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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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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평가3. 여담


파일:예종창릉.jpg
창릉 능침

1. 개요[편집]

예종은 조선의 8대 왕이다.

2. 평가[편집]

아버지 세조가 공신들을 적절히 솎아내지 않고 우대하여 공신들의 위세가 높았으나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고 강한 왕권을 휘두른 것에 감명받아 왕권 강화에 힘썼다. 이 와중에 장인이자 권신인 한명회와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그래서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배후에 항상 한명회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따라다닌다. 예종 사후에 왕위를 둘째 조카인 성종이 이어받았으며 성종도 한명회의 사위라는 것이 한명회가 살해했다고 의심받는 근거인데, 사실 그 외에는 딱히 이렇다 할만한 근거는 없다.

또한 강력한 왕권을 기본으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려고 하는 모습도 보였고 그러한 정책들을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이나 배짱은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예종이 실제 역사보다 훨씬 오래 살아 즉위 직후로부터 10년 넘게 왕위에 있었다면 아버지인 세조보다 훨씬 나은 왕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아버지를 지나치게 칭송한 점 때문에 윤리적인 면에서 비판을 받는다. 물론 충=효 개념이 강한 시대고 효성이 지극한 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걸 감안해도 아버지가 그 때 당시 민중들과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을 줄 정도로 끔찍한 패륜을 저질렀는데도 아버지를 지나치게 찬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버지에게 '세조'라는 묘호를 주었는데 원래 세조의 묘호는 신종, 예종, 성종 중 하나가 될 예정이었던 것을 세조로 고치고 시호도 굉장히 길게 바친다. 세조라는 묘호가 본래 세종보다도 더욱 뛰어난 명군에게 바치는 묘호임을 감안하면, 예종은 효성이 필요 이상으로 지극했던 나머지 의도치 않게나마 할아버지에게 고인드립을 저지른 셈이다. 그리고 예종이 이렇게 선례를 만들어버린 탓에 후대 조선에서는 '조'를 남발하게 된다.

3. 여담[편집]

예종은 흔히 병약하고 존재감이 옅은 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알고 보면 강단 있고 결단력 넘치는 군주였다.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남긴 인상만큼은 ‘짧고 굵게’ 확실했다.

예종은 어릴 때부터 무예를 좋아하고 군사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성격이 다소 급한 편이라, 신하들이 건방지거나 헛소리를 하면 "뭐라고?" 하며 바로 제압하는 강단을 보였다. 그렇다고 마구 화를 내는 왕은 아니었고, 오히려 신하들과 협조하며 정치를 안정시키려 했다. 다만, 필요할 때는 망설임 없이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는 점에서 ‘카리스마 왕’이라고 불릴 만했다.

즉위하자마자 왕권 강화를 위해 숙청을 단행했는데, 세조 때 기세등등하던 권신들도 예종 앞에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 다 쓸어버리자’는 식이 아니라, 조정 균형을 맞추려는 현실적인 조치였다. 한명회 같은 최고 실세들도 예종 앞에서는 말을 가려 했다는 후문.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던 예종은 즉위한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쉽게도 오래 버티지 못했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보여준 결단력과 리더십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예종은 ‘불같은 성격’보다는 ‘단호한 카리스마’로 기억될 만한 왕이었다. 그리고 조선 역사에서 가장 짧고 굵게 존재감을 각인시킨 왕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