 등 여러 여건이 맞지 않아 (인수가)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으며, 벨웨이브 양기곤 사장 또한 "인수가격, 고용승계 등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 지난 6일 SK텔레콤에 협상 결렬을 통보했다"고 밝혔다.

3. 사건 사고[편집]

3.1. 삼성전자 기술유출 누명[편집]

2000년경 약 16년간 삼성전자 산하 연구소에서 GSM 휴대폰의 기술개발을 담당하던 수석연구원이 벨웨이브로 이직하였고, 삼성전자에서 이를 계기로 벨웨이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삼성전자는 "벨웨이브가 계획적으로 삼성전자 기술을 도용했고, 무엇보다 1급 대외비로 관리되는 국내 휴대폰 핵심기술을 중국으로 넘겼다"며 강력한 처벌을 촉구했으나, 실제로는 해당 연구원이 퇴사 전 독단적으로 개인의 이익을 위해 데이터를 빼 간 것이었으며 벨웨이브에 입사한 것은 그로부터 1년 뒤였기에 벨웨이브에서는 해당 기술유출 건에 대해 직접적으로 동조한 사실이 없다. 또한 중국에 GSM 기술을 유출한 내용은 애당초 있지도 않은 부분이었다.

벨웨이브 양 대표는 삼성전자의 기술을 유출하는 것에 회사측에서 동조한 적 없다고 단언하며 "애먼 중소기업(당시 중견기업 격상 전이다.)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냐, 결코 중국에 어떠한 기술도 넘긴 적 없다"며 결백을 주장했다. 실제로 법원에서도 벨웨이브 측에서 기술 유출에 동조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 벨웨이브 양 대표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고 해당 연구원 및 그에 동조한 3명에 대해서만 실형을 선고했다. 결국 삼성전자에서 소송을 취하하고 한 발 양보하며 마무리되었다.

벨웨이브는 이 법정공방 기간동안 제대로 판매를 이행하지 못해 큰 손실을 입게 되었고, 삼성전자 또한 벨웨이브 탓은 아니지만 해당 연구원으로 인해 발생한 기술 유출로 손실을 입게되어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에게 상처만 남게 되었다.

4. 문서가 존재하는 출시제품[편집]

5. 여담[편집]

  • 일본 소프트뱅크로부터 160억 외자유치를 받으며 국내 중견~벤처기업 수출규모 1위 업체 자리에 올랐다.
  • 2004년에는 불과 얼마 전까지 텔슨전자 본사 빌딩이었던 한국자산관리공사 캠코양재타워의 6층에 입점한 바 있다.

[1] 2003년경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격상되었다. 격상 이후 모든 기업정보 페이지나 언론 등지에서 벨웨이브를 중견기업으로 표기한다.[2] 현재 접속이 되지 않는다.[3] 전자신문 인터뷰에서 나왔다.[4] 영업이익 평균 500억원[5] 당시 벨웨이브 관계자가 한 말을 찾아보면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도 해외 시장에서는 한국의 휴대폰 경쟁력을 높이 사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R&D 경쟁력을 세계 최고로 인정하고 있죠." 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