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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ST )

Tang Dynasty
대당
파일:1000000753.jpg
8세기말 당나라의 강역
1. 개요2. 정치
2.1. 황실
2.1.1. 황제2.1.2. 당 황실의 정체성
2.2. 중앙관제

1. 개요[편집]

중국왕조. 618년부터 904년까지 288년동안 존재했다. 당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왕조 가운데 하나로, 7세기 초부터 10세기 초까지 존속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한 뒤 당고조 이연이 세운 이 왕조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과거제를 본격적으로 시행하였으며, 법률과 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가 체제를 안정시켰다.

초기에는 율령 체제를 바탕으로 지방까지 통제하는 체제를 갖추었고, 정관 연간에는 문물과 정치가 크게 융성하였다. 이후 현종 시기에는 문화와 경제가 절정에 달했으며, 비단길을 통한 국제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장안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복잡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지방 군벌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9세기 말 황소의 난과 내부 반란이 이어졌고, 결국 10세기 초 주전충이 황제를 폐위하면서 왕조는 종말을 맞이하였다.

당나라는 동아시아 문화권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한국일본, 베트남 등지의 정치 제도와 문물에 큰 영향을 남겼다.

2. 정치[편집]

2.1. 황실[편집]

2.1.1. 황제[편집]

2.1.2. 당 황실의 정체성[편집]

당의 황가인 농서 이씨 가문은 수나라 황실과 마찬가지로 혈통적으로 순수한 한족 계통이라 단정하기 어렵다. 문헌상으로는 한족 귀족 계보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선비족을 포함한 북방계 이민족의 요소가 강하게 작용한 혼합적 기원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당나라 자체가 북주와 수나라를 거치며 형성된 관롱집단의 정치적 기반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관롱집단은 북주 시기부터 등장한 정치 군사 귀족 집단으로, 관중 지방을 중심으로 한 호한 통합 지배층이었다. 이 집단은 선비족 계통인 우문씨, 양씨, 이씨 등 여러 가문들이 혼인 관계를 통해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당 고조 이연 역시 어머니가 선비계 독고씨 출신이었으며, 부친인 이호는 북주의 군사 귀족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수나라를 창건한 수 문제 또한 북주 시기에는 선비족식 성명을 사용하였으며, 왕조 개창 이후 한자식 이름으로 바꾼 전례가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당나라 황실은 스스로를 한족 명문가의 후예로 포장하였다. 《구당서》에는 이씨 왕조가 진나라의 명장 이신과 전한의 장수 이광의 후손임을 자처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계보는 당나라 초기에 널리 알려졌으며, 당 고조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반면 송나라 시기에 편찬된 《신당서》는 이씨 황실의 혈통에 있어 이민족 요소를 보다 명확히 언급하고 있으며, 북방계 혼혈적 기원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북위 효문제 이래 선비족은 강력한 한화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로 인해 선비족과 한족 사이의 문화적 경계는 점차 모호해졌다. 당시의 지배층은 언어, 의복, 종교, 법률 등 여러 방면에서 한족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정치적 정체성 또한 한화된 양상을 보였다. 이 같은 흐름은 북주와 수, 당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으며, 특히 태원 이씨, 홍농 양씨, 청하 최씨, 박릉 최씨 등 유서 깊은 한족 명문가들도 관롱집단의 일부로 참여하였다.

당나라 황족의 혈통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일부 학설은 수나라와 당나라의 황족이 철륵계 튀르크 민족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으며, 일본의 연구자인 모리야스 다카오 등은 당 황실이 탁발계 왕조의 후손일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중국 내에서는 선비화한족설, 한화선비족설, 혼혈 기원설 등이 논의되어 왔다.

당 태종 이세민은 즉위 직후 장안에 노자 사당을 세웠는데, 이는 자신이 노자의 후손이라는 설화에 기반한 상징적 정치 행위였다. 일부 계보 기록에서는 이씨 가문이 노자와 연결되었다고 서술되지만, 이는 혈통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정통성 확보를 위한 상징 조작으로 해석된다.

관롱집단은 정치적 폐쇄성과 족내 혼인을 특징으로 하였으며,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배경에도 이러한 폐쇄적 질서를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측천무후는 지방 출신자들을 관직에 등용하는 한편, 관롱 귀족 가문들의 씨족지를 약화시켜 정치 기반을 넓혔다. 당 고조의 친인척 다수가 선비계 독고씨 출신이었던 사실 역시 이 시대의 혼혈 귀족 구조를 잘 보여준다.

당나라는 황실 혈통에 북방계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지배 체제와 문화적 지향은 철저히 한문 문명 중심이었다. 언어, 법률, 종교, 예악 등에서 한족적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그 통치 방식은 정복 왕조나 식민 지배 체제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원나라나 청나라처럼 황실의 언어나 문화가 이질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경우와는 달리, 당 황실은 언어와 문화 면에서 실질적으로 한족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나라는 침투 왕조의 일종으로 분류되며, 북방계 혈통을 지녔지만 한족 문명권 안에서 작동한 복합적 통치 체제를 대표한다.

2.2. 중앙관제[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