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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성은 이(李), 휘는 융기(隆基)이며, 당나라 제6대 황제이다. 초기 생전 존호는 개원신무황제(開元神武皇帝)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추가와 개칭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개원천지대보성문신무증도효덕황제(開元天地大寶聖文神武證道孝德皇帝)라는 존호를 받았다. 그가 퇴위한 뒤 태상황으로 물러난 시기에는 태상지도성황제(太上至道聖皇帝)라는 존호가 더해졌다. 정식 시호는 지도대성대명효황제(至道大聖大明孝皇帝)이며, 묘호는 현종(玄宗), 능호는 태릉(泰陵)이다.
이융기는 예종 이단과 소성황후(昭成皇后) 두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무씨 정권이 붕괴된 뒤 부친이 복위하면서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712년 이단이 스스로 퇴위함에 따라 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이듬해 단독 친정을 시작하면서 개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본격적인 통치에 착수하였다.
그의 초기 통치는 개원지치로 불리는 시기로, 당 제국의 정치 · 경제 · 문화가 모두 융성한 황금기를 열었다. 중앙과 지방 행정을 정비하고, 조세 제도와 병제를 개혁하여 국가의 운영 체계를 다시 정립하였다. 민생 안정을 중시하면서 농업 생산과 국가 재정이 크게 확장되었고, 비단길을 통한 대외 교역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문화적으로는 시와 음악, 불교와 도교가 함께 융성하였으며, 이상적 군주상을 실현하고자 유교적 정치 이념을 제도화하였다. 인재 등용에 적극적이었던 그는 유학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 개편을 단행하였으며, 문치주의를 강화하여 당 제국의 문명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그러나 통치 말기에 접어들면서 조정은 점차 균형을 잃기 시작하였다. 총애하던 양귀비와 그 일가가 권력을 행사하면서 궁정 내 정치는 혼탁해졌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절도사 안녹산이 75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안사의 난으로 불리며, 당 제국 전역을 전란에 빠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현종은 촉 지방으로 피난하였고, 정국 안정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아들 이형에게 제위를 넘겼다. 이후 그는 태상황의 신분으로 장안으로 귀환하였지만 국정에는 개입하지 않고 여생을 보냈으며, 762년에 붕어하였다.
현종의 통치는 당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군주로서 높이 평가받는다. 그의 치세는 문화와 제도의 융성, 국력의 확장, 유교 정치의 정착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전범으로 인식되며, 동아시아 황제 통치의 이상형으로 간주된다. 말년의 실정과 그에 따른 정국 혼란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장기 재위 기간 동안 이룩한 성과는 당 왕조 전체의 위상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는 태릉에 묻혀 후세로부터 제향을 받으며 기려졌다.
이융기는 예종 이단과 소성황후(昭成皇后) 두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무씨 정권이 붕괴된 뒤 부친이 복위하면서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712년 이단이 스스로 퇴위함에 따라 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이듬해 단독 친정을 시작하면서 개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본격적인 통치에 착수하였다.
그의 초기 통치는 개원지치로 불리는 시기로, 당 제국의 정치 · 경제 · 문화가 모두 융성한 황금기를 열었다. 중앙과 지방 행정을 정비하고, 조세 제도와 병제를 개혁하여 국가의 운영 체계를 다시 정립하였다. 민생 안정을 중시하면서 농업 생산과 국가 재정이 크게 확장되었고, 비단길을 통한 대외 교역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문화적으로는 시와 음악, 불교와 도교가 함께 융성하였으며, 이상적 군주상을 실현하고자 유교적 정치 이념을 제도화하였다. 인재 등용에 적극적이었던 그는 유학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 개편을 단행하였으며, 문치주의를 강화하여 당 제국의 문명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그러나 통치 말기에 접어들면서 조정은 점차 균형을 잃기 시작하였다. 총애하던 양귀비와 그 일가가 권력을 행사하면서 궁정 내 정치는 혼탁해졌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절도사 안녹산이 75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안사의 난으로 불리며, 당 제국 전역을 전란에 빠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현종은 촉 지방으로 피난하였고, 정국 안정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아들 이형에게 제위를 넘겼다. 이후 그는 태상황의 신분으로 장안으로 귀환하였지만 국정에는 개입하지 않고 여생을 보냈으며, 762년에 붕어하였다.
현종의 통치는 당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군주로서 높이 평가받는다. 그의 치세는 문화와 제도의 융성, 국력의 확장, 유교 정치의 정착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전범으로 인식되며, 동아시아 황제 통치의 이상형으로 간주된다. 말년의 실정과 그에 따른 정국 혼란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장기 재위 기간 동안 이룩한 성과는 당 왕조 전체의 위상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는 태릉에 묻혀 후세로부터 제향을 받으며 기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