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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개요[편집]
조선의 제21대 군주로 숙종과 인현왕후를 모시는 몸종이자 궁녀의 옷을 빨던 무수리 출신이었던 숙빈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왕실 최초이자 유일하게 왕세자(子)가 아닌 왕세제(弟)로서 왕위에 오른 국왕이다. 즉, 혈연적으로는 숙종의 아들로서 직계비속이지만 공식적으로는 경종의 이복동생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서출이자 방계로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에 큰 약점이 있었다. 모친 숙빈 최씨는 궁녀의 허드렛일을 도맡는 무수리 출신이다. 형 경종의 재위도중에 신임옥사가 일어나면서 죽을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1724년(영조 즉위년) 30세 다소 늦은 나이에 즉위했지만 영조의 치세는 장장 52년에 달했는데 이는 조선 왕사에 있어 최장 집권에 해당하며 역대 조선의 국왕 중 가장 장수한 군주이다.
탕평책을 위시한 영조의 전반적인 정치는 크게 성공적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영조의 가정사는 언제나 불행했다.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와는 자식이 없었고, 후궁(정빈 이씨)에게서 얻은 장남 효장세자는 10살도 채우지 못하고 까닭없이 요절했다. 뒤를 이어 후궁 영빈 이씨 사이에서 늦둥이 아들인 '이선(李愃)'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훗날에 사도세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영조는 돌도 지나지 않은 늦둥이 아들을 곧바로 세자로 책봉하였고, 아들이 젖먹이 유아이던 시절부터 과도한 학습을 강요하였다. 정서적인 학대를 당한 이선은 결국 정신병 증세를 보였고 각종 살인, 폭행, 음주가무 같은 기행을 일삼았다. 세손이 다음 왕위를 잇기 위해서 세자 폐위를 물릴 수 없었던 영조는 그러한 이선을 쌀담는 뒤주 속에 가둬 죽이는 극약처방을 내렸으니, 후계자를 뒤주에 넣어 아사(餓死)시킨 임오화변이다. 임오화변은 한국사 뿐만이 아니라 세계사적 측면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형태이자 희대의 비극적 왕실 스캔들 사건에 해당한다. 영조는 사건 당시 69세로 이미 조선의 역대 군왕 중 태조(향년 74세) 다음으로 최장수 국왕이었으며, 이후로도 14년의 기간 동안 조선을 더 다스려 최장수 국왕이 되었다.
아들의 죽음 이후로도 손자인 세손에 대한 영조의 애정은 너무나 각별했고, 그를 통해 300년 종사와 보위를 이을려는 생각도 확고했다. 국왕으로서 불가결했던 정통성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영조는 이산의 세손 책봉식 때 자신이 왕세제 책봉식에서 입었던 옷을 물려 입힐 만큼 그러한 과오를 다시 범하지 않기 위해 손자 정조한테는 정말 지극정성이었다.
왕실 최초이자 유일하게 왕세자(子)가 아닌 왕세제(弟)로서 왕위에 오른 국왕이다. 즉, 혈연적으로는 숙종의 아들로서 직계비속이지만 공식적으로는 경종의 이복동생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서출이자 방계로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에 큰 약점이 있었다. 모친 숙빈 최씨는 궁녀의 허드렛일을 도맡는 무수리 출신이다. 형 경종의 재위도중에 신임옥사가 일어나면서 죽을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1724년(영조 즉위년) 30세 다소 늦은 나이에 즉위했지만 영조의 치세는 장장 52년에 달했는데 이는 조선 왕사에 있어 최장 집권에 해당하며 역대 조선의 국왕 중 가장 장수한 군주이다.
탕평책을 위시한 영조의 전반적인 정치는 크게 성공적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영조의 가정사는 언제나 불행했다.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와는 자식이 없었고, 후궁(정빈 이씨)에게서 얻은 장남 효장세자는 10살도 채우지 못하고 까닭없이 요절했다. 뒤를 이어 후궁 영빈 이씨 사이에서 늦둥이 아들인 '이선(李愃)'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훗날에 사도세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영조는 돌도 지나지 않은 늦둥이 아들을 곧바로 세자로 책봉하였고, 아들이 젖먹이 유아이던 시절부터 과도한 학습을 강요하였다. 정서적인 학대를 당한 이선은 결국 정신병 증세를 보였고 각종 살인, 폭행, 음주가무 같은 기행을 일삼았다. 세손이 다음 왕위를 잇기 위해서 세자 폐위를 물릴 수 없었던 영조는 그러한 이선을 쌀담는 뒤주 속에 가둬 죽이는 극약처방을 내렸으니, 후계자를 뒤주에 넣어 아사(餓死)시킨 임오화변이다. 임오화변은 한국사 뿐만이 아니라 세계사적 측면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형태이자 희대의 비극적 왕실 스캔들 사건에 해당한다. 영조는 사건 당시 69세로 이미 조선의 역대 군왕 중 태조(향년 74세) 다음으로 최장수 국왕이었으며, 이후로도 14년의 기간 동안 조선을 더 다스려 최장수 국왕이 되었다.
아들의 죽음 이후로도 손자인 세손에 대한 영조의 애정은 너무나 각별했고, 그를 통해 300년 종사와 보위를 이을려는 생각도 확고했다. 국왕으로서 불가결했던 정통성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영조는 이산의 세손 책봉식 때 자신이 왕세제 책봉식에서 입었던 옷을 물려 입힐 만큼 그러한 과오를 다시 범하지 않기 위해 손자 정조한테는 정말 지극정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