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회사명 | 주식회사 가이낙스 株式会社ガイナックス GAINAX Co., Ltd. |
창립일 | 1984년 12월 24일 |
폐업일 | 2024년 6월 7일 |
창립자 | |
대표이사 | 카미무라 야스히로 |
본사 | |
품목 | 애니메이션 제작 외 |
링크 |
1. 개요[편집]
2. 역사[편집]
DAICON 3 오프닝 애니메이션. |
DAICON 4 오프닝 애니메이션. |
일본SF대회 DAICON(다이콘) 3, 4[4][5] 오프닝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던 동인집단 다이콘 필름의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오사카에서 도쿄로 자리를[6] 옮겨 왕립우주군을 만들기 위해 탄생한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원래 예정대로라면 왕립우주군의 제작이 끝난 후(1986년 제작은 완료되었다.) 해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제작 중 투자받은 자본 이외에도 가이낙스 명의로 돈을 빌려 제작비를 충당한 상황에서 왕립우주군의 흥행에 실패했고, 가이낙스 명의로 빌린 돈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게 되자 갚기 위해서라도 애니메이션 제작을 계속해야만 하는 상태였다. 다만 왕립우주군의 감독이자 과거 가이낙스의 대표이사였던 야마가 히로유키는 왕립우주군 제작 과정에서 생긴 빚보다 제작에 관여한 스태프들 중 일부가 아무리 작품이 성공을 해도 해산을 하면 다른 일자리를 얻을 기회가 없어질까봐 그대로 존속하는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국판 뉴타입에서 밝힌 바 있었다.[7]
이 무렵 매달 70만엔씩이나 월세를 내던 100평짜리 스튜디오에서 월세 16만엔짜리 사무실로 이사했고, 빚을 독촉하는 관련 업체들의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커다란 오피스를 빌린 건 타츠노코 프로덕션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이후 지인들의 인맥을 통해,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을 영상화한 애플시드 등의 하청작업으로 연명하면서, 이때 새롭게 형성된 OVA 시장을 눈여겨보고 자신들의 오타쿠 성향에 충실하면서도 잘 팔릴 만한 상업용 노선으로 톱을 노려라!를 제작, 돈과 인기를 얻었다. 톱을 노려라 역시 제작비를 많이 투자한 탓에 인기는 끌었어도 이익이 별로 나지 않아 빚을 갚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지만, 다른 OVA에 비해서 월등하게 많이 팔렸고, 숨통이 트일 정도는 되었다.
톱을 노려라 이후, 가이낙스는 하청의 하청을 받는 형태로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를 제작했다. 나디아는 여러 모로 인기를 끌었지만 하청의 하청 형태로 가이낙스가 제작한 탓에 가이낙스 쪽으로 오는 수익은 별로 없었고[8], 오히려 수천만엔의 빚만 더 쌓였다.
나디아는 NHK가 기획한 작품으로 가이낙스는 원화만 그려주면, 나머지는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미리 NHK와 한국측 애니 제작사 하청업체 사이에 계약을 이미 맺고 동화와 채색을 맡을 플랜이 이미 서 있었다. NHK측 프로듀서는 오카다 토시오에게 가이낙스 걱정하지 마라, 한국이 나머지는 다 해줄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고 한다. 가이낙스는 작화부분을 맡아서 원화만 그리면 되고 동화는 한국측에서 맡고, 그 동화를 체크해서 NHK에게 넘겨주면 끝나는 간단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돈 많은 NHK답게 동화도 원하는 만큼 마음껏 써도 된다고 했고, 한국측에서도 동화를 많이 쓰면 일거리도 더 늘어나고 돈을 버는거라 가이낙스 전체가 대환영이라는 분위기였다.[9]
NHK는 1편당 1200만 엔의 제작비를 제공했다. 이건 작화만을 위한 비용으로 성우라든가 음악이라든가 하는 음향작업비는 포함되지 않은 거였다. 예정대로라면 가이낙스는 손해보았을 일은 없었다. 가이낙스의 사장 오카다 토시오는 다른 사람이 이미 각본을 쓴 상태였고 가이낙스에서는 그림 콘티와 원화(배경그림 포함)만 그리기 때문에 제작기간은 2달을 예상했다.
그러나 감독을 맡은 안노 히데아키가 제작 초기부터 NHK가 준 각본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각본을 무시하기 시작하더니 마구마구 폭주하고 지나치게 집착한 탓에 6개월이 더 늘어나 최종 8개월의 제작기간이 소요되었고, 그 기간만큼 제작비가 초과해 버려 빚이 늘어났다...
이 시기(1989년) 돈벌이용으로 19禁 에로 OVA도 제작한 적이 있지만 가이낙스 작품 팬들도 잘 모를만큼 대외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흑역사.[10]
당시 가이낙스의 빚을 갚은 것은 아카이 타카미[11]를 중심으로 한 게임반이 개발한 전뇌학원과 프린세스 메이커였다. 가이낙스는 당시 허접한 게임의 실상을 보고 이 정도라면 우리가 충분히 이긴다고 자신만만하게 게임업계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게임 사업으로 수 억엔의 수익을 올려서 애니 사업의 빚을 갚는 식이었다. 당시 사장 오카다 토시오는 가이낙스 시절 아니메 만들 때는 월급 15~17만엔을 가져갔는데, 게임이 히트하고 나서는 경영진은 월 250만 엔씩 가져갔다고 밝혔다.(#)
나디아의 제작이 끝난 뒤, 가이낙스는 자신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나 같은 작품인 오타쿠의 비디오[12]를 만들었고, 그 다음엔 시마모토 카즈히코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인 불꽃의 전학생을 제작했다. 해당 작품은 전대 미문의 OLA(오리지널 레이저디스크 애니메이션)이었는데 망하고 말았다. 이에 시마모토 카즈히코[13]가 자신의 자전적 만화 불타라 펜에서 비판했다.[14]
그 다음작으로 왕립우주군의 세계관을 잇는 작품인 푸른 우르를 만들려고 했지만 막대한 제작비 소요가 예정되는 상황에서 당시 가이낙스에는 그 정도 규모의 자금 동원이 불가능해 제작이 중단되자 안노 히데아키의 주도로 기획한 오리지널 로봇 애니메이션이자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어 마침내 빚더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15] 사실 수익은 대부분 제작위원회에서 다 가져갔기 때문에 가이낙스의 수익은 의외로 크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다. 가이낙스의 몫으로 돌아왔던 것은 전체 수익의 5%라는 소리가 있었다.[16] 그래도 가이낙스를 빚더미에서 벗어나게 하는데는 충분한 수익이었다.
이후 가이낙스는 예상외로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인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를 제작해 제작비 절감의 묘미를 보이면서도 원작에 충실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지만 원작이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묘한 마무리를 한 탓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99년 말, 사장이 연루된 대규모 탈세 사건[17]이 발각되는 바람에 회사가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했다.[18]
한편, 역속으로 TV판 애니메이션을 만든 가이낙스는 OVA로 돌아가 신진 애니메이터들이 주력을 맡은 작품인 프리크리를 제작했는데, 프리크리는 움직임의 맛을 살린 작화와 이해하기 묘한 스토리로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들었다. 프리크리 이후, 왕립우주군의 감독이었던 야마가 히로유키가 십수 년 만에 감독으로 복귀해서 메이드 로봇이 주인공인 만화를 애니메이션화한 작품인 마호로매틱을 만들었다.
이후 가이낙스답게 온갖 패러디가 가득한 아베노바시 마법 상점가, 프린세스 메이커의 세계관을 이으면서 소녀층을 주 대상으로 한 작품인 쁘띠프리 유시를 만들었으며,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 오타쿠 소재의 개그 만화를 애니메이션화한 이 사람이 나의 주인님, 톱을 노려라의 속편인 톱을 노려라2! 등을 연속으로 제작했다.
그리고 2007년, 에반게리온 이후 가이낙스에 몸을 담은 애니메이터들이 주축이 된 작품인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제작해 좋은 평을 들었다. 이처럼 계속 돈이 모이자 가이낙스는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시희, 하나마루 유치원을 만들었으며, 2010년 10월 팬티 & 스타킹 with 가터벨트를 방영했지만 수익은 기대 이하였다. 2011년 7월달엔 단탈리안의 서가를 제작하여 방영했다.
하지만 제작 중 투자받은 자본 이외에도 가이낙스 명의로 돈을 빌려 제작비를 충당한 상황에서 왕립우주군의 흥행에 실패했고, 가이낙스 명의로 빌린 돈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게 되자 갚기 위해서라도 애니메이션 제작을 계속해야만 하는 상태였다. 다만 왕립우주군의 감독이자 과거 가이낙스의 대표이사였던 야마가 히로유키는 왕립우주군 제작 과정에서 생긴 빚보다 제작에 관여한 스태프들 중 일부가 아무리 작품이 성공을 해도 해산을 하면 다른 일자리를 얻을 기회가 없어질까봐 그대로 존속하는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국판 뉴타입에서 밝힌 바 있었다.[7]
이 무렵 매달 70만엔씩이나 월세를 내던 100평짜리 스튜디오에서 월세 16만엔짜리 사무실로 이사했고, 빚을 독촉하는 관련 업체들의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커다란 오피스를 빌린 건 타츠노코 프로덕션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이후 지인들의 인맥을 통해,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을 영상화한 애플시드 등의 하청작업으로 연명하면서, 이때 새롭게 형성된 OVA 시장을 눈여겨보고 자신들의 오타쿠 성향에 충실하면서도 잘 팔릴 만한 상업용 노선으로 톱을 노려라!를 제작, 돈과 인기를 얻었다. 톱을 노려라 역시 제작비를 많이 투자한 탓에 인기는 끌었어도 이익이 별로 나지 않아 빚을 갚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지만, 다른 OVA에 비해서 월등하게 많이 팔렸고, 숨통이 트일 정도는 되었다.
톱을 노려라 이후, 가이낙스는 하청의 하청을 받는 형태로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를 제작했다. 나디아는 여러 모로 인기를 끌었지만 하청의 하청 형태로 가이낙스가 제작한 탓에 가이낙스 쪽으로 오는 수익은 별로 없었고[8], 오히려 수천만엔의 빚만 더 쌓였다.
나디아는 NHK가 기획한 작품으로 가이낙스는 원화만 그려주면, 나머지는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미리 NHK와 한국측 애니 제작사 하청업체 사이에 계약을 이미 맺고 동화와 채색을 맡을 플랜이 이미 서 있었다. NHK측 프로듀서는 오카다 토시오에게 가이낙스 걱정하지 마라, 한국이 나머지는 다 해줄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고 한다. 가이낙스는 작화부분을 맡아서 원화만 그리면 되고 동화는 한국측에서 맡고, 그 동화를 체크해서 NHK에게 넘겨주면 끝나는 간단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돈 많은 NHK답게 동화도 원하는 만큼 마음껏 써도 된다고 했고, 한국측에서도 동화를 많이 쓰면 일거리도 더 늘어나고 돈을 버는거라 가이낙스 전체가 대환영이라는 분위기였다.[9]
NHK는 1편당 1200만 엔의 제작비를 제공했다. 이건 작화만을 위한 비용으로 성우라든가 음악이라든가 하는 음향작업비는 포함되지 않은 거였다. 예정대로라면 가이낙스는 손해보았을 일은 없었다. 가이낙스의 사장 오카다 토시오는 다른 사람이 이미 각본을 쓴 상태였고 가이낙스에서는 그림 콘티와 원화(배경그림 포함)만 그리기 때문에 제작기간은 2달을 예상했다.
그러나 감독을 맡은 안노 히데아키가 제작 초기부터 NHK가 준 각본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각본을 무시하기 시작하더니 마구마구 폭주하고 지나치게 집착한 탓에 6개월이 더 늘어나 최종 8개월의 제작기간이 소요되었고, 그 기간만큼 제작비가 초과해 버려 빚이 늘어났다...
이 시기(1989년) 돈벌이용으로 19禁 에로 OVA도 제작한 적이 있지만 가이낙스 작품 팬들도 잘 모를만큼 대외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흑역사.[10]
당시 가이낙스의 빚을 갚은 것은 아카이 타카미[11]를 중심으로 한 게임반이 개발한 전뇌학원과 프린세스 메이커였다. 가이낙스는 당시 허접한 게임의 실상을 보고 이 정도라면 우리가 충분히 이긴다고 자신만만하게 게임업계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게임 사업으로 수 억엔의 수익을 올려서 애니 사업의 빚을 갚는 식이었다. 당시 사장 오카다 토시오는 가이낙스 시절 아니메 만들 때는 월급 15~17만엔을 가져갔는데, 게임이 히트하고 나서는 경영진은 월 250만 엔씩 가져갔다고 밝혔다.(#)
나디아의 제작이 끝난 뒤, 가이낙스는 자신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나 같은 작품인 오타쿠의 비디오[12]를 만들었고, 그 다음엔 시마모토 카즈히코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인 불꽃의 전학생을 제작했다. 해당 작품은 전대 미문의 OLA(오리지널 레이저디스크 애니메이션)이었는데 망하고 말았다. 이에 시마모토 카즈히코[13]가 자신의 자전적 만화 불타라 펜에서 비판했다.[14]
그 다음작으로 왕립우주군의 세계관을 잇는 작품인 푸른 우르를 만들려고 했지만 막대한 제작비 소요가 예정되는 상황에서 당시 가이낙스에는 그 정도 규모의 자금 동원이 불가능해 제작이 중단되자 안노 히데아키의 주도로 기획한 오리지널 로봇 애니메이션이자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어 마침내 빚더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15] 사실 수익은 대부분 제작위원회에서 다 가져갔기 때문에 가이낙스의 수익은 의외로 크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다. 가이낙스의 몫으로 돌아왔던 것은 전체 수익의 5%라는 소리가 있었다.[16] 그래도 가이낙스를 빚더미에서 벗어나게 하는데는 충분한 수익이었다.
이후 가이낙스는 예상외로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인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를 제작해 제작비 절감의 묘미를 보이면서도 원작에 충실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지만 원작이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묘한 마무리를 한 탓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99년 말, 사장이 연루된 대규모 탈세 사건[17]이 발각되는 바람에 회사가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했다.[18]
한편, 역속으로 TV판 애니메이션을 만든 가이낙스는 OVA로 돌아가 신진 애니메이터들이 주력을 맡은 작품인 프리크리를 제작했는데, 프리크리는 움직임의 맛을 살린 작화와 이해하기 묘한 스토리로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들었다. 프리크리 이후, 왕립우주군의 감독이었던 야마가 히로유키가 십수 년 만에 감독으로 복귀해서 메이드 로봇이 주인공인 만화를 애니메이션화한 작품인 마호로매틱을 만들었다.
이후 가이낙스답게 온갖 패러디가 가득한 아베노바시 마법 상점가, 프린세스 메이커의 세계관을 이으면서 소녀층을 주 대상으로 한 작품인 쁘띠프리 유시를 만들었으며, 이 추하고도 아름다운 세계, 오타쿠 소재의 개그 만화를 애니메이션화한 이 사람이 나의 주인님, 톱을 노려라의 속편인 톱을 노려라2! 등을 연속으로 제작했다.
그리고 2007년, 에반게리온 이후 가이낙스에 몸을 담은 애니메이터들이 주축이 된 작품인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제작해 좋은 평을 들었다. 이처럼 계속 돈이 모이자 가이낙스는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시희, 하나마루 유치원을 만들었으며, 2010년 10월 팬티 & 스타킹 with 가터벨트를 방영했지만 수익은 기대 이하였다. 2011년 7월달엔 단탈리안의 서가를 제작하여 방영했다.
2.1. 분열[편집]
최초의 분열은 1992년이다. 핵심 멤버였던 무라하마 쇼지, 마에다 마히로, 야마구치 히로시, 히구치 마사츠구가 가이낙스를 뛰쳐나와 GONZO를 설립했다. 이 사태로 오카다 토시오가 책임을 지고 대표이사직을 사임, 퇴사했다.
이후 1994년,회사 창립자이자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를 위시로 한 게임부의 총책임자였던 아카이 타카미가 독립해 나인 라이브즈를 차린다. 당시 게임개발팀은 프린세스 메이커 2를 성공적으로 런칭하고 프메2의 슈퍼패미콤용 포팅작과 기존작의 하드한 설정을 쳐내고 여성향으로 방향을 전환한 외전격 작품을 계획중이었으나 가이낙스의 불안한 자금력과 야마가 히로유키를 위시로 한 경영진의 방만 경영 탓에 개발이 진행되지 않아 출시가 연기되었다. 그 때문에 아카이는 원만한 게임 제작 및 저작권 관리를 위해 슈패미판 2는 타카라에 외주를 주어 2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주인공이 나오는 작품을 만들게하고, 3은 나인 라이브즈가 개발해 출시하는 방향으로 하였다.
아카이는 다른 독립한 멤버들과는 달리 가이낙스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대한민국에선 유독 불화설이 진실이라고 알고있는 사람이 많았다. 나인 라이브즈는 프린세스 메이커 4(나인 라이브즈)의 개발이 지지부진하다가 발매가 취소되면서 휴업 선언을 하고 2001년 가이낙스로 흡수되었다.
2011년에는 그렌라간 때부터 시작된 스폰서(주로 애니플렉스)와의 갈등이 심해지는 바람에 결국 요시나리 요우, 스시오, 이마이시 히로유키를 비롯한 특급 애니메이터들이 퇴사하는 일이 벌어졌다.[19] 동년 8월 22일, 퇴사한 일원들은 트리거를 설립했고 10월 8일 공식 홈페이지를 개설했다.(홈페이지)
2011년 돗토리현 요나고시에 요나고 필름을 설립(대표: 아카이 타카미). 2014년에는 요나고 가이낙스 설립. 이어 2016년까지 후쿠시마 가이낙스(대표: 아사오 요시노리), 가이낙스 웨스트(대표: 타케다 야스히로/고베시), 가이낙스 니가타, 가이낙스 교토(대표: 타케다 야스히로) 설립. 결국 이 중 요나고 가이낙스는 독립해버리는데 성공한다.[20] 특히 가이낙스가 난장판이 되버린걸 보면 만약 독립하지 않았다면 2025년 프린세스메이커 신작은 나오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2013년, 26년만에 왕립우주군의 속편 제작을 발표했다. 지금은 사이트가 내려간 상태
과거 가이낙스를 대표하던 인물들이 나가서 만든 스튜디오 카라, 차세대 가이낙스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나가서 만든 트리거, 기존 가이낙스의 게임 개발 파트나 다름없던 요나고 가이낙스가 창립되어 독립한 이후로는 영 시원치 않은 작품들이 나오는 중이다. 끌어올 수 있는 스태프가 다 나가서 별볼일 없어졌기 때문이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역시 저작권은 물론 가이낙스가 제작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후기의 가이낙스는 우에무라 유타카와 사에키 쇼지로 대표되는데, 둘 다 퇴사하고 딴 곳으로 간 상태.
2016년 11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퇴사하며 가져간 에반게리온의 판권에 대한 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소송에서 1억엔의 배상을 하라는 기소가 있었고 동년도 12월 가이낙스 측은 인정하고 사과하는 형태를 취했다. 다만 기소는 취소하지 않았고, 이 사건은 결국 2017년 6월 1억엔을 지불하는 것으로 판결이 났다. 그러나 안노 말로는 아직도 다 지불받지 못했다고 한다.
아래에 언급된 '가이나'라는 회사는 지금의 가이낙스와 별개의 회사(원래 자회사였으나 독립)로, 지금의 가이낙스는 일체의 제작활동 없이 에반게리온을 제외한 예전 가이낙스 작품의 저작권만 관리하는 회사가 되었다. 거의 바지 회사인 모양. 그나마도 사장이 성희롱 혐의로 체포되기까지 했는데 아래의 가이나와 안노는 "이 회사는 이제 우리와 관계가 없다."라면서 선을 그었다.
오카다 토시오는 '야마가 히로유키는 사람보는 눈이 하나도 없었으며 회사를 망하게 하고싶지 않다는 그의 자존심을 이용한 사기꾼들이 몰려와 회사를 강탈한 상태라고 본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여기다 안노 히데아키는 추가로 언론에다 야마가 히로유키와 타케다 야스히로가 있는 가이나까지 저격하면서 퇴직 사유를 폭로하기에 이르렀다. 요약하자면 가이낙스는 왕립우주군 제작 시절부터 경영이 방만했으며 에반게리온의 성공으로 그것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야마가와 타케다에게 경영권이 넘어간 이후로도 개선되질 않았다고 한다.[21] 심지어 안노에게 구걸하는 일도 잦았다고.
안노는 독립 이후 이미 회수한 에바 이외 작품의 판권 회수를 시도했는데, 다른 작품 판권은 야마가가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갑자기 6배나 비용을 올렸다고 폭로했다. 문제가 된 가이낙스 사장의 성추행 때문에 에바 관련 사업이 취소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이게 야마가나 타케다 탓이 아니면 누구 탓이겠냐는 뉘앙스의 발언도 했다. 상당히 실망하고 분노한 어조의 성명이라 안노와 카라는 가이나랑 영원히 척을 졌다고 봐야 한다. 참고 다만 카라와 트리거는 원만한 관계인 것으로 보인다.[22]
그리고 앞으로 가이낙스는 제작에 있어서 큰 위기를 겪을 게 뻔한데 트위터만 쳐도 이 안노의 폭로에 대해서 리트윗이 65000, 좋아요가 75000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애니메이터들이 이걸 리트윗하면서 안노 편을 들었다. 트위터만 친 것이고 다른데서도 비슷한 반응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가이낙스와 가이나는 대부분의 애니메이터를 적으로 돌린 것이 되었다.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터가 안 모이면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 이젠 정말 앞날이 캄캄해진 것이다.
아무튼 이 때문인지 몰라도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 개봉 임박 기념으로 일본 현지에서 재방한 TV판의 스태프 표시에서 가이낙스와 관련된 표기가 전부 사라지거나 블러 처리가 됐다.[23]#[24] 그러나 왠지 엔딩 스태프롤에 야마가 이름은 남아있다고 한다. 다만 갑자기 이랬던 것은 아니고, 2014년부터 카라만 표기되고 있었다. 안노의 폭로를 참고해보면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가이낙스와의 채무 문제가 격화되었다고 하는데, 이쯤 해서 판권을 소유한 카라나 제작위원회 측에서 모종의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히라마츠 타다시는 안노 편을 들면서 "이젠 경영으로 회사를 어떻게 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을 정도로 일본 경제가 망했다. 아베가 책임을 져야한다."라면서 아베 신조를 깠다.
이후 1994년,회사 창립자이자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를 위시로 한 게임부의 총책임자였던 아카이 타카미가 독립해 나인 라이브즈를 차린다. 당시 게임개발팀은 프린세스 메이커 2를 성공적으로 런칭하고 프메2의 슈퍼패미콤용 포팅작과 기존작의 하드한 설정을 쳐내고 여성향으로 방향을 전환한 외전격 작품을 계획중이었으나 가이낙스의 불안한 자금력과 야마가 히로유키를 위시로 한 경영진의 방만 경영 탓에 개발이 진행되지 않아 출시가 연기되었다. 그 때문에 아카이는 원만한 게임 제작 및 저작권 관리를 위해 슈패미판 2는 타카라에 외주를 주어 2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주인공이 나오는 작품을 만들게하고, 3은 나인 라이브즈가 개발해 출시하는 방향으로 하였다.
아카이는 다른 독립한 멤버들과는 달리 가이낙스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대한민국에선 유독 불화설이 진실이라고 알고있는 사람이 많았다. 나인 라이브즈는 프린세스 메이커 4(나인 라이브즈)의 개발이 지지부진하다가 발매가 취소되면서 휴업 선언을 하고 2001년 가이낙스로 흡수되었다.
2011년에는 그렌라간 때부터 시작된 스폰서(주로 애니플렉스)와의 갈등이 심해지는 바람에 결국 요시나리 요우, 스시오, 이마이시 히로유키를 비롯한 특급 애니메이터들이 퇴사하는 일이 벌어졌다.[19] 동년 8월 22일, 퇴사한 일원들은 트리거를 설립했고 10월 8일 공식 홈페이지를 개설했다.(홈페이지)
2011년 돗토리현 요나고시에 요나고 필름을 설립(대표: 아카이 타카미). 2014년에는 요나고 가이낙스 설립. 이어 2016년까지 후쿠시마 가이낙스(대표: 아사오 요시노리), 가이낙스 웨스트(대표: 타케다 야스히로/고베시), 가이낙스 니가타, 가이낙스 교토(대표: 타케다 야스히로) 설립. 결국 이 중 요나고 가이낙스는 독립해버리는데 성공한다.[20] 특히 가이낙스가 난장판이 되버린걸 보면 만약 독립하지 않았다면 2025년 프린세스메이커 신작은 나오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2013년, 26년만에 왕립우주군의 속편 제작을 발표했다. 지금은 사이트가 내려간 상태
과거 가이낙스를 대표하던 인물들이 나가서 만든 스튜디오 카라, 차세대 가이낙스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나가서 만든 트리거, 기존 가이낙스의 게임 개발 파트나 다름없던 요나고 가이낙스가 창립되어 독립한 이후로는 영 시원치 않은 작품들이 나오는 중이다. 끌어올 수 있는 스태프가 다 나가서 별볼일 없어졌기 때문이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역시 저작권은 물론 가이낙스가 제작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후기의 가이낙스는 우에무라 유타카와 사에키 쇼지로 대표되는데, 둘 다 퇴사하고 딴 곳으로 간 상태.
2016년 11월,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퇴사하며 가져간 에반게리온의 판권에 대한 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소송에서 1억엔의 배상을 하라는 기소가 있었고 동년도 12월 가이낙스 측은 인정하고 사과하는 형태를 취했다. 다만 기소는 취소하지 않았고, 이 사건은 결국 2017년 6월 1억엔을 지불하는 것으로 판결이 났다. 그러나 안노 말로는 아직도 다 지불받지 못했다고 한다.
아래에 언급된 '가이나'라는 회사는 지금의 가이낙스와 별개의 회사(원래 자회사였으나 독립)로, 지금의 가이낙스는 일체의 제작활동 없이 에반게리온을 제외한 예전 가이낙스 작품의 저작권만 관리하는 회사가 되었다. 거의 바지 회사인 모양. 그나마도 사장이 성희롱 혐의로 체포되기까지 했는데 아래의 가이나와 안노는 "이 회사는 이제 우리와 관계가 없다."라면서 선을 그었다.
오카다 토시오는 '야마가 히로유키는 사람보는 눈이 하나도 없었으며 회사를 망하게 하고싶지 않다는 그의 자존심을 이용한 사기꾼들이 몰려와 회사를 강탈한 상태라고 본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여기다 안노 히데아키는 추가로 언론에다 야마가 히로유키와 타케다 야스히로가 있는 가이나까지 저격하면서 퇴직 사유를 폭로하기에 이르렀다. 요약하자면 가이낙스는 왕립우주군 제작 시절부터 경영이 방만했으며 에반게리온의 성공으로 그것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야마가와 타케다에게 경영권이 넘어간 이후로도 개선되질 않았다고 한다.[21] 심지어 안노에게 구걸하는 일도 잦았다고.
안노는 독립 이후 이미 회수한 에바 이외 작품의 판권 회수를 시도했는데, 다른 작품 판권은 야마가가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갑자기 6배나 비용을 올렸다고 폭로했다. 문제가 된 가이낙스 사장의 성추행 때문에 에바 관련 사업이 취소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이게 야마가나 타케다 탓이 아니면 누구 탓이겠냐는 뉘앙스의 발언도 했다. 상당히 실망하고 분노한 어조의 성명이라 안노와 카라는 가이나랑 영원히 척을 졌다고 봐야 한다. 참고 다만 카라와 트리거는 원만한 관계인 것으로 보인다.[22]
그리고 앞으로 가이낙스는 제작에 있어서 큰 위기를 겪을 게 뻔한데 트위터만 쳐도 이 안노의 폭로에 대해서 리트윗이 65000, 좋아요가 75000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애니메이터들이 이걸 리트윗하면서 안노 편을 들었다. 트위터만 친 것이고 다른데서도 비슷한 반응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가이낙스와 가이나는 대부분의 애니메이터를 적으로 돌린 것이 되었다.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터가 안 모이면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 이젠 정말 앞날이 캄캄해진 것이다.
아무튼 이 때문인지 몰라도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 𝄇 개봉 임박 기념으로 일본 현지에서 재방한 TV판의 스태프 표시에서 가이낙스와 관련된 표기가 전부 사라지거나 블러 처리가 됐다.[23]#[24] 그러나 왠지 엔딩 스태프롤에 야마가 이름은 남아있다고 한다. 다만 갑자기 이랬던 것은 아니고, 2014년부터 카라만 표기되고 있었다. 안노의 폭로를 참고해보면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가이낙스와의 채무 문제가 격화되었다고 하는데, 이쯤 해서 판권을 소유한 카라나 제작위원회 측에서 모종의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히라마츠 타다시는 안노 편을 들면서 "이젠 경영으로 회사를 어떻게 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을 정도로 일본 경제가 망했다. 아베가 책임을 져야한다."라면서 아베 신조를 깠다.
2.2. 신규 임원진[편집]
2019년 12월 대표가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긴급 체포됨에 따라 임시 주주총회를 열었으며, 2020년 2월 주식회사 가이낙스에 신규 임원진이 들어섰다.
신규 임원진 중 감사(회계사)를 제외한 나머지 이사 4인의 구성을 보면 대표이사가 에반게리온 저작권 관리사인 그라운드 웍스[25] 대표, 나머지 3인은 트리거 대표이사, 카도카와 애니메이션 제작 담당 임원과 킹레코드 저작권 담당 임원의 구성이었다.임원진 전원 사외이사
임원 구성에서 알 수 있었듯이 당시 가이낙스는 카라와 트리거, 그리고 관련 업계의 공동관리 체제가 된 것으로 보였다. 상근 내부 임원없이 전원 외부 이해관계 업체의 사외이사인 것을 보았을 때, 카라나 트리거에서 가이낙스 명의의 신규 사업을 진행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기 보다는, 가이낙스 자체는 페이퍼 컴퍼니가 된 상태로 놔두었고, 다른 애먼 사람이 가이낙스 명의를 차지하여 물의를 빚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추정되었다. 이후로 스튜디오 카라 명의로 팬티 & 스타킹 with 가터벨트의 굿즈를 제작, 트리거와 가이낙스 SNS 계정에서 속편인 NEW 팬티 & 스타킹이 발표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가이낙스때 만든 몇몇 작품들의 판권이 각각 카라와 트리거로 이관되었다.
결국 정리하자면 기존 인력과 작품들은 스튜디오 카라, 트리거, 요나고 가이낙스[26], 가이나[27]로 쪼개졌고 사외이사들이 관리하는 저작권 관리 회사가 되었다.
게다가 가이낙스 작품 관련 굿즈를 판매했거나 트리거 사의 SNS를 리포스트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또한 가이낙스 사의 애니메이션을 트리거로 판권을 옮겨 제작하는 등의 활동도 진행했었다. 이제 트리거가 사실상 가이낙스를 완전히 승계해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으며 가이낙스 본사는 과거 작품을 리마스터링하며 트리거 사의 광고 및 홍보를 지원한 회사로 탈바꿈하였다. 심지어 트리거도 그라운드웍스, 스튜디오카라, 카도카와, 킹레코드와 함께 가이낙스 존속 시기 동안 경영에 대해 간섭할 수 있었으며 과거 가이낙스에서 제작하던 애니의 후속작까지 만드니 사실상 2024년 기준으로 가이낙스=트리거&카라가 된 셈. 가이낙스를 이어받은 애니 제작은 트리거로 가버렸고, 가이낙스의 상표&명칭은 스튜디오 카라가 가져갔다.
신규 임원진 중 감사(회계사)를 제외한 나머지 이사 4인의 구성을 보면 대표이사가 에반게리온 저작권 관리사인 그라운드 웍스[25] 대표, 나머지 3인은 트리거 대표이사, 카도카와 애니메이션 제작 담당 임원과 킹레코드 저작권 담당 임원의 구성이었다.
임원 구성에서 알 수 있었듯이 당시 가이낙스는 카라와 트리거, 그리고 관련 업계의 공동관리 체제가 된 것으로 보였다. 상근 내부 임원없이 전원 외부 이해관계 업체의 사외이사인 것을 보았을 때, 카라나 트리거에서 가이낙스 명의의 신규 사업을 진행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기 보다는, 가이낙스 자체는 페이퍼 컴퍼니가 된 상태로 놔두었고, 다른 애먼 사람이 가이낙스 명의를 차지하여 물의를 빚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추정되었다. 이후로 스튜디오 카라 명의로 팬티 & 스타킹 with 가터벨트의 굿즈를 제작, 트리거와 가이낙스 SNS 계정에서 속편인 NEW 팬티 & 스타킹이 발표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가이낙스때 만든 몇몇 작품들의 판권이 각각 카라와 트리거로 이관되었다.
결국 정리하자면 기존 인력과 작품들은 스튜디오 카라, 트리거, 요나고 가이낙스[26], 가이나[27]로 쪼개졌고 사외이사들이 관리하는 저작권 관리 회사가 되었다.
게다가 가이낙스 작품 관련 굿즈를 판매했거나 트리거 사의 SNS를 리포스트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또한 가이낙스 사의 애니메이션을 트리거로 판권을 옮겨 제작하는 등의 활동도 진행했었다. 이제 트리거가 사실상 가이낙스를 완전히 승계해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으며 가이낙스 본사는 과거 작품을 리마스터링하며 트리거 사의 광고 및 홍보를 지원한 회사로 탈바꿈하였다. 심지어 트리거도 그라운드웍스, 스튜디오카라, 카도카와, 킹레코드와 함께 가이낙스 존속 시기 동안 경영에 대해 간섭할 수 있었으며 과거 가이낙스에서 제작하던 애니의 후속작까지 만드니 사실상 2024년 기준으로 가이낙스=트리거&카라가 된 셈. 가이낙스를 이어받은 애니 제작은 트리거로 가버렸고, 가이낙스의 상표&명칭은 스튜디오 카라가 가져갔다.
2.3. 파산[편집]
그러나 2024년 5월 29일, 도쿄지방재판소에 파산 신청 후 6월 7일에 수리되면서 장장 40년의 역사를 마치게 되었다.
알림
지난 5월 29일, 저희 주식회사 가이낙스는 도쿄 지방 법원에 파산 신청을 하고, 수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1984년에 설립한 이후, 저희 회사에서는 애니메이션 제작과 게임 소프트 제작 판매 등을 실행해 왔습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현재는 주식회사 카라가 저작권을 보유) 등 여러 히트작을 누렸지만, 2012년경부터 시정된 무딘 음식점 경영, 무계획한 CG회사 설립, 운영 간부 개인에 대한 고액 무담보 대출, 투자 작품의 실주 등, 경영진 운영 간부의 회사를 사물화한 듯한 운영으로 인해 경제 상태가 나빠져 갔습니다.
해당 경영진이 만든 고액의 부채로 인해 저작권 사용료 미지급에 따른 위원회 제명과 거금 소송 등의 궁핍에 빠진 가운데 지방에 해당 간부나 관계자를 대표로 한 가이낙스의 사명을 쓴 계열사가 다수 설립되어 많은 퇴직자들을 내보내고 스튜디오로서의 애니메이션 제작 기능도 잃었습니다. 이러한 회사는 저희 회사와 관계 없다는 것을 표명하고 경영 책임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92년부터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대표이사로부터 영상제작에 지식과 견문이 없는 인물에 대한 주식양도가 당시 경영진의 승인을 토대로 2018년에 실시되었습니다. 게다가 2019년에는 그 인물이 대표이사에 취임 직후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력 가해자로 체포되기에 이르렀고, 고액의 부채를 기용한 가운데 완전히 운영 능력을 상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 대표이사의 불상사에서 일어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채권자이기도 한 주식회사 카라님의 선의에 따른 지원을 토대로 2020년 2월에 경영진을 쇄신하고 새로운 체제 하에 남겨진 다양한 자료를 확인하고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 결과, 고액의 금융기관으로부터 차입이나 각 애니메이션 업계 회사에 대한 채무 불이행, 지적 재산과 작품 자료를 정당한 권리자의 허락 없이 전술한 경영진, 운영 간부의 회사와 개인에 대한 매각, 양도 등의 사실이 판명되어 정상화에 착수했습니다.
카라님과 새로운 체제로 이끄시는 이사 대표 여러분의 협조에 따라 주된 작품에 대해 각 제작 위원회 등에서 앞으로의 작품 운용이 가능해지도록 각 협력 기업사와 함께 작품의 권리 확인, 작가, 크리에이터에 대한 권리 보호와 점점 산일해져 가고 있던 지적 재산과 자료의 정상적인 관리 및 운용에 노력해 왔지만, 많은 구 경영진이 주주로서 남는 상황에 가세해 이전 체제 때 쌓여 있었던 고액 부채 해소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5월에 채권회수회사로부터 채권청구소송을 제소받기에 이르렀고, 업무를 계속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판단 때문에 이번에 파산 신청을 실행한 대로입니다.
만전의 목적을 얻지 못하고 파산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채권자 여러분 또 협조해 주신 각 회사분들, 그리고 팬 여러분들께 대단히 죄송합니다.
구 경영진이 이러한 궁핍을 일절 개의치 않고 가이낙스의 브랜드를 이용해 활동을 이어가는 가운데, 무보수에도 불구하고 협조해 주셨던 새로운 체제 이사 대표와 이사 소속 기업분들, 작가, 크리에이터를 가장 지적한 정리 양도 등에 진력을 받으셨던 카라님을 비롯한 관계 기업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또, 무엇보다도 팬들로부터 40년동안 지원해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4년 6월 7일
주식회사 가이낙스
대표이사 카미무라 야스히로
가이낙스 및 스튜디오 카라의 공식 성명문에 따르면, 크리에이터에 대한 미지급금 해결, 지적재산 및 저작권 보존을 위해 유지했으나 회사의 채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28] 5월 채권 청구 소송이 들어오자 파산을 신청했다고 한다. 지적재산 및 저작권은 여러 논의를 거쳐 적합한 저작권자에게 양도되도록 처리했으며[29] 가이낙스라는 상표 및 명칭은 카라가 획득했다고 한다.
일단 모든 저작권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역할은 마쳤으니, 채무관계를 완전 정리하기 위해 파산 수순으로 넘어간 것이다. 성명문에는 후술된 가이나나 기타 가이낙스나 GAINAX 명의를 사용하는 유사한 회사들은 완전 별개의 회사라고 밝혔으니 완전 파산이 맞다.[30] 상표권 계약마저 없다고 하며, 이후 사용시 무단 사용으로 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였다. 각 유사 가이낙스 간판을 단 회사들은 각자의 길을 걸으며 이름을 바꾸든, 상표권 계약을 하든, 정상 영업을 하든, 폐업하든 할 방침이다.
가이낙스 본사는 파산했고, 분사된 회사들은 모두 무관한 회사라고 발표했으니 가이낙스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3. 특징[편집]
3.1. 오타쿠 기질[편집]
애초에 오타쿠 집단이 모여 만든 회사였기 때문에 회사 안에서도 오타쿠 분위기가 짙었다. 가이낙스 입사 시험 문제 자체가 매니악한 지식들에 관련된 문제고 작화 쪽도 기초 실력을 깐깐하게 봐서 스튜디오 지브리,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과 함께 들어가기 엄청나게 어려운 회사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31] 당시 인사를 주로 담당했던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말에 따르면 회사 직원들이 다 오타쿠라서 그에 맞춰 오타쿠 지식이 많고 오래 버틸 사람 위주로 뽑았다고 한다. 그러나 2000년대 와선 예전에 비해선 많이 순화되었다는 말도 있었다.
오타쿠 집단이었는지 작품들에 대체로 좀 매니악하고 그로테스크한 발상이 들어갔었다. 정석오타쿠물에 가까운 톱을 노려라!만이 그런게 없고 나디아, 에바, 에비츄 등은 지금 봐도 상당히 기묘(...)하다.
아무튼 회사 자체에 2차 창작에 열의를 가진 오타쿠의 유전자가 새겨져 있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단지 돈벌이에 혈안이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사의 판권물에 대한 유연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원작의 이미지를 지키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회사는 아니라서 원작의 세계관을 비틀고 뜯어고친 관련 작품이라든가, 원작의 캐릭터를 탈의 시킨다던가 그런쪽에 비교적 관대했다.
가이낙스의 탄생에 원더 페스티벌을 최초 기획한 제네럴 프러덕츠[32]가 관여했던 탓인지, 가이낙스의 원페 판권을 좀 널널하게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가이낙스를 퇴사하고 트리거라는 회사를 세운 오오츠카 마사히코의 인터뷰에 따르면 회사 분위기가 너무 자유로워 설마 통과되겠냐 하는 기획조차 OK 사인이 뜬다고 한다. 그래서 반대급부로 부담감이 너무 심해서 퇴사했다고.
원래도 오타쿠집단이었고 작품들도 하나같이 좀 독특했던 게 많아서 신세대 덕후들에겐 여러가지 선입견이 있었던 제작사였다. 가장 유명한 신세기 에반게리온만 봐도 평범하게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거에 비해 전체적으로 밝고 희망찬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대표작인 톱을 노려라!는 그냥 오타쿠 로봇 애니로 보일 수 있었지만 상당히 훈훈한 주제를 담고 있었고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는 천공의 성 라퓨타와 비슷한 외형이나 약간 괴기스러운 설정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주제는 상당히 교훈적이었다. 특히 가장 어둡고 비희망적일 것 같았던 신세기 에반게리온도 주제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집 보는 에비츄나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등도 동일했다.
서양 오타쿠들 사이에서 Gainax bounce 라는 용어가 쓰이기도 했는데 이는 여성캐릭터의 가슴의 물리학법칙을 거부하는 과장된 움직임을 말한다. 바스트 모핑 참조.
오타쿠 집단이었는지 작품들에 대체로 좀 매니악하고 그로테스크한 발상이 들어갔었다. 정석오타쿠물에 가까운 톱을 노려라!만이 그런게 없고 나디아, 에바, 에비츄 등은 지금 봐도 상당히 기묘(...)하다.
아무튼 회사 자체에 2차 창작에 열의를 가진 오타쿠의 유전자가 새겨져 있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단지 돈벌이에 혈안이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사의 판권물에 대한 유연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원작의 이미지를 지키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회사는 아니라서 원작의 세계관을 비틀고 뜯어고친 관련 작품이라든가, 원작의 캐릭터를 탈의 시킨다던가 그런쪽에 비교적 관대했다.
가이낙스의 탄생에 원더 페스티벌을 최초 기획한 제네럴 프러덕츠[32]가 관여했던 탓인지, 가이낙스의 원페 판권을 좀 널널하게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가이낙스를 퇴사하고 트리거라는 회사를 세운 오오츠카 마사히코의 인터뷰에 따르면 회사 분위기가 너무 자유로워 설마 통과되겠냐 하는 기획조차 OK 사인이 뜬다고 한다. 그래서 반대급부로 부담감이 너무 심해서 퇴사했다고.
원래도 오타쿠집단이었고 작품들도 하나같이 좀 독특했던 게 많아서 신세대 덕후들에겐 여러가지 선입견이 있었던 제작사였다. 가장 유명한 신세기 에반게리온만 봐도 평범하게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거에 비해 전체적으로 밝고 희망찬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대표작인 톱을 노려라!는 그냥 오타쿠 로봇 애니로 보일 수 있었지만 상당히 훈훈한 주제를 담고 있었고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는 천공의 성 라퓨타와 비슷한 외형이나 약간 괴기스러운 설정들을 가지고 있었으나, 주제는 상당히 교훈적이었다. 특히 가장 어둡고 비희망적일 것 같았던 신세기 에반게리온도 주제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집 보는 에비츄나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등도 동일했다.
서양 오타쿠들 사이에서 Gainax bounce 라는 용어가 쓰이기도 했는데 이는 여성캐릭터의 가슴의 물리학법칙을 거부하는 과장된 움직임을 말한다. 바스트 모핑 참조.
3.2. 제작 방식[편집]
리스크 절감을 위해서인지 가이낙스 오리지널 작품의 경우에도 공동 제작으로 만든 경우가 잦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타츠노코 프로덕션과 공동 제작이었고, 그와 그녀의 사정은 J.C.STAFF와 공동 제작, 마호로매틱과 이 사람이 나의 주인님은 SHAFT와 공동 제작 등.
일반적인 업계 관행을 무시하고 스폰서 물먹이기에도 일가견이 있어 왕립우주군, 나디아, 에반게리온의 경우 제작 기간 내내 스폰서와 아웅다웅했다라는 말도 있었다. 단 나디아의 경우엔 충돌에 대한 소문이 과장되었다는 말도 있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제작 당시 제작 스케줄은 미친듯이 빡빡해서 스태프들은 몇번이나 저승과 이승을 왔다갔다 했다고. 마기 해킹화에서 아카기 리츠코가 어머니가 남긴 쪽지를 들여다보는 화가 있었는데, 그 쪽지의 문구가 죄다 '힘들어', '배고파', '감독...감독..!!'과 같은 스태프들의 절규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
알게 모르게 하청을 받아서 작업한 경력이 화려했는데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작안의 샤나, The Big-O, 크레용신짱, 도라에몽, 포켓몬스터 극장판 등의 제작을 일부 전담하기도 했다.
일반적인 업계 관행을 무시하고 스폰서 물먹이기에도 일가견이 있어 왕립우주군, 나디아, 에반게리온의 경우 제작 기간 내내 스폰서와 아웅다웅했다라는 말도 있었다. 단 나디아의 경우엔 충돌에 대한 소문이 과장되었다는 말도 있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제작 당시 제작 스케줄은 미친듯이 빡빡해서 스태프들은 몇번이나 저승과 이승을 왔다갔다 했다고. 마기 해킹화에서 아카기 리츠코가 어머니가 남긴 쪽지를 들여다보는 화가 있었는데, 그 쪽지의 문구가 죄다 '힘들어', '배고파', '감독...감독..!!'과 같은 스태프들의 절규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
알게 모르게 하청을 받아서 작업한 경력이 화려했는데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작안의 샤나, The Big-O, 크레용신짱, 도라에몽, 포켓몬스터 극장판 등의 제작을 일부 전담하기도 했다.
3.3. 게임 개발[편집]
회사가 애니메이션 사업으로 빚더미에 앉게 되었던 아득한 옛날, 아카이 타카미가 '작화는 있으니 간단한 어드벤처 게임은 쉽게 만들지 않을까?'라는 발상에 사장인 오카다 토시오와 함께 일부 프로그래밍과 음악 외주를 제외하고는 둘이서 전부 용돈벌이겸 벌린일이 초대박을 쳐서 그 많던 빚도 한방에 갚고, PC88/98시절에는 PC게임 제작사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전뇌학원 시리즈가 캐릭터 산업을 앞세워 회사를 빚더미에서 구원했다면, 최초로 육성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를 확립한 게임인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는 사실상 거의 게임을 만들지도 않은 가이낙스가 게임업계의 새로운 장르를 구축한 회사로써 회자되게 될 정도로 대히트했다.[33]프린세스 메이커(특히 3)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인 쁘띠 프리 유시는 한국에서도 재능방송에서 방영했다.
프린세스 메이커 이전에는 PC 98과 IBM PC로 전뇌학원 시리즈라는 15금[34] 옷 벗기기 퀴즈게임 시리즈를 만들어 상당한 히트를 기록했으며[35] 심지어 3탄에서는 자사 작품인 톱을 노려라!의 여자 캐릭터들을 가차없이 유린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가이낙스의 히로인들이 딸내미 앵벌이라 불리우며 두고두고 몹쓸 일을 당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이런 몹쓸 행동은 한국 출신의 임모씨와 아이들이 코미케 회지를 통해 재현하고 있었다 또한 이 3번째 작품은 안노 히데아키가 직접 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당시 원화로 참여했던 쿠보오카 토시유키(아이돌 마스터 캐릭터 디자이너)는 톱을 노려라!의 히로인 노리코의 에로 그림을 그려 제출했더니 "에로가 부족해!! 이런 그림으로 중딩의 **가 빳빳해질것 같애!"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36]
그러나 윈도우즈로 갈아탄 이후 만들어낸 작품들은 하나같이 망작에 희대의 쿠소게들로 정평이 나있다. 더욱 비참한 것은 그들이 사일런트 뫼비우스, 에반게리온 등 네임밸류 높은 작품들이었다는 것. 심지어 삽화가가 가이낙스 소속(아카이 타카미)이었다는 것 때문에 애먼 성계 시리즈의 게임에도 불똥이 튄 적도 있었다.
현재 게임 개발 파트는 상당수가 스튜디오 카라나 트리거처럼 요나고 가이낙스로 이관되어 독립된 상태다.
전뇌학원 시리즈가 캐릭터 산업을 앞세워 회사를 빚더미에서 구원했다면, 최초로 육성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를 확립한 게임인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는 사실상 거의 게임을 만들지도 않은 가이낙스가 게임업계의 새로운 장르를 구축한 회사로써 회자되게 될 정도로 대히트했다.[33]프린세스 메이커(특히 3)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인 쁘띠 프리 유시는 한국에서도 재능방송에서 방영했다.
프린세스 메이커 이전에는 PC 98과 IBM PC로 전뇌학원 시리즈라는 15금[34] 옷 벗기기 퀴즈게임 시리즈를 만들어 상당한 히트를 기록했으며[35] 심지어 3탄에서는 자사 작품인 톱을 노려라!의 여자 캐릭터들을 가차없이 유린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가이낙스의 히로인들이 딸내미 앵벌이라 불리우며 두고두고 몹쓸 일을 당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윈도우즈로 갈아탄 이후 만들어낸 작품들은 하나같이 망작에 희대의 쿠소게들로 정평이 나있다. 더욱 비참한 것은 그들이 사일런트 뫼비우스, 에반게리온 등 네임밸류 높은 작품들이었다는 것. 심지어 삽화가가 가이낙스 소속(아카이 타카미)이었다는 것 때문에 애먼 성계 시리즈의 게임에도 불똥이 튄 적도 있었다.
현재 게임 개발 파트는 상당수가 스튜디오 카라나 트리거처럼 요나고 가이낙스로 이관되어 독립된 상태다.
4. 작품 목록[편집]
4.1. 애니메이션[편집]
1980년대 | 감독 | |
1987년 | ||
1988년 | 톱을 노려라! - GUNBUSTER | |
1990년대 | 감독 | |
1990년 | ||
1991년 | ||
1995년 | ||
1997년 | ||
1998년 | ||
1999년 | ||
2000년대 | 감독 | |
2000년 | ||
2001년 | ||
2002년 | ||
2004년 | ||
톱을 노려라2! - DIEBUSTER | ||
2005년 | ||
2007년 | ||
2008년 | ||
2009년 | ||
2010년대 | 감독 | |
2010년 | ||
2011년 | ||
방과후의 플레이아데스(WEB) | ||
2012년 | ||
2013년 | ||
카와지리 마사요시 | ||
2014년 | ||
오오노기 아야노 | ||
2015년 | ||
방과후의 플레이아데스(TVA)[37] |
4.2. 게임[편집]
5. 관련 인물[편집]
여기 있는 멤버들은 2000년대까지 소속되어 있던 멤버로 가이낙스란 회사가 거의 공중분해 되면서 안노 히데아키 파는 스튜디오 카라, 이마이시 히로유키파는 트리거, 니시고리 아츠시 파는 A-1 Pictures, 그 외 인물들은 샤프트에 가거나 아예 프리랜서로 독립을 해버려서 남아있는 사람은 야마가 히로유키, 사다모토 요시유키, 아카이 타카미 밖에 없다고 생각되었으나, 2020년 가이낙스 대숙청 당시 사외이사들을 앉히는 과정에서 모두 갈려나갔다.[39]
- 안노 히데아키: 그의 지분이 가장 컸다.
6. 가이낙스의 계보 회사[편집]
일본 3대 계보로 꼽히는 토에이 애니메이션, 무시 프로덕션, 타츠노코 프로덕션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던 아마추어들이 모여서 만든 회사로, 전혀 다른 계보로 꼽힌다.[40] 구 가이낙스의 지적재산권을 획득해 공식적으로 정통성이 인정된 회사는 볼드처리.[41]
- 스튜디오 카라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신극장판을 만든 회사이며 현재 모든 에반게리온 작품의 저작권과 가이낙스 상표 및 명칭까지도 보유하였고 마침내 2024년에는 가이낙스 브랜드를 완전히 이어받았다. 가이낙스 파산전까지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 트리거
가이낙스 기존 작품의 후속작까지 만들고 있어서 사실상 가이낙스의 애니 제작부를 완전히 이어받은 회사가 되었다.
이하는 가이낙스가 공중 분해되면서 회사의 인원들이 모여 우후죽순으로 만든 회사들이다. 다만 가이낙스가 파산하면서 모두 무관계한 회사이며 가이낙스 상표권을 사용시 무단사용으로 취부될 수 있다며 경고를 받았다.
[1] 접속 시 파산 신청으로 인한 수리 공지가 나온다.[2] 파산 후에도 현재까지도 비공개로 처리되었다.[3] 창단 멤버 중 한명인 아카이 타카미의 출신지가 돗토리현이다. 참고로 돗토리현을 연고로 하는 일본의 프로축구단 가이나레 돗토리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4] 오사카에서 열리면 DAICON, 도쿄에서 열리면 TOKON(토콘), 지역명을 붙인다. 1981년의 DAICON 3는 오사카에서 3번째로 열린 일본 SF 대회. DAICON 4는 1983년.[5] 다이콘 4의 오프닝은 드라마 전차남의 오프닝으로 패러디된 적 있으며(배경음악인 영국의 록밴드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의 'Twilight'마저도...), 또한 가이낙스의 애니 프리크리에서도 하루코가 대놓고 다이콘 V라면서 패러디한 적이 있다. 5화에서.[6] 사장인 오카다 토시오가 불륜 스캔들을 일으켜 오사카에서는 사회적으로 매장당해 상경을 결행했다.[7] 당시 가이낙스의 사장 오카다 토시오는 왕립우주군이 끝난 후 사무실에 모였는데 스태프들이 '다음 달은 어떡할까요?'라고 물어와서 '우리 해산하는 거 아니었어?'라고 되물었지만, 한편으로는 계속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에 내심 기분이 좋았다고 회상했다.[8] 당장 나디아 관련 저작권 표기만 봐도 ©NHK · 総合ビジョン · 東宝로 되어 있다. 즉, 저작권 수입은 제로.[9] 다만 그때 당시 안노 히데아키는 "정말인가요...?" 하면서 불안감을 드러냈다고 하는데...[10] 제목은 'ビートショット!!(beat shot)' 1989년 OVA로 출시, 일단 골프를 소재로 한 청춘만화가 원작인데, 그딴 것 필요없고 꽤나 수위가 높은 적나라한 정사씬이 두 차례 나온다. 작품 자체도 기획만 하고 나머지 실제작은 하청으로 던져버린 작품이라 전반적인 퀄리티도 떨어진다. 일본 위키피디아에도 항목 자체가 없는 진정한 가이낙스의 흑역사. 이 기획은 오카다 토시오의 생각이었는데, 당시 흥했던 비디오 대여점의 점주나 점원을 타겟으로 작품성이고 뭐고 이런 '야한 장면'이 끼어있으면 손님들이 잘 빌려갈 것이라며 생각하게 해서 팔아치우려는 안일한 기획이었다. 이에 야마가 히로유키와 안노 히데아키는 '가이낙스가 이래도 되는 건가'라면서 술자리에서 불만을 표출했다고 한다. 오카다는 지금 니들이 마시고 있는 그 술값이 거기에서 나온 돈이라면서 섭섭해했다고 한다.[11] 특촬과 애니메이션이 좋아서 프로의 세계로 뛰어들었는데, 게임쪽에서 재능을 각성해버려서 가이낙스를 먹여살리는 가장 노릇을 하게 되자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고, 이런 것들이 나중에 가이낙스의 분열의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12] 각본은 오카다 토시오. 실제 제작사는 가이낙스의 작화 하청을 주로 담당하는 다른 스튜디오.[13] 1961년생. 안노 히데아키, 야마가 히로유키와는 오사카 예대 동기. 대학 재학시절 만화가로 프로 데뷔했다. 이때 안노가 와서 만화책에 싸인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녀석은 오타쿠라서 수집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시마모토도 안노가 재학시절 만든 튼튼한 타이어나, 다이콘 오프닝 애니메이션을 보고 충격을 받고 애니메이션의 길은 포기하고 만화가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을 했다.[14] 시마모토는 당시에 불꽃의 전학생 OLA를 가족에게 자랑했었는 데, 문제는 가족들 중에 레이저디스크 플레이어가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뒷이야기가 있었다. 결국은 VHS로도 출시.[15] 이것도 원래는 타츠노코 프로에서 재하청한 것이다.[16] 이때의 교훈을 바탕으로 안노는 가이낙스를 떠난 뒤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을 제작과 배급 전부 100% 자비로 충당했다.[17] 도쿄국세국에 따르면 약 5억 8000만엔을 탈세했다고 한다.[18] 당시 사장의 이름은 사와무라 타케시(澤村武伺). 제너럴 프로덕츠 시절부터 관계가 있었던 인물. 오카다 토시오에 따르면 사장으로 발탁하자 오사카의 부동산을 매각한 돈 수억엔을 회사로 들고 오거나, 탈세 사건이 터지자 모든 걸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간 사나이 기질이 넘치는 인물이었다고...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재일교포라는 소문도 있었다. 2000년 사임. 참고로 가이낙스 창립 멤버 가운데 타케다 야스히로(武田康廣/한국 이름은 윤강광)는 확실한 재일교포(1997년 6월 22일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로 확인)이다.[19] 다만 트리거 창사 이후에도 창립 멤버인 스시오가 게스트 형식으로 가이낙스 공식 홈페이지 대문에 그렌라간을 그려준 걸 보면 원만하게 분리된 듯하다.[20] 이 회사는 그냥 회사가 아니라, 다름아닌 일본 게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의 저작권을 행사할 수 있는 회사이다. 과거 나인 라이브즈의 역할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아카이 타카미는 이전에도 독립을 시도한 바 있었다.[21] 안노 주장으로는 본인은 경영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문제가 심각해진 2003년쯤 사내 상황을 확인을 해봤는데 경악하고, 체질 개선을 시도했으나 먹히지 않았다고 한다. 안노가 경악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급여의 편차가 너무 심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가이낙스를 위해 헌신한 직원들에게는 쥐꼬리만한 급여를 준 반면, 거의 놀고 먹기만 한 구성원들은 짭짤하게 한 몫 챙기는 식으로 말이다.[22] 이 뉴스 트윗을 트리거 공식 계정이 리트윗했기 때문에 그렇다.# 정황상 안노가 당했던 수난을 트리거 소속 인원들도 당한 것으로 보인다. 가이낙스 피해자 모임[23] 예를 들면 오프닝에서의 원작자 표시가 가이낙스에서 안노 히데아키로 바뀌었다거나 엔딩에서의 GAINAX SHOP이 블러 처리됐다거나.[24] 다만 넷플릭스 한국 버전의 에반게리온 애니의 가이낙스 표기는 그대로 남아있었다.[25] 카라로부터 에반게리온 시리즈 저작권 관리 위임을 받아서 관련 사업 전반을 진행.[26]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의 저작권을 관리했다. 가이낙스의 게임 개발 파트를 사실상 완전히 이어받았다.[27] 푸른 우르, 톱을 노려라 등 몇 작품을 제외하면 말 그대로 인력만 쪼개졌다. 심지어 톱을 노려라 판권마저도 가이낙스로, 그 이후 2024년 6월 기준으로 스튜디오 카라로 옮겨졌다.[28] 심지어 구 경영진의 채무도 갚아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29] 팬스가 애니 제작 판권(가이낙스->트리거), 천원돌파 그렌라간 등의 작품의 저작권은 이미 트리거에게 넘어간 지 오래고, 팬스가 기존 시리즈 굿즈 등의 관련 판권,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안노가 세운 스튜디오 카라에 넘어간 지 오래였다. 프리크리는 안노가 미처 회수하기 전에 야마가가 Production I.G에 팔아서 그쪽에 저작권이 있으며, 톱을 노려라!는 프리크리와 함께 협상을 하던 중 야마가가 다른 회사에 팔아버렸다고 하는데 그 이후의 상황은 불명. 다만 다른 특허 정보 사이트에서는 톱을 노려라 저작권 출처가 멀쩡히 카라의 소유로 등록되있어 확인이 필요할 듯 하다.# 또한 카라에게 있던 팬스가 굿즈 판권도 트리거에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다.[30] 물론 다 갈라져 나온 회사들은 가이낙스 계통인 건 맞으나, 재무관계는 없고 정통성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 가능하다.[31] 무라야마 코스케, 료치모, 사이토 켄고, 나츠메 신고 등의 애니메이터들이 처음에는 가이낙스에 들어오려 했으나 이 입사 시험에서 떨어져 다른 곳에서 데뷔했다.[32] 제네럴 프러덕츠가 가이낙스에 전념하게 되면서 주관사가 카이요도로 넘어갔다.[33] 가이낙스가 손을 뗀 것 자체는 사실이다. 현재는 게임 시리즈 저작권이 요나고가이낙스에게 옮겨졌고 지금 새로 만드는 신작도 다른 회사가 만드는 중이며 2편 리메이크도 요나고가이낙스가 만드는 중이다.[34] 당시에 이 등급을 달고 출시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였다면 빼도 박도 못할 18금(또는 19금)이지만, 일본의 경우 게임에 대한 심의 규정이 기기마다 단체마다 워낙 제각각인지라...[35] 전뇌학원 시리즈의 캐릭터 디자이너 중 일부가 아카이 타카미였다. 그의 프메 시리즈 관련 그림이 괜히 꼴릿한 게 아니었다.[36] 토미노 요시유키가 퀘스 파라야를 디자인한 디자이너에게 한 대사를 들어둔 안노 히데아키가 써먹은 것이라고 한다. 토미노 요시유키 항목 참조.[37] 가이낙스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38] 여담으로 한 커뮤니티에서 4편마저도 가이낙스가 아니라 사이버제넥스에 있는게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39] 여담으로 아카이 타카미는 이미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의 저작권을 가지고 2014년에 회사를 따로 차려버린 상황이었다.[40] 현재 가이낙스의 큰 축을 담당한 인원들은 크게 보면 대부분 스튜디오 카라, 트리거, 요나고 가이낙스, 가이나로 갈라진 상황이다.[41] 샤프트 출신인 사람까지 포함하면 밀팡세도 있다. 창업자가 샤프트, 가이낙스 출신이기 때문.[42] 야마가 히로유키가 분사한 회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