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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李舜臣 | Yi Sun-Sin | |
이순신 표준 영정,장우성 화백(1953년 작)[1] | |
생몰년도 | 1545년~1597년 (54세) |
사당 | 현충원 |
본관 | 덕수이씨 |
시호 | 충무 |
역임지위 | 한성부 권지 훈련원 봉사 (1576)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1576) 한성부 훈련원 봉사 (1579) 충청도 해미읍성 병마절도사 휘하 군관 (1579) 전라도 고흥 발포 수군만호 (1581) 함경도 건원보 권관 (1583) 한성부 훈련원 참군 (1583) 사복시 주부 (1586) 함경도 조산보 만호 (1586) 전라도 조방장 (1589) 한성부 선전관 (1589) 전라도 강진현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 (1591) |
전라도 정읍현 현감 | |
1590년~1591년 | |
전라좌수사 | |
1591년~1597년 1597년~1598년 | |
삼도수군 통제사 | |
1593년~1597년 1597년~1598년 | |
묘 | 아산 이충무공묘 |
저서 | 난중일기 충무공이순신 전서 임진장초 |
참전 | |
신장 | 187cm |
1. 개요[편집]
필사즉생 필생즉사이순신이 자주 인용하던 말
거의 망해가던 조선을 구제했던 영웅이다.
2. 생애[편집]
2.1. 임진왜란 이전[편집]
1545년 덕수이씨에서 3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에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악동이였다. 1565년, 20살이 되던 해에 방수진과 혼인한 뒤, 1568년 무과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었다. 이후 1576년 재시험으로 합격해서 무인으로 복무하기 시작했다.
1576년 동부비호 권관으로 복무하며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1581년 종 4품인 수군 만호가 되었으나 모함으로 좌천 되었고 다시 승진가도를 달리며 임진왜란 1년전 1591년 전라좌수사로 임명된다. 이후 꾸준한 준비끝에 전쟁의 판도를 뒤엎는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지금의 거북선도 이때 만들어진다.
1576년 동부비호 권관으로 복무하며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1581년 종 4품인 수군 만호가 되었으나 모함으로 좌천 되었고 다시 승진가도를 달리며 임진왜란 1년전 1591년 전라좌수사로 임명된다. 이후 꾸준한 준비끝에 전쟁의 판도를 뒤엎는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지금의 거북선도 이때 만들어진다.
2.2. 임진왜란[편집]
일본군이 침략해 왔다. 그러나 1592년 옥포, 사천, 당포등에서 연이어 승리해서 8월 14일, 전황을 바꿀 한산도 대첩에서는 그 유명한 학인진 전법을 펼쳐 일본군을 사실상 전멸시키고 조선군은 왜선 59척을 침몰 시키며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적장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한산도에서 미역으로 7일을 연명하다 일본으로 귀환했다. 이후 안골포에 추가로 40척을 섬멸시키고 여수로 귀환했다.
8월 말에는 부산해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1593년 2월 6일에는 웅포에서 왜군을 쳤으나 이들이 성을 쌓아서 예전보다는 큰 전과를 거두진 못했다. 7월 15일 전라좌수형을 한산도로 옮기고 8월 15일에는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된다.
1594년에는 왜선30척을 격파하고 이후 서로 강화협상을 해서 아무일도 없다가 1597년 일본측이 협상을 깨고 정유재란이 일어나는데...
8월 말에는 부산해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1593년 2월 6일에는 웅포에서 왜군을 쳤으나 이들이 성을 쌓아서 예전보다는 큰 전과를 거두진 못했다. 7월 15일 전라좌수형을 한산도로 옮기고 8월 15일에는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된다.
1594년에는 왜선30척을 격파하고 이후 서로 강화협상을 해서 아무일도 없다가 1597년 일본측이 협상을 깨고 정유재란이 일어나는데...
2.3. 정유재란[편집]
이순신의 수하인 김신국이 모함을 하였다. 거짓으로 밝혀졌으나 이건 파직의 이유가 된다 또 원균이 조정에게 명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하자 이순신을 2월 26일 탄핵을 시킨다 그리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이 된다. 그러나 통제사가 된 원균은 칠천량에서 배를 12척만 남겨놓고 자기도 죽는다. 이때 거북선도 다 탔다고.
그렇게 이순신은 이 일로 복직이 되었으나 모친인 변씨가 사망하자 매우 슬퍼했다. 어쨌든 조정에서는 해군 상태가 답이 없으니 육지에서 싸우라 명했으나, 이때 남긴 말.
그렇게 이순신은 이 일로 복직이 되었으나 모친인 변씨가 사망하자 매우 슬퍼했다. 어쨌든 조정에서는 해군 상태가 답이 없으니 육지에서 싸우라 명했으나, 이때 남긴 말.
임진년부터 5·6년 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은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순신은 다가올 해전을 위해 판옥선 한척을 하나 더 건조해서 배를 13척으로 만들고 드디어 9월 16일, 명량에서 격전을 치룬다. 적선 133척과 아군13척으로 좁은 지협인 울돌목에서 30여척 정도를 침몰시키며 승리를 거둔다.
이후 제해권을 다시 장악해 수군을 빠르게 재건해 나갔고 자잘한 해전에서도 승리를 거둔다.
2.4. 사망[편집]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노량해전에서의 유언
원수를 보낼수는 없습니다.노량해전 출병전 진린에게
1598년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조선에서 철수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일본군은 조선에서 안전하게 빠질려고 명나라 장수 진린에게 뇌물을 남겼는데 이순신이 거들어서 결국 도망가는 일본군을 잡기위해 추격해서 12월 16일 양군이 서로 전투를 한다 역시 결과는 왜선200여척 격침으로 조선군의 승리였으나 이때 이순신은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이로 인해 이순신의 조카가 대신 지휘했다. 그리고 전투의 승리로 병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으나 소식이 곧 들려지자 환호는 통곡으로 바뀌었다. 이 통곡은 한동안 남도 전역을 맴돌았다. 그의 묘는 현제 아산시에 있는 이충묘 공묘. 사후에 받은 시호는 충무공이다.
그리고 그를 모신 사당은 현충원이다. 이 현충원은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서월철폐로 없어졌으나 다시 복구해서 현재 많은 관광객을 맞이한다.
3. 평가[편집]
조선시대에는 현대만큼은 아니지만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현재는 영웅정도가 아니라 성웅이라 불리고 있다.
4. 대중매체[편집]
[1] 1973년 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