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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1937년 상주에서 태어났으며 상주농잠고를 졸업해 공군하사관에 지원하였다. 당시 장기하사관을 대상으로 야간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한 제도가 있었는데, 김영룡은 사천비행장에 근무하면서 해인대학[1]을 졸업하였다.
1955년 고등학교 2학년일 당시 차숙희와 결혼하였고 3년 후인 1958년 김부겸을 낳았다. 결혼을 빨리 한 이유로는, 김영룡의 어머니가 42살에 그를 낳았고 부모님이 환갑때 결혼하였으며 김영룡이 독자였기에 손자를 빨리 보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1968년 공군간부후보생으로 임관하여 소위로 임명되었다. 이후 K2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대구 봉산동 대구경찰국장 관사 방 한칸을 빌렸고 그곳에서 김부겸을 비롯한 가족 5명이 살았다. 이후 아들 김부겸이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에 입학하자 2학년 때 과가 나눠지니까 법대에 가서 판사, 검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권유하였으나 김부겸은 정치학과를 희망하였다.
이후 1977년 아들이 시국사범으로 구속되고 광주 민주화운동에 연루되어 수배자가 되자 김영룡 본인도 국군보안대에 끌려가 현역 중령의 신분으로 열흘 넘게 조사를 받았고 그 소식을 들은 김부겸은 자수하였다. 김영룡은 당시 학생 운동을 하는 자식의 아버지는 모두 옷을 벗기라는 명 때문에 해임될 가능성이 있었으나, 중학교 동기인 5관구사령부 법무참모가 계엄사령관을 통해 그를 구명해줬다. 또한 진급심사 때마다 성적이 좋아 진급누락 같은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2000년 김부겸이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군포시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자 선거운동을 도움과 동시에 유세장에 방문하여 아들의 연설을 들었고, 이후 아들이 대구로 출마할 때도 말렸다가 230곳 되는 노인정을 방문하는 등 아들을 위해 힘썼다고 한다.
1955년 고등학교 2학년일 당시 차숙희와 결혼하였고 3년 후인 1958년 김부겸을 낳았다. 결혼을 빨리 한 이유로는, 김영룡의 어머니가 42살에 그를 낳았고 부모님이 환갑때 결혼하였으며 김영룡이 독자였기에 손자를 빨리 보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1968년 공군간부후보생으로 임관하여 소위로 임명되었다. 이후 K2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대구 봉산동 대구경찰국장 관사 방 한칸을 빌렸고 그곳에서 김부겸을 비롯한 가족 5명이 살았다. 이후 아들 김부겸이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에 입학하자 2학년 때 과가 나눠지니까 법대에 가서 판사, 검사를 했으면 좋겠다고 권유하였으나 김부겸은 정치학과를 희망하였다.
이후 1977년 아들이 시국사범으로 구속되고 광주 민주화운동에 연루되어 수배자가 되자 김영룡 본인도 국군보안대에 끌려가 현역 중령의 신분으로 열흘 넘게 조사를 받았고 그 소식을 들은 김부겸은 자수하였다. 김영룡은 당시 학생 운동을 하는 자식의 아버지는 모두 옷을 벗기라는 명 때문에 해임될 가능성이 있었으나, 중학교 동기인 5관구사령부 법무참모가 계엄사령관을 통해 그를 구명해줬다. 또한 진급심사 때마다 성적이 좋아 진급누락 같은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2000년 김부겸이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군포시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자 선거운동을 도움과 동시에 유세장에 방문하여 아들의 연설을 들었고, 이후 아들이 대구로 출마할 때도 말렸다가 230곳 되는 노인정을 방문하는 등 아들을 위해 힘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