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젊었을 때부터 명성이 높아 송순제 시기 안남장군(安南將軍), 남예주자사(南豫州刺史)로 임명되었으며 소릉왕(昭陵王) 유우(劉友) 직할 군부(軍府)의 참군(參軍)을 맡았다.
이후 남제 시기 소의는 입조하여 태자사인(太子舍人), 태자세마(太子洗馬)를 역임하였고 제무제의 아들인 건안왕(建安王)의 친구가 되었다. 후에 상경하여 진릉태수(晉陵太守)를 맡아 선정을 펼쳤다고 한다. 이후 재입조하여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임명되었고 아버지 소순지가 죽자 소의는 영삭장군(寧朔將軍)을 수여받았다.
494년 1월 26일, 지절(持節), 도독남량북진사사주제군사(都督梁南北秦沙四州諸軍事), 서융교위(西戎校尉), 남량진이주자사(梁南秦二州刺史), 진호관군장군(進號冠軍將軍), 출진한중(出鎮漢中)에 임명되었다. 동년 삼년상이 끝나자 아버지의 작위인 임상현개국후(臨湘縣開國侯)를 습봉하였다.
495년, 북위의 양주자사(梁州刺史) 원영(元英)과 진주자사(秦州刺史) 유조(劉藻)가 협력하여 소량의 한중(漢中)을 공격하자 소의는 북위군을 물리쳤고 그 공으로 식읍 300호를 받았다.
496년 6월 3일, 소의는 도독 익녕이주제군사(益寧李州諸軍事),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입조하여 태자우위률(太子右衛率), 상서이부랑(尚書吏部郎)에 임명되었다.
498년, 수도를 떠나니 사지절(使持節), 도독영사이주제군사(都督郢司二州諸軍事), 정로장군(征虜將軍), 영주자사(郢州刺史) 및 건안왕 직속 군부의 장사(長史), 행령주사(行郢州事)로 임명되었다. 동년 소의의 셋째 동생인 소연이 장홍책(張弘策)을 영주로 보내 황제의 폭정을 이유로 협력하여 거병할 것을 청했으나 소의는 이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져 거절하였다. 이듬해 소의는 징집되어 위위(衛尉)가 되었다.
500년, 예주자사(豫州刺史) 배숙업(裵叔業)이 북위에 투항하자 황제 소보권은 소의에게 그를 토벌하도록 했다. 그러나 배숙업이 3일 만에 병사하자 무산되었다. 동년 3월, 최혜경(崔慧景)이 거병하자 소의는 3천 병력을 이끌고 그를 붙잡아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후 최혜경은 참수되었다. 이 공으로 소의는 시중, 상서우복위 등에 임명되었다가 이틀 후 반란이 일어나자 그 반란도 진압하여 식읍 2,500호를 받았다.
이처럼 계속해서 공로가 높아지자 소의는 황제의 시기를 받았고, 여법정(呂法貞)의 무고에 시달리다가 동년 10월, 넷째 동생인 소창(蕭暢)과 함께 사사되었다. 형제들의 불합리한 처형에 대노한 소연은 동년 12월 건강으로 쳐들어가 소보권을 폐위시키고 소보융을 옹립시키는 정변을 일으켰으며, 소연이 전권을 장악한 후 소의는 태부로 추증되었다.
502년 4월, 소연이 소량을 건국하자 소의를 승상으로 추숭하였으며 장사군왕(長沙郡王)에 봉하고 시호를 선무왕(宣武王)로 올려 장사선무왕(長沙宣武王)이 되었다[1]. 장례는 서진의 안평헌왕 사마부의 고사를 따라 하도록 하였다.
이후 소연은 불교에 귀의했으며 소의를 기리기 위해 선무사(宣武寺)를 건립하였다.
이후 남제 시기 소의는 입조하여 태자사인(太子舍人), 태자세마(太子洗馬)를 역임하였고 제무제의 아들인 건안왕(建安王)의 친구가 되었다. 후에 상경하여 진릉태수(晉陵太守)를 맡아 선정을 펼쳤다고 한다. 이후 재입조하여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임명되었고 아버지 소순지가 죽자 소의는 영삭장군(寧朔將軍)을 수여받았다.
494년 1월 26일, 지절(持節), 도독남량북진사사주제군사(都督梁南北秦沙四州諸軍事), 서융교위(西戎校尉), 남량진이주자사(梁南秦二州刺史), 진호관군장군(進號冠軍將軍), 출진한중(出鎮漢中)에 임명되었다. 동년 삼년상이 끝나자 아버지의 작위인 임상현개국후(臨湘縣開國侯)를 습봉하였다.
495년, 북위의 양주자사(梁州刺史) 원영(元英)과 진주자사(秦州刺史) 유조(劉藻)가 협력하여 소량의 한중(漢中)을 공격하자 소의는 북위군을 물리쳤고 그 공으로 식읍 300호를 받았다.
496년 6월 3일, 소의는 도독 익녕이주제군사(益寧李州諸軍事),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입조하여 태자우위률(太子右衛率), 상서이부랑(尚書吏部郎)에 임명되었다.
498년, 수도를 떠나니 사지절(使持節), 도독영사이주제군사(都督郢司二州諸軍事), 정로장군(征虜將軍), 영주자사(郢州刺史) 및 건안왕 직속 군부의 장사(長史), 행령주사(行郢州事)로 임명되었다. 동년 소의의 셋째 동생인 소연이 장홍책(張弘策)을 영주로 보내 황제의 폭정을 이유로 협력하여 거병할 것을 청했으나 소의는 이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져 거절하였다. 이듬해 소의는 징집되어 위위(衛尉)가 되었다.
500년, 예주자사(豫州刺史) 배숙업(裵叔業)이 북위에 투항하자 황제 소보권은 소의에게 그를 토벌하도록 했다. 그러나 배숙업이 3일 만에 병사하자 무산되었다. 동년 3월, 최혜경(崔慧景)이 거병하자 소의는 3천 병력을 이끌고 그를 붙잡아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후 최혜경은 참수되었다. 이 공으로 소의는 시중, 상서우복위 등에 임명되었다가 이틀 후 반란이 일어나자 그 반란도 진압하여 식읍 2,500호를 받았다.
이처럼 계속해서 공로가 높아지자 소의는 황제의 시기를 받았고, 여법정(呂法貞)의 무고에 시달리다가 동년 10월, 넷째 동생인 소창(蕭暢)과 함께 사사되었다. 형제들의 불합리한 처형에 대노한 소연은 동년 12월 건강으로 쳐들어가 소보권을 폐위시키고 소보융을 옹립시키는 정변을 일으켰으며, 소연이 전권을 장악한 후 소의는 태부로 추증되었다.
502년 4월, 소연이 소량을 건국하자 소의를 승상으로 추숭하였으며 장사군왕(長沙郡王)에 봉하고 시호를 선무왕(宣武王)로 올려 장사선무왕(長沙宣武王)이 되었다[1]. 장례는 서진의 안평헌왕 사마부의 고사를 따라 하도록 하였다.
이후 소연은 불교에 귀의했으며 소의를 기리기 위해 선무사(宣武寺)를 건립하였다.
3. 참고 항목[편집]
[1] 《南史·卷五十一·列傳第四十一》:天監元年,追崇丞相,封長沙郡王,諡曰宣武。給九旒鸞輅、黃屋左纛,葬禮依晉安平王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