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가계[편집]
3. 활동 사항[편집]
진희규는 한일 병합 이전인 1902년 내부 주사에 임명되었으며, 한일 병합 이후인 1911년부터 1920년까지 경상북도 참사(參事)로 복무하였다. 그 사이 1915년 10월 일본 적십자사 특별 사원으로 활동하였다. 1915년 10월 28일 대구부에 자신의 토지를 도로 부지로 기부하여 목배 1개를 받았다. 1918년 대구 은행에 자본을 투자하고 감사역이 되었다. 1919년 계림 농림 주식회사(鷄林農林株式會社) 이사(취체역), 1920년 주식회사 대동사(大東社) 이사(취체역), 1920년 경일 은행(慶一銀行) 이사, 1920년 대구 주조 주식회사(大邱酒造株式會社) 이사(취체역), 1928년 경상 합동 은행(慶尙合同銀行)에 자본을 투자하고 경영에 참여하여 대주주를 역임했으며, 1935년부터 1939년까지 대구 상공 은행(大邱商工銀行)이라는 회사에 자본을 투자하고 경영에 참여하면서 이사라는 직위를 가지고 그 직위를 역임했다. 1924년에는 수성 공립 보통학교 학부형 장학회 회장이 되어 그 직위를 역임했다. 또한 동년에 달성군수성 수리 조합 조합장이 되어 그 직위를 역임했으며, 1927년 1월 20일부터 1938년 6월까지 달성 동부 금융 조합 조합장 등을 역임하였다. 진희규는 경상북도 고령(高靈)·달성(達城)·경산(慶山)·칠곡(漆谷) 등지에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진희규는 1924년 4월 1일과 1927년 4월 1일 경상북도 관선 도 평의회 의원이 되었다. 이때 그는 ‘당선사례’를 통해 "금반(今般) 경상북도 평의원에 임명되었음은 도민(道民) 첨위(僉位)의 애원해 온 바 금후 일층 도치(道治)에 전력코자 자(玆)에 감히 감사의 뜻을 표하옵니다."라고 하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1932년 조선 유교회 명리원(明理院) 의정(議正)이 되었다. 1930년 6월 3일부터 1933년 6월 2일까지 조선총독부의 자문 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여 그 직위로 활동하면서 연수당 600원을 받았다. 8·15 광복 후인 1949년 3월 18일 박창수 참의와 함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 특위]에 자수하여 체포되었다. 진희규는 1959년 11월 25일 사망하였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진희규는 1924년 4월 1일과 1927년 4월 1일 경상북도 관선 도 평의회 의원이 되었다. 이때 그는 ‘당선사례’를 통해 "금반(今般) 경상북도 평의원에 임명되었음은 도민(道民) 첨위(僉位)의 애원해 온 바 금후 일층 도치(道治)에 전력코자 자(玆)에 감히 감사의 뜻을 표하옵니다."라고 하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1932년 조선 유교회 명리원(明理院) 의정(議正)이 되었다. 1930년 6월 3일부터 1933년 6월 2일까지 조선총독부의 자문 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여 그 직위로 활동하면서 연수당 600원을 받았다. 8·15 광복 후인 1949년 3월 18일 박창수 참의와 함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 특위]에 자수하여 체포되었다. 진희규는 1959년 11월 25일 사망하였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