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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세조는 조선의 7대 왕이다.
2. 비판[편집]
2.1. 계유정난을 통한 즉위[편집]
2.1.1. 정통성에 맞지 않는 즉위 과정[편집]
세조 치적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왕권 강화에 기반을 다졌다는 것은 단종을 몰아내고 아무런 명분도 없이 자신 스스로 즉위했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어서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흔히 세조를 태종에 비교 하는데, 세조와 태종은 명분과 그 행동 사이즈가 차이가 컸다. 특히 태종 시절에 경우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앉히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사실상 명분도 태종에게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우선 차장자인 형 이방과를 왕으로 앉힌 후에 정당한 세자책봉을 통해 집권하면서 집권의 명분을 치밀하고 착실하게 만들었다.
태종과는 다르게 세조가 단순히 배신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이유는 여기 있다. 명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단종의 정치 기반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 조정에 충신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종과 문종때 워낙 잘 길을 닦아 놔서 적정수준의 간신과 충신이 섞여 있었다. 단종이 단명했기 때문에 그 치적을 알 수 없으나 원래대로 단종이 계속 이어 나갔다면, 앞서 언급한 정통성 문제 또한 해결이 되고(문종에 이어 2대째 장남이 이어가는 상황), 단종 본인만 조심하면 문종 때까지 이어졌던 강화된 왕권이 흔들릴 이유도 없기 때문에 지지 기반을 보나 환경을 보더라도 더 나았을 것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유일한 단점은 단종이 너무 어렸다는 것인데, 그당시가 조선이 개국하고 고작 5대째였다는 것을 감안해 보자. 성인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적은 나이라고만 보기도 어려웠다. 물론 국정 수행 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것이기에 좋은 스승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쫒아낸 조카 단종은 조선 시대 통틀어 가장 정통성이 충분했던 군주 중 한 명이였다. 그런 단종을 딱히 능력을 검증할 틈도 안주고 하늘나라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이런 단종에 대한 아쉬움 역시 세조의 평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태종과는 다르게 세조가 단순히 배신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이유는 여기 있다. 명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단종의 정치 기반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 조정에 충신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종과 문종때 워낙 잘 길을 닦아 놔서 적정수준의 간신과 충신이 섞여 있었다. 단종이 단명했기 때문에 그 치적을 알 수 없으나 원래대로 단종이 계속 이어 나갔다면, 앞서 언급한 정통성 문제 또한 해결이 되고(문종에 이어 2대째 장남이 이어가는 상황), 단종 본인만 조심하면 문종 때까지 이어졌던 강화된 왕권이 흔들릴 이유도 없기 때문에 지지 기반을 보나 환경을 보더라도 더 나았을 것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유일한 단점은 단종이 너무 어렸다는 것인데, 그당시가 조선이 개국하고 고작 5대째였다는 것을 감안해 보자. 성인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적은 나이라고만 보기도 어려웠다. 물론 국정 수행 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것이기에 좋은 스승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쫒아낸 조카 단종은 조선 시대 통틀어 가장 정통성이 충분했던 군주 중 한 명이였다. 그런 단종을 딱히 능력을 검증할 틈도 안주고 하늘나라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이런 단종에 대한 아쉬움 역시 세조의 평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2.1.1.1. 정통성이 문제가 된 이유[편집]
태종은 무인정사로 아버지 태조의 정치적 입지를 몰아내고 즉위했지만 형제들 중 가장 건국의 공로가 컸기에 명분이 충분했다. 무인정사의 명분이 장자계승이었기 때문에 그 공로만으로는 명분이 충분치 않았지만 형 정종이 적자를 보지 못했고 회안대군이 섣불리 나서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을 잃었기에 별 문제 없이 즉위할 수 있었다. 성종은 친형 월산대군과 예종의 적자이자 4살인 어린 제안대군을 제치고 예종의 뒤를 이었지만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가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하였기 때문에 정통성이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 또한, 제안대군은 세종의 아들이었던 5촌 당숙인 평원대군의 봉사손으로 출계함으로써 직계 왕위와 한참 멀어졌고, 성종은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 대왕(德宗大王)으로 사후 추존하여 정통성을 높이고자 했다.
그러나 세조의 적장손이자 덕종(의경세자)의 적장자 월산대군의 정통성은 성종보다 우월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정희왕후의 지명 정도로 무마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정통성 문제는 두고두고 성종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에 성종은 세종과 두 형인 양녕대군, 효령대군의 전례대로 친형인 월산대군을 배척하거나 귀양보내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또한 신하들을 무력으로 다스리지 않고 아끼고 잘 대해주어 자기 사람으로 만들면서 정통성 문제도 점차 누그러지게 되었다. 사실 신하와 백성들 모두가 존경하고 우러러 보는 성군이 되는 게 강력한 정통성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당장에 세종도 맏형인 양녕대군이 워낙 초막장이라 그렇지 바로 위의 형인 효령대군은 조용히 지낸지라 그와는 딱히 정통성 측면에서 유리할 것도 없었지만 정치를 잘 했기에 아무도 이의를 걸지 않았다.
인조는 인조반정으로 공을 세워 즉위하였지만, 선조의 서자이자 다섯째 정원군의 아들이기 때문에 장자, 적자계승을 모두 어겼기 때문에 조선 왕 중 가장 정통성이 부족하다. 또한 선조의 양자로 즉위해 놓고선 친부 정원대원군을 원종 대왕(元宗大王)으로 추존해 정통성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인조의 정통성이 저평가받지 않는 이유는 이후 왕들이 전부 인조의 직계후손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인조반정의 명분도 적어도 세조에 비해서는 훨씬 충분했다.
정원군의 동복형 의안군과 신성군은 후사 없이 선조 치세(1567-1608)에 요절했고, 영창대군은 이복형 광해군에게 어린 나이(9세)에 의문스럽게 살해당했다. 게다가 신성군은 세자 후보이기도 했었고, 인조반정 당시 인조의 직접적인 공로와 명분이 확실했기에 정원군의 혈통이 인조에게 걸림돌이 되지도 않았고 명의 고명 책봉을 받은 이후 인조의 정통성은 문제시되지 않았다. 또한 정원군을 추존왕인 '원종(元宗)'으로 추존한다는 것은 선조-원종-인조의 대통을 하나로 이음으로써 정통성을 강화하겠다는 뜻이었고, 추존할 명분이 취약해 크게 비난받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정통성을 내치는 짓과는 거리가 있었다.
반면에 세조는 장자계승은 어겼지만 적자이자 차남이기 때문에 '직계승통(直係承統)'으로 넘어갈 만하다. 적자>서자, 장자>차자>…라는, 즉 적장자와 그 자손 부재 시 적자이자 차남인 게 정통성으로 작용한다는 것 자체가 장자계승의 논리이다. 조카 단종을 명분 없이 내쳐 장자계승을 어겼지만 장자계승을 통해 명분을 얻었다는 것은 모순 그 자체다. 특히나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는 조의제문이 사화의 발단이 된 예가 있듯이 실록에 있어 조카의 왕위 찬탈 및 살해라는 패륜 행위로 왕이 된 세조에 대한 부분만은 당시로서는 더욱 예민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간단히 생각해봐도 만약 후대 임금에서 세조의 찬탈과 시역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현 왕의 왕위 정통성 부정→ 역모→ 숙청' 루트일 텐데 저 난폭하고 거칠 것 없는 세조 본인의 시대에는 실록의 기록에 대한 감시는 단언컨대 조선 왕조 기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살벌했을 것이다. 심지어는 사관이 배속되어 있었을 리 만무한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심복들과 나눈 대화가 실려 있는 게 바로 《단종실록》이다. 이를 두고 《조선국왕 이야기》의 저자 임용한 교수는 《단종실록》에 대해 '《단종실록》은 《세조실록》의 예고편이다'라는 촌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은 태종의 신하들이 편찬한 《태조실록》처럼 수양 일파의 사관이 철저히 반영된 총체적 편집물이라는 것을 감안을 하고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야 하며, 계유정난과 세조의 찬탈에 이르는 역사는 역사 해석을 실록에만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후대의 사림파들은 세조가 조선 역사상 가장 정통성이 부족한 왕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세조의 적장손이자 덕종(의경세자)의 적장자 월산대군의 정통성은 성종보다 우월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정희왕후의 지명 정도로 무마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정통성 문제는 두고두고 성종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에 성종은 세종과 두 형인 양녕대군, 효령대군의 전례대로 친형인 월산대군을 배척하거나 귀양보내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또한 신하들을 무력으로 다스리지 않고 아끼고 잘 대해주어 자기 사람으로 만들면서 정통성 문제도 점차 누그러지게 되었다. 사실 신하와 백성들 모두가 존경하고 우러러 보는 성군이 되는 게 강력한 정통성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당장에 세종도 맏형인 양녕대군이 워낙 초막장이라 그렇지 바로 위의 형인 효령대군은 조용히 지낸지라 그와는 딱히 정통성 측면에서 유리할 것도 없었지만 정치를 잘 했기에 아무도 이의를 걸지 않았다.
인조는 인조반정으로 공을 세워 즉위하였지만, 선조의 서자이자 다섯째 정원군의 아들이기 때문에 장자, 적자계승을 모두 어겼기 때문에 조선 왕 중 가장 정통성이 부족하다. 또한 선조의 양자로 즉위해 놓고선 친부 정원대원군을 원종 대왕(元宗大王)으로 추존해 정통성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인조의 정통성이 저평가받지 않는 이유는 이후 왕들이 전부 인조의 직계후손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인조반정의 명분도 적어도 세조에 비해서는 훨씬 충분했다.
정원군의 동복형 의안군과 신성군은 후사 없이 선조 치세(1567-1608)에 요절했고, 영창대군은 이복형 광해군에게 어린 나이(9세)에 의문스럽게 살해당했다. 게다가 신성군은 세자 후보이기도 했었고, 인조반정 당시 인조의 직접적인 공로와 명분이 확실했기에 정원군의 혈통이 인조에게 걸림돌이 되지도 않았고 명의 고명 책봉을 받은 이후 인조의 정통성은 문제시되지 않았다. 또한 정원군을 추존왕인 '원종(元宗)'으로 추존한다는 것은 선조-원종-인조의 대통을 하나로 이음으로써 정통성을 강화하겠다는 뜻이었고, 추존할 명분이 취약해 크게 비난받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정통성을 내치는 짓과는 거리가 있었다.
반면에 세조는 장자계승은 어겼지만 적자이자 차남이기 때문에 '직계승통(直係承統)'으로 넘어갈 만하다. 적자>서자, 장자>차자>…라는, 즉 적장자와 그 자손 부재 시 적자이자 차남인 게 정통성으로 작용한다는 것 자체가 장자계승의 논리이다. 조카 단종을 명분 없이 내쳐 장자계승을 어겼지만 장자계승을 통해 명분을 얻었다는 것은 모순 그 자체다. 특히나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는 조의제문이 사화의 발단이 된 예가 있듯이 실록에 있어 조카의 왕위 찬탈 및 살해라는 패륜 행위로 왕이 된 세조에 대한 부분만은 당시로서는 더욱 예민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간단히 생각해봐도 만약 후대 임금에서 세조의 찬탈과 시역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현 왕의 왕위 정통성 부정→ 역모→ 숙청' 루트일 텐데 저 난폭하고 거칠 것 없는 세조 본인의 시대에는 실록의 기록에 대한 감시는 단언컨대 조선 왕조 기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살벌했을 것이다. 심지어는 사관이 배속되어 있었을 리 만무한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심복들과 나눈 대화가 실려 있는 게 바로 《단종실록》이다. 이를 두고 《조선국왕 이야기》의 저자 임용한 교수는 《단종실록》에 대해 '《단종실록》은 《세조실록》의 예고편이다'라는 촌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은 태종의 신하들이 편찬한 《태조실록》처럼 수양 일파의 사관이 철저히 반영된 총체적 편집물이라는 것을 감안을 하고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야 하며, 계유정난과 세조의 찬탈에 이르는 역사는 역사 해석을 실록에만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후대의 사림파들은 세조가 조선 역사상 가장 정통성이 부족한 왕이라고 평가한다.
2.2. 패륜/도를 넘는 숙청 행위[편집]
동생들과 조카, 서모와 사돈 송현수를 죽였다.
먼저 형제 관계에서도 친형인 문종에게 엄청난 불경을 저질렀다. 계유정난 때 병조판서 민신을 살해하는데, 이 때 살해당하는 장소가 형 문종의 무덤인 현릉 비석소(비석을 관리하는 곳)였다. 말이 비석소지 비석소를 보통 무덤 근처에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면, 형의 무덤에서 사람을 죽여버린 것이다. 현대 기준으로도 고인 모욕급 행동이고, 당시기준으로는 저주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또한, 문종의 정실이자 자신의 형수인 현덕왕후 권씨의 친정 일가가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자, 현덕왕후를 폐서인하고 무덤을 현릉에서 파헤쳐 평민의 무덤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당시 현덕왕후는 남편이자 세조의 친형인 문종과 이미 합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형수에게도 불경을 범한 것인 데다, 애꿎은 형이자 선왕에게까지도 패륜과 무례를 범한 셈이다. 이것 때문에 세조가 너무나도 잘난 엄친아 형이었던 문종에게 어릴 적부터 심한 열등감과 그에 따른 자격지심을 가졌던 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게다가 현덕왕후의 무덤을, 무덤터로는 최악인, 범람이 잦고 습한 지역으로 이장해버렸다. 이를 두고, 세조가 단종을 죽인 뒤에 형수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걸었고, 이 때문에 의경세자가 일찍 죽었다는 야사까지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 의경세자는 사촌동생 단종보다 일찍 요절했기에 이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태종조차 확실히 반란을 일으켜 시가전까지 만든 동복형을 살려주었으나 세조는 반란 혐의만으로 동복형제들까지 살해하는 짓을 저질렀다. 자기 기준에서 세조의 찬탈 행위를 방해 혹은 반대했다는 이유로 계유정난 때 사살한 역적이나 사육신 등 역모[5]가 있었다고 해도 조카 단종은 정통성이 높았다. 명신인 황보인, 김종서 등 대신들을 아무런 명분도 없이 그냥 살해했는데 김종서 또한 청렴결백하고 흠잡을 이유가 없고 북방 개척, 뛰어난 행정 능력, 《고려사》 편찬까지 한, 아버지 세종이 신임하던 명신들 중 1명이다. 정분 또한 두 사람에 비해 행정 능력은 딸리지만 토목 사업이나 건축에는 업적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건축물을 설계한 공도 있었다. 이러한 명망높은 대신들을 아무런 이유없이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죽여댄 것이다.
이복동생들(한남군, 수춘군, 영풍군)도 단종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죽이고 식솔을 노비로 부리는 잔학한 면모도 있었고, 세종의 후궁으로 자기에게는 서모에 해당하는 혜빈 양씨 또한 찬하려던 것을 막으려 하자 그녀도 죽여버렸다. 그것도 강제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로 만들어서 절로 내쫓은 다음에 목숨을 빼앗은 것이다. 친조카인 단종까지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세조인데, 심지어는 친동생 안평대군의 양어머니이자 자신의 친숙모였던 성녕대군 부인을 양자를 두둔한다는 이유만으로 폐서인시키는 짓도 서슴치 않고 벌였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성녕대군의 장례식 때 양녕대군은 활쏘기와 음주가무 중이었고 참고 참던 아버지 태종조차 "세자는 이제는 사람의 마음이 없다."고 분노했다. 그런데 양녕대군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적극 지지했다. 한마디로 존속살해에 전혀 거리낌없이 할아버지 태종조차 정치적 목적 없으면 하기를 꺼린 일을 예사로 해댄 희대의 패륜아다. 조선의 역사상 자기의 작은 어머니, 이복형제에 더해서 동복형제까지 이렇게 마음대로 다 죽여버리고 작은 어머니를 폐서인시키는 왕은 세조 이외에는 없었다.
세조가 가장 까이는 부분은 조카 단종 관련 문제이다. 단종은 사육신 사건 때 사육신들에게 도움을 준 것이 발각되어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제로 강등당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갔다가 그 곳에서 어린 나이(16~17세)에 사약을 받았다. 하다 못해 세조 사후에 집권하여 후세에게 암군이라고 자주 비난받는 인조조차도 전 국왕이던 광해군을 죽이지 않고 멀리 제주도로 유배 보내는 선에서 그쳤는데 세조는 친조카를 살해했을 뿐 아니라 시체 수습도 안하고 야생동물들이 뜯어먹게 방치하는 짓을 저질렀다. 하지만 정작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종이 자살해서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고 적어놓는 씨알도 안 먹힐 역사왜곡까지 대놓고 해놨다. 훗날 중종 때 노산군(단종)의 묘소 정비를 시작하면서 단종의 최후에 대한 전모가 드러났다. 중종 대 유학자 음애 이자는 《음애잡기》에 세조실록의 기록들은 쥐새끼와 여우새끼들이 아첨을 하는 간사한 붓장난이니, 이에 속지 말라고 대놓고 까버리는 글을 적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단종을 시해한 뒤에는 왕실 족보인 《선원보략》에서 파 버리는 짓도 벌였다. 바로 적장자 단종을 살아있을 때는 문종의 서자로 만들어 버린 뒤 사후에는 서자 아래인 사생아로까지 격하시킨 것. 이래놓고 왕위 찬탈 전에는 자기 측근들을 시켜서 자신을 삼촌으로 어린 주성왕을 보필했던 주공단에 비유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도 보였다.
친족은 아니지만 세조 본인과 매우 가까운 왕실의 인척도 방해가 되면 가리지 않고 죽인 전적도 있다. 단종의 장인어른이자 정순왕후의 아버지 여량부원군 송현수는 단종복위운동에 휘말려 사사당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은 세조 본인과 매우 절친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그가 단종의 장인이 된 것도 세조의 영향이 매우 컸는데 송현수 입장에서는 옛 속담처럼 모진 놈과 친했다가 정말 날벼락 맞은 격이다.
원천석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태종을 가르친 스승이다. 태종이 저지른 왕자의 난 때문에 제자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져서 자신을 만나러 며칠을 기다리는 태종을 피해 도망다닐 정도였는데, 후에 상왕으로 은거한 태종의 부름에 마지 못해 만나러 왔다. 이 때 태종이 스승에게 자신의 손자들을 직접 소개시켜 주었는데 노인이 아직 어린 세조를 보고 "조부를 닮았는데 부디 형제를 사랑해라." 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다. 오죽하면 이런 야사가 남아있을까? 그리고 태종의 스승이었기에 원천석에게 관직을 주었으나 모두 거절하였고 나중에는 태종이 직접 스승을 만나러 강원도 원주의 치악산까지 찾아가는데 이를 알고 원천석이 미리 피했고 결국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치악산을 가보면 태종이 행차했던 길이나 잠시 앉아있던 곳이 남아있다.
먼저 형제 관계에서도 친형인 문종에게 엄청난 불경을 저질렀다. 계유정난 때 병조판서 민신을 살해하는데, 이 때 살해당하는 장소가 형 문종의 무덤인 현릉 비석소(비석을 관리하는 곳)였다. 말이 비석소지 비석소를 보통 무덤 근처에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면, 형의 무덤에서 사람을 죽여버린 것이다. 현대 기준으로도 고인 모욕급 행동이고, 당시기준으로는 저주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또한, 문종의 정실이자 자신의 형수인 현덕왕후 권씨의 친정 일가가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자, 현덕왕후를 폐서인하고 무덤을 현릉에서 파헤쳐 평민의 무덤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당시 현덕왕후는 남편이자 세조의 친형인 문종과 이미 합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형수에게도 불경을 범한 것인 데다, 애꿎은 형이자 선왕에게까지도 패륜과 무례를 범한 셈이다. 이것 때문에 세조가 너무나도 잘난 엄친아 형이었던 문종에게 어릴 적부터 심한 열등감과 그에 따른 자격지심을 가졌던 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게다가 현덕왕후의 무덤을, 무덤터로는 최악인, 범람이 잦고 습한 지역으로 이장해버렸다. 이를 두고, 세조가 단종을 죽인 뒤에 형수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걸었고, 이 때문에 의경세자가 일찍 죽었다는 야사까지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 의경세자는 사촌동생 단종보다 일찍 요절했기에 이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태종조차 확실히 반란을 일으켜 시가전까지 만든 동복형을 살려주었으나 세조는 반란 혐의만으로 동복형제들까지 살해하는 짓을 저질렀다. 자기 기준에서 세조의 찬탈 행위를 방해 혹은 반대했다는 이유로 계유정난 때 사살한 역적이나 사육신 등 역모[5]가 있었다고 해도 조카 단종은 정통성이 높았다. 명신인 황보인, 김종서 등 대신들을 아무런 명분도 없이 그냥 살해했는데 김종서 또한 청렴결백하고 흠잡을 이유가 없고 북방 개척, 뛰어난 행정 능력, 《고려사》 편찬까지 한, 아버지 세종이 신임하던 명신들 중 1명이다. 정분 또한 두 사람에 비해 행정 능력은 딸리지만 토목 사업이나 건축에는 업적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건축물을 설계한 공도 있었다. 이러한 명망높은 대신들을 아무런 이유없이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죽여댄 것이다.
이복동생들(한남군, 수춘군, 영풍군)도 단종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죽이고 식솔을 노비로 부리는 잔학한 면모도 있었고, 세종의 후궁으로 자기에게는 서모에 해당하는 혜빈 양씨 또한 찬하려던 것을 막으려 하자 그녀도 죽여버렸다. 그것도 강제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로 만들어서 절로 내쫓은 다음에 목숨을 빼앗은 것이다. 친조카인 단종까지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세조인데, 심지어는 친동생 안평대군의 양어머니이자 자신의 친숙모였던 성녕대군 부인을 양자를 두둔한다는 이유만으로 폐서인시키는 짓도 서슴치 않고 벌였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성녕대군의 장례식 때 양녕대군은 활쏘기와 음주가무 중이었고 참고 참던 아버지 태종조차 "세자는 이제는 사람의 마음이 없다."고 분노했다. 그런데 양녕대군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적극 지지했다. 한마디로 존속살해에 전혀 거리낌없이 할아버지 태종조차 정치적 목적 없으면 하기를 꺼린 일을 예사로 해댄 희대의 패륜아다. 조선의 역사상 자기의 작은 어머니, 이복형제에 더해서 동복형제까지 이렇게 마음대로 다 죽여버리고 작은 어머니를 폐서인시키는 왕은 세조 이외에는 없었다.
세조가 가장 까이는 부분은 조카 단종 관련 문제이다. 단종은 사육신 사건 때 사육신들에게 도움을 준 것이 발각되어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제로 강등당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갔다가 그 곳에서 어린 나이(16~17세)에 사약을 받았다. 하다 못해 세조 사후에 집권하여 후세에게 암군이라고 자주 비난받는 인조조차도 전 국왕이던 광해군을 죽이지 않고 멀리 제주도로 유배 보내는 선에서 그쳤는데 세조는 친조카를 살해했을 뿐 아니라 시체 수습도 안하고 야생동물들이 뜯어먹게 방치하는 짓을 저질렀다. 하지만 정작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종이 자살해서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고 적어놓는 씨알도 안 먹힐 역사왜곡까지 대놓고 해놨다. 훗날 중종 때 노산군(단종)의 묘소 정비를 시작하면서 단종의 최후에 대한 전모가 드러났다. 중종 대 유학자 음애 이자는 《음애잡기》에 세조실록의 기록들은 쥐새끼와 여우새끼들이 아첨을 하는 간사한 붓장난이니, 이에 속지 말라고 대놓고 까버리는 글을 적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단종을 시해한 뒤에는 왕실 족보인 《선원보략》에서 파 버리는 짓도 벌였다. 바로 적장자 단종을 살아있을 때는 문종의 서자로 만들어 버린 뒤 사후에는 서자 아래인 사생아로까지 격하시킨 것. 이래놓고 왕위 찬탈 전에는 자기 측근들을 시켜서 자신을 삼촌으로 어린 주성왕을 보필했던 주공단에 비유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도 보였다.
친족은 아니지만 세조 본인과 매우 가까운 왕실의 인척도 방해가 되면 가리지 않고 죽인 전적도 있다. 단종의 장인어른이자 정순왕후의 아버지 여량부원군 송현수는 단종복위운동에 휘말려 사사당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은 세조 본인과 매우 절친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그가 단종의 장인이 된 것도 세조의 영향이 매우 컸는데 송현수 입장에서는 옛 속담처럼 모진 놈과 친했다가 정말 날벼락 맞은 격이다.
원천석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태종을 가르친 스승이다. 태종이 저지른 왕자의 난 때문에 제자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져서 자신을 만나러 며칠을 기다리는 태종을 피해 도망다닐 정도였는데, 후에 상왕으로 은거한 태종의 부름에 마지 못해 만나러 왔다. 이 때 태종이 스승에게 자신의 손자들을 직접 소개시켜 주었는데 노인이 아직 어린 세조를 보고 "조부를 닮았는데 부디 형제를 사랑해라." 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다. 오죽하면 이런 야사가 남아있을까? 그리고 태종의 스승이었기에 원천석에게 관직을 주었으나 모두 거절하였고 나중에는 태종이 직접 스승을 만나러 강원도 원주의 치악산까지 찾아가는데 이를 알고 원천석이 미리 피했고 결국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치악산을 가보면 태종이 행차했던 길이나 잠시 앉아있던 곳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