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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나치 독일일본 제국이 아닌 중화민국과 동맹을 맺었다면?2.2. 진주만 공습 당시 항공모함들이 모두 진주만에 있었다면?2.3. 진주만 공습에서 일본군이 미군의 유류 저장고를 공격했다면?2.4.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승리했다면?2.5. 상하이 전투가 일본군의 패배로 끝났다면?2.6. 중일전쟁이 없었거나 늦게 일어났다면?2.7. 우호 작전이 없었다면?2.8. 니고 연구로 일본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했다면?2.9. 일제가 1944년에 항복했다면?2.10. 히로시마·나가사키를 포함해서 그 어느곳에서도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2.1. 나치 독일일본 제국이 아닌 중화민국과 동맹을 맺었다면?[편집]

중독합작은 실제로 10년 넘게 유지되었던 동맹관계였다.[1]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을 벌인 1차적인 이유가 미국의 금수조치 때문이었음을 고려하면 진주만 공습은 추축국 가입과는 별개로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만약 독일이 중일전쟁 국면에서 일본이 아닌 중국과의 동맹을 이어나갔다면 일본과는 적대관계가 되기에 미국의 유럽 전선 참전 양상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2] 또, 독일의 레벤스라움(소련)과 일본의 대동아공영권(태평양)이 사실상 동상이몽인 것과는 다르게 장제스의 국민당과 소련은 잠재적 적국이다. 일본과의 동맹이 독일에게 도움이 되기는 커녕 손해만 입혔다는 것을 생각해 볼때 나름 희망적인 시나리오로 보인다. 물론 중일전쟁 당시 중국은 국공합작 중이었기도 했고, 중국은 소련이나 독일 중 하나를 무작정 적대하진 않았다. 황포 군관 학교도 소련의 지원을 받아 건설했었다.

2.2. 진주만 공습 당시 항공모함들이 모두 진주만에 있었다면?[편집]

예정상 진주만 공습 당일 항공모함은 모두 4척이 진주만에 있어야 했다. 새러토가, 렉싱턴, 엔터프라이즈, 요크타운으로, 이 네 척은 모두 태평양 전쟁 초반부에 스스로를 갈아넣으며 적극적으로 싸운 수훈함들이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 당일 새러토가는 긴급 기관 문제 발생으로 샌디에이고 조병창에서 수리 중이었고, 문제의 엔터프라이즈는 폭풍이 와서 하루 늦게 입항하는 등 단 한 척도 진주만에 주재하지 않았다. 만약 이들이 진주만에 정상적으로 있었더라면 분명 참혹한 꼴을 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 큰 문제는 아닌데, 진주만 공습은 12월 7일이고 이들이 본격적으로 활약을 시작한 것은 이듬해 3월경부터이다. 진주만에서 항공모함들이 정박해 있을 곳은 얕은 동부 해안의 정박장이므로 이들이 폭탄을 맞았다고 해도 좌초 이상의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 보기 어려우며, 4개월이면 미국 입장에서 항공모함 네 척 수리할 시간으로는 충분하다. 리처드 딕 베스트[3]가 죽는 바람에 일본 항모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살아난다든지 하는 소설적인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면 별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2.3. 진주만 공습에서 일본군이 미군의 유류 저장고를 공격했다면?[편집]

사실상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원활히 이끌어 나갈 수 있는"[4] 방도는 이외에 찾기 힘들다. 일본군은 미군의 주력함대를 격멸하는 데에 집중하느라 유류 저장고를 파괴하기 전에 이미 탄약, 폭탄 등을 다 써 버렸고, 때문에 3차 공습으로 유류 저장고를 치려다가 중단하고 돌아왔다. 당시 미군의 유류 저장고는 태평양 함대 전체를 지탱하는 물자의 기둥이었고, 만약 일본군이 탄약이 넉넉하고 항공기들의 피로가 적어 3차 공습을 했더라면, 그래서 이것이 파괴되었다면 미군은 태평양 전쟁 진행에 심대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5]은 "미국의 석유 생산량이 막대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건 많지 않다"고 평하지만, 적어도 한 달 내지 두어 달 정도의 여유라도 벌 수 있다면 일본군은 남방작전을 끝마치지도 못한 채 미드웨이 해전을 감행할 필요성도 적어지고, 더 나아가서는 미 태평양 함대의 재건에 사용될 물자가 유류 공급에 돌려져야 하므로 어쨌든 미군의 기동력과 전투력을 심대하게 저하시킬 몇 안 되는 가능성의 길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어쨌든 일본군이 하와이를 점령하는 것은 무리고[6] 미군의 물량이 본격적으로 뽑히기 시작하면 일본군은 그걸 당해낼 방도가 없으므로, 어디까지나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미국과의 협상의 여지를 더 만드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2.4.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승리했다면?[편집]

만약 일본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을 먼저 포착하고 선제타격, 퇴각시키는 데 성공했다면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긴 했을 것이다. 히류의 요크타운 공격 성공에서 보다시피, 미드웨이 작전에 나선 나구모 주이치 예하 일본 항공모함들과 그 탑재 항공단은 미 항공모함들을 먼저 발견하면 모두 격침시킬 수 있는 역량과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미드웨이를 미군이 승리 했다는 결과론만 놓고 보는 경향 때문에 그렇지, 당시의 미군은 여기서 패배하면 뒤가 없는 상황에 항모격차를 줄이기 위해 산호해해전에서 타격을 입은 요크타운을 3일만에 긴급수리와 함선으로써 기능을 할 정도의 핵심적인 수리를 마친 뒤 투입시키고 미드웨이에 활주로 건설해 전투기를 배치하고 요새화를 하는 등 사활을 건 전투였기 때문,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작전목표는 미 해군에 대한 물리적 격멸이 아니라 미드웨이 섬에 대한 공격이었고, 상술했듯이 진주만 기습으로 하와이를 어마어마하게 요새화한 미군은 미드웨이에게도 충분한 요새화를 끝마쳐 두었다. 물론 하와이에 비하면 못하지만 미드웨이도 충분히 강한 요새고, 패배해 해상전력을 전부 잃지 않은 이상 일본군이 끌고 간 4척의 항공모함과 전함, 1만을 좀 넘는 상륙전력으로 감당할 수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완전히 궤멸했다면 미 해군 역시 앞으로의 전투에서 고전을 강요받았을 것이다. 우선 태평양 지역 연합군 반격의 첫 발인 과달카날 전역이 벌어지지 않거나 연기되어 과달카날에서 소진을 강요받았던 일본군의 수상함 전력들, 항공 전력들이 그만큼 더 남아있었을 것이며, 1항전을 위시한 일본군 항모기동부대의 건재 때문에 미 태평양 함대는 본토에서 건조 중인 에식스급 항공모함,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들이 사라토가, 와스프와 함께 궤멸당한 항모기동부대를 본 전투력까지 재건할 때까지는 과달카날 전투와 같은 적극적인 반격이 힘들어져 전쟁이 1~2년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 대서양에서 날뛰던 독일 크릭스마리네 유보트들에 대항하기도 빡빡했던 미 해군에겐 일본군 잠수함의 통상 파괴도 위협적인 요소다. 일본군 잠수함들이 하와이와 미드웨이를 말려죽일 수준까지 되었는가? 는 의문부호가 붙지만 미 해군 입장에서 마이너스 요소가 되었음은 되었지 플러스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또한, 일본군에도 점령지를 확대할 기회가 됨은 물론이다. 미드웨이 해전을 연구하여 책까지 출간한 조너선 파셜과 앤서니 털리는 미드웨이에서 일본군이 승리할 경우 일본군은 뉴헤브리디스 제도, 피지, 사모아는 물론 심지어 호주 북부까지 진격할 수 있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물론 조너선 파셜과 앤서니 털리는 미드웨이에서의 일본군의 승리가 전쟁의 승리를 가져다 줄 수는 없다는 것이라는 것을 함께 지적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미국의 수많은 전쟁 병기를 생산하는 산업 시설들은 일본군이 절대 타격할 수 없는 지점에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이 미 태평양 함대 항모기동부대의 궤멸로 끝났다고 해서 본토에서 건조 중이던 에식스급 항공모함,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 아이오와급 전함, 플레처급 구축함 등의 수많은 신예 함선들과 F6F 헬캣, F4U 콜세어와 같은 신예 전투기들의 생산, 새로운 미군 사단들의 배치가 중단되는 것도 아니며, 1944년의 사례에서 입증하였듯 미군은 중부 태평양에서 직접 공격하여 일본군 방어선을 뚫고 일본 본토까지 진격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항모기동부대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더라도, 미군은 이 패배를 만회할 능력과, 입지 역시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2.5. 상하이 전투가 일본군의 패배로 끝났다면?[편집]

실제로 상하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수적, 양적, 질적으로 중국군에게 완전히 압도당했으며[7] 심지어 그 일본 해군 항공대가 중국 공군에 의해 제공권을 이틀 가까이 빼앗기기 까지 했다. 일본군이 상하이 전투에서 중화민국군을 제압하고 내륙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건 무차별적으로 뿌려 댄 독가스 때문이었는데, 만약 일본군이 상하이 공세를 포기했다면 중일전쟁은 훨씬 더 안정적으로 영위되었을 것이다. 중화민국군은 엄연히 40만 명에 육박하는 최정예 병력과[8] 각종 군벌군 450만 명을 거느린 당대의 지역강국이었고, 상하이에는 중국 철강의 90%를 생산하던 거대한 제철소도 있었다[9]. 또한 무역항으로서 중국 조세의 30%를 담당하고 있는 대도시였으므로, 일본이 상하이를 포기했더라면 결과적으로 이는 중화민국의 외세 지원을 확대하고 산업 역량을 키워 주며 행정력을 확충할 기회를 열어 주며 중일전쟁을 독소전쟁 꼴로 만들었을 것이다.

2.6. 중일전쟁이 없었거나 늦게 일어났다면?[편집]

당시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보았을 때 가능성은 상당히 낮으나 21세기 현재의 전 세계 판도까지 다 바꿔놓았을 엄청난 대격변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만약 중일전쟁이 2년만 늦춰진다고 해도 일본군은 결코 하북을 넘을 수도, 상하이를 돌파할 수도 없다. 중국군이 상하이에서 일본군 12만 5천 명을 1개월 이상 묶어두는 데 독일식 기계화 정예사단 3개면 충분했는데, 1939년까지 이것이 40개로, 이것보다는 못하지만 일본군에 준하는 정예사단이 80개로 늘어날 예정이었다. 여기에 각종 무기를 더 배치하여 중화민국군 전체를 일본군에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최소한의 전투는 가능할 정도로 근대화하려는 계획도 갖고 있었으며, 만약 이것이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중국군은 450만에 육박하는 그 엄청난 대군 대부분이 근대화를 거치며 소련군을 능가하는 조직화된 대군으로서 다시 한 번 아시아 최강의 육군으로 군림할 것이다.

게다가 당시 중화민국의 근대화 속도는 결코 느리지 않았다. 중화민국은 급속도로 서방제 무기를 수입하고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으며, 이미 일본 다음가는 규모의 제철소를 보유하고 있었고 중국 전 지역에 열악하지만 철도를 확대하고 있었다. 상하이, 난징, 우한, 충칭, 광저우 5개 도시를 중심으로 근대화를 진행했을 뿐인데도 당시 중국의 총생산은 일본을 능가하고 프랑스 식민제국에 필적하고 있었다. 만약 당시의 상승세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중국은 1938년에는 철도 보유량에서 일본을 넘어서고, 1941년에는 철강 생산량에서도 일본을 넘어서게 된다.[10] 이미 중화민국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방과 일본의 투자가 꽤 있었지만) 성냥, 못, 탄약 등의 기초물자는 물론 야전포, 항공기, 함정까지 자력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중국과 일본의 입장은 아예 뒤바뀐다. 1940년대를 넘기게 되면 그때부터는 중국이 공격자, 일본이 수비자의 입장으로 변하며, 중국 공산당도 만주의 장쉐량도 중화민국 중앙정부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대적할 수 없다. 특히 공산당은 1940년대를 넘기기 전에 완전 소탕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5차 초공작전으로 사실상 식물인간이 되었던 공산당이다. 장쉐량 역시 더 이상 독립적인 세력으로 남지 못할 것이며 중화민국의 군사력은 일본군에 대등한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힘을 되찾은 중국이 눈앞에 있는 고토그 밑에 있는 번국을 그냥 놔둘 리가 없다.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용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등 언뜻 보면 한국의 독립운동에 지원적이고 우호적이었던 듯하지만, 실상 그가 한국에 애착을 보인 이유는 한반도에 친중 정권을 수립시켜 동아시아 패권을 잡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었다. 물론 국부천대 이후로도 한국에 어느정도 관심을 두는 등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호감 또한 어느정도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정치와 개인적인 감정은 어디까지나 별개이기에 그러한 요소들은 고려되지 않을 것이다. 중화민국이 결코 대만을 그냥 둘 가능성 역시 없고, 무엇보다 자신 이상으로 강력해진 중국을 일본이 그냥 둘 가능성도 없으므로, 1940년대가 지나가기 전에는 아마 사실상의 동아시아 대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과가 대단히 아이러니해지는데, 여기서 중국이 이기든 일본이 이기든 일본은 대륙에서 쫓겨나고, 중국은 승패와 상관없이 동아시아 최대의 세력으로 급부상할 것이다.

이후의 변화는 중화민국이 국공내전 승리한 대체 역사 항목에 쓰여있다시피 엄청난 떡밥이지만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아 섣부르게 어떤 결과로 이어졌다 결론 내리긴 어렵다.

중화민국 입장에서 긍정적인 가정을 한다면 통일된 중국의 역량하에서 문화대혁명도 대약진 운동도 없이 냉전기를 보낼 것이고, 반공국가로서 미국의 어마어마한 지원을 받을 것이다. 장제스의 독재와 국민당 일당체제도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후의 일본이 어떻게 되느냐, 한국이 어떻게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진다. 중국은 아시아에서 더 이상 대적할 자 없는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할 것이고, 일본, 한반도, 만주, 몽골, 동남아시아 등에 있어 광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며, 나아가서 그 거대한 인구를 앞세워 무수한 유럽국가들의 공장을 유치하고, 제조업에서 어마어마한 입지를 확보할 것이고, 채굴 과정의 오염이 심한 희토류, 티타늄 등에 있어서는 거의 독점적인 입지를 가지게 될 것이다. 대약진 운동도 문화대혁명도 없으므로 중국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물과 유적들은 보존되었을 것이고, 중국의 어마어마한 미디어 산업으로 소프트 파워를 확대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소련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강력한 육해군을 가질 것이고, 반도체와 정밀기계에서도 무시 못할 입지를 갖추고 높은 기술 수준을 확보할 것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시베리아 지역의 자원과 경제권에 있어서 영향력을 투사할 것이고, 제3세계의 수장인 인도 역시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 앞에 무릎꿇을 것이다.
그리고 냉전 종식 이후 스스로 충분히 힘을 길렀다고 판단한 중화민국이 태평양을 향해 눈을 돌리는 순간, 미국은 자신이 아시아에 뭘 만들어 낸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정부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상술한 중화민국의 부상은 국민당 정부의 부정부패와 내부의 문제가 해소된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한 일일 것이고, 내부 사정으로 성장이 지연 혹은 정체되어 인도나 러시아가 그러하듯 규모의 측면에서 경제력과 영향력은 국제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패권국이 되어 군림하지는 못하는 국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서두에 썼듯이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사의 판도를 바꿔놓았을 가정이라는 것이다.

2.7. 우호 작전이 없었다면?[편집]

우호 작전(임팔 전투)은 희대의 뻘짓으로 유명하지만, 대전략상 대단히 중요하다. 남방에 주둔하던 일본의 10만 대군이 건재한 상태로, 이들이 버마에서 소멸하는 대신 오키나와, 이오지마 등으로 갔다면 미군은 훨씬 더 많은 인명피해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원자폭탄을 개발했으므로 전쟁을 좀 더 잔혹하게 만들 뿐이다.

2.8. 니고 연구로 일본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했다면?[편집]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수렴하며, 상징성은 크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개변이다. 일단 당시의 핵무기란 미사일에 실어서 쏘는 게 아니라 폭격기가 들고 다녀야 하는 무기였고, 일본군은 원자폭탄의 최소질량인 5톤을 들어올릴 폭격기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일본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것부터가 넌센스이지만, 그걸 넘어서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역사 개변이 될 것이다. 다만, 적어도 전후에 일본 본토의 원자폭탄 관련 서류를 손에 넣기 위한 미국과 소련의 첨예한 첩보전은 더 격화되었을 것이고, 소련의 핵개발이 앞당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일본이 투하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독일에게 폭격기를 지원받아 독일 폭격기에 일본 핵을 실어서 하와이 등지에 핵무기를 투하하는 경우도 생각해볼수가 있다. 정말로 일본이 핵무기를 가졌다면 어떻게든 사용하려고 할 것이며 그것을 독일에게 의뢰해서라도 투사하거나 또는 미끼로 삼아 미국에게 조건부 항복이나 강화협상으로의 처리[11] 를 요구할 수도 있다.

독일로서는 일본에게 폭격기를 제공한 대가로 일본의 핵을 몇 개 양도받아 소련에다 투발할 가능성이 있다. 대략 바그라티온 작전과 비슷한 시기를 것이기 때문.

2.9. 일제가 1944년에 항복했다면?[편집]

필리핀 해 해전사이판 전투절대방위선이 무너지면서 일본 제국 내부에서도 연합국에 대한 항복을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만약 일제가 항복을 일찍했다면 도쿄 대공습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기아 작전이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고 일본 본토의 산업체계가 온전히 보존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 백만의 생명들이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일제가 이미 미국의 역린을 단단히 건드린 상황이라 미국의 가혹한 요구를 피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중화민국과 한반도에게도 희망적인 시나리오인데, 중화민국의 경우 피해를 좀더 최소화한채로 중국 공산당 소탕에 힘을 쏟을 수 있었을 것이며, 한반도 역시도 중국 공산당의 소멸에 더해 소련의 개입 가능성이 희박한 시기이기 때문에 남북분단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온전히 독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12] 소련이 독소전쟁을 끝낸 이후에도 중화민국이 세력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어서 함부로 남진할 수가 없다. 다만 온전히 독립한 한국이 정세도 안정적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한데 미군정 시기에도 정치가 혼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산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간의 갈등이 폭발하다 못해 백색테러는 물론이고 수 많은 양민 학살이 터졌을 가능성도 높다.

2.10. 히로시마·나가사키를 포함해서 그 어느곳에서도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는다면?[편집]

일단 이러려면 몇 가지 중 하나의 조건이 붙는다.

전자의 경우라면 실제 역사와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핵무기는 물론 일본의 항복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이미 1944년 중반 시점에는 일본의 패망이 확실시되었고, 일본 본토 공습의 전개로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핵폭탄이 전략적으로 끼친 영향은 생각보다 별로 크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 본토 공습과 외교만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었고, 또한 실제로 그렇게 했다.[13] 일본이 폭격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버텼던 이유는 소련을 중재자로 미국과 협상할 수 있다는 처절한 희망을 끝까지 부여잡고 있었기 때문이며, 일본 대본영과 천황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맞았을 때는 계속해서 총옥쇄를 부르짖었지만 소련이 참전하자 바로 다음날에 항복을 결정지었다. 계전파 군부가 시간을 끌지 않았다면 나가사키에는 핵을 맞기도 전에 항복했을 것이다. 원자폭탄의 투하는 일본에게 "경악"이었지만, 소련의 침공은 일본에게 "절망"이었고, 둘 중 무엇이 더 항복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을지는 자명하다.

따라서,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실제로 벌어진 일과 별다른 차이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다만 소련의 참전이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10일 앞당겨졌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일본은 8월 25일에 항복했을 것이고 그게 끝이다... 그리고 그동안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 교토 등 원자폭탄 투하의 대상으로 지목되어 공습을 막았던 지역들도 이 세계선에서는 모두 혹독하게 폭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후자의 경우는 조금 전자에 더한 거긴 하지만, 차이가 있다. 바로 소련이 참전하기도 전에 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러면 위에 1944년에 일본이 항복한거랑 비슷한 루트를 타게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본을 제 2의 이탈리아라고 놀려먹는 경우가 생길 것으로 보이며, 일본 내부에서도 군은 수치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서 주일미군에게 일본의 안녕을 100% 위임할수도 있을 것이다. 자위대 없는 세상 또한 소련이 일본 쪽에 간섭할 명분이 사라지면 독립한 대한민국은 남북 분단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1] 1929년부터 1939년까지 독일은 중국군의 현대화에 도움을 주는 대신 중국으로부터 원자재를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의 일방적인 공세가 계속되자, 히틀러는 향후 소련 침공 대비를 위해서는 중국 대신 일본과 동맹을 맺는 편이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중일전쟁 초반까지 독일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전쟁을 중재하려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1937년 12월 일본군이 중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며 더 이상의 전쟁 중재는 불가능해졌다. 1939년 독일은 만주국을 국가로 인정하고, 또 1941년 왕징웨이 정권을 인정하며 장제스 국민당 정부와의 외교관계는 끊어진다. 그리고 1941년 12월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이 2차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된다.[2] 실제 역사에서 1939년 독일이 U보트로 상선을 격침시켜서 대서양 전투가 시작되었음을 고려하면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이 독일편에서 소련과 싸울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미국의 대독일 유럽 전선 지원 규모가 줄어들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미국의 총력전은 국민의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독일은 진주만 공습을 벌인 적(일본)의 적(중국)의 동맹이다. 총력전으로 독일에 맞서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상당했을 것이다.[3] 하루만에 일본 항공모함 2척에 폭탄을 명중시켜 인류 역사상 최고의 공격 파일럿 중 하나가 된 인물.[4] 강조하지만 "승리할 수 있는" 이 아니다.[5] 특히 토크멘터리 전쟁사 진주만 공습 편에서 이를 부정적으로 다루었다.[6] 70년의 기술 격차가 벌어진 2020년 시점의 미군도 24시간 내에 함락시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는 엄청난 요새가 1940년대의 하와이 오아후 섬이다. 지형부터가 많이 양심이 없고, 해안포와 벙커도 장난이 아니다. 일본군이 상륙전을 감행했다면 오키나와 전투 역전세계가 펼쳐졌을 것이다. 거기다 진짜 있을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점령을 한다 치더라도 보급 선박의 부족으로 하와이까지 보급을 할수가 없었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 발발후 동남아로의 침공을 위해 민간선박까지 닦닦 긁어모았던게 그때 당시 일본이다. 설령 보급에 필요한 선박이 충분했다 하더라도 그 먼거리까지 보급선을 유지할만한 능력은 그때 일본 해군에겐 없었다.[7] 인구나 물량은 예나 지금이나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고 질은 중독합작으로 해결.[8] 당연한 소리겠지만 전부 독일제 무장이다.[9] 상하이 제철소는 일본의 야하타 제철소 다음가는 거대 제철소였으며, 동시에 단일 용광로의 규모로서는 세계 최대였다.[10] 1937년 일본과 중국의 제철량 격차가 150:1에 달하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따라잡아?" 싶을 수도 있으나, 1935년에는 그 격차가 3,000배를 넘었다. 즉 중국은 고작 3년 만에 총 제철량을 20배 이상 확대하며 일본을 바짝 추격해온 것이다. 이 상승세가 그대로 이어진다면 1939년에는 격차가 7.5:1로 줄어들며, 1942년에는 1:2.6으로 중국이 일본을 압도하게 된다.[11] 핵은 빨라도 1944년에야 개발될 것이라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엔 너무 격차가 커졌고, 석유 금수조치를 해제하고 동남아는 철수하며 중일전쟁을 용인하는 선에서 타협을 요구하는 것이 현실적이다.[12] 상황에 따라 만주국이 아닌 일본의 할양 영토였던 요동이 한반도의 손에 들어올 가능성도 있다. 물론 요동의 주민은 모두 중국인이긴 하지만.[13] 자주 착각하는데 원자폭탄 투하도 엄연히 공습이다. 그리고 그 전과는 도쿄 대공습과 비교했을 때 별로 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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