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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 초대 황제 측천무후 | 則天武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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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개요[편집]
당고종의 계후이자 무주 왕조의 유일한 황제로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여제다. 성은 무(武), 휘는 조(曌)이며, 아명은 무미랑(武媚娘)이다. 무사확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여제로 즉위하면서 스스로 이름을 조로 바꾸었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황제의 존호와 제왕 칭호를 사용하여 즉위한 여성으로, 당나라의 황후에서 출발하여 독립된 왕조를 수립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특이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올린 존호는 자씨월고금륜성신황제(慈氏越古金輪聖神皇帝)이며, 이후 이를 천책금륜성신황제(天冊金輪聖神皇帝)로 고쳤다. 퇴위 후 태상황으로 존숭되었을 때는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는 존호를 받았다. 사후에는 당 왕실의 신분으로 복권되어 황후의 격식으로 예우받았으며, 처음에는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시호가 올려졌고, 이후 천후(天后), 대성천후(大聖天后), 천후성제(天后聖帝) 등의 시호가 사용되었다. 최종적으로 정식 시호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로 확정되었다. 능호는 고종과 합장된 건릉(乾陵)이다.
무조는 당 고종 이치의 후궁으로 입궐한 뒤 총애를 얻어 황후로 책봉되었으며, 고종이 병약해지면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고종의 붕어 이후에도 중종과 예종을 차례로 옹립하고 섭정의 자리에 오르면서 권력을 유지하였다. 결국 690년에 자신이 직접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주(周)로 바꾸어 독립 왕조를 세움으로써 명실상부한 여제의 시대를 열었다.
그녀는 재위 기간 동안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과거제를 확대하여 문신 관료 체계를 정비하였으며, 지방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감찰 제도를 운영하였다. 유교, 불교, 도교를 모두 활용하였으며, 특히 불교 교리를 통해 자신을 미륵불의 화현으로 선전하며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또한 여성 통치에 대한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다양한 종교적 상징과 천명 사상을 적극 활용하였다.
문예와 학문을 장려하였고, 신분이나 가문에 관계없이 유능한 인재를 중용하여 관료층의 구성을 새롭게 하였다. 반면 측근과 무씨 일족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말년에는 환관과 밀찰기관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는 등의 전제적 통치도 병행하였다. 이러한 강압적 체제는 정치적 긴장을 불러일으켰으며, 결국 705년 궁정 반정으로 퇴위하였다.
무조는 퇴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붕어하였으며, 고종과 함께 건릉에 합장되었다. 능의 비석에는 어떤 글도 새기지 않아 훗날 ‘무자비’라 불렸으며, 이는 후대에 그녀의 공과를 판단하지 않고 역사의 평가에 맡기겠다는 상징으로 여겨진다.
무조는 강한 통치력과 제도 개혁을 통해 한 시대를 이끈 군주로 평가되며, 동아시아 군주제 역사에서 전례 없는 여제 통치를 실현한 인물로 남아 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올린 존호는 자씨월고금륜성신황제(慈氏越古金輪聖神皇帝)이며, 이후 이를 천책금륜성신황제(天冊金輪聖神皇帝)로 고쳤다. 퇴위 후 태상황으로 존숭되었을 때는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는 존호를 받았다. 사후에는 당 왕실의 신분으로 복권되어 황후의 격식으로 예우받았으며, 처음에는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시호가 올려졌고, 이후 천후(天后), 대성천후(大聖天后), 천후성제(天后聖帝) 등의 시호가 사용되었다. 최종적으로 정식 시호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로 확정되었다. 능호는 고종과 합장된 건릉(乾陵)이다.
무조는 당 고종 이치의 후궁으로 입궐한 뒤 총애를 얻어 황후로 책봉되었으며, 고종이 병약해지면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고종의 붕어 이후에도 중종과 예종을 차례로 옹립하고 섭정의 자리에 오르면서 권력을 유지하였다. 결국 690년에 자신이 직접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주(周)로 바꾸어 독립 왕조를 세움으로써 명실상부한 여제의 시대를 열었다.
그녀는 재위 기간 동안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과거제를 확대하여 문신 관료 체계를 정비하였으며, 지방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감찰 제도를 운영하였다. 유교, 불교, 도교를 모두 활용하였으며, 특히 불교 교리를 통해 자신을 미륵불의 화현으로 선전하며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또한 여성 통치에 대한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다양한 종교적 상징과 천명 사상을 적극 활용하였다.
문예와 학문을 장려하였고, 신분이나 가문에 관계없이 유능한 인재를 중용하여 관료층의 구성을 새롭게 하였다. 반면 측근과 무씨 일족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말년에는 환관과 밀찰기관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는 등의 전제적 통치도 병행하였다. 이러한 강압적 체제는 정치적 긴장을 불러일으켰으며, 결국 705년 궁정 반정으로 퇴위하였다.
무조는 퇴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붕어하였으며, 고종과 함께 건릉에 합장되었다. 능의 비석에는 어떤 글도 새기지 않아 훗날 ‘무자비’라 불렸으며, 이는 후대에 그녀의 공과를 판단하지 않고 역사의 평가에 맡기겠다는 상징으로 여겨진다.
무조는 강한 통치력과 제도 개혁을 통해 한 시대를 이끈 군주로 평가되며, 동아시아 군주제 역사에서 전례 없는 여제 통치를 실현한 인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