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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엘비스 프레슬리
1. 개요[편집]
엘비스 프레슬리의 생애를 다룬 문서.
2. 데뷔 이전 (1936~1954)[편집]
어린 시절의 가족 사진 |
1936년 1월 8일, 버논 프레슬리와 글래디스 프레슬리 사이에서 쌍둥이 형인 제시 프레슬리와 태어났으며,[1] 이후 버논이 위조 수표 혐의로 수감되며 경제적 상황이 나빠지자, 고향인 투펄로에서 당시 흑인 빈민층이 주로 살던 멤피스로 이사하였다.[2]
이후 성인이 된 엘비스는 트럭 운전수가 되었다. 물론 음악의 꿈을 놓진 않았기에 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 초반 유행하던 재즈 빅밴드나 컨트리 밴드 등에 지원하거나, 여러 밴드들과 음악적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3] 이후 선 레코드 사의 샘 필립스 사장의 눈에 띄게 되어 해당 레코드 사에서 1954년 싱글 'That's All Right'으로 데뷔한다. 'That's All Right'은 열악한 레코드 사 사정 탓에 홍보를 전혀 하지 못했지만, 미국 남부 내에서 꽤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 시기 엘비스는 매니저 톰 파커와 전속 계약을 맺으며 RCA로 이적한다.
이후 성인이 된 엘비스는 트럭 운전수가 되었다. 물론 음악의 꿈을 놓진 않았기에 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 초반 유행하던 재즈 빅밴드나 컨트리 밴드 등에 지원하거나, 여러 밴드들과 음악적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3] 이후 선 레코드 사의 샘 필립스 사장의 눈에 띄게 되어 해당 레코드 사에서 1954년 싱글 'That's All Right'으로 데뷔한다. 'That's All Right'은 열악한 레코드 사 사정 탓에 홍보를 전혀 하지 못했지만, 미국 남부 내에서 꽤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 시기 엘비스는 매니저 톰 파커와 전속 계약을 맺으며 RCA로 이적한다.
3. 전성기 (1954~1958)[편집]
밀턴 베를 쇼에서의 모습 (1956년)[4] |
RCA로 이적한 엘비스는 싱글 'Hert Break Hotel'과 'Hound Dog'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그러나 이로 인해 큰 위기가 찾아오는데, 바로 기성세대와의 갈등이었다. TV 쇼에 출연해 로큰롤을 부르며 하체를 흔드는 춤을 추는 엘비스의 모습은 기성세대에겐 큰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이전까진 로큰롤은 저질스런 악마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엘비스의 춤마저 성적인 행위를 연상시킨다며 비판했다.[5]
엘비스는 기성세대와의 갈등으로부터 전면 돌파하며 'Jailhouse rock' 등의 곡을 불렀고, 결국 엘비스의 이미지는 애꿏은 젊은이들을 저질 춤과 음악으로 망가뜨리는 뒷세계의 황제로 전락하고 말았고, 매니저 톰 파커는 엘비스의 이미지 변신을 위해 군에 입대시키기로 한다.[6]
엘비스는 기성세대와의 갈등으로부터 전면 돌파하며 'Jailhouse rock' 등의 곡을 불렀고, 결국 엘비스의 이미지는 애꿏은 젊은이들을 저질 춤과 음악으로 망가뜨리는 뒷세계의 황제로 전락하고 말았고, 매니저 톰 파커는 엘비스의 이미지 변신을 위해 군에 입대시키기로 한다.[6]
4. 군입대 (1958~1960)[편집]
엘비스 프레슬리의 군대 영장 |
[1]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시는 사산된 상태로 분만했다.[2] 이 시기 흑인 아이들과 어울리며 낡은 통기타로 블루스, 가스펠 등을 부르며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3] 엘비스와 음악적 교류를 한 가장 대표적인 밴드가 조니 브루넷 트리오였다. 엘비스는 해당 밴드에 객원 멤버로 참여하기도 하였다.[4] 그 유명한 'Hound Dog'을 부르는 모습이다. 이는 엘비스의 가장 유명한 모습이기도 하다.[5] 음악에 맞춰 춤 추는 행위가 당연한 현재로썬 이해할 수 없는 비판이지만, 당시엔 TV 쇼에 나오는 가수는 보통 정장을 입고, 가만히 서서 재즈를 부르는 것이 당연한 시대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이 나올수밖에 없었다. 엘비스와 엘비스 이전 인기 가수였던 루디 발레, 빙 크로스비, 프랭크 시나트라의 무대를 비교해보면 이러한 비판을 이해할수있다.[6] 당시 미국은 징병제를 시행중이었지만, 군인 수가 많았기에 손쉽게 군면제가 가능했고, 엘비스 역시 군면제가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