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말의 군벌 이외의 동탁에 대한 내용은 동탁(동음이의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후한의 상국, 태사, 태위 동탁 董卓 | |
이름 | |
자 | 중영 仲穎 |
출생 | 139년 추정 |
사망 | |
최종 관직 | |
작위 | 태향후(斄鄕侯) → 미후(郿侯) |
가족 |
1. 개요[편집]
후한 말의 군벌, 정치가.
삼국지의 시작을 연 악인의 대명사면서 동시에 근대까지 모든 중국 군벌들의 원형이다.[6] 망탁조의의 멤버 중 하나였으며 장양, 하진과 더불어 소설《삼국지연의》의 초반 주요 인물이다. 낙양으로 쳐들어와 황제 소제를 폐위하고 꼭두각시 헌제를 옹립해 국정을 농단했다. 반동탁연합이 쳐들어오자 수도인 낙양을 불태우고 헌제를 데리고 장안을 새 도읍으로 삼았다. 자중지란에 빠진 연합군이 와해되면서 기사회생하는 듯 했으나 192년 왕윤과 여포에게 살해된다.
현대 중국어로는 둥줘(Dong Zhuo)로 읽지만, 후한 당시에는 상고한어로 대략 tongʔ trewk(똥 뜨레욱), toongʔ rteewg(똥 르떼욱) 정도로 읽혔을 것이다.
삼국지의 시작을 연 악인의 대명사면서 동시에 근대까지 모든 중국 군벌들의 원형이다.[6] 망탁조의의 멤버 중 하나였으며 장양, 하진과 더불어 소설《삼국지연의》의 초반 주요 인물이다. 낙양으로 쳐들어와 황제 소제를 폐위하고 꼭두각시 헌제를 옹립해 국정을 농단했다. 반동탁연합이 쳐들어오자 수도인 낙양을 불태우고 헌제를 데리고 장안을 새 도읍으로 삼았다. 자중지란에 빠진 연합군이 와해되면서 기사회생하는 듯 했으나 192년 왕윤과 여포에게 살해된다.
현대 중국어로는 둥줘(Dong Zhuo)로 읽지만, 후한 당시에는 상고한어로 대략 tongʔ trewk(똥 뜨레욱), toongʔ rteewg(똥 르떼욱) 정도로 읽혔을 것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양주(涼州)[7] 농서군 임조현 출신. 거칠고 지략이 있었으며, 덩치가 크고 대단한 완력을 가졌고 궁마술에 능했는데 이 때문인지 그는 화살집 두 개를 차고 좌우 자유자재로 활을 쏠 수 있었다고 한다.
젊어서부터 호방하고 보스 기질이 있어서 주변에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강족의 유력자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살 때 강족 무리가 찾아오자 밭을 갈던 소를 잡아서 연회를 베풀었기에 강족들이 감격했다는 일화도 있다.[8]
환제 말엽에 우림랑으로 천거되어 병주에서 전공을 세워 병주자사가 되었다. 그리고 포상으로 받은 전리품들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인심 장악에 뛰어난 기질을 가졌다. 이후로도 동탁은 북방 이민족 토벌에 자주 전과를 올려 승진을 거듭했으며 하동 태수로 재임한다.
젊어서부터 호방하고 보스 기질이 있어서 주변에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강족의 유력자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살 때 강족 무리가 찾아오자 밭을 갈던 소를 잡아서 연회를 베풀었기에 강족들이 감격했다는 일화도 있다.[8]
환제 말엽에 우림랑으로 천거되어 병주에서 전공을 세워 병주자사가 되었다. 그리고 포상으로 받은 전리품들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인심 장악에 뛰어난 기질을 가졌다. 이후로도 동탁은 북방 이민족 토벌에 자주 전과를 올려 승진을 거듭했으며 하동 태수로 재임한다.
2.2. 황건적의 난[편집]
하동 태수로 재임하던 중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184년, 황건적을 상대로 승전을 거듭하던 노식이 좌풍(左豊)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서 소환당하고 동탁이 대신 동중랑장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황건적에게 패배하여 면직되었다. 이를 두고 일부러 대충 싸웠다는 말도 있으나 본인이 이에 대해 매우 속상해했다는 기록도 나오므로 그냥 진 것이 맞는 듯하다.
184년, 황건적을 상대로 승전을 거듭하던 노식이 좌풍(左豊)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서 소환당하고 동탁이 대신 동중랑장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황건적에게 패배하여 면직되었다. 이를 두고 일부러 대충 싸웠다는 말도 있으나 본인이 이에 대해 매우 속상해했다는 기록도 나오므로 그냥 진 것이 맞는 듯하다.
군대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듣게 되지만 불복했다. 병사들이 자신을 따른다는 이유를 내세웠는데, 실제로도 동탁의 핵심 부하들은 그의 사후까지도 배신을 하지 않았으므로 거짓말로 볼 수는 없다. 고대의 변경 지방과 중앙은 환경적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부하들의 입장에서는 중앙 지휘관들의 소모품 보다는, 동향에서 함께 내려온 동탁을 계속 따를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 있다.
2.3. 변장 · 한수의 난과 복귀[편집]
그러나 184년 동탁이 면직된 바로 그해 겨울에 한수가 같은 마을 사람인 변장과 같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185년 봄에는 장안이 있는 삼보지역까지 침범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한나라 정부도 좌거기장군 황보숭에게 진압명령을 내리는데 동탁도 복직되어 중랑장으로 황보숭을 따라 한수 진압작전을 진행했다. 하지만 황보숭이 뇌물을 바치지 않자 조정에서는 7월에 황보숭을 해임하고, 8월에 사공이던 장온을 거기장군으로 임명해 반란을 진압하는데, 이때 동탁은 파로장군으로 승진한다.
삼국지 오서 손견전에 따르면 장온은 조서를 보내 부하 동탁을 장안으로 불렀으나 동탁은 늑장을 피우며 한참만에야 도착했다. 특히 상관인 장온을 우습게 보아 불손하기 짝이 없게 대하였다. 이때 장온군에서 참군사로 종군하고 있던 손견은 동탁이 평소 무례하고 윗사람을 가볍게 여기며, 반란 진압을 맡고도 몇 년이 지나도록 공을 세우지 못한 데다, 군율을 무시하고도 오히려 뻔뻔하게 행동하니 절대 살려두면 안 된다고 장온에게 진언했지만, 장온은 강족과 동탁의 관계를 들어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11]
동탁은 장온과 같이 미양에서 변장과 한수를 방어했지만 고전을 거듭하였는데 11월 동탁이 포홍과 같이 분전하여 변장 등을 격퇴하였다. 이후 동탁은 장온의 명령으로 3만의 병력을 받아 선령의 강족을 정벌하지만 변장과 한수를 추격하러간 주신의 군대가 유중성에서 보급로가 끊기는 바람에 패퇴하였고[12] 결국 동탁도 선령강에서 강족에게 포위당한다. 이에 동탁은 식량이 떨어지지만 물고기를 잡는 척하면서 빠져나가고, 도중에 하천을 막아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를 통과시키고 나서 제방을 무너뜨렸다. 이에 강족은 물이 깊어 추격하지 못해 동탁은 상처없이 무사히 귀환했다. 조정이 보낸 여섯 군 중 다섯 군은 모두 패배했지만 오직 동탁의 군대만이 무사하였다. 이 공로로 동탁은 전장군 태향후로 봉해지고 식읍 1,000호를 받는다.
비록 동탁과 군대는 무사히 퇴각했지만, 한수의 반란군은 건재했고 186년 겨울에는 동료인 변장과 북궁백옥과 이문후를 죽여 세력을 통합해 그 세력이 10여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이 군대로 농서지역을 공격한다. 187년 4월에는 이상(李相)에 마등, 왕국마저 합세하고 양주의 자사 경비의 군대를 패퇴시키고[13] 한양군을 공격해 태수 부섭을 죽일 정도로 한수의 반란군은 그 세력이 강해진다.
188년 11월에는 한수의 부하 왕국이 진창(陳倉)을 포위하자 이에 한나라 정부는 동탁을 전장군으로 임명하고 좌장군 황보숭과 함께 한수 반란군의 토벌을 지시한다. 189년 2월, 왕국 등이 진창에서 후퇴하자[14] 이를 추격해 크게 승리한다.
황보숭 열전에 따르면 동탁은 진창으로 바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황보숭은 진창이 충분히 버틸 수 있다며 반군이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고 한다. 그리고 황보숭의 말대로 왕국의 군대가 물러가자 황보숭이 때를 놓치지 않고 추격하려 하였다. 동탁이 이번에는 궁지에 몰린 적을 치는 것은 위험하다며 반대하자 그의 부대를 후방에 남겨둔 채 황보숭만이 진격하여 만여 명을 베고 반군을 소탕하였다. 동탁은 몹시 부끄럽고 한스러워 황보숭을 미워하였다고 한다. 이후 동탁은 장온, 황보숭에게 원한을 품어 훗날 정권을 잡자, 장온을 원술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형을 부과해 죽게 하였는데, 황보숭은 아들 황보견수의 간청으로 살려주었다.
삼국지 오서 손견전에 따르면 장온은 조서를 보내 부하 동탁을 장안으로 불렀으나 동탁은 늑장을 피우며 한참만에야 도착했다. 특히 상관인 장온을 우습게 보아 불손하기 짝이 없게 대하였다. 이때 장온군에서 참군사로 종군하고 있던 손견은 동탁이 평소 무례하고 윗사람을 가볍게 여기며, 반란 진압을 맡고도 몇 년이 지나도록 공을 세우지 못한 데다, 군율을 무시하고도 오히려 뻔뻔하게 행동하니 절대 살려두면 안 된다고 장온에게 진언했지만, 장온은 강족과 동탁의 관계를 들어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11]
동탁은 장온과 같이 미양에서 변장과 한수를 방어했지만 고전을 거듭하였는데 11월 동탁이 포홍과 같이 분전하여 변장 등을 격퇴하였다. 이후 동탁은 장온의 명령으로 3만의 병력을 받아 선령의 강족을 정벌하지만 변장과 한수를 추격하러간 주신의 군대가 유중성에서 보급로가 끊기는 바람에 패퇴하였고[12] 결국 동탁도 선령강에서 강족에게 포위당한다. 이에 동탁은 식량이 떨어지지만 물고기를 잡는 척하면서 빠져나가고, 도중에 하천을 막아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를 통과시키고 나서 제방을 무너뜨렸다. 이에 강족은 물이 깊어 추격하지 못해 동탁은 상처없이 무사히 귀환했다. 조정이 보낸 여섯 군 중 다섯 군은 모두 패배했지만 오직 동탁의 군대만이 무사하였다. 이 공로로 동탁은 전장군 태향후로 봉해지고 식읍 1,000호를 받는다.
비록 동탁과 군대는 무사히 퇴각했지만, 한수의 반란군은 건재했고 186년 겨울에는 동료인 변장과 북궁백옥과 이문후를 죽여 세력을 통합해 그 세력이 10여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이 군대로 농서지역을 공격한다. 187년 4월에는 이상(李相)에 마등, 왕국마저 합세하고 양주의 자사 경비의 군대를 패퇴시키고[13] 한양군을 공격해 태수 부섭을 죽일 정도로 한수의 반란군은 그 세력이 강해진다.
188년 11월에는 한수의 부하 왕국이 진창(陳倉)을 포위하자 이에 한나라 정부는 동탁을 전장군으로 임명하고 좌장군 황보숭과 함께 한수 반란군의 토벌을 지시한다. 189년 2월, 왕국 등이 진창에서 후퇴하자[14] 이를 추격해 크게 승리한다.
황보숭 열전에 따르면 동탁은 진창으로 바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황보숭은 진창이 충분히 버틸 수 있다며 반군이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고 한다. 그리고 황보숭의 말대로 왕국의 군대가 물러가자 황보숭이 때를 놓치지 않고 추격하려 하였다. 동탁이 이번에는 궁지에 몰린 적을 치는 것은 위험하다며 반대하자 그의 부대를 후방에 남겨둔 채 황보숭만이 진격하여 만여 명을 베고 반군을 소탕하였다. 동탁은 몹시 부끄럽고 한스러워 황보숭을 미워하였다고 한다. 이후 동탁은 장온, 황보숭에게 원한을 품어 훗날 정권을 잡자, 장온을 원술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형을 부과해 죽게 하였는데, 황보숭은 아들 황보견수의 간청으로 살려주었다.
2.4. 낙양 입성[편집]
진창에서의 승리 후 동탁은 군대를 사병화하며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간다. 상관을 무시했으므로 조정에서는 동탁을 두려워했고 이에 189년에는 동탁을 소부로 삼아 중앙으로 부르고 군권을 박탈하도록 시도했지만 동탁은 지휘하는 군대의 생활고와 부하들이 자기를 너무 좋아해 보내주지 않는다며 거부한다. 이에 대안으로 같은 해 동탁을 병주 목으로 임명한 뒤 동탁의 군대를 좌장군 황보숭에게 맡기도록 지시한다. 그러나 동탁은 자신이 통솔하는 병력을 병주로 데려가겠다는 상소를 올리면서 사실상 거부한다.
그리고 얼마 뒤인 189년 4월 영제가 사망하고 소제가 즉위하자, 소제의 외삼촌인 대장군 하진은 십상시 제거를 계획한다. 이때 태후 하씨의 반대로 십상시 숙청이 번번이 실패하자 원소 등이 위해 지방의 장수들을 소집해 낙양에서 무력시위를 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진림의 반대에도[15] 하진이 이 계획을 따르고 여기에 동탁이 참여해 군대를 낙양으로 진군시킨다. 그러나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기 직전 밤에 십상시의 난으로 인해 하진이 죽임을 당하자 하진 세력의 반격으로 궁궐이 불타고 황제와 진류왕이 실종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리고 동탁은 불타는 낙양을 보고는 군대를 강행군시켜 하루 만에 낙양에 도착한다. 그리고 북망에서 소제를 만난다. 이때 소제는 동탁과 그의 군대를 보자 겁에 질려 울었고, 반대로 진류왕 유협은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막힘없이 대화하였다고 한다.[16] 또한 동탁은 유협의 보호자가 자신과 같은 동씨인 효인황후 동씨였다는 점을 상기해내고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황제로 삼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 당시 영사황후 하씨와 하진의 잔류세력들이 보호자로 있던 소제와 달리 유협에게는 아무런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능력이 있건말건 동탁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기에 훨씬 용이했으며, 사실 동탁과 효인황후는 별 상관없는 사람이지만[17] 아무튼 같은 성씨라는 것은 지금과 달리 그 의미가 굉장히 컸기 때문에 자신이 전권을 틀어쥐는 데 약간이나마 명분을 세울 수가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인 189년 4월 영제가 사망하고 소제가 즉위하자, 소제의 외삼촌인 대장군 하진은 십상시 제거를 계획한다. 이때 태후 하씨의 반대로 십상시 숙청이 번번이 실패하자 원소 등이 위해 지방의 장수들을 소집해 낙양에서 무력시위를 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진림의 반대에도[15] 하진이 이 계획을 따르고 여기에 동탁이 참여해 군대를 낙양으로 진군시킨다. 그러나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기 직전 밤에 십상시의 난으로 인해 하진이 죽임을 당하자 하진 세력의 반격으로 궁궐이 불타고 황제와 진류왕이 실종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리고 동탁은 불타는 낙양을 보고는 군대를 강행군시켜 하루 만에 낙양에 도착한다. 그리고 북망에서 소제를 만난다. 이때 소제는 동탁과 그의 군대를 보자 겁에 질려 울었고, 반대로 진류왕 유협은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막힘없이 대화하였다고 한다.[16] 또한 동탁은 유협의 보호자가 자신과 같은 동씨인 효인황후 동씨였다는 점을 상기해내고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황제로 삼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 당시 영사황후 하씨와 하진의 잔류세력들이 보호자로 있던 소제와 달리 유협에게는 아무런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능력이 있건말건 동탁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기에 훨씬 용이했으며, 사실 동탁과 효인황후는 별 상관없는 사람이지만[17] 아무튼 같은 성씨라는 것은 지금과 달리 그 의미가 굉장히 컸기 때문에 자신이 전권을 틀어쥐는 데 약간이나마 명분을 세울 수가 있었다.
2.5. 정권 장악[편집]
동탁은 황제 소제의 신변을 장악하긴 했지만 동탁의 병사는 3천명 정도로 원소 등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크게 강할 것도 없었던 데다 동탁 본인을 포함해 군사들 대부분이 변방 촌놈들이라 위엄이라곤 전혀 없었고 사람들이 무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동탁이 꾀를 내서 4~5일 간격으로 밤에 네 성문에서 밖으로 군사를 보내 다음 날 아침 군기와 북을 가지고 입성시켜 서쪽에서 대군이 계속 도착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더불어 십상시의 난 때 살해당한 대장군 하진과 거기장군 하묘 형제가 이끌던 낙양 중앙군을 모두 찾아 자신에게 귀속시킨다. 이로써 동탁은 낙양의 군사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병주 자사이자 집금오[18] 정원(丁原)이 위협이 되자 정원 부하 가운데 주부였던 여포를 회유해 정원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고[19] 정원의 군대마저 흡수하여 엄청난 세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원소 등 경쟁자들은 데꿀멍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병주 자사이자 집금오[18] 정원(丁原)이 위협이 되자 정원 부하 가운데 주부였던 여포를 회유해 정원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고[19] 정원의 군대마저 흡수하여 엄청난 세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원소 등 경쟁자들은 데꿀멍하게 된다.
2.6. 소제 폐위와 폭정[편집]
정권을 장악하자 동탁은 가뭄을 이유로 사공 유홍을 면직시키고 대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자마자 태위로 승진한다. 그 뒤 동탁은 한 달도 안 되어 소제를 폐위하여 홍농왕으로 강등시킨 뒤 이틀 뒤 곧바로 이유[20]를 시켜서 소제의 모후인 영사황후 하씨를 함께 시해[21][22]하고 진류왕을 옹립시켰다.
동탁의 포악함이 극심해진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군대를 이끌고 순찰 중에 양성에서 주민들이 지신제를 지내는 것을 보자 거기에 있던 남자들은 도적떼라고 누명씌워서 모조리 학살하고, 여자와 재산은 탈취했다.[23] 그리고 귀가해서는 "도적떼들을 소탕하고 오는 길이다."라고 쌩구라를 쳤다. 심지어 궁녀나 공주에게까지 희롱을 하며 함부로 폭행을 가하거나 강간까지 했다. 또 영사황후 하씨의 시신을 영제가 묻힌 문릉에 묻었는데, 그 틈을 타서 문릉에 있던 부장품과 보물들을 모두 도굴했다. 이와 같은 만행들을 참다 못한 오부가 동탁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몄지만, 실패하여 처형되고 만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도 왕윤의 칠보도(七寶刀)를 빌려 동탁 암살을 모의하다가 실패하여 달아났다는 일화가 나오지만 이는 정사에 없는 연의의 창작이다.
또한 하내 태수 왕광도 이에 반발하여 수도 근방에 병력을 배치한 뒤 동탁을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자 동탁은 자신의 병력을 강을 건너는 것으로 눈속임한 뒤 몰래 정예병을 보내 왕광군의 배후군을 급습하고 대파하여 거의 몰살시켰다.
동탁의 포악함이 극심해진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군대를 이끌고 순찰 중에 양성에서 주민들이 지신제를 지내는 것을 보자 거기에 있던 남자들은 도적떼라고 누명씌워서 모조리 학살하고, 여자와 재산은 탈취했다.[23] 그리고 귀가해서는 "도적떼들을 소탕하고 오는 길이다."라고 쌩구라를 쳤다. 심지어 궁녀나 공주에게까지 희롱을 하며 함부로 폭행을 가하거나 강간까지 했다. 또 영사황후 하씨의 시신을 영제가 묻힌 문릉에 묻었는데, 그 틈을 타서 문릉에 있던 부장품과 보물들을 모두 도굴했다. 이와 같은 만행들을 참다 못한 오부가 동탁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몄지만, 실패하여 처형되고 만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도 왕윤의 칠보도(七寶刀)를 빌려 동탁 암살을 모의하다가 실패하여 달아났다는 일화가 나오지만 이는 정사에 없는 연의의 창작이다.
또한 하내 태수 왕광도 이에 반발하여 수도 근방에 병력을 배치한 뒤 동탁을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자 동탁은 자신의 병력을 강을 건너는 것으로 눈속임한 뒤 몰래 정예병을 보내 왕광군의 배후군을 급습하고 대파하여 거의 몰살시켰다.
2.7. 동탁 토벌전[편집]
그러나 190년, 각지의 제후가 원소(袁紹)를 맹주로 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조직하였다.
안 그래도 황건적이었던 곽태(郭太) 등의 백파적이 봉기하여 그 규모만 자그마치 10여만 명이었는데, 반동탁 연합군까지 일어나자 동탁은 매우 난감해졌다. 동탁은 화풀이로 한복(韓馥), 유대(劉岱), 공주(孔伷), 장막(張邈) 등의 제후들을 천거했던 주비(周毖)와 오경(伍瓊), 원소의 숙부인 태부(太傅) 원외(袁畏)와 원술의 형인 태복(太僕) 원기(袁基) 두 집안 사람 50여 명을 잡아 죽였다.
반동탁 연합군은 막상 모여놓고서는 동탁을 치는 것을 꺼려 지지부진했다. 조조, 포신 등이 그나마 동탁을 치러 나가봤지만, 동탁은 에이스 카드 서영을 꺼내어 조조와 포신을 털어버렸다. 한편 손견도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고 원술 휘하로 들어가는 형식을 취해 191년에 하남까지 이르렀으나, 손견도 서영에게 크게 패하고 간신히 군대를 수습하였다.
동탁은 손견을 마저 몰아내기 위해 호진과 여포를 파견해 손견이 있는 양인성을 공격했으나 호진과 여포 등의 반목으로 인해 실패하였으며, 오히려 원술의 든든한 물자지원을 등에 업은 손견의 반격을 받아 패하고 도위 화웅 등이 전사했다. 참고로 당시 원술이 웅거한 남양군은 광무제가 그곳에서 거병한 이래, 성세에는 36개 현 약 36만 호 194만 명의 인구를 거느린 거대 권역이었다. 낙양이 있는 수도권 하남군이 성시에 22개 현 약 28만 호 174만 명이었으며, 당시 인구가 집중된 연주, 예주, 기주 주요 군국 인구가 최대 70만~120만 명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웬만한 군국 2 ~ 3곳이 합쳐진 셈. 심지어 훗날 확인되는 촉한 전체의 인구가(서류상 누락된 인구가 있을 수도 있다고는 하나) 90만 정도였다. 훗날 조조가 형주를 정벌한 후 신야현을 포함한 남양군의 몇몇 현을 분리해 군 단위의 행정구역을 신설하였다.
또한, 영천의 태수 이민이나 예주의 종사 이연처럼 반군의 편에 선 이들을 생포하자 기름솥에 튀겨 죽이며 학살을 벌였다.
동탁은 손견의 용진을 꺼려 이각을 보내 화친을 시도했지만 동탁을 증오하는 손견이 오히려 온갖 굴욕을 주며 동씨 가문을 멸하겠다고 선언까지 하면서 이 화친제의를 거절했다.
손견과의 화친도 실패하자 동탁은 다시 손견과 싸웠지만 털리고 동탁은 손견을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하였다.
안 그래도 황건적이었던 곽태(郭太) 등의 백파적이 봉기하여 그 규모만 자그마치 10여만 명이었는데, 반동탁 연합군까지 일어나자 동탁은 매우 난감해졌다. 동탁은 화풀이로 한복(韓馥), 유대(劉岱), 공주(孔伷), 장막(張邈) 등의 제후들을 천거했던 주비(周毖)와 오경(伍瓊), 원소의 숙부인 태부(太傅) 원외(袁畏)와 원술의 형인 태복(太僕) 원기(袁基) 두 집안 사람 50여 명을 잡아 죽였다.
반동탁 연합군은 막상 모여놓고서는 동탁을 치는 것을 꺼려 지지부진했다. 조조, 포신 등이 그나마 동탁을 치러 나가봤지만, 동탁은 에이스 카드 서영을 꺼내어 조조와 포신을 털어버렸다. 한편 손견도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고 원술 휘하로 들어가는 형식을 취해 191년에 하남까지 이르렀으나, 손견도 서영에게 크게 패하고 간신히 군대를 수습하였다.
동탁은 손견을 마저 몰아내기 위해 호진과 여포를 파견해 손견이 있는 양인성을 공격했으나 호진과 여포 등의 반목으로 인해 실패하였으며, 오히려 원술의 든든한 물자지원을 등에 업은 손견의 반격을 받아 패하고 도위 화웅 등이 전사했다. 참고로 당시 원술이 웅거한 남양군은 광무제가 그곳에서 거병한 이래, 성세에는 36개 현 약 36만 호 194만 명의 인구를 거느린 거대 권역이었다. 낙양이 있는 수도권 하남군이 성시에 22개 현 약 28만 호 174만 명이었으며, 당시 인구가 집중된 연주, 예주, 기주 주요 군국 인구가 최대 70만~120만 명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웬만한 군국 2 ~ 3곳이 합쳐진 셈. 심지어 훗날 확인되는 촉한 전체의 인구가(서류상 누락된 인구가 있을 수도 있다고는 하나) 90만 정도였다. 훗날 조조가 형주를 정벌한 후 신야현을 포함한 남양군의 몇몇 현을 분리해 군 단위의 행정구역을 신설하였다.
또한, 영천의 태수 이민이나 예주의 종사 이연처럼 반군의 편에 선 이들을 생포하자 기름솥에 튀겨 죽이며 학살을 벌였다.
동탁은 손견의 용진을 꺼려 이각을 보내 화친을 시도했지만 동탁을 증오하는 손견이 오히려 온갖 굴욕을 주며 동씨 가문을 멸하겠다고 선언까지 하면서 이 화친제의를 거절했다.
손견과의 화친도 실패하자 동탁은 다시 손견과 싸웠지만 털리고 동탁은 손견을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하였다.
관동의 군대가 여러 차례 패하여 모두 나를 두려워하니, 능히 할 수 있는 게 없소. 오직 손견만이 젊고 외고집인 데다, 자못 사람을 잘 등용하지만,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게 되어서는 나를 기피한다는 것을 알게 했소. 나는 옛날에 주진(主神)과 같이 서정(西征)을 나섰는데, 서정은 변장과 한수를 금성(金城)에서 포위했소. 내가 장온에게 말하여, 거느리는 병사들로 주진의 뒤에 주둔케 하려 했는데, 장온이 듣지 않았소. 내가 이때 그 형세를 상언하였는데, 주진이 필히 이기지 못할 것을 알았소. 대각(臺閣 = 상서)에는 지금 (당시 일의) 본말(本末)이 있소. 일을 아직 보고하지 않았으면서 장온은 또한 나더러 선령(先零)의 모반한 강(羌)족들을 토벌하게 하여, 서방 지역을 일시에 소탕하려 하였소. 나는 모든 그 일이 옳지 않음을 알지만, 그만두게 할 수 없어, 마침내 일을 행하여 별부사마(別部司馬) 유정(劉靖)을 남겨두어 보기 4천 명을 거느리고 안정(安定)에 주둔하여 성세(聲勢)로 삼았소. 모반한 강족들이 곧바로 돌아가면서 돌아가는 길을 끊고자 하기에, 내가 조금씩 공격하여 번번이 (길을) 소통시키니, 안정에 병사가 남아있음을 두려워했소. 오랑캐들은 안정에 수만 명이 있다고 말하지만, 유정에 대해서만은 몰랐소. 이때 또한 소장을 올려 그 상황을 말하니, 손견은 주진을 행군을 따르면서 주진은 1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을 지으려 한다고 말하기에, 주진에게 2만 명으로 뒤에 주둔토록 하였소. 변장과 한수의 성중에는 묵을 곳이나 먹을 것이 없기에 응당 밖에서 운반하려 하지만, 주진의 대병(大兵)을 두려워하여 감히 가벼이 손견과 대전하지 못했고, 손견은 병사가 풍족하여 그 운반로를 끊고, 아이들을 써서 강족이 반드시 곡중(谷中)으로 돌아갈 것이라 하니, 양주(凉州)는 혹 안정될 수 있었소. 장온은 이미 능히 나를 기용하지 못했고, 주진 또한 손견을 등용하지 못하여, 직접 금성을 공격하고 그 바깥담을 무너뜨려서, 말을 달려 장온에게 얘기하게 하여 나의 승리가 아침저녁에 달려 있다고 하니, 장온이 이때 또한 스스로 계획이 적중했다 여겼소. 아과(兒果)에게 건너가 규원(葵園)을 끊어버리니, 주진은 군수품을 버리고 달아나고 아과는 내 계책대로 되었소. 대각에서는 이것 때문에 나를 도향후(都鄕侯)에 봉했소. 손견이 좌군사마(佐軍司馬)가 된 것은 이를 보는 바가 남들도 같이 보았듯이, 나도 할 수 있었던 것일 뿐이오.“ - 정사 오서 손견전 |
2.8. 장안 천도[편집]
그러자 동탁은 장안(長安) 천도를 하고자 하였는데, 양표, 황완, 순상, 오경, 주비 등이 여러 가지 문제들을 들며 반대하자 양표와 황완, 순상은 면직시켰고, 오경과 주비는 목을 벤 뒤 곧바로 강행했다.
이 과정에서 이유에게는 낙양성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하였고, 여포에게는 후한 역대 황제와 후비들의 능묘를 파서 보물을 도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심지어는 공경대부들의 무덤마저 도굴하자, 그의 군사들은 백성들의 무덤까지 도굴했다.[24] 또한 기병 5000명을 보내 낙양의 부호들을 붙잡아 모조리 '반신역당'이라는 깃발을 이마에 꽂고 참수한 뒤 그들 재산을 몰수해 천도 비용으로 충당했다.[25]
이로 인하여 낙양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기존의 수도인 낙양은 불태운 뒤 군사기지화 했고, 자신도 낙양에 주둔하며 하내, 산조에 집결한 연합군과 대치한다.
손견에게 동탁군이 크게 패하고 낙양 입성을 허용하고 말았지만, 낙양은 이미 황폐해진 상태였다.
동탁은 동월, 단외, 우보를 배치하여 대치시키고 장안으로 들어갔다.
반동탁 연합군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원술과 공손찬이 연합하여 공손찬의 동생 공손월을 지휘관으로, 손견을 부장으로 삼아 원소를 공격했으나, 원소군의 주앙에 의해 공손월이 전사하게 되었다. 손견은 이후 전투를 중단하였고, 이에 따라 연합군도 자연스레 해체되었다.
반동탁 연합군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스스로 해산되었지만 동탁 입장에서 장안천도는 반동탁 연합군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며 동탁을 포함한 당대인들도 그런 인식을 어느 정도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훗날과 달리 이때의 장안은 물론 정치적으로는 낙양 다음가는 대도시이기는 하지만 인구만 해도 낙양의 몇분의 일에 불과했고 낙양과 달리 서쪽에 치우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안에서의 동탁의 행보만 보더라도 1. 미오 건축, 2. 상국 취임, 3. 기타 공포 정치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억지로라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여 장안 천도로 인한[26] 정권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면이 있다(특히 상국 취임과 공포정치). 미오 건설의 경우 동탁이 자신의 실패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공손찬의 역경루와 유사한 발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즉, 반동탁군의 활동은 분명 동탁 정권에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을 입힌 것으로 볼 수는 있다. 따지고 보면 동탁 시기 후한 조정은 형식적 권위는 있을지 모르나 사실상 함곡관 너머 군벌들에 아무 힘도 쓸 수 없고 동탁도 이를 타개하려는 시도를 한 적은 딱히 없다. 당장 화폐개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유발만 해도 이런 것은 정부가 조세 등을 통해 재정적자를 보전할 수 없을 때 하는 일이다.[27] 즉, 동탁의 중앙정부는 자기 이름으로 재정을 보전할 정도의 세금도 제대로 못 거두는 처지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이유에게는 낙양성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하였고, 여포에게는 후한 역대 황제와 후비들의 능묘를 파서 보물을 도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심지어는 공경대부들의 무덤마저 도굴하자, 그의 군사들은 백성들의 무덤까지 도굴했다.[24] 또한 기병 5000명을 보내 낙양의 부호들을 붙잡아 모조리 '반신역당'이라는 깃발을 이마에 꽂고 참수한 뒤 그들 재산을 몰수해 천도 비용으로 충당했다.[25]
이로 인하여 낙양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기존의 수도인 낙양은 불태운 뒤 군사기지화 했고, 자신도 낙양에 주둔하며 하내, 산조에 집결한 연합군과 대치한다.
손견에게 동탁군이 크게 패하고 낙양 입성을 허용하고 말았지만, 낙양은 이미 황폐해진 상태였다.
동탁은 동월, 단외, 우보를 배치하여 대치시키고 장안으로 들어갔다.
반동탁 연합군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원술과 공손찬이 연합하여 공손찬의 동생 공손월을 지휘관으로, 손견을 부장으로 삼아 원소를 공격했으나, 원소군의 주앙에 의해 공손월이 전사하게 되었다. 손견은 이후 전투를 중단하였고, 이에 따라 연합군도 자연스레 해체되었다.
반동탁 연합군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스스로 해산되었지만 동탁 입장에서 장안천도는 반동탁 연합군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며 동탁을 포함한 당대인들도 그런 인식을 어느 정도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훗날과 달리 이때의 장안은 물론 정치적으로는 낙양 다음가는 대도시이기는 하지만 인구만 해도 낙양의 몇분의 일에 불과했고 낙양과 달리 서쪽에 치우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안에서의 동탁의 행보만 보더라도 1. 미오 건축, 2. 상국 취임, 3. 기타 공포 정치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억지로라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여 장안 천도로 인한[26] 정권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면이 있다(특히 상국 취임과 공포정치). 미오 건설의 경우 동탁이 자신의 실패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공손찬의 역경루와 유사한 발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즉, 반동탁군의 활동은 분명 동탁 정권에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을 입힌 것으로 볼 수는 있다. 따지고 보면 동탁 시기 후한 조정은 형식적 권위는 있을지 모르나 사실상 함곡관 너머 군벌들에 아무 힘도 쓸 수 없고 동탁도 이를 타개하려는 시도를 한 적은 딱히 없다. 당장 화폐개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유발만 해도 이런 것은 정부가 조세 등을 통해 재정적자를 보전할 수 없을 때 하는 일이다.[27] 즉, 동탁의 중앙정부는 자기 이름으로 재정을 보전할 정도의 세금도 제대로 못 거두는 처지였다고도 볼 수 있다.
2.9. 막장 전횡[편집]
동탁은 황제를 데리고 장안으로 도착하여 푸른 덮개에 금 장식을 두른 수레를 탔는데, 위엄이 마치 천자와 같았다. 아우 동민을 좌장군으로 삼고, 조카 동황을 중군 교위로 삼으니 종족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조정에 나란히 섰으며, 손녀 동백은 위양군에 봉해지고 심지어 시첩(侍妾)의 뱃속에 든 아이까지도 제후에 봉해졌다.
자신이 사는 미(郿)에 만세오(萬歲塢)라는 성채를 쌓았는데, 당대 사람들이 흔히 미오(郿塢)라고 불렀다고 한다. 높이와 두께가 무려 7장(丈)으로 장안과 같은 규모의 성을 쌓아 30년 분의 식량과 엄청난 보물들을 비축했다. 동탁은 스스로 "일이 성사되면 천하에 웅거하고, 일을 그르치면 이곳을 지키며 한평생 지낼 수 있다."고 말했다.
오(塢)는 거점 요새의 개념에 가까운데 유사한 군사거점인 진(鎭)과의 차이는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만세오는 미 땅에 세운 요새 또는 성채라는 의미로 훗날 위와 오가 대립하는 유수에 새워진 유수오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런 점에서 미오성이란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다. 사실, 동탁의 이 장면은 동시대 인물의 훨씬 유명한 행동과 사실상 근본적 형태가 같은데 바로 공손찬의 역경루다. 공교롭게도 동탁과 공손찬은 공통점이 참 많은데, 이 짓 외에도 둘 다 죄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으며 폭정을 했다. 그러나 공손찬의 악행도 대놓고 역적인 동탁에 비하면 양반인 수준이다.
현대인들 중에서는 미오 관련 항목 정사 서술과 관련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역사의 기록대로라면 당시 피폐한 장안 일대의 여력으로는 2, 3년에 불과한 동탁의 치세 동안 그런 대규모 역사를 일으키거나, 30년 분의 식량을 비축한다거나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주로 동탁 옹호론이나 그의 폭정이 과장되었다는 축에서 주장되는 의견. 그러나 이는 애당초 중국이 동원할 수 있는 물량이나 전후 사정을 살펴보지 않은 것이다. 관중은 적어도 동탁 이전에 각 군벌이 일어나 난장판이 되긴 했으나 이는 다른 중원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관중이 완전히 박살난 건 동탁의 2~3년 폭정과 그 뒤를 이은 이각, 곽사의 삼보의 난 등의 개짓거리로 인한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미오 축조 같은 폭정을 남발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다. 당장 공손찬도 비교적 단기간 만에 역경 테마파크를 잘만 지었다. 그리고 후한, 삼국시대의 성은 흙을 쌓아 만든 토성으로 빠르게 건축이 가능했다. 한나라 시대 기록으로는 현대 도량형 기준으로 한 사람이 한 달에 5미터 40센치에 이르는 방벽을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외에 주연회를 열 때마다 죄인을 끌고 와 혀와 사지를 자르거나 눈을 도려내기도 하고, 큰 솥에 삶기도 했다. 심지어 장온의 경우는 원술과 내통한 죄를 뒤집어 씌워 자기가 직접 주먹으로 때려서 죽였다.[28] 게다가 자기 마음대로 형벌을 남용하고 사람들이 서로 무고했기에 억울하게 죽은 자가 수천 명이나 됐다는 기록도 있다. 황의백 저서인 《삼국지의 지혜》에서는 이런 사디즘을 보인 이유가 정서 불안이었거나 대신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으로써라고 평하고 있다.
거기에다 헌제를 협박해서 상국이라는 어마무시한 관직을 받았다. 때문에 황제의 옆에서도 칼을 들고 무장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29] 이 전설의 관직을 따낸 이후, 기록된 동탁의 행보는 말 그대로 눈 앞에 걸릴 것이 없는 기세. 동탁은 장안에서 위세를 떨치며 대신들을 능멸했다. 후한서에는 동탁이 상국이 되고 나서 예종을 첩으로 삼으려한 일화가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예종 문서 참조.
특히나 경제 정책에서 큰 실책을 저지르게 되는데, 바로 화폐개혁. 오수전을 녹여 조그만 주화로 주조하지만 불량률이 심했는데, 그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였던 데다가 모양도 형편없었고 심지어는 불순물까지 잔뜩 섞여서 이게 돈인지 뭔지조차 모르게 찍힌 개체도 있었다. 그 결과로 저질의 화폐가 대량으로 유통되어 화폐가치가 떨어지면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후한의 경제는 혼란에 빠졌고, 화폐 경제는 이후 한동안 회복되지 못했다. 오늘날의 각 국가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항목이 화폐임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점은 학계의 평이 일치하고 있다.
자신이 사는 미(郿)에 만세오(萬歲塢)라는 성채를 쌓았는데, 당대 사람들이 흔히 미오(郿塢)라고 불렀다고 한다. 높이와 두께가 무려 7장(丈)으로 장안과 같은 규모의 성을 쌓아 30년 분의 식량과 엄청난 보물들을 비축했다. 동탁은 스스로 "일이 성사되면 천하에 웅거하고, 일을 그르치면 이곳을 지키며 한평생 지낼 수 있다."고 말했다.
오(塢)는 거점 요새의 개념에 가까운데 유사한 군사거점인 진(鎭)과의 차이는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만세오는 미 땅에 세운 요새 또는 성채라는 의미로 훗날 위와 오가 대립하는 유수에 새워진 유수오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런 점에서 미오성이란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다. 사실, 동탁의 이 장면은 동시대 인물의 훨씬 유명한 행동과 사실상 근본적 형태가 같은데 바로 공손찬의 역경루다. 공교롭게도 동탁과 공손찬은 공통점이 참 많은데, 이 짓 외에도 둘 다 죄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으며 폭정을 했다. 그러나 공손찬의 악행도 대놓고 역적인 동탁에 비하면 양반인 수준이다.
현대인들 중에서는 미오 관련 항목 정사 서술과 관련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역사의 기록대로라면 당시 피폐한 장안 일대의 여력으로는 2, 3년에 불과한 동탁의 치세 동안 그런 대규모 역사를 일으키거나, 30년 분의 식량을 비축한다거나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주로 동탁 옹호론이나 그의 폭정이 과장되었다는 축에서 주장되는 의견. 그러나 이는 애당초 중국이 동원할 수 있는 물량이나 전후 사정을 살펴보지 않은 것이다. 관중은 적어도 동탁 이전에 각 군벌이 일어나 난장판이 되긴 했으나 이는 다른 중원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관중이 완전히 박살난 건 동탁의 2~3년 폭정과 그 뒤를 이은 이각, 곽사의 삼보의 난 등의 개짓거리로 인한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미오 축조 같은 폭정을 남발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다. 당장 공손찬도 비교적 단기간 만에 역경 테마파크를 잘만 지었다. 그리고 후한, 삼국시대의 성은 흙을 쌓아 만든 토성으로 빠르게 건축이 가능했다. 한나라 시대 기록으로는 현대 도량형 기준으로 한 사람이 한 달에 5미터 40센치에 이르는 방벽을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외에 주연회를 열 때마다 죄인을 끌고 와 혀와 사지를 자르거나 눈을 도려내기도 하고, 큰 솥에 삶기도 했다. 심지어 장온의 경우는 원술과 내통한 죄를 뒤집어 씌워 자기가 직접 주먹으로 때려서 죽였다.[28] 게다가 자기 마음대로 형벌을 남용하고 사람들이 서로 무고했기에 억울하게 죽은 자가 수천 명이나 됐다는 기록도 있다. 황의백 저서인 《삼국지의 지혜》에서는 이런 사디즘을 보인 이유가 정서 불안이었거나 대신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으로써라고 평하고 있다.
거기에다 헌제를 협박해서 상국이라는 어마무시한 관직을 받았다. 때문에 황제의 옆에서도 칼을 들고 무장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29] 이 전설의 관직을 따낸 이후, 기록된 동탁의 행보는 말 그대로 눈 앞에 걸릴 것이 없는 기세. 동탁은 장안에서 위세를 떨치며 대신들을 능멸했다. 후한서에는 동탁이 상국이 되고 나서 예종을 첩으로 삼으려한 일화가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예종 문서 참조.
특히나 경제 정책에서 큰 실책을 저지르게 되는데, 바로 화폐개혁. 오수전을 녹여 조그만 주화로 주조하지만 불량률이 심했는데, 그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였던 데다가 모양도 형편없었고 심지어는 불순물까지 잔뜩 섞여서 이게 돈인지 뭔지조차 모르게 찍힌 개체도 있었다. 그 결과로 저질의 화폐가 대량으로 유통되어 화폐가치가 떨어지면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후한의 경제는 혼란에 빠졌고, 화폐 경제는 이후 한동안 회복되지 못했다. 오늘날의 각 국가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항목이 화폐임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점은 학계의 평이 일치하고 있다.
2.10. 최후[편집]
하지만 이렇게 떵떵거리던 동탁의 전횡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 사도였던 왕윤은 사손서[30] 등과 동탁의 암살을 모의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동탁의 호위를 맡던 중랑장 여포가 왕윤의 집에 찾아온다. 당시 여포는 과거에는 동탁이 창을 던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고 이후 동탁의 호위로 미오성 합문을 호위하던 중 동탁의 시비와 간통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런 일 때문에 여포는 동탁에 대한 원한과 두려움이 쌓이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를 같은 동향 사람이라 친하게 지내던 왕윤에게 토로하자 왕윤은 자신의 계획을 알리며 여포에게 동탁 암살을 권유한다. 처음에 여포는 양부자 사이의 정 때문에 거부했지만 왕윤이 과거 창사건과 동탁과 여포가 친부자가 아님을 주장하며 부추기자 여포도 동탁 암살에 참여한다.
연의에 등장하는 초선에 대한 이야기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으로, 잡극에서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밀통했다는 소재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창작한 것이 시초다. 이후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이 양녀 초선을 이용하여 연환지계(連環之計)로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형태로 완성된다. 이 연환지계의 전개에 대해선 초선 문서 참조.
연의에 등장하는 초선에 대한 이야기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으로, 잡극에서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밀통했다는 소재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창작한 것이 시초다. 이후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이 양녀 초선을 이용하여 연환지계(連環之計)로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형태로 완성된다. 이 연환지계의 전개에 대해선 초선 문서 참조.
192년 4월 23일 황제가 병에 걸렸다가 낫자 신하들이 이를 축하하기 위해 궁궐의 미앙전에 모였고, 동탁도 여기에 참석하기 위해 여포에게 호위를 맡기고 궁궐로 입궁한다. 이에 여포는 기도위 이숙을 시켜 동탁을 암살할 병사 10여 명을 모아 호위병으로 위장 후 궁궐의 액문 안쪽에 숨겨두었고, 동탁이 액문을 지나자 바로 급습한다. 동탁이 궁궐에 들어간 뒤[31] 가장 먼저 왕윤을 보자 반갑게 인사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왕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고, 이내 그의 지휘 하에 호위병들에게 제지당하였고, 이숙이 먼저 칼로 동탁을 베려 했으나, 조복 밑에 갑옷을 입고 있어 팔만 베어낸다. 부상을 입은 동탁은 황급히 여포를 호출했으나, 그 여포는 도리어 "(황제의) 조서가 내렸다!"라며 오히려 동탁을 공격했다. 이에 동탁은 "개 같은 놈(用狗)[32]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라는 말을 남긴 채 여포의 창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후한서나 정사 삼국지 등 역사서에 따르면 동탁의 죽음을 암시하는 현상들이 많이 나온다 삼국지에 주석으로 달린 영웅기에 따르면 이 당시에 천리초 십일복(千里草(千+里+艸=董) 十日卜(十+日+卜=卓))이라는 풍문이 있었는데 "온 천지에 난 풀은 열흘을 못 넘긴다"며 동탁의 이름을 파자한 것이었다.[33] 또한 동도(董逃)라는 동탁이 달아난다는 뜻의 노래가 지어졌다. 또 후한서에는 어떤 도사가 포(布)[34]에 여포의 성인 여(呂)자[35]를 적어 동탁에게 여포를 경계할 것을 알렸지만[36] 동탁은 도사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도사를 쫓아냈다고 한다. 더불어 죽는 날 말이 날뛰어 옷을 더럽힌다든가, 북액문 앞에서는 말이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후한서나 정사 삼국지 등 역사서에 따르면 동탁의 죽음을 암시하는 현상들이 많이 나온다 삼국지에 주석으로 달린 영웅기에 따르면 이 당시에 천리초 십일복(千里草(千+里+艸=董) 十日卜(十+日+卜=卓))이라는 풍문이 있었는데 "온 천지에 난 풀은 열흘을 못 넘긴다"며 동탁의 이름을 파자한 것이었다.[33] 또한 동도(董逃)라는 동탁이 달아난다는 뜻의 노래가 지어졌다. 또 후한서에는 어떤 도사가 포(布)[34]에 여포의 성인 여(呂)자[35]를 적어 동탁에게 여포를 경계할 것을 알렸지만[36] 동탁은 도사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도사를 쫓아냈다고 한다. 더불어 죽는 날 말이 날뛰어 옷을 더럽힌다든가, 북액문 앞에서는 말이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지연의에서 이것을 각색해 이숙이 동탁의 죽음을 암시하는 징조를 둘러대는 장면으로 창작되었다. 이숙은 동탁 입장에서 보자면 여포를 데려온 1등 공신이었지만, 어느새 잉여가 되어 있었다. 특히 동탁이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여포가 왕윤에게서 "동탁을 꾀어낼 인물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이숙을 추천한다. 이리하여 동탁은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고 이숙을 따라 궁궐로 간다. 동탁이 궁궐로 올 때 생기는 숱한 불길한 징조[37]에 대해 이숙이 "수레바퀴가 부서진 것은 이제 낡은 한나라가 망하고 대신 상국 어르신께서 새 황제가 되셔서 새로운 나라를 여신다는 하늘의 계시입니다."라는 식의 구라로 둘러대서 립서비스로 안심시킨다.
동탁의 머리와 사체는 저잣거리에 내걸렸는데, 후한서에 따르면 뚱뚱한 몸의 배꼽에 누군가가 심지를 꽂고 불을 놓자 며칠씩이나 계속 탔다고 한다.[38] 동탁의 시신은 그 뒤로도 수난을 겪은 통에 동탁은 죽어서도 전혀 행복하지 못했는데, 여포가 장안에서 도주할 때 동탁의 머리를 챙겨서 도망갔다는 기록도 있다.[39] 영웅기에 따르면 여포가 장안을 탈출하면서 원술에게 의탁하기 위해 선물로 동탁의 수급을 보낸 모양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각 등이 동탁의 산소를 만들었지만[40] 산소도 만들어지는 족족 3번이나 벼락을 맞았으며, 결국 그나마 남은 뼛조각 몇 개도 깡그리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건 창작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각 등이 동탁의 산소를 만들었지만[40] 산소도 만들어지는 족족 3번이나 벼락을 맞았으며, 결국 그나마 남은 뼛조각 몇 개도 깡그리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건 창작이다.
3. 평가[편집]
伯業成時為帝王(패업성시위제왕)
不成且作富家郎(불성차작부가랑)
誰知天意無私曲(수지천의무사곡)
郿塢方成已滅亡(미오방성이멸망)천하를 거머쥐어 성공하면 제왕이 되고
실패해도 부자는 될 줄 알았지만
하늘이 용서치 않을 줄 누가 알았으리
미오성을 쌓자마자 멸망하는구나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서 동탁의 최후를 평한 시
수당시대 이전까지 거의 약 400년 가까이 지속된 삼국시대-오호십육국 시대-남북조 시대의 시초인 악인이자 사실상 만악의 근원이며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지게 한 실질적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를 박살낸 역적인 망탁조의 중 하나로 제갈량과 노숙 등의 천하삼분지계를 보면 동탁이 워낙에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언급이 나오는 걸로 보아 당대에 동탁은 이미 악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원소는 헌제가 황제라는 것을 부정하면서 한 황실에서 대인배로 이름 높은 유우를 옹립하려 시도했고 원술은 칭제, 유언은 오두미교를 핑계로 조공을 끊고 황제의 의복, 깃발 등을 대량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유표는 이를 조정에 고발하였는데, 유표도 피장파장이다. 정사 삼국지 위서 유표전에 이르기를 유표 역시 후한 황실 조정에 대한 조공을 끊고 황제와 복식을 동일하게 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 때문에 정사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동탁은 원소, 원술, 유표와 동급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동탁 사망 직후에는 후한이 되살아날 여지가 있었으나, 그 싹조차 이각과 곽사가 제거해 버렸다. 이후 동탁의 업보를 기반으로 위진남북조시대의 대혼란이 열렸다.
정치적으로는 권력을 차지하는 방법에만 뛰어나고,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도덕이나 사상에는 관심이 없어서 국가를 완전히 멸망시킨 악인, 폭군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정사를 보든 연의를 보든 손권,[41] 원소[42] 등과는 정반대로, 진정한 의미로 조직폭력배 수준의 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동탁의 죽음은 삼국지 초반부의 가장 인상깊은 사건 중 하나로, 양아들로 맞아들인 여포와 개인적인 문제로 갈등하다 결국 그의 손에 죽는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악인다운 비참한 죽음이었다.[43] 게다가 둘 사이에 여자문제까지 있었으니 그 막장성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동탁의 죽음이 워낙 인상깊었는지, 부하에게 배신당하는 폭군의 대명사로 널리 통하고 있다.
변경 출신 장수이지만 황건적에게 패하고, 변장 토벌에 지지부진한 것 등 군사 지휘, 즉 군령권 행사에는 그다지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용병술은 미약하지만 군사 육성과 축성 등을 비롯하여 군사행정(즉, 군정권)의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즉, 낮은 용병술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육성하고 성을 쌓는 능력은 대단했다. 당대의 군벌들이 중앙 진출 이후에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다른 지역의 태수들을 도살하고 약탈하는 식으로 상비군을 유지했던 막장 상황과 비교해보면 정말로 뛰어난 재능이 맞다.[44] 북방민족을 때려잡던 무인이라서, 무술 실력은 궁술에도 뛰어났고 초인적인 완력을 보유한 싸움꾼이었다. 무엇보다 동탁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는 능력과 군대 유지 능력에서 장점을 보여 정치형 군인으로서 장점이 더 많았다. 전술보다는 사람을 꼬드기는 재주가 좋았다. 이 덕분에 강족들과 한족의 대립에서 평화로운 줄타기를 했고, 변경 출신의 제후와 부하들도 동탁을 좋아했다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그런 동탁이 유일하게 두려워한 사람이 손견이었다. 동탁은 손견 이외의 모든 사람은 자신이 육성한 군사력으로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만큼 업신여겼다. 이건 반대로 말하면 손견만큼은 인정했다는 뜻이다.
한편 동탁보다 수백 년 뒤에 정치적 위치로만 봐선 정확히 동탁과 비슷했던 사람이 중국사에 나타나는데, 그가 북위의 군벌 이주영이다. 다만 이주영은 군령도 군정도 잘한 전형적 의미에서의 종합적 명장이었기에, 정치적 위치에서라면 모를까 군략에서 동탁과 같은 선에 두고 놓기엔 이주영에게 미안해질 정도로 곤란한 면이 있다. 또한 흥미롭게도 서양사에도 동탁처럼 부대 유지 관리, 축성, 보급 같은 군사행정 및 정치적 관계 유지에만 능했지 정작 군령, 즉 전술적 능력은 영 꽝이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테오도시우스 1세. 콘스탄티누스가 서양판 항우였다면, 테오도시우스는 서양판 동탁이었던 것. 다만 동탁은 수도 관료층 및 유능한 젊은 일선지휘관들과 본격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게 권력을 움켜쥔 시점이었기에 이들과 제대로 된 상호작용을 하지 못했고 본인도 자기 권력을 주체하지 못해 화를 부른 부른 반면, 테오도시우스는 중앙 행정부 및 일선을 오가는 순환 근무 과정에서 아주 일찍부터 수도관료층 및 휘하 일선지휘관들과 매끄러운 관계를 오래도록 맺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바로 이들에게 추천받아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재가를 거쳐 황제가 된 인물이었다. 즉 동탁은 낙양에 있는 사람들에겐 거의 별로 권력에 빚진 게 없었던 반면 테오도시우스는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기존 군인 및 관료들에게 큰 빚을 진 터라 어느 정도 그들의 눈치를 봐야했다. 또한 즉위 당시에 어디까지나 정통 황가는 발렌티니아누스 가문인 상황에서 제국 동방에 다른 적격자가 없었기에 대타로 황제가 된 상황이라 권력에 취해 있을 겨를이 없었다. 물론 테오도시우스도 몇 년 안 되어서 절대 권력을 쥐게 되지만 아무래도 견제받는 최고 자리에서 있으면서 겪은 경험으로 성장해서였는지 그 이후에도 전제적 모습은 여간해선 보여주지 않아 여전히 수도 관료층 및 장교단의 지지를 잃지 않았기에, 의외로 군사적 능력 면에서는 유형이 같았던 동탁과는 꽤 다른 결말이 되었다.
연의와는 달리 정사에서의 동탁은 젊은 시절에는 이민족들과 친분을 맺고 주변인들과 부하들에게는 평판이 나쁘지 않은 걸 보면 개인적으로는 좋았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중앙으로 진출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권력 구도를 개편하고 악인이 되었으니, 권력을 탐하고 타락한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흔히 동탁을 그저 무능하고 미련한 돼지로 묘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조조보다 빨리 나타난 간웅이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는데, 정사를 따지고 본다면 그는 서량 지역의 변방 장수 출신 답지 않게 의외로 중앙 조정의 권위와 힘을 알고 이용할 줄 아는 정치군인이었다. 애초에 그냥 돈 좀 많은 중앙에서 파견된 돼지였다면, 그 미쳐 날뛰는 변방 부하들이 당장 동탁부터 죽여버리고 재산을 뺏으면 빼앗았지, 그 밑에서 충실하게 부하로서 있다가 동탁이 죽은 뒤에야 날뛰지는 않았을 거다. 혹자는 그가 시골 촌놈답지 않게 황제를 이용하는 정치적인 센스가 굉장히 뛰어났기 때문에 조조의 선배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권력을 잡는 방법은 잘 알고 있었으나 권력을 잡고 난 이후에는 그걸 제대로 쓸 줄 몰랐던 자라고 할 수 있다. 조조는 동탁과 비슷한 경로로 협천자를 했고, 자신의 권력을 높이는 데 욕심을 내긴 했다. 하지만 조조는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 전국에서 인재들을 모았고, 본인도 학문을 장려하고 즐겼으며, 확실히 질서를 잡고 치국을 실시했다. 하지만 동탁은 정권을 잡는 순간 폭정을 해서 국치를 문란하게 했고, 자신의 몰락도 재촉했다. 조조가 능력에 맞게 인재를 배치한 것에 비해 동탁은 갓난아기도 자신의 친척이면 태수 등 중요한 자리를 주는 기행을 저질렀다. 물론 조조도 군사적 능력은 연의와는 달리 별로 뛰어나다고 하기 힘든 하후돈을 대장군 자리에까지 앉힌 사례가 있지만, 대신 하후돈은 인덕이 있고 정치력도 괜찮았던 데다[45] 고대 군대에서 제일 중요한 행정 보급 능력은 최고였기에 오히려 적절한 인사 배치라고 볼 수 있다.[46] 즉, 조조의 선배는 선배이지만, 아무리 봐도 하위호환에 지나지 않았다.
동탁은 물질적인 이득에만 집착하는, 매우 속좁은 통치를 했던 군인의 한계를 보였다. 정사에서도 전략적으로는 노련한 책략으로 반동탁 연합군을 상대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자폭이나 다름없는 바보 짓을 반복했다. 특히, 낙양을 불태우고 요새화한 것은 문민 정치를 팽개치고 당장의 물리적인 이득만 보는 군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기도 하다. 즉, 동탁은 권력 투쟁에는 약삭빨랐으나 큰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민심을 잃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말아먹은 1차원적인 독재 군인의 예시라고 볼 수 있다.
주류 여론에 대한 반발로 인해 동탁이나 후한에 관련된 논의를 하다 보면 종종 동탁을 진정한 충신으로 미화하며 그는 역사의 승리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후 자신과 대립했던 조조와 연의를 쓴 나관중 등에 의해 역사적인 책임을 모조리 뒤집어 쓰고 억울하게 폄하당했다거나 혹은 동탁이야말로 개혁자라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고 있다.[47] 그러나 동탁에게 "변방 출신치고는 정치적인 센스가 뛰어났고 완력과 정권 장악 능력이 준수했다." 정도의 재평가는 해줄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대로 오수전을 남발해서 화폐 경제를 어지럽히고 한나라 조정의 정통성을 무너뜨린 것도 모자라서 무고한 백성들까지 학살하고 겁탈했다는 기록들이 엄연히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재평가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또한 동탁이 사후에 조조나 손견, 원소, 나관중 등에 의해 억울하게 역적으로 매도당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닌데 이미 동탁은 자신의 악행들 탓에 당대부터 상당한 미움과 원망을 받고 있었다. 오죽하면 동탁을 축출하기 위해 연합군까지 조직되었겠는가?[48] 더군다나 이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적어도 동탁이 생전에 선정을 베풀어서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다거나 하는 등의 긍정적인 기록이라도 남아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기록은 없다. 동탁이 진류왕을 옹립한 것도 그가 한나라 조정에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훗날 동진 안제를 죽인 유유처럼 기왕 대권을 장악하려면 남들이 봤을 때 더 똘똘하고 유망한 쪽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우는 것이 스스로의 정치적 위신이나 정통성 마련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잔혹하고 무도한 폭력성, 그러한 행위에 대한 기존 도덕관념과 남의 비판에 대해 완전히 무심한 독선적 태도를 영웅의 상, 최소한 그들 중 하나라 설정하고 거기에 인물들을 끼워 맞추는 경우도 있는데 이 중 하나가 동탁의 예라 할 것이다. 물론 일반 백성들이나 자기 부하들, 이름이 널리 떨치지 못한 이들은 죽어나갔으나 개인적으로 가장 꺼림칙한 상대였을 황보숭과 노식은 물론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 한 순유조차도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생전에 해치우지 못했고 명망 높은 왕윤과 채옹을 우대하거나 심지어 이 시점에서 고작 20대 젊은이였던 사마랑에게도 회유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강약약강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동탁이 당고의 금 해제 이후 슬슬 현실적 권력성을 띄기 시작한 사대부 명사 사회의 여론의 위력을 느끼게 해주는 동시에 약한 백성들에게는 포악하고 소위 명사 클래스에 드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무른 면이 있는 일종의 강약약강 성향을 가졌던 점에선 재평가할 여지가 있다. 결국 동탁은 생전에 저지른 악행들로 사망한 후에도 꾸준히 비판받고 있으며, 동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조조를 포함한 정적 및 나관중에 의해서 조작된 잘못된 평가가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한 역사적 평가일 뿐이다.
4. 가족 관계[편집]
5. 기타[편집]
《동도가董逃歌》는 후한 때 떠돌던 아이들이 지은 곡이다. 뒤에 동탁이 난을 일으켰다가 마침내 도망갔는데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익혀 가장(歌章)을 만들었다. 악부(樂府)에서는 이를 연주해 경계로 삼았다.고금주 『음악』
- 《후한서 동탁열전》에 의하면 궁기마술은 뛰어나지만 체구 자체는 뚱뚱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창작물에서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성격에 걸맞게 욕심사나운 얼굴을 한 뚱보로 묘사된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지속적으로 비대한 몸집에 대해 묘사된다. 몸이 비대해서 오래 앉아있지 못하고 드러누웠다는 묘사까지 있다. 조조가 이때를 틈타 암살하려고 했다가 거울에 비쳐 실패했다. 여포가 초선과 밀회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여포를 쫓았으나, 몸집이 비대한 탓에 따라잡지 못하기도 한다.[49] 뚱뚱한 외모와, 힘 쓰는 일은 여포에게 맡기는 이미지 때문에 싸움은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연의에서는 손꼽히는 장사이며 몸놀림도 잽싸다. 원래 있던 곳도 서량으로 말타기와 활쏘기도 매우 잘했다. 오부가 자기를 암살하려고 단도를 들고 덤비자 순식간에 피하고는 팔을 붙잡아 막아냈으며, 조조가 동탁을 암살하려고 할 때 뒤돌아 누울 때까지 기다린 것도 동탁의 강한 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불륜현장 발각이기는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여포에게 창을 던지며 덤벼들 정도였다. 비만이라도 그냥 살만 뒤룩뒤룩 찐 것과 근육이 잡혀있고 그 위에 지방이 붙은 것은 전혀 다르다. 동탁은 야전 군인 출신이었기에 상당한 단련을 해서 강골을 갖췄을 것이고 그렇다면 뚱뚱한 체구임에도 민첩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50][51]
6. 대중매체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동탁/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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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어] [상고한어] [3] 음력 192년 4월 23일.[4] 장안성 궁궐의 전각이다.[5] 정사(역사서)에서는 동탁이 헌제가 병으로부터 쾌유한 걸 기념하여 축하연이 열린 미앙전에 들렀다가 죽임을 당한 것으로 나오나, 연의(소설)에서는 왕윤과 이숙, 여포 등이 '헌제가 동탁에게 황제 자리를 양위하기로 결심했다'고 거짓말을 하여 그가 머물던 미오성에서 장안성까지 데리고 와서 죽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6] 동탁 타도를 목표로 모인 후한의 군웅들 역시 자기 야심만 채웠고 나라 땅을 자기 사유지로 여기며 조세를 자기 걸로 삼았다. 섭정이 된 조조나 사마소 역시 꼭두각시 황제를 앉혀 놓고 국정을 마음대로 농단하는 동탁의 전철을 밟았다. 훗날 서진의 환온 등 위진남북조 이후 찬탈자들은 모두 같은 짓을 했다.[7] 서량 지역이다.[8] 이게 동탁의 유일한 소였다는 설도 있다. 가끔 훈훈함을 더하기 위해 감격한 강족이 소를 보내줘서 오히려 소가 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9] 동탁과 반대로 조조는 유비 일행이 의용군이래도 정중하게 대했으며 훗날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며 다시 진압을 나섰다.[10] 판본, 책 내용에 따라 달라지는데, 동탁의 거만함과 무례함을 참지 못한 장비가 동탁을 때려죽일 기세로 분노하다가 유비, 관우의 만류에 억지로 화를 참으며 그만두는 묘사도 나온다.[11] 삼국지 오서 손견전.[12] 당시 장온의 부하였던 손견이 주신에게 보급로를 지킬 것을 주장했지만 주신을 이를 무시했고 손견의 말대로 변장의 군대는 규원협에 주둔해 주신 군대의 보급로를 차단한다.[13] 후한서 동탁열전에는 죽였다고 나오나 같은 후한서 효령제(본)기에는 단순 패퇴로 나온다.[14] 동탁열전에는 한수의 숙청 때문이라 한다.[15] 연의에서는 조조로 각색이다.[16] 다만 이 점은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우둔하다는 소제를 폐위하고 현명하다는 진류왕을 옹립한 데서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현명한 황제보다 어수룩하고 우둔한 황제가 더욱 손에 쥐고 농락하기 좋기 때문. 이 탓에 다양한 추론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상식적으로 아무리 현명한 9살이라고 해봤자 어머니, 하태후의 보호를 받는 10대보다 손에 쥐고 농락하기 어려웠을까 하는 반론도 있다. 해당 반론대로라면 이미 진류왕이 어머니가 없단 점에서 합격점이었을 것이다.[17] 황후 일족은 하간의 동씨고, 동탁은 농서의 동씨.[18] 연의에서는 전직인 병주 자사의 오기로 형주 자사로 나온다.[19] 연의에서는 이 제거를 사주하는 역할을 이숙이 맡았다. 그리고 여기서 여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해진 선물이 바로 적토마. 물론 동탁이 여포에게 적토마를 선물한 것은 연의의 각색이다.[20] 삼국지연의에서는 이유가 동탁의 사위로 나와서 여러가지 꾀를 내주지만 정사에서 이유는 동탁과 별 관련 없는 사람이었고 동탁의 명으로 소제를 독살한 것만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유는 동탁보다 꽤 연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1] 연의에서는 그 이유가 유폐된 이후 '날 구해줄 충신 어디 없나'라는 의미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참고로 연의에서는 홍농왕과 영사황후 하씨 말고도 홍농왕의 아내인 당희까지 죽였다고 나오지만, 실제 역사에서 당희는 죽지 않았다.[22] 후한서에서는 하태후가 먼저 죽고, 반동탁연합군이 기의한 뒤 소제가 독살당했다고 나온다.[23] 말 그대로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죽였다. 그저 백성들이 축제를 즐기며 노는 꼴을 보기 싫어서 무고한 백성들을 도적떼라고 뒤집어 씌워 죽였다. 실제로도 "농번기라 바쁜 시기인데 저 놈들은 놀고 있으니까 도적떼가 틀림없다"고 박박 우겼다.[24] 여기서 백성은 부유한 평민들을 말한다.[25] 즉, 낙양의 부호들을 모두 원소의 반동탁 연합군과 내통한 역적들이라고 몰아간 것이다.[26] 그리고 낙양 대겁탈과 폭정도 추가.[27] 이를 인플레이션 조세라고 한다.[28] 삼국지연의에서는 여포가 장온의 뒷덜미를 잡아서 끌고 밖으로 나가는데, 얼마 후 여포는 쟁반에 담긴 장온의 수급을 가져오는 걸로 묘사되어 있다.[29] 상국은 본래 한나라의 관직 체계에 있어서 전설의 관직이자 일종의 영구결번과 같은 관직이었다. 한나라를 창시한 고조 유방의 개국공신으로 전설적인 공로를 세운 소하, 조참 및 여후의 조카였던 여산 이후로는 상국을 지낸 사람이 없다가 약 400여 년 만에 동탁이 상국이 된 것이다. 물론 동탁은 그에 걸맞은 공을 세운 일이 없었으니, 그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상국이 됐을 뿐이다.[30] 복야 관직에 있던 인물이다. 나관중이 이를 잘못 해석해서 연의에서는 복야사 손서로 나온다.[31] 들어가기 전 여포를 만났는데, 여포가 어제의 일에 대해서 사죄하며 용서를 빌자 동탁은 너그럽게 용서해 준 뒤 이따 보자며 다시 들어갔다. 물론 이는 동탁을 안심시키려는 계략이었다.[32] 개 구 狗 자는 공을 세운 자로 해석될 수도 있다. 물론 정황상 동탁은 여포에게 욕한 것이 맞지만, 여포가 동탁을 죽이는 데에는 공을 세웠음을 감안하면 참으로 재미있는 상황이다.[33] 삼국지 6에서는 "천리의 풀은 왜 푸른가? 태양이 열 개 내리쬐면 살 수 없겠지."라는 해석이 되어있다.[34] 베 포(布) 자이다.[35] 판본에 따라 입 구(口)자 두 개를 위 아래에 적어 여(呂)자를 나타냈다는 말도 있다.[36] 동탁의 죽음을 바라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이 도사는 동탁 생전에 동탁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도사 노릇을 했던 모양이다.[37] 수레바퀴가 부서진다든지, 먹구름이 낀다든지. 이 중에는 동탁이 오래 못 살거나 여포에게 죽는다는 것도 있었다.[38] 이 때문에 살아서는 장안을 통치하던 동탁이 죽어서는 장안의 등불이 되어 며칠 동안 장안의 불을 밝혔다고 하는 농담이 있다.[39] 출처: 후한서 여포열전.[40] 이미 동탁의 산소를 만들 당시 동탁이 죽은 지 오래되어 시체가 다 썩은 데다 워낙 나쁜 놈이다 보니 백성들이 동탁의 시체에 침을 뱉고 짓밟고 발길질을 한데다 수급에도 주먹질을 일삼아서 이각과 곽사 등이 도착했을 때는 겨우 피골 몇 조각만 남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래서 피골 몇 조각과 좋은 향나무를 깎아 동탁의 시신을 대신해 관에 넣고 무덤을 만들었다.[41] 늙어서 실책을 좀 저지르긴 했어도 국가운영을 상당히 잘했고 부하들도 상당히 잘 관리했다. 여몽 역시 그가 직접 발굴한 인재다. 오히려 소패왕으로 불리던 손책이 더욱 사이코처럼 집권했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였다.[42] 노비의 자식이었으나 자신을 희생하는 퍼포먼스로 원씨가문과 천하의 마음을 얻고 심지어 생모를 포함한 가문이 몰살당하게 냅둬도 효자로 칭송받고 악행을 저질러도 찬사를 받을 정도의 뛰어난 정치력을 보였다. 그러나 당대의 여러 문사들은 원소가 지나치게 비정하고 파벌싸움을 의도적으로 조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원소군에 잠깐 있어 보기도 했던 순욱은 원소군 체제의 단점과 모순을 줄줄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43] 게다가 죽인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삼국지의 대표 인물 중 하나인 여포인 것도 한몫한다.[44] 다만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낙양과 장안을 엄청나게 약탈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45] 어차피 대장군 급 보직씩이나 되면 직접 전장에서 싸우는 것보단 하진처럼 후방에서 휘하 제장들을 지휘하고 통솔할 능력이 더 중요할 것이다. 특히 조조처럼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목적이 있는 야심가한테는 더욱. 그런 의미에서 자신과 친한 친척이자 정치력이 뛰어난 하후돈은 휘하 제장들을 통솔, 포섭하는 데는 오히려 안성맞춤격 인사가 된다.[46] 조조가 거대권력으로 자리잡은 이후 하후돈의 역할은 현장에서 병력을 지휘하는 것보다는 주로 세력 내 정치가이자 행정가였다. 즉 군재가 좀 떨어져도 별 지장이 없었다는 것. 사실 하후돈은 조조가 원래 하후씨였을 수도 있단 기록에 기반해 친척일 가능성이 있는 경우고, 조인과 조홍은 조조와 확실한 인척이었는데도 하후돈보다 더 낮은 직위를 받았다.이걸 보면 단순히 가까운 관계라 높은 직위를 준게 아니란 걸 알 수 있다.[47] 김운회도 삼국지 해제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다.[48] 심지어 여기에 가담한 공주, 장막, 유대, 한복은 동탁이 임명한 관리이며 유표는 손견이 왕예를 살해한 후 조정에서 임명하였는데 시기를 보면 임명자가 동탁일 가능성이 있다.[49] 그 대신 여포가 놓고 간 방천화극을 던졌으나, 희대의 맹장 여포답게 그냥 손으로 툭 쳐서 떨어트려 버린다.[50] 임용한은 동탁이 뚱뚱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삼국시대 관련 프로그램에서 동탁이 정말 뚱뚱했는가에 대해 질문하자 "뚱뚱하면 말 못타요."라며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51]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수염도 적고 전혀 뚱뚱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오는데 동탁이 마른 모습으로 나오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