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본래 송나라의 서안주(西安州) 통판(通判)을 지냈다.
1137년, 서하가 서안주를 공격하자 임득경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서하군에 투항하였고, 당시 서하 황제 숭종은 그를 권지주사(權知州事)로 임명했다. 또한 임득경은 자신의 딸을 궁중으로 들여보낸 공로가 인정되어 정주방어사(静州防御使)에도 임명되었다.
임득경은 많은 재물로 조정의 대신들에게 뇌물을 바쳐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고자 하였다. 어사중승(御史中丞) 파리조인(芭里祖仁) 등이 황제의 앞에서 임득경을 칭찬했으며, 1138년 숭종은 그의 딸 임씨를 황후로 세우니 임득경은 국구가 되어 정주도통군(靜州都統軍)이 되었다.
1138년, 숭종이 죽고 그의 아들 인종이 즉위하였다. 황후 임씨는 인종의 생모가 아니지만 태후가 되었다.
1140년, 하주통군(夏州統軍) 소합달(蕭合達)이 반란을 일으키자 임득경은 반군 토벌을 자처하고 하주를 탈환하여 소합달을 진압하였다. 이 공으로 서평공(西平公)에 책봉되고 상경군도통군(翔慶軍都統軍)에 임명되었다.
1143년, 위주(威州)·정주(定州)의 농민 봉기를 진압하였다.
1147년, 국정 참여를 위해 상소를 올려 황제를 알현하고자 하였으나 알도충(斡道冲) 등에 의해 저지당했다.
1149년에 이르러 그의 관직은 상서령, 중서령을 지나 국상에 도달했고 동생들인 임득총(任得聰)을 전전태위(殿前太尉)로, 임득공(任得恭)을 흥경부윤(興慶府尹)으로 임명하여 서하의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권세가 높아진 임득경은 1170년 황제 인종을 협박하여 서하를 반으로 나누고 국호를 초(楚)라 하여 자신에게 넘기게 하였다. 이로인해 서남로(西南路)와 서평부(西平府), 영주(靈州) 나방령(羅龐嶺)[1]은 임초(任楚)에 넘어갔다.
이후 임득경은 금나라에 자신의 임초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인종의 황위를 찬탈하고 남송과 연합해 금을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음모가 발각되어 인종이 금나라와 협력해 임초를 공격했고 동년 8월 임득경과 그 형제들은 연합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1137년, 서하가 서안주를 공격하자 임득경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서하군에 투항하였고, 당시 서하 황제 숭종은 그를 권지주사(權知州事)로 임명했다. 또한 임득경은 자신의 딸을 궁중으로 들여보낸 공로가 인정되어 정주방어사(静州防御使)에도 임명되었다.
임득경은 많은 재물로 조정의 대신들에게 뇌물을 바쳐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고자 하였다. 어사중승(御史中丞) 파리조인(芭里祖仁) 등이 황제의 앞에서 임득경을 칭찬했으며, 1138년 숭종은 그의 딸 임씨를 황후로 세우니 임득경은 국구가 되어 정주도통군(靜州都統軍)이 되었다.
1138년, 숭종이 죽고 그의 아들 인종이 즉위하였다. 황후 임씨는 인종의 생모가 아니지만 태후가 되었다.
1140년, 하주통군(夏州統軍) 소합달(蕭合達)이 반란을 일으키자 임득경은 반군 토벌을 자처하고 하주를 탈환하여 소합달을 진압하였다. 이 공으로 서평공(西平公)에 책봉되고 상경군도통군(翔慶軍都統軍)에 임명되었다.
1143년, 위주(威州)·정주(定州)의 농민 봉기를 진압하였다.
1147년, 국정 참여를 위해 상소를 올려 황제를 알현하고자 하였으나 알도충(斡道冲) 등에 의해 저지당했다.
1149년에 이르러 그의 관직은 상서령, 중서령을 지나 국상에 도달했고 동생들인 임득총(任得聰)을 전전태위(殿前太尉)로, 임득공(任得恭)을 흥경부윤(興慶府尹)으로 임명하여 서하의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권세가 높아진 임득경은 1170년 황제 인종을 협박하여 서하를 반으로 나누고 국호를 초(楚)라 하여 자신에게 넘기게 하였다. 이로인해 서남로(西南路)와 서평부(西平府), 영주(靈州) 나방령(羅龐嶺)[1]은 임초(任楚)에 넘어갔다.
이후 임득경은 금나라에 자신의 임초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인종의 황위를 찬탈하고 남송과 연합해 금을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음모가 발각되어 인종이 금나라와 협력해 임초를 공격했고 동년 8월 임득경과 그 형제들은 연합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