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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의빈 성씨
1. 개요[편집]
의빈 성씨가 정조의 승은을 두 차례 거절한 것과 이후 승낙한 것에 관한 문서.
2. 승인 거절 및 승낙[편집]
1766년(영조 42)에 정조가 처음 그녀에게 승은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의빈은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정조는 의빈의 뜻을 납득하고 물러났다.
1779년(정조 3)에 첫 번째 간택 후궁 원빈 홍씨가 사망하고 1780년(정조 4)에 화빈 윤씨를 간택하자고 했을 때 정조는 새 후궁을 들이는 것을 꺼리다 받아들였다. 화빈 간택 이후에 정조는 의빈에게 다시 승은을 내렸는데 의빈은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뜻을 굽히며 승은을 받아들였고 상의(尙儀)가 되었다.
1779년(정조 3)에 첫 번째 간택 후궁 원빈 홍씨가 사망하고 1780년(정조 4)에 화빈 윤씨를 간택하자고 했을 때 정조는 새 후궁을 들이는 것을 꺼리다 받아들였다. 화빈 간택 이후에 정조는 의빈에게 다시 승은을 내렸는데 의빈은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뜻을 굽히며 승은을 받아들였고 상의(尙儀)가 되었다.
3. 거절한 공식적인 이유[편집]
성덕임이 정조의 고백을 거부한 공식적인 이유는 (당시만 해도 왕과 사이가 서먹하고) 슬하에 자식도 없던 효의왕후를 배려하는 차원에서다. 여러 기록을 통해 의빈 성씨와 효의왕후 김씨의 사이가 무척이나 좋았다는 사실과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의빈 성씨가 1753년 7월 생, 효의왕후는 1753년 12월 생인 동갑내기로 입궁 시기도 10살이었던 1762년에 들어왔다. 서로 비슷했으니 어릴 때부터 친했을 가능성도 꽤 있다. 또 효의왕후 문서에도 나오지만 의빈 성씨는 죽기 전날 밤에도 효의왕후 처소에 들러 아들을 낳을 것을 간청했다고 하고, 의빈이 죽은 이후 효의왕후도 친자매 잃은냥 울며 슬퍼했다고 한다.
의빈 성씨가 1753년 7월 생, 효의왕후는 1753년 12월 생인 동갑내기로 입궁 시기도 10살이었던 1762년에 들어왔다. 서로 비슷했으니 어릴 때부터 친했을 가능성도 꽤 있다. 또 효의왕후 문서에도 나오지만 의빈 성씨는 죽기 전날 밤에도 효의왕후 처소에 들러 아들을 낳을 것을 간청했다고 하고, 의빈이 죽은 이후 효의왕후도 친자매 잃은냥 울며 슬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