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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한반도 중북부와 남만주 일대에 위치해 있던 한국의 고대 군주제 국가이다.
한국사에서 역대 두번째로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로 개마무사로 대표되는 강력한 군사력이 먼저 생각나는 국가이다.
한국사에서 역대 두번째로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로 개마무사로 대표되는 강력한 군사력이 먼저 생각나는 국가이다.
2. 역사[편집]
2.1. 초기[편집]
사실 고구려는 기원전200년경 부터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37년 주몽(이하 동명성왕)와 거기에 살던 소서노와 혼인하여 압록강 일대에서 힘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3대왕 대무신왕(대주률왕)때는 낙랑군을 정복하는 등 위세를 떨친다. 그리고 6대 태조대왕때는 계루부 집권의 토대를 닦았으나 12대 동천왕때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침략해 고구려 방방곳곳을 해집는 바람에 위기를 맞고 14대 봉상왕때는 왕의 폭정으로 장기간 주춤해 진다.
그래도 고구려의 국상 명림답부가 봉상왕을 몰아내서 왕의 조카인 을불을 왕위에 옹립하니 그가 미천왕이다. 미천왕은 태조대왕이후로 하지못한 정복사업을 단행한다,311년 서안평을 정복해 낙랑군을 완전히 굴복시켰으며 옥저,동예도 굴복 시켰다.
그래도 고구려의 국상 명림답부가 봉상왕을 몰아내서 왕의 조카인 을불을 왕위에 옹립하니 그가 미천왕이다. 미천왕은 태조대왕이후로 하지못한 정복사업을 단행한다,311년 서안평을 정복해 낙랑군을 완전히 굴복시켰으며 옥저,동예도 굴복 시켰다.
2.2. 전성기[편집]
미천왕의 아들인 고국원왕이 왕이 되었다 고국원왕은 방비를 강화 하는등 노력을 많이 했지만 비판 받는점은 아버지 미천왕이 유리하게 깔아놓은 판도를 말아먹을걸 말할수 있겠다 후연군이 처들어 와서 아버지 미천왕의 릉을 해집지 않나 백제의 근초고왕의 평양 정벌때 전사하지 않나, 참으로 불운한 왕이었다.
그래도 이노답 산골국가 고구려를 구원해줄 구세주는 있었다 소수림왕 이었다. 소수림왕은 373년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을 공고히 하고 교육기관인 태학을 양성했다, 그리고 율령[23]을 반포 하는등 고구려를 살려냈다.
소수림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동생 고국야왕이 즉위하고 죽자, 고국야왕의 아들인 광개토대왕이 즉위했다. 이후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시킨다.
그래도 이노답 산골국가 고구려를 구원해줄 구세주는 있었다 소수림왕 이었다. 소수림왕은 373년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을 공고히 하고 교육기관인 태학을 양성했다, 그리고 율령[23]을 반포 하는등 고구려를 살려냈다.
소수림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동생 고국야왕이 즉위하고 죽자, 고국야왕의 아들인 광개토대왕이 즉위했다. 이후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시킨다.
2.3. 후기[편집]
3. 군사[편집]
4. 사회[편집]
[1] 5세기 말 쌍영총 연도동벽화 거마행렬도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고선지 실크로드 개척사-기창을 든 개마갑주무사와 석반부철모' 원전 이미지와 복원 이미지 발췌. 《삼국사기》 근초고왕 본기에서는 "고구려 군대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수를 채운 가짜 병사입니다. 그 중 날쌔고 용감한 병사는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니, 만일 그들을 먼저 쳐부수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악 3호분 벽화에서도 기수가 붉은 색 깃발을 들고 있으며 개마무사 부대가 붉은 깃발을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붉은 색 깃발을 군기(軍旗)로 사용한 것은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고구려의 국기(國旗)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시대의 깃발을 근대적인 국기의 성격과 동일시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도 있다.[2] 고구려 건국 연도에 대한 다른 견해는 고구려/역사 문서의 건국 연도 항목 참조.[3] 엄밀히 얘기하면 현도군은 지역민들의 반발로 기원전 75년경 치소인 고구려현을 포함하여 흥경 일대로 이현하였고, 이후 압록강 유역에는 비류, 졸본, 조나, 구다 등의 소국들이 군장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후 졸본 지역에서 부여계 유민인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보고 있다.[4] 소고구려의 실존여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5] 동명성왕 ~ 동명성왕.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삼국유사》 <고구려>편 기록. 두 기록에 따르면 동명왕은 처음엔 국호를 졸본부여로 한 것으로 나온다. 반면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는 아예 처음부터 국호가 고구려로 정해진 것으로 나온다.[6] 동명성왕 ~ 장수왕. 구려, 고리 등. 초기 고(구)려는 신라처럼 국가명이 공인된 한자 표기가 없었고 구전으로만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7] 장수왕 ~ 보장왕. 이 국호는 고구려 멸망 후에도 700년 동안 발해 고왕, 태봉 궁예, 고려 태조가 이어갔으며, 그 이후에도 한자문화권 밖의 전 세계에서 한국의 대외적인 명칭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만일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가 최근의 연구 결과대로 광개토대왕 대에 세워진 것이라면 '고려' 국호는 광개토대왕 대부터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8] 영남의 신라와 그 주변부 그리고 거란이나 실위, 말갈 등 내몽골, 흑룡강성, 연해주 남부의 유목, 수렵인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했었다. 고고학자 손보기는 몽골 동남부 수흐바타르 아이막의 다리 강가에서 고구려 유적으로 가늠되는 유적들을 발견한 바 있다. # 장수왕 대에 유연과의 지두우 지역 분할 시도와 연관짓기도 하는데 다만 후속 연구는 수십년 째 전무하다.[9] 건국 당시 내륙 국가였던 고구려가 비로소 서해로 진출하게 되었다. 서해 진출의 의의는 중국, 백제 방향으로의 진출이 해상으로도 가능해졌다는 것이며, 고구려가 수군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반면 고구려가 동해안 방면으로 진출하게 된 때는 57년 옥저를 복속했을 때이다.[10]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한 후,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설치된 이래로 장장 400여년간 지속되었던 한족의 지배를 청산한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한 것이다. 한사군을 완전히 축출한 것은 404년 광개토대왕때지만, 광개토대왕이 마지막으로 축출한 현도군은 이미 요동 지역으로 옮겨진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고구려의 영토 밖에 있었다. 따라서 현도군은 축출했다기 보다는 침공해서 점령에 성공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다. 이 사건이 백제에 끼친 영향력도 상당한데, 낙랑군·대방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오던 백제는 낙랑인과 대방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대량으로 흘러들어온 신진 문물을 바탕으로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훗날 백제가 일본으로 문화를 전파할 기틀을 이때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사건이 한반도 역사에 끼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11] 광개토대왕릉비에는 홀본으로 기록됨.[12] →환도성→국내성[13] →장안성. 국내성-환도성은 평시 수도-전시 수도의 개념으로 거의 일체화되어 있었으며, 고구려 장안성은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과 동일하게 평양에 위치한 성이기에 애초에 《삼국사기》부터 '장안성은 평양성이라고도 한다'며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장안성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기록엔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하여 국내성, 평양성의 순서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같은 책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하고, 유리왕 대에 국내성(국내 위나암)으로 천도한 후 산상왕 대에 환도성으로 천도했고, 이후 동천왕 대에 조위의 관구검의 침공으로 환도성이 불타 평양성(장수왕 대의 평양성과는 다른 곳으로, 《삼국사기》 <지리지>의 남평양이 이곳일 가능성이 있다.)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후 고국원왕 대에 국력을 회복하여 국내성을 수리하고 환도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겨오나, 전연의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평양 동쪽 황성(혹은 평양 동황성)으로 도읍을 옮겨갔다. 이후 장수왕 대에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평원왕 대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겨 멸망할 때까지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14] 《요사》 <지리지>에는 국내성 수도 시절 변란 때 임시 수도였던 환도성이 고구려의 중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기록은 '환도'(丸都)의 '환'(丸)을 '중'(中)으로 잘못 표기한 기록으로 보인다.[15] 고구려족, 옥저, 부여 등.[16] 흑수말갈, 속말말갈 등.[17] 고구려/종교, 무교 항목 참고[18] 소수림왕 시기부터[19] 연개소문 시기부터[20] 연개소문 집권 이후부터 고구려 멸망 전까지[21] 말기 고구려의 실질적 권력자이자 독재자.[22] 소노부 → 계루부. 건국 초기에는 소노부의 권력이 막강해 계루부와 서열 다툼이 있었으나, 제6대 태조대왕 또는 그 이후로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소노부 또는 태조대왕 이전 국왕들이 해(解)씨 였다는 주장은 해씨 고구려설 문서 참조.[23] 왕의 명령하에 이루어지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