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맨 坦克人 | Tank Man | |
별칭 | 무명의 저항가(Unknown Protester) |
이름 | |
국적 | |
관련 사건 | |
생존 여부 | 생존 (2017년 기준) |
1. 개요[편집]
사건 당시 CNN 스탭이 촬영한 영상이다. 주변 기자와 시민들의 반응을 들을 수 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놀라고 난 뒤에는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
1989년 6월 5일 천안문 6.4 항쟁 직후 인민해방군 전차 대군의 진격을[3] 맨몸으로 혼자 막아선 시위대 측 남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명 탱크맨이라고 불린다. 이 사람은 왕웨이린(王維林)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천안문 6.4 항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오늘날에도 회자되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위치는 아래 나오는 사진의 천안문광장 국기게양대와 인민대회당의 위치로 봤을 때 대략 동창안로와 난허얀로의 교차로 인근으로 추정된다.[4]
1998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20세기의 지도자들 & 혁명가들 20인 중 하나로 등재되었다.#
2. 특징[편집]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의 가까운 이웃 외에는 아무도 그의 글을 읽거나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세계의 거실에 들어간 지 한 시간이 지나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1989년 6월 5일 천안문 광장 근처의 탱크 열 앞에 서 있던 그는 쑨원보다도 더 생생하고 친밀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세계 기억 속에 새겼을지도 모른다. 자기 초월의 순간에 윈스턴 처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제임스 조이스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목격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자유와 저항의 불멸의 세계적인 상징이 되었다.
2.1. 역사[편집]
미국 공영 방송 PBS의 다큐멘터리 | 이 사진을 찍은 기자 중 한 명인 스튜어트 프랭클린(Stuart Franklin)이 설명하는 탱크맨 |
악몽의 6월 3일 밤부터 6월 4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유혈 진압이 마무리되고, 6월 5일 탱크가 천안문 광장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를 하는 상황이었다. 시민들은 당연히 겁에 질려 도망쳤으나, 수십 미터 밖에서 진격해 오는 59식 전차들을 천안문 앞 10차선 도로(장안거리)에서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양손에는 검은 비닐봉투와 옷가지를 든 어떤 사람이 단신으로 막아냈다. 영상을 보면 저 사람이 막은 전차가 한두 대가 아니었고, 가만히 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전차 조종수들이 차마 저 사람을 깔아뭉개고 갈 수 없었는지 옆으로 지나가려 하자, 이번에는 그 방향으로 가서 서서 막았다.
그런가 하면 전차 위로 올라가서 조종수석에다 대고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며 곧 다시 내려왔다. 이후 전차는 엔진을 재시동하여 다시 출발했다. 그 때 전차 측면에서 1~2m 이내에 서 있던 그가 다시 전차 앞으로 뛰어들어 재빨리 대치 상황을 재연했다.[5] 이후 몇몇 시민들이 달려와 데려가면서 위험한 상황이 끝난다. 영상에는 파란색 옷을 입은 2명의 인물이 그를 끌어내 근처 군중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주변에 포진해 있던 사복 공안들이 위험한 상황을 막기 위해 달려와서 떼어놨다는 설도 있고, 같이 시위를 한 동료들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후 탱크맨을 찍은 사진은 전세계 신문의 1면에 실리며 세계적으로 퍼졌으며, 천안문 6.4 항쟁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여러 언론과 미디어 매체에서 탱크맨 사진을 여러 차례 사용했고, 탱크 앞에 서서 무언의 저항을 한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됐다.[6] 또한 탱크맨이 찍힌 이 사진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가 되었으며, 중국 현대사의 상징 중 하나가 됐다.
1989년 6월 19일 타임지 표지에 실린 탱크맨 |
이 순간은 베이징 호텔 발코니에서 아래의 참상을 내려다보던 다섯 명의 외국 기자들에 의해 포착되었다. 가장 유명한 버전은 제프 와이드너(Jeff Widener)의 사진이다. 이 사진은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탱크맨의 사진을 촬영한 기자 중 한 명인 AP통신 동남아시아 사진편집자였던 제프 와이드너는 베이징 호텔 6층에서 이 사진을 찍었다. 인터뷰에서 제프는 당시 사진을 찍게 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광장 근처 호텔에서 창문을 통해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남자가 종이가방을 들고 탱크 앞으로 걸어나왔다"며 "그러더니 탱크 한 대의 포탑에 올라 군인들에게 말을 걸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결국 청색 옷을 입은 두 명의 남자에게 현장에서 잽싸게 끌려나갔다고 회고했다.# 또 다른 기자 스튜어트 프랭클린(Stuart Franklin)이 촬영한 사진은 필름이 상자 안에 담겨 중국에서 밀반출된 후 'Time and Life' 잡지에 실렸다.#
이 사진을 촬영한 또 다른 기자 찰리 콜(Charlie Cole)은 천안문 6.4 항쟁 당시 뉴스위크지를 위해 베이징의 한 호텔 발코니에서 원격 사진 렌즈를 이용해 '탱크맨' 사진을 찍게 됐다. 일부러 사진의 왼쪽 아래에 사람의 모습이 오도록 구도를 잡음으로써 사람을 향해서 오는 탱크들의 위용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호텔을 감시 중이던 공안이 곧 들이닥칠 것에 대비해 사진이 찍힌 필름 롤을 사진기로부터 재빨리 빼낸 후 비닐봉지에 싸서 화장실 변기 물탱크 속에 숨겼다. 그리고 빈 필름 롤을 대신 사진기에 끼워두었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공안이 그의 방으로 쳐들어왔고 예상대로 필름을 빼앗겼지만, 콜 기자가 지혜를 발휘해 대비한 덕분에 역사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한 사진은 무사히 도쿄의 AP통신 지국으로 보내져 마감에 맞춰 뉴스위크에 보도될 수 있었다.# 찰리 콜이 찍은 이 사진은 1990년 올해의 세계보도사진상을 수상했다. 서방 기자 이외에도 로이터의 쩡셴화가 베이징 호텔 1111호실에서도 탱크맨을 촬영했다.#
당연히 중국에서는 탱크맨 사진을 검열, 통제하고 있다.
2.2. 용기에서 비롯된 행위[편집]
6.4 항쟁 당시 인민해방군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들이 속출했다. 고로 군인들이 별 생각 없이 탱크맨을 진짜로 밟고 지나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7] 혹은 짓밟지 않더라도 탱크에서 나온 군인이 총으로 쏴 버리고 시체를 옆으로 치운 후 지나갔을 수도 있다. 즉, 탱크맨은 정말 죽을 걸 각오했던 것이다.
여기서 만약에 탱크맨마저 전차가 밟고 지나갔다면 더 큰 일이 되었을 것이다. 저 사진이 퓰리처상 후보작 중 하나였으며 사진 속 인물이 타임지 선정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었던 인물로 뽑혔음을 생각하면 큰 일이었을 것이다. 탱크맨 사진 자체도 충격적인데 전차에 처참하게 짓밟히는 탱크맨의 모습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면 그 즉시 중국의 국제적 위상과 인식은 바닥으로 추락했을 것이고 국내에서는 반발이 더욱 거세져 시위진압도 실패했을 가능성도 있다.
여러 사람이 학살당하는 것은 분명 더욱 비참한 일이나, 때로는 어떤 한 사람의 죽음이 학살보다 더욱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있다. 틱꽝득의 소신공양은 월남의 운명을 결정지었으며,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자유당 정권의 파멸을 불러왔다. 결정적 장소에서 발생한 비극적 죽음은 그 자체로 아이콘이 되어 꺼지지 않는 혁명의 연료가 되는 셈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차 부대가 본인을 밀고 지나가게 하는 것이 탱크맨 본인의 의도였을 수도 있다. 게다가 컬러 사진으로 보면 길이 피로 물들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8] , 그가 서 있던 바로 그 길은 몇 시간 전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던 곳이었다. 같은 위치를 몇 시간 전에 같은 구도로 찍은 사진을 보면 미처 수습되지 못한 수많은 시체들과 부서진 자전거들이 널려 있다.
시민들이 학살된 바로 그 자리에서 탱크맨 자신도 "그래, 나도 죽여 봐라"는 마음을 가지고 죽을 각오를 하고 선 것이다. 군인들도 차마 시민을 눈앞에서 전차로 짓밟지 못할 양심[9][10]이 있었겠지만 단순히 전차 앞에 서는 데만에도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며, 죽음을 무릅쓴 자세가 가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당장 땅이 울리도록 자신을 압도하며 서 있는 수십 톤짜리 살상무기를 상상하면 공감이 될 것이다. 탱크라는 건 보통 무게가 아니기에[11] 빠른 속도로 움직일때 바로 근처에 서있으면 진짜로 땅이 흔들리며, 사람이 넘어질 수도 있다. 단순히 움직이는 전차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집중력이 요구된다.
살벌했던 당시의 상황과 거대한 폭력 앞에 단신으로 서서 막아내는 그의 용기가 인상깊게 표현되어 위 사진이 퓰리처상 후보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여기서 만약에 탱크맨마저 전차가 밟고 지나갔다면 더 큰 일이 되었을 것이다. 저 사진이 퓰리처상 후보작 중 하나였으며 사진 속 인물이 타임지 선정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었던 인물로 뽑혔음을 생각하면 큰 일이었을 것이다. 탱크맨 사진 자체도 충격적인데 전차에 처참하게 짓밟히는 탱크맨의 모습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면 그 즉시 중국의 국제적 위상과 인식은 바닥으로 추락했을 것이고 국내에서는 반발이 더욱 거세져 시위진압도 실패했을 가능성도 있다.
여러 사람이 학살당하는 것은 분명 더욱 비참한 일이나, 때로는 어떤 한 사람의 죽음이 학살보다 더욱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있다. 틱꽝득의 소신공양은 월남의 운명을 결정지었으며,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자유당 정권의 파멸을 불러왔다. 결정적 장소에서 발생한 비극적 죽음은 그 자체로 아이콘이 되어 꺼지지 않는 혁명의 연료가 되는 셈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차 부대가 본인을 밀고 지나가게 하는 것이 탱크맨 본인의 의도였을 수도 있다. 게다가 컬러 사진으로 보면 길이 피로 물들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8] , 그가 서 있던 바로 그 길은 몇 시간 전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던 곳이었다. 같은 위치를 몇 시간 전에 같은 구도로 찍은 사진을 보면 미처 수습되지 못한 수많은 시체들과 부서진 자전거들이 널려 있다.
시민들이 학살된 바로 그 자리에서 탱크맨 자신도 "그래, 나도 죽여 봐라"는 마음을 가지고 죽을 각오를 하고 선 것이다. 군인들도 차마 시민을 눈앞에서 전차로 짓밟지 못할 양심[9][10]이 있었겠지만 단순히 전차 앞에 서는 데만에도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며, 죽음을 무릅쓴 자세가 가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당장 땅이 울리도록 자신을 압도하며 서 있는 수십 톤짜리 살상무기를 상상하면 공감이 될 것이다. 탱크라는 건 보통 무게가 아니기에[11] 빠른 속도로 움직일때 바로 근처에 서있으면 진짜로 땅이 흔들리며, 사람이 넘어질 수도 있다. 단순히 움직이는 전차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집중력이 요구된다.
살벌했던 당시의 상황과 거대한 폭력 앞에 단신으로 서서 막아내는 그의 용기가 인상깊게 표현되어 위 사진이 퓰리처상 후보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3. 생존 여부[편집]
이른바 탱크맨으로 불리는 왕웨이린은 대만으로 건너가 살아 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다만 이는 중화권 언론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100% 밝혀진 바 없고, 오히려 진압 직후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복역 중이라거나 이미 처형당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사건 당시 직접 사진을 찍었던 미국인 사진기자 제프 와이드너(Jeff Widener)는 "그가 4명에 의해 끌려갔으며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2014년 독일 '도이체 벨레'에 말했다. 와이드너는 "그(탱크맨)는 탱크가 오는 것을 보았고, 자신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며 "가족이나 친척이 군에 의해 죽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건 당시 직접 사진을 찍었던 미국인 사진기자 제프 와이드너(Jeff Widener)는 "그가 4명에 의해 끌려갔으며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2014년 독일 '도이체 벨레'에 말했다. 와이드너는 "그(탱크맨)는 탱크가 오는 것을 보았고, 자신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며 "가족이나 친척이 군에 의해 죽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3.1. 장쩌민의 발언[편집]
위 영상은 1990년 미국 ABC 방송의 유명 베테랑 앵커인 바버라 월터스(Barbara Walters,1929~2022)가 장쩌민과 단독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다.
월터스가 대놓고 당시의 사진을 제시하며 왕웨이린을 언급하자 장쩌민은 너털웃음을 짓는 등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그 남자가 어떻게 되었느냐는 월터스의 질문에 중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쓰며 답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중국어로 사진 속 장면 자체에 대해서만 얘기하면서 말을 돌리다가 갑자기 영어로 "그 사진이 증명해 준다. 그는 탱크에 깔려죽지 않았다."는 답변을 한다. 그러자 월터스는 좀 더 직설적으로 체포 혹은 처형에 대한 질문을 하고 이에 표정이 굳어진 장쩌민은 중국어로 그 사람이 체포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답한다. 재차 질문을 받은 장쩌민은 마침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절대로... 죽지 않았다."(But I think never... never killed.)라고 영어로 답변하고[12] 그것을 확인하는 월터스를 향해 다소 신경질적인 어조로 다시 한 번 똑같은 답변을 한다.
즉, 왕웨이린에 대한 서방 측의 의구심을 분명하게 부정한 셈이다. 특히 'never'라는 표현을 쓴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never는 일반적인 부정문에도 쓰이지만, '결코' 혹은 '절대로' 등의 강조형으로도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 장쩌민이 영어에 매우 능통한 인물[13]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다분히 의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구태여 사망설을 부정했다는 것은 결국 해당 인물이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독재자에게서 다행이 살아남은 인물이 되었다.
월터스가 대놓고 당시의 사진을 제시하며 왕웨이린을 언급하자 장쩌민은 너털웃음을 짓는 등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그 남자가 어떻게 되었느냐는 월터스의 질문에 중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쓰며 답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중국어로 사진 속 장면 자체에 대해서만 얘기하면서 말을 돌리다가 갑자기 영어로 "그 사진이 증명해 준다. 그는 탱크에 깔려죽지 않았다."는 답변을 한다. 그러자 월터스는 좀 더 직설적으로 체포 혹은 처형에 대한 질문을 하고 이에 표정이 굳어진 장쩌민은 중국어로 그 사람이 체포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답한다. 재차 질문을 받은 장쩌민은 마침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절대로... 죽지 않았다."(But I think never... never killed.)라고 영어로 답변하고[12] 그것을 확인하는 월터스를 향해 다소 신경질적인 어조로 다시 한 번 똑같은 답변을 한다.
즉, 왕웨이린에 대한 서방 측의 의구심을 분명하게 부정한 셈이다. 특히 'never'라는 표현을 쓴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never는 일반적인 부정문에도 쓰이지만, '결코' 혹은 '절대로' 등의 강조형으로도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 장쩌민이 영어에 매우 능통한 인물[13]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다분히 의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구태여 사망설을 부정했다는 것은 결국 해당 인물이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독재자에게서 다행이 살아남은 인물이 되었다.
3.2. 2017년 보도[편집]
결국 장쩌민이 단언한 대로, 2017년 6월 탱크맨이 중국에서 안전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홍콩에 있는 중국 인권민주화운동정보센터 창립자인 '프랭크 루(盧四淸)'의 인터뷰에 따르면, 탱크맨은 망명하거나 감옥에 가지 않고 중국에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으며 왕웨이린이 본명도 아니고 굳이 해외에서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고 중국이 민주국가가 되기 전까지는 조용히 살고 싶다고 밝혔다.
그가 정말 중국에 있다면 신변의 안전 때문에 자신이 진짜 탱크맨이라고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며, 중국공산당 일당 독재가 끝나야 비로소 탱크맨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정말 중국에 있다면 신변의 안전 때문에 자신이 진짜 탱크맨이라고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며, 중국공산당 일당 독재가 끝나야 비로소 탱크맨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4. 관련 매체나 기념물[편집]
4.1. 게임[편집]
4.2. 음악[편집]
- Bon Jovi의 노래 'We weren't born to follow'의 뮤직비디오에서도 잠깐 등장한다.
4.3. 기념물[편집]
- 스페인 조각가 페르난도 산체스 카스티요(Fernando Sánchez Castillo)가 만든 탱크맨 조각상을 만들었다.
- 2019년 캘리포니아 자유조각공원에 천안문 6.4 항쟁 30주년을 맞아 중국 민주화 운동가들과 천안문 6.4 항쟁 생존자들이 모여 탱크맨 조각상을 설치해 기념하기도 했다.
- 2019년 미국 국회의사당 부근에서 열린 중국공산당의 베이징 천안문 6.4 항쟁 학살 30주년 지탄 집회에 공개된 '탱크맨' 동상이다. 이후 집회가 끝나고 철거됐다.
5. 검열[편집]
- 2016년 중국 사진유통회사인 쓰줴원화가 세계 최대 디지털이미지 은행인 코비스 내 베크만 아카이브와 시그마 아카이브의 사진 5,000만장에 대한 저작권을 사들였다. 천안문 6.4 항쟁 당시 학생지도자로 활동한 왕단은 BBC에 "쓰줴원화가 인수한 사진에는 '탱크맨'으로 알려진 왕웨이린(王維林)의 사진을 비롯한 천안문 6.4 항쟁 현장 사진이 포함됐다"며 "이번 인수 건은 중국 당국의 검열이 전 세계적인 범위로 확대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BBC 케리 앨런 분석가도 "중국이 전 세계적인 범위에서 자국 정부가 민감하다고 판단되는 사진의 확산을 차단할수 있게 된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우려와 관련해 코비스 측은 "우리는 단순히 저작권 에이전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며 "예를 들어 톈안먼 사태에 관한 대부분 사진 저작권은 AP통신과 로이터 통신이 갖고 있다"고 해명했다. 또 "관련 계약 기한이 만료되면 저작권 소유자는 우리 아카이브에서 이미지를 내릴 수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유명한 탱크맨 사진과 같은 경우 코비스가 일부 사진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지만 널리 공유되는 다른 버전의 사진의 저작권은 로이터가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이미지를 사용하려는 사람들은 충분히 다른 통로를 이용해 해당 이미지를 구입할 수 있다고 부언했다.#
- 2021년 마이크로소프트의 검색엔진 'Bing'에서 '탱크맨'의 검색 결과가 제한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단순 실수라고 해명에 나섰지만 천안문 6.4 항쟁 32주년 당일에 발생한 사건이라 다른 속내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이어졌다.#
- 유비소프트의 프로필 계정 사진을 위의 탱크맨 또는 탱크맨 패러디 사진으로 바꾸면 얼마 안가서 유비 측에서 약관 위반을 운운하며 강제로 사진을 내리고 2회 적발 시 다시는 프로필 사진을 못 바꾸도록 제재를 먹인다. 아예 프로필 사진 검열 알고리즘에 학습시켜 놨는지 빠르면 하루도 안 돼서 초고속으로 제재당한다. 스팀에서는 그런 게 없어서 중국인의 계정 해킹을 우려하는 이들이 올려 놓은 탱크맨 프로필 사진을 종종 볼 수 있다.
6. 2022년: 새로운 탱크맨의 등장[편집]
자유아시아방송 영문판 기사
중국어 위키피디아 문서
2022년 10월 13일, 33년만에 중국 본토에서 새로운 탱크맨이 등장했다. 시진핑의 3연임과 관련된 전국대표대회가 열리기 이틀 전에 시진핑에 반대하는 현수막 2개를 베이징 도심 고가도로에 설치해서 시위를 한 사람(이름은 彭立发)이 나온 것이다.
해당 시위가 일어난 곳은 베이징 하이뎬구 중관춘에 있는 쓰퉁차오(四通桥)로, 북3환서로(北三环西路)에 있는 다리이다. 베이징시 문서에 적힌 대로 3환 내부는 심야 시간대에는 베이징시 번호판을 단 차량만 출입이 가능할 정도로 엄격하게 통제되는 지역이다. 심지어 당대회를 맞아 베이징의 경비가 더욱 강화된 시점에 이런 시위를 벌인 것이기 때문에 해당 시위자는 탱크맨이란 칭호를 얻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해당 현수막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不要核酸要吃饭,不要封控要自由,不要谎言要尊严
不要文革要改革,不要领袖要选票,不做奴才做公民
그리고 또 다른 현수막에는 "독재자 매국노 시진핑을 파면하자!"라는 매우 노골적인 비판이 적혀 있었다.
중국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은 모조리 골라 시위를 벌였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불을 붙였다. 이 시위자는 곧 체포되었지만, 소식은 순식간에 인터넷에 퍼졌으며 중국 당국은 관련된 사진이나 영상을 모조리 삭제하고 관련 검색어들도 모조리 금지 처분을 내렸다.
시위 이후 중국 전역의 화장실에서 발견된 반정부 문구를 찍은 사진들이 다수 돌아다녔다.# 상하이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일어났다.#
아케인: 리그 오브 레전드의 중국판 한정 OST인 孤勇者(외로운 용사)의 뮤비 영상에 해당 시위를 기리는 댓글들이 달리기도 하였다.# 중국 본토에서는 해당 곡을 공유했다가 계정 정지를 먹은 사람들도 나왔다.
이 시위 이후 제로 코로나 정책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2022년 중국 제로 코로나 반대 시위가 발생하였다.
현수막을 걸었던 사람은 2023년 타임지 100명의 올해의 인물 중 선정되었다. 미 의회 의해 노벨평화상을 추천받기도 했다.
2023년 천안문 사태 34주년 앞두고 시위가 발생했던 장소의 도로 표지판이 철거됐다.#
7. 여담[편집]
- 파일:Lithuanian demonstrator stands in front of a Soviet Red Army tank during the assault on Lithuanian Radio and Television Station on January 13, 1991 in Vilnius.webp
유사 사례로 1991년 1월 13일 리투아니아의 혁명 당시 소련군의 전차가 방송국으로 진격하려고 하자 이를 막아선 리투아니아 시민이 있었다. 사진의 전차는 T-72B.
- 중국의 유명 반체제 인사이자 저명한 인권운동가 후자(胡嘉)는 "탱크맨은 살해당했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해외로 도주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가 탱크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영원히 산다."고 말하기도 했다.#
- 2018년에는 트위터에서 '#TankMan2018'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탱크맨'을 따라하는 사진을 올리며 탱크맨의 용기 있는 행동을 따라하는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 유머러스하게 한자로 占占占占人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 파일:탱크맨 버전2.png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우크라이나의 한 시민이 러시아 후송 행렬을 단신으로 막으려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진입하는 전차 위로 타고 올라가 멈추게 했는데 이 상황이 천안문 6.4 항쟁 당시의 탱크맨을 연상시켜 다시금 언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이를 무시하고 그 민간인을 전차로 깔아뭉개고 갔으며, 이는 21세기 제노사이드의 일부에 불과했다.
8. 관련 문서[편집]
9. 외부 링크[편집]
[1] 사건 발생 당시부터 알려져 있는 가명이다. 1990년 LA 타임즈 기사에 의하면 19세의 학생이었다고 한다. 인디펜던트의 기사에 따르면 고고학을 배우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정보의 진실성은 확인되지 않았다.[2] 2017년 한 소식통에 의해 알려진 이름이다. 다만 이 이름도 확실하지 않다. 이름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시민(공민)을 위하여'이기 때문이다.[3] 흔히 알려진 위의 사진만 보면 탱크 3대 정도를 막은 것처럼 보이지만 본 문서 아래 갤러리를 보면 그가 얼마나 많은 59식 전차의 진군을 홀로 막아섰는지 알 수 있다.[4] 사진에서 보이는 횡단보도는 현재 지하차도로 대체되었다.[5] 이때 군인이 손짓으로 물러나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6] 비단 중국 민주화 운동뿐만 아니라 무력 진압에 맞서는 비폭력적인 용기와 힘을 상징하는 비폭력 시위의 대표적인 예로 흔히 사용된다.[7] 훗날 자칭 이슬람 국가 ISIL은 실제로 포로를 탱크로 뭉개서 죽였으며, 러시아가 2022년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차에 탄 민간인을 전차로 깔아뭉갰다.[8] 컬러 사진에 있는 길에 있는 주황색의 무언가가 다 핏자국이다.[9] 근데 이것도 확실하게 장담할 순 없다. 상부에서 시위를 계속하면 죽이라고 시켜서 하는 거라 탱크 사건 전에도 여러 사람들을 참혹하게 죽인 것이므로 탱크맨 역시 사실 탱크를 운전하던 군인이 그냥 죽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단지 평범한 사람이 그런 무서운 용기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을 것이고(전설에는 이런 사건들이 꽤 있지만, 20세기에 증거가 남는 인류의 영상기록 역사가 시작된 이후에는 이렇게 혼자 신념만으로 생명을 건 사건이 매우 적다.) 몇 명만 쏴도 나머지가 도망가는 걸 많이 봐 왔을 테니, 오히려 너무나도 당당히 전차 앞을 가로막은 모습에 탱크맨이 들고 있는 것이 자폭용 폭탄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당황해서 일단 멈춘 것일 가능성도 있다.[10] 이와 별개로 살인이 주는 중압감은 그 차원을 달리한다. 국가 불문하고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교도관들조차 사형 집행만큼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피하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교도관이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은 대개 살아 있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나은 인간이 대부분인데도 말이다. 차라리 군경이 잔뜩 나와 총격을 가하는 상황이었다면 '다들 하는데 나라고 뭐.', '나는 허공에 총을 쐈어. 내 탓은 아냐!'라는 최소한의 합리화와 현실부정이라도 가능하지만, 탱크맨을 죽이는 행위와 그로 인한 죄책감은 오롯이 '전차 앞으로' 라는 명령을 내린 전차장 홀로 감수해야 하는 것이 된다. 군인이라도 결국 전투훈련을 받은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11] 당시 사용된 59식 전차의 무게가 약 36톤이다. 59식 전차가 비록 다른 현대 주력 전차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 들지라도 어쨌든 탱크는 맞다.[12] 상단 영상 10분 38초부터 나온다.[13] 국립중앙대학교(현재의 난징대학교)를 다니다가, 상하이교통대학으로 옮겨 졸업한 중국 최고의 엘리트 출신 정치인이다. 위 대학은 둘다 지금까지도 중국 6대 일류대학교(베이징대학, 칭화대학, 상하이교통대학, 푸단대학, 난징대학, 저장대학)에 들어가는 곳이라는 점, 그리고 당시의 국립중앙대학은 (지금도 높은 편이지만) 현재 한국으로 치면 SKY 중 하나 수준인 난징대학의 위상과 달리 더 높았는데, 당시 중국(중화민국)의 수도가 난징이었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지금의 베이징대학과 동급인, 사실상 중국의 서울대학교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장쩌민의 학력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14] 4:40초 카메라 렌즈에 희미하게 탱크맨이 보인다.[15] 하지만 이와 별개로 탱크맨은 라이카 카메라가 아닌 니콘 카메라로 촬영되었다.[16] 체르니히우 주민들이 단체로 나와서 러시아군 전차를 맨몸으로 막아서며 이때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