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R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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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 후쿠치야마선 (타카라즈카선) 탈선 사고 JR福知山線 (宝塚線) 脱線 事故 | ||
발생일 | 2005년 4월 25일 오전 9시 18분 | |
유형 | 탈선 | |
사고 원인 | ||
발생 위치 |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쿠쿠치 3쵸메 27 (兵庫県尼崎市久々知3丁目27) | |
인명 피해 | 사망 | 107명 |
부상 | 562명 | |
운영 기관 | ||
사고 열차 | 열차 번호 | 도시샤마에행 쾌속 5418M |
차량 | 207계 전동차 Z16+S18 편성 | |
노선 | 후쿠치야마선 (JR 타카라즈카선) |
1. 개요[편집]
2005년 4월 25일에 발생한 철도사고로 토사 쿠로시오 철도 스쿠모역 충돌사고, JR 우에츠 본선 탈선사고와 함께 일본철도 3대 참사로 불리고 있다. 이 사고로 승객과 승무원 포함 107명이 숨졌고 562명이 부상을 당했다.[1] 외국에서는 아마가사키역 주변에서 일어났다 해서 '아마가사키 탈선 사고(Amagasaki derailment)'라고 한다.
2. 전개[편집]
사고 당일 아침 9시 18분경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에서 7량 편성의 후쿠치야마선 JR 서일본 쾌속 열차가 탈선해 인근 エフュージョン尼崎라는 아파트를 들이받았다. 맨 앞 선두차량은 아예 건물 1층 주차장(필로티) 안으로 들어가서 주차된 오토바이 • 자전거 • 차들과 함께 뭉개졌고 두 번째 차량(2호 차량)은 건물(아파트 모퉁이)에 부딪혀 뭉개지면서 연이어 탈선된 3, 4호 차량들과 나머지 차량들이 밀려들어 짓뭉개졌다. 그로 인해 첫 번째와 두 번째 차량에서만 9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고 열차는 이타미역을 지날 때 정차 위치를 오버런했다. 당초에는 8m 오버런했다고 보고되었으나 실제로는 72m 정도인 것으로 밝혀졌다. 기관사와 차장이 불이익을 두려워해 축소 보고한 것이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기관사가 열차 내 전화 시스템으로 선배였던 차장에게 연락해서 이번 일을 눈감아 달라고 부탁했고 차장은 이 말을 알아듣고 축소 보고했다. 보고를 열차 내 전화로 차장이 하기 전에 맨 뒷칸에서 열차가 제대로 안 서는 바람에 늦었다며 항의한 손님이 있었다고 한다. 오버런 한 것을 제 위치로 되돌리는 과정에서 이미 1분 20초 정도 지연되어 있는 상태였고 열차가 츠카구치역을 통과하여 아마가사키역으로 가는 동안 우측으로 커브를 도는 구간이 있으며[2] 여기는 속도제한이 70km/h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관사는 마음이 조급해졌는지 무려 116km/h의 속도로 사고 구간에 진입하였다.[3] 위험하다고 느꼈는지 급히 비상제동[4]을 시도하였으나 이미 원심력으로 차량은 붕 떠 버린 상태였다.
참고로 위 사진에서 탈선해 아파트에 제일 붙어있는 칸은 2호차다. 1호차는 아예 건물 안까지 밀려들어가 보이지도 않는데 당시 뉴스를 접한 시청자들은 선두에 있던 찌그러진 차량이 2호차인 것을 알고 경악했다고 한다.
선로에서 불과 약 6m 떨어진 곳에는 아파트가 있었는데 선두차량부터 아파트에 충돌하면서 정지했고 편성된 전동차 중 2호차와 3호차가 잭나이프 현상[5]을 일으키면서 아파트에 포개져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4호차와 5호차는 선로에 널브러졌으나 6호차와 7호차는 탈선하지 않았다. 해당 열차가 통근전철이다 보니 승차권을 사면 해당 구간의 아무 전철이나 탈 수 있어 정확한 탑승인원은 파악하기 어려우나 700명 정도가 승차하고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당시 반대편 선로에는 특급 열차[6]가 진입하고 있었는데 사고를 목격한 한 여성(47세)이 순간 기지를 발휘해 철도 건널목의 비상 버튼을 눌러 마주오던 특급 열차를 정지시켰다. 자칫 발생할 뻔한 2차 참사를 방지한 공을 인정하여 일본 정부는 이 여성에게 홍수포장(紅綬褒章 こうじゅほうしょう, Medal with Red Ribbon)을 수여하였다.
또 사고 현장인 아파트 근처에 있는 日本スピンドル製造株式会社[7]라는 회사 직원들이 소방관들의 구조 활동에 도움을 줘서 이 회사 대표도 홍수포장을 받았다.
사고 열차는 이타미역을 지날 때 정차 위치를 오버런했다. 당초에는 8m 오버런했다고 보고되었으나 실제로는 72m 정도인 것으로 밝혀졌다. 기관사와 차장이 불이익을 두려워해 축소 보고한 것이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기관사가 열차 내 전화 시스템으로 선배였던 차장에게 연락해서 이번 일을 눈감아 달라고 부탁했고 차장은 이 말을 알아듣고 축소 보고했다. 보고를 열차 내 전화로 차장이 하기 전에 맨 뒷칸에서 열차가 제대로 안 서는 바람에 늦었다며 항의한 손님이 있었다고 한다. 오버런 한 것을 제 위치로 되돌리는 과정에서 이미 1분 20초 정도 지연되어 있는 상태였고 열차가 츠카구치역을 통과하여 아마가사키역으로 가는 동안 우측으로 커브를 도는 구간이 있으며[2] 여기는 속도제한이 70km/h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관사는 마음이 조급해졌는지 무려 116km/h의 속도로 사고 구간에 진입하였다.[3] 위험하다고 느꼈는지 급히 비상제동[4]을 시도하였으나 이미 원심력으로 차량은 붕 떠 버린 상태였다.
참고로 위 사진에서 탈선해 아파트에 제일 붙어있는 칸은 2호차다. 1호차는 아예 건물 안까지 밀려들어가 보이지도 않는데 당시 뉴스를 접한 시청자들은 선두에 있던 찌그러진 차량이 2호차인 것을 알고 경악했다고 한다.
선로에서 불과 약 6m 떨어진 곳에는 아파트가 있었는데 선두차량부터 아파트에 충돌하면서 정지했고 편성된 전동차 중 2호차와 3호차가 잭나이프 현상[5]을 일으키면서 아파트에 포개져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4호차와 5호차는 선로에 널브러졌으나 6호차와 7호차는 탈선하지 않았다. 해당 열차가 통근전철이다 보니 승차권을 사면 해당 구간의 아무 전철이나 탈 수 있어 정확한 탑승인원은 파악하기 어려우나 700명 정도가 승차하고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당시 반대편 선로에는 특급 열차[6]가 진입하고 있었는데 사고를 목격한 한 여성(47세)이 순간 기지를 발휘해 철도 건널목의 비상 버튼을 눌러 마주오던 특급 열차를 정지시켰다. 자칫 발생할 뻔한 2차 참사를 방지한 공을 인정하여 일본 정부는 이 여성에게 홍수포장(紅綬褒章 こうじゅほうしょう, Medal with Red Ribbon)을 수여하였다.
또 사고 현장인 아파트 근처에 있는 日本スピンドル製造株式会社[7]라는 회사 직원들이 소방관들의 구조 활동에 도움을 줘서 이 회사 대표도 홍수포장을 받았다.
3. 원인[편집]
우선 사고 구간은 곡선 반경 300m의 급곡선으로 본래에는 없었던 구간이지만 1997년 JR 도자이선의 개통과 함께 직결 운행 및 JR 고베선 아마가사키역과의 연계를 위해[8] 부득이하게 이설되어 급곡선 구간이 만들어졌다.
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나왔지만 시뮬레이션 결과 사고 구간의 한계속도는 106km/h인 것으로 드러났다. 처음에는 133km/h이 넘어가면 차량이 전복된다고 발표하였으나 이것은 승객이 아예 탑승하지 않은 공차 상태의 기준이고 실제로 승객이 탑승한 경우는 이보다 훨씬 위험하다. 더군다나 입석까지 흔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하다. 결국 과속으로 인한 탈선 사고였다. 해당 구간의 ATS 장비가 구형이라 참사를 막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JR그룹 각 사는 제한속도 초과를 막을 수 있는 ATS-P나 ATC 같은 유형의 신호시스템을 차근차근 적용 중이었으나 당시 후쿠치야마선은 ATS-P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된 열차의 경량화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 열차는 통상적으로 일정한 충돌강도를 갖추도록 되어 있고 물론 해당 207계 전동차는 그 조건을 만족했지만 전면 충돌강도에 비해 측면 충돌강도가 미흡하여 사고를 키웠다는 이야기다.
이렇든 직접적인 원인은 기관사의 과실이지만 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과도한 경쟁과 JR 서일본의 후진적인 사내 문화가 있다.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고베(神戸)에서 각 한 글자씩 따 온 이른바 케이한신(京阪神) 지역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철도 회사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곳이다. 주요한 도시 구간마다 어김없이 두세 개의 회사가 역 짓고 선로 깔아서 열차 돌리는 트랜스포트 타이쿤이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동네다.
이러한 경쟁은 물론 철도 서비스의 향상을 가져오기도 했다. 예컨대 JR 서일본은 고속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속달형 전철인 신쾌속은 통근용 전철인데도 최고 속도가 130km/h며 표정 속도도 85.2km/h에 달한다. 한국의 용산-춘천 경춘선 ITX-청춘 표정 속도에 맞먹는다. JR 서일본의 이런 고속화에 맞서 사철은 JR에 비해 더 저렴한 운임을 내세워 경쟁하고 있다. 철도 운행의 정시성도 칼같이 지켜져서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JR 서일본이 받던 찬사의 이면에는 열차 운행시간을 초 단위로 점검하며 진행된 기관사들에 대한 압박이 있었고 이것이 사고의 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도 드러나면서 크게 비판받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고 기관사인 다카미 류지로(高見隆二郞)는 23세였던 젊은이로, 경력이 11개월밖에 되지 않는 초보였다. 비용을 절감[9]하기 위해 충분히 숙련되지 않은 초보 기관사를 현업에 배치하였고 그는 열차 조작에 미숙한 나머지 오버런을 범하고 열차를 지연시키고 말았다. JR 서일본은 이러한 경우 '일근교육(日勤教育)'을 부과하곤 했는데 그게 교육이라기보다는 군기훈련에 가까운 형태여서 기관사들은 대단한 부담감을 느꼈다고 한다. 일근교육을 받을 때는 근무조에서 제외되어 업무시간 내내 교육만 받는데 그 교육이라는 게 남들 눈에 잘 띄는 곳에서 리포트 쓰기, 사규 옮겨쓰기, 제초·청소[10], 상사 면담[11]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실상 징벌적 조치다. 이미 2000년에 일근교육 때문에 자살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결국 지연된 열차를 회복하고자 무리한 운전을 하다가 참변을 불렀다.
뿐만 아니라 JR 서일본은 제대로 숙달되지 않은 사람을 통근시간대 기관사로 배치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을 받았다. 통근시간대는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많이 몰리고 연착이 발생하면 많은 사람들이 지각하는 사고가 터지기 때문에 각 철도 회사에서 더욱 신경쓰는 시간대라 통근시간대의 열차 운전에는 충분히 숙련된 베테랑을 투입하며[12] 신참 기관사는 사람이 적은 새벽이나 낮 시간대에 투입하거나 어느 시간대에 투입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고강도로 숙달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황이 비슷했던 JR 동일본을 예로 들면 이를 잘 알고 이미 1990년대부터 안전 관리와 기관사 및 차장 교육을 철저히 진행하고 있었다. 출퇴근 시간엔 보조 기관사로 일하면서 주기관사 옆에서 보고 배우는 식으로 연수를 진행하고 승객이 많지 않은 낮 시간대에 운전실습을 시키고[13] 운전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정기관사로 승진하지도 못하고 실습기관사로 계속 배치하도록 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가하였다. 그러나 JR 서일본은 고작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안전 관리를 소홀히 하고 승차 인원이 많아 가장 신경써야 하는 출퇴근 시간대에도 경력이 안 되는 신참 기관사를 단독으로 운전대를 잡도록 투입하는 등 교육도 제대로 안 했다. 이 점이 밝혀지면서 JR 서일본은 욕을 엄청나게 먹었다.
또한 당시 JR 서일본은 속달성만을 고려해 여유시간이 없는 열차 시각표를 짜서, 만성적인 지연을 초래하고 그 지연을 회복하기 위해 기관사에게 과속을 조장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당시 JR 서일본은 아예 여유시간 없이 열차 시각표를 짜는 것을 경영방침으로 삼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2003년 12월에 후쿠치야마선 쾌속열차가 나카야마데라역에 추가정차하게 되었음에도 쾌속열차의 소요시간은 전혀 변함없었다. 이는 열차의 속도향상이나 가감속 개선 등으로 이룬 게 아니라 여유시간을 줄여서 달성한 것이었다.
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나왔지만 시뮬레이션 결과 사고 구간의 한계속도는 106km/h인 것으로 드러났다. 처음에는 133km/h이 넘어가면 차량이 전복된다고 발표하였으나 이것은 승객이 아예 탑승하지 않은 공차 상태의 기준이고 실제로 승객이 탑승한 경우는 이보다 훨씬 위험하다. 더군다나 입석까지 흔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하다. 결국 과속으로 인한 탈선 사고였다. 해당 구간의 ATS 장비가 구형이라 참사를 막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JR그룹 각 사는 제한속도 초과를 막을 수 있는 ATS-P나 ATC 같은 유형의 신호시스템을 차근차근 적용 중이었으나 당시 후쿠치야마선은 ATS-P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된 열차의 경량화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 열차는 통상적으로 일정한 충돌강도를 갖추도록 되어 있고 물론 해당 207계 전동차는 그 조건을 만족했지만 전면 충돌강도에 비해 측면 충돌강도가 미흡하여 사고를 키웠다는 이야기다.
이렇든 직접적인 원인은 기관사의 과실이지만 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과도한 경쟁과 JR 서일본의 후진적인 사내 문화가 있다.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고베(神戸)에서 각 한 글자씩 따 온 이른바 케이한신(京阪神) 지역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철도 회사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곳이다. 주요한 도시 구간마다 어김없이 두세 개의 회사가 역 짓고 선로 깔아서 열차 돌리는 트랜스포트 타이쿤이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동네다.
이러한 경쟁은 물론 철도 서비스의 향상을 가져오기도 했다. 예컨대 JR 서일본은 고속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속달형 전철인 신쾌속은 통근용 전철인데도 최고 속도가 130km/h며 표정 속도도 85.2km/h에 달한다. 한국의 용산-춘천 경춘선 ITX-청춘 표정 속도에 맞먹는다. JR 서일본의 이런 고속화에 맞서 사철은 JR에 비해 더 저렴한 운임을 내세워 경쟁하고 있다. 철도 운행의 정시성도 칼같이 지켜져서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JR 서일본이 받던 찬사의 이면에는 열차 운행시간을 초 단위로 점검하며 진행된 기관사들에 대한 압박이 있었고 이것이 사고의 원인 중 하나라는 사실도 드러나면서 크게 비판받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고 기관사인 다카미 류지로(高見隆二郞)는 23세였던 젊은이로, 경력이 11개월밖에 되지 않는 초보였다. 비용을 절감[9]하기 위해 충분히 숙련되지 않은 초보 기관사를 현업에 배치하였고 그는 열차 조작에 미숙한 나머지 오버런을 범하고 열차를 지연시키고 말았다. JR 서일본은 이러한 경우 '일근교육(日勤教育)'을 부과하곤 했는데 그게 교육이라기보다는 군기훈련에 가까운 형태여서 기관사들은 대단한 부담감을 느꼈다고 한다. 일근교육을 받을 때는 근무조에서 제외되어 업무시간 내내 교육만 받는데 그 교육이라는 게 남들 눈에 잘 띄는 곳에서 리포트 쓰기, 사규 옮겨쓰기, 제초·청소[10], 상사 면담[11]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실상 징벌적 조치다. 이미 2000년에 일근교육 때문에 자살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결국 지연된 열차를 회복하고자 무리한 운전을 하다가 참변을 불렀다.
뿐만 아니라 JR 서일본은 제대로 숙달되지 않은 사람을 통근시간대 기관사로 배치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을 받았다. 통근시간대는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많이 몰리고 연착이 발생하면 많은 사람들이 지각하는 사고가 터지기 때문에 각 철도 회사에서 더욱 신경쓰는 시간대라 통근시간대의 열차 운전에는 충분히 숙련된 베테랑을 투입하며[12] 신참 기관사는 사람이 적은 새벽이나 낮 시간대에 투입하거나 어느 시간대에 투입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고강도로 숙달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황이 비슷했던 JR 동일본을 예로 들면 이를 잘 알고 이미 1990년대부터 안전 관리와 기관사 및 차장 교육을 철저히 진행하고 있었다. 출퇴근 시간엔 보조 기관사로 일하면서 주기관사 옆에서 보고 배우는 식으로 연수를 진행하고 승객이 많지 않은 낮 시간대에 운전실습을 시키고[13] 운전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정기관사로 승진하지도 못하고 실습기관사로 계속 배치하도록 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가하였다. 그러나 JR 서일본은 고작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안전 관리를 소홀히 하고 승차 인원이 많아 가장 신경써야 하는 출퇴근 시간대에도 경력이 안 되는 신참 기관사를 단독으로 운전대를 잡도록 투입하는 등 교육도 제대로 안 했다. 이 점이 밝혀지면서 JR 서일본은 욕을 엄청나게 먹었다.
또한 당시 JR 서일본은 속달성만을 고려해 여유시간이 없는 열차 시각표를 짜서, 만성적인 지연을 초래하고 그 지연을 회복하기 위해 기관사에게 과속을 조장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당시 JR 서일본은 아예 여유시간 없이 열차 시각표를 짜는 것을 경영방침으로 삼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2003년 12월에 후쿠치야마선 쾌속열차가 나카야마데라역에 추가정차하게 되었음에도 쾌속열차의 소요시간은 전혀 변함없었다. 이는 열차의 속도향상이나 가감속 개선 등으로 이룬 게 아니라 여유시간을 줄여서 달성한 것이었다.
[1] 사망자 가운데 재일 한국인인 전칠영(당시 35세 여성)이 있었고 부상자 중에는 양창원(당시 50세 남성)이 있었으며 이 참변의 장본인인 20대 초반의 기관사도 이 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했다.[2] 이 구간을 통과한 뒤, 고가구간에서 한 번 더 드리프트를 하게 되면 아마가사키 역에 들어올 수 있다.[3] 예전에 100m 정도 오버런해서 재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 조급해졌을 것이다.[4] 비상제동이 아닌 일반제동이었다는 설도 있다. '회사 내에서 비상제동 사용 시 재교육이라는 정책이 있었기 때문'. 이 경우 충격으로 인해 제동간이 비상제동으로 전환되었다는 설이다.[5] 선두차량에 급제동이 걸렸을 때 뒤따라오는 차량들이 마치 잭나이프의 칼날처럼 꺾이는 현상.[6] 신오사카발 키노사키온센(城崎温泉)행 키타킨키 3호(北近畿3号)[7] 정밀제조기기, 집진기, 에어샤워룸 등 제조하는 업체.[8] 즉, 금정역과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9] 기관사도 경력이나 근속년수, 직급에 따른 임금 차이가 당연히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경력이 많은 즉 높은 호봉의 숙련된 기관사일수록 임금이 올라간다.[10] 선로에 떨어진 비둘기 똥을 솔로 닦아내는 작업[11] 말이 좋아 면담이지 사실상 쌍욕과 폭언이다.[12] 이때 옆에서 보고 배우라고 초보 기관사를 동승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나마 이것도 정말 피크일 때는 운전에 방해된다고 하지 않는다.[13] 연습시킬 때도 옆에 관리하는 보조 기관사를 1~2명씩 꼭 배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