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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칼라니오푸우아카이아마마오(칼라니오푸우)는 18세기 하와이 섬을 다스린 알리이 누이(최고 군주)로, 하와이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기록된다. 그는 서구 세계에 처음으로 하와이를 알린 인물 중 하나였으며, 제임스 쿡 선장이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이한 군주였다. 서양인들은 그를 "테리오부, 오와히 왕"이라 불렀으며, 그의 이름은 종종 '칼레이오푸우'로도 기록되었다.
칼라니오푸우는 칼라니누이아마마오와 그의 부인 카마카이모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하와이의 최고 귀족 계층에 속하는 알리이 와히네(고귀한 혈통의 여성)였으며, 후에 다른 남편인 칼라니케에아우모쿠와의 사이에서 케오우아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로 인해 그녀는 훗날 하와이를 통일한 카메하메하 1세의 할머니가 되었다.
칼라니오푸우가 군주로 즉위한 시기는 하와이 섬 내부에서 정치적 긴장이 높아지던 시기였다. 이전 군주였던 알라파이누이는 어린 칼라니오푸우와 그의 이복형제 케오우아를 자신의 궁정에서 양육하며 가까이 두었다. 이는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었고, 단순한 친절의 표현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칼라니오푸우가 성장하며 그의 권력 기반은 점점 강해졌고, 마침내 그는하와이 섬의 최고 군주 자리에 올랐다.
그의 통치는 제임스 쿡 선장이 하와이에 도착한 1778년과 맞물리며 하와이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쿡의 함대가 하와이섬에 도착하자, 칼라니오푸우는 그를 환대하며 1779년 1월 26일 공식적인 의례를 통해 그를 맞이했다. 당시 하와이는 마카히키라고 불리는 종교적 축제 기간이었으며, 이 시기에는 전쟁이 금지되고 평화와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칼라니오푸우는 이 신성한 시기의 전통에 따라 쿡에게 화려한 깃털 망토(아후울라)와 의례용 투구(마히올레)를 선물했다.
그러나 양측의 관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악화되었다. 1779년 2월, 쿡의 함대는 폭풍으로 인해 심하게 손상되었고, 수리를 위해 다시 하와이에 돌아왔다. 이때 하와이인들과 영국 선원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결국 쿡이 하와이인들에게 도둑맞은 배를 되찾기 위해 칼라니오푸우를 인질로 잡으려 시도하면서 사태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하와이인들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결국 쿡은 이 과정에서 사망했다.
칼라니오푸우는 이후에도 계속 통치를 이어갔지만, 1782년 4월, 카우 지역의 카알리키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사망한 후 왕위는 그의 아들 키왈라오가 계승했다. 그러나 그의 조카인 카메하메하 1세는 할아버지 칼라니오푸우로부터 쿠카일리모쿠(전쟁의 신)의 수호자 역할을 부여받았고, 이는 곧 그가 왕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결국, 키왈라오와 카메하메하 사이의 갈등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1782년 모쿠오하이 전투에서 카메하메하 1세는 키왈라오를 패배시키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길을 열었다. 그러나 하와이섬은 완전히 통합되지 않았으며, 키왈라오의 동맹이었던 케오우아 쿠아훌라는 카우 지역을, 그의 삼촌인 케아웨마우힐리는 힐로 지역을 장악하면서 섬은 세 개의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칼라니오푸우의 통치는 하와이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하와이는 서구 세계와 처음으로 접촉했으며, 이후 서구 문명의 영향이 점차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의 후계 구도는 카메하메하 1세의 등장과 하와이 통일 전쟁으로 이어지며, 하와이 왕국 탄생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유산은 단순히 한 시대의 끝이 아니라, 하와이 역사에서 가장 격변하는 시대를 여는 시작점이 되었다.
칼라니오푸우는 칼라니누이아마마오와 그의 부인 카마카이모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하와이의 최고 귀족 계층에 속하는 알리이 와히네(고귀한 혈통의 여성)였으며, 후에 다른 남편인 칼라니케에아우모쿠와의 사이에서 케오우아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로 인해 그녀는 훗날 하와이를 통일한 카메하메하 1세의 할머니가 되었다.
칼라니오푸우가 군주로 즉위한 시기는 하와이 섬 내부에서 정치적 긴장이 높아지던 시기였다. 이전 군주였던 알라파이누이는 어린 칼라니오푸우와 그의 이복형제 케오우아를 자신의 궁정에서 양육하며 가까이 두었다. 이는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었고, 단순한 친절의 표현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칼라니오푸우가 성장하며 그의 권력 기반은 점점 강해졌고, 마침내 그는하와이 섬의 최고 군주 자리에 올랐다.
그의 통치는 제임스 쿡 선장이 하와이에 도착한 1778년과 맞물리며 하와이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쿡의 함대가 하와이섬에 도착하자, 칼라니오푸우는 그를 환대하며 1779년 1월 26일 공식적인 의례를 통해 그를 맞이했다. 당시 하와이는 마카히키라고 불리는 종교적 축제 기간이었으며, 이 시기에는 전쟁이 금지되고 평화와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칼라니오푸우는 이 신성한 시기의 전통에 따라 쿡에게 화려한 깃털 망토(아후울라)와 의례용 투구(마히올레)를 선물했다.
그러나 양측의 관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악화되었다. 1779년 2월, 쿡의 함대는 폭풍으로 인해 심하게 손상되었고, 수리를 위해 다시 하와이에 돌아왔다. 이때 하와이인들과 영국 선원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결국 쿡이 하와이인들에게 도둑맞은 배를 되찾기 위해 칼라니오푸우를 인질로 잡으려 시도하면서 사태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하와이인들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결국 쿡은 이 과정에서 사망했다.
칼라니오푸우는 이후에도 계속 통치를 이어갔지만, 1782년 4월, 카우 지역의 카알리키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사망한 후 왕위는 그의 아들 키왈라오가 계승했다. 그러나 그의 조카인 카메하메하 1세는 할아버지 칼라니오푸우로부터 쿠카일리모쿠(전쟁의 신)의 수호자 역할을 부여받았고, 이는 곧 그가 왕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결국, 키왈라오와 카메하메하 사이의 갈등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1782년 모쿠오하이 전투에서 카메하메하 1세는 키왈라오를 패배시키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길을 열었다. 그러나 하와이섬은 완전히 통합되지 않았으며, 키왈라오의 동맹이었던 케오우아 쿠아훌라는 카우 지역을, 그의 삼촌인 케아웨마우힐리는 힐로 지역을 장악하면서 섬은 세 개의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칼라니오푸우의 통치는 하와이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하와이는 서구 세계와 처음으로 접촉했으며, 이후 서구 문명의 영향이 점차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의 후계 구도는 카메하메하 1세의 등장과 하와이 통일 전쟁으로 이어지며, 하와이 왕국 탄생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유산은 단순히 한 시대의 끝이 아니라, 하와이 역사에서 가장 격변하는 시대를 여는 시작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