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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98년

1. 개요2. 상세
2.1. 일본문화 개방한일관계의 대대적인 정상화의 해2.2. 타이타닉의 국내 열풍2.3. 1세대 아이돌 스타들의 시대

1. 개요[편집]

1998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자 1990년대의 9번째 해다.

2. 상세[편집]


이 해는 한국에서 문민정부에서 국민의 정부로 이어지는 해이자, 헌정사상 최초로 권력이 보수정당에서 중도진보 정당으로 넘어가는 순간이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UN에서 지정한 '세계 해양의 해'이기도 했다.

하지만 새 정부 앞엔 해결해야 할 온갖 문제가 쌓였고, 대다수 국민들은 이 한 해를 정권교체보다 IMF, 외환위기, 실업난, 노숙자라는 네 단어로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아래 사건들에서도 나오지만 엄청나게 많은 회사들이 부도/화의/법정관리 등으로 흑역사를 맞게 되었다. 이 해에는 초중고교 학생들과 대학생가방태극기가 달리기도 했다. 금 모으기 운동도 있었으며 게다가 직장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구조조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도 이 해이며, 노사 갈등도 전보다 더 치열해져 파업만 터지면 시가지는 화염병과 쇠파이프 천지가 됐다.

언론/대중매체 분야에선 대기업이 언론사나 문화사업에 서서히 손을 떼는가 하면, 영남일보, 부산매일 등처럼 부도나거나 폐간되는 지방신문사가 많았다. 프로스포츠에도 타격을 입혔는데, 모기업이 부도가 난 해태쌍방울이 이 해부터 몰락하기 시작한다. 정치권에선 김대중 정부 출범 후 전년도 15대 대선 때 불거진 '북풍', '세풍', '총풍'에 메스가 가해졌고, 제2회 지방선거에선 새정치국민회의가 광역단체장 6곳, 기초단체장 232개 중 84개에서 당선해 승리를 거머쥐기도 했으며, 특히 서울지역에선 시장을 비롯해 19개 구까지 석권하여 '야도(野都)'를 '여도(與都)'로 바꾸기도 했다. 학계에선 하반기엔 최장집 교수 사상검증 파문이 일었다. 환경 분야에선 동강댐 건설 계획을 놓고 파장이 일었다.

또한 이러한 시대상 때문에 방송가에서는 심심하면 IMF 드립이라는 웃지 못할 드립이 성행하기도 하였다. 무언가 긴축스럽거나 저가형 티나는 것들 혹은 절약스러운 것들에 IMF라는 수식어를 붙였다.[1] 롯데리아에서도 IMF버거라고 빈티나 보이는 아주 간단한 햄버거를 만들어 팔았던 시절이다. 가공육 업계에서는 IMF 김밥햄이라는 저가형 햄도 파는 등 상업에서도 IMF라는 수식어는 자주 쓰였다.

그리고, 이 해 발행된 오백원 주화는 화폐 수집가들에게 엄청난 고가로 팔린다. 한국은행에서 매년 제작한 주화세트용으로 딱 8,000개만 제작되어서 증정용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 와중에서도 1998년부터 시작된 벤처기업 열풍이 김대중 정부의 IT산업 육성정책으로 힘입어 어둠의 전설, 미르의 전설, 리니지전설이 된 온라인 게임이 쏟아진 한 해였다. 이러한 온라인 게임이 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98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빌 게이츠, 손정의 회장을 초청하여 의견을 들은 후[2] 전국의 관공서에 인터넷 인프라를 설치해서 전국의 모든 곳에 인터넷이 연결된 세계 최초의 국가를 만들어낸 배경이 있다.[3] 특히 손정의는 아직 일본에서도 못 이룬 것을 한국이 해냈다며 부러워하는 말을 방송에서 할 정도였다. 민간에만 맡겨두면 인구가 적은 곳은 상당히 늦게 인터넷회선이 들어가거나 채산성을 빌미로 아예 들어가지 않을 수 있지만[4]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있는 관공서에 인터넷 인프라를 1998년~1999년 중으로 불과 1년 만에 모두 설치했기 때문에 모든 곳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당해 초까지 대립 일변도이던 남북관계에선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해이기도 한데,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전임 대통령들의 대북 강경노선 대신 '햇볕정책'을 창안했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팔순을 넘은 나이에 소떼 1만 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금강산 유람선관광 성사까지 달성해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북측은 김대중 정부를 냉담하게 여겼고, 그런 연유로 속초 잠수정 침투사건과 여수 반잠수정 격침사건, '광명성 1호' 발사 파문, 금창리 핵시설 파문 등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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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엔저 현상으로 일본 엔화가 1998년 6월 15일, 사상 최저치인 145엔대까지 올라갔고, 같은 해 8월 11일에는 147엔으로 또 기록을 경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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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인하여 6월 15일에는 종합주가지수(현재 코스피지수)도 주가가 300선 마저 붕괴된 288로 마감돼 87년 3월 수준으로 떨어졌다.

세계적으로도 아시아 경제위기의 여파로 러시아루블화가 흔들리며 8월에는 국채모라토리엄(채무 지불유예)까지 선언했고, 이것이 다시 즉각 남미의 경제를 들썩이게 하면서 대공황 공포까지 밀려왔다. 그러면서 브라질도 10월에 IMF체제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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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5일, 미-일 언론들이 일본 총리 하시모토 류타로의 사임을 메인뉴스로 보도했을 정도로 미-일 관계는 하시모토 시절 최악의 갈등을 겪었다. (MBC 자료)

그러나 한일관계에선 전혀 다른 면모를 선보였는데, 10월 7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 국빈방문 때 아키히토한반도에 대한 고통사과 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언급함으로써 과거 일본의 모습과 다른 면모를 보였다.(KBS, MBC)

위와 같이 외교관계가 호전되자 문화관광부가 일본 문화 개방정책을 마련해 이 때부터 일본만화 원판 번역본 및 일본 영화 중 국제영화제 수상작이 제한적 개방되었으며 일본 가요도 수입되었다. 일부 세간에서는 과거사 사죄를 하지도 않았던 일본의 문화를 개방한다는 것은 식민지 시대를 재현할 것이라는 일설 때문에 반대 입장을 나타냈고, 영화, 음반 등 관련 업계도 한국보다 규모가 일본 대중문화에 잠식당할까봐 우려를 표했으나 <하나비> 등 일본 영화 흥행 부진으로 기우가 되었다.

남북한 통틀어 정부수립 50년, 유엔측은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맞이하던 해였다. 한편 문화관광부는 이 해를 음악의 해로 지정했고, 성균관대학교는 '건학 600년', 역사학계에선 '발해 건국 1300년'을 성대히 기념하였다.

이 해에 지상파 3사인 KBS, MBC, SBS 모두가 각자 음악 프로그램인 뮤직뱅크[5], 음악캠프[6], SBS 인기가요[7]를 개설했다. 왜 동시에 생겼나면 외환위기 때문에 그 전 프로그램이 거의 같은기간 종영됐기 때문이다. 그 후에 새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음악 프로그램들은 카우치의 성기 노출로 강제 종영된 음악캠프[8]를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방영되고 있다. 대신 전년도와 달리 방송 3사에서 립싱크 빈도가 라이브를 초월했다.

영화계에선 문화관광부가 한미투자협정 타결을 위해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는 쪽으로 돌아서자 '한국 영화 종말론'이 나돌았고, 영화인들이 이에 일치단결해 '스크린쿼터 사수'를 목터져라 외쳤다. 멀티플렉스 영화관 CGV 강변이 개업하였는데 이 영화관으로 인해 한국 영화계의 판도 자체가 완전히 변화되었을 정도로 영화계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스포츠에서는 프로골퍼 박세리가 큰 활약을 보여 외환위기로 실의에 빠진 우리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으로 인해 축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고 이동국, 고종수, 안정환 등 연예인급의 인기를 누리던 스타플레이어들 덕에 K리그가 역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시기이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창단 3년 만에 K리그 우승을 차지한 시즌이기도 하다. 반면 미국 NBA는 시카고 불스의 마지막 3-peat 후 마이클 조던의 하차, 선수노조 파업 등으로 침체기에 빠졌다.

또한 이 해에는 한국군에서 육해공 3군 할 것 없이 판문점 내통사건, 미사일 오발사고 등 대형 사고들이 연달아 터져서 군부가 개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1998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천 3백달러로 집계돼, IMF 사태로 세계 42위 중소득 국가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KBS, MBC)

1998년의 화두는 IMF체제 하에서의 생존이었다. 정경유착 속에 덩치만 부풀려 온 재벌들도 구조조정의 칼날을 비켜가지 못했다.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아예 취업의 문을 두드려 보지도 못한 채 2백여만 명이 실직의 아픔을 겪었다. 경제성장률 마이너스 5.1%에 물가상승률 7.5%, 실업률 7%대 폭등 등 한국경제는 IMF체제 하의 최악의 위기를 겪었던 한 해였다. (KBS, MBC)

1998년 1월이 되자 실업률은 한 달 만에 무려 1.4%P나 폭등하여 4.5%까지 폭등하고 한 달 만에 무려 3300여개의 기업이 도산한다.[9][10] 다음 해 2월이던 1999년 2월, 실업률은 무려 8.7%에 달해 단군 이래 최악의 IMF 위기상황을 실감케 하였다. 1999년 2월을 피크로 실업률은 감소하였으나 현재까지도 실업난은 한국경제를 괴롭히는 주요 문제이다.[11][12]

게이머들에겐 게임 역사상 최고의 한 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스타크래프트, 하프라이프,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를 필두로 수많은 전설급 게임들을 배출해 큰 파장을 불러온 해였고, 인도네시아에선 5월 독재자 수하르토가 집권 32년 만에 민중의 힘으로 쫓겨나면서 국민들은 독립 53년 만에 '민주주의'라는 값진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IT 업계에서는 구글이 창업한 해이다. 그러나 런칭 당시부터 몇년간은 야후!, 라이코스, 알타비스타 3대장에[13] 비하면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뒤쳐졌으나 이내 뒤집는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선정한 1998년 올해의 한자는 '(독 독)'이었다.

20세기에 마지막으로 윤달이 낀 해였다. 당시 윤달은 윤5월.

주말 공휴일이 7일이나 되었다. 식목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일요일과 겹쳤다. 그 밖에도 삼일절과 부처님오신날(5월 3일)이 일요일과 겹쳤고, 현충일, 광복절, 개천절은 토요일과 겹쳤다. 추석은 10월 3일(토)~6일(화)이었다.[14] 하지만 설 연휴는 1월 27일(화)~29일(목)요일이었고 샌드위치 데이까지 포함하면 1월 25일부터 1월 29일까지 5일[15]을 쉴 수 있었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1998년에 태어난 사람들은 올해로 반오십이 되며 인구에 있어서도 에코/에코붐세대[16]와 초저출산 세대[17] 사이에 끼인 세대이기 때문에 에코/에코붐 세대와 초저출산 사이의 과도기를 상징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구가 어느정도 유지된 마지막 세대중 하나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향후 저출산 해결에 마지막 희망을 거는 세대이다.[18]

이 해는 전 년도후 년도의 일어난 사건과 임팩트가 너무 커서 묻힌 감이 심하다. 전 년도인 1997년은 충격적인 엽기적 사고[19]가 많이 일어나고 새해부터 기업들의 부도가 갑자기 연쇄적으로 일어나더니 결국 IMF가 왔고, 후 년도인 1999년은 1000년대의 마지막해인지라 눈에띄기도 하고 세기말 분위기가 많이 강했던만큼 그 사이에 있는 1998년은 존재감이 약한데 별 다른 특징도 없는지라 그 정도가 심하다. 또한 1998년은 1990년대중에 세기말 공포 없이 무난하게 한해를 마무리한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 무렵부터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했는데 기존의 80년대부터 시작한 고전적인 일본 애니 스타일은 이 해에 대부분 막을 내렸고 세계명작극장이나 용자 시리즈도 모두 막이 내린 시점인데다가 카우보이 비밥이나 카드캡터 사쿠라를 중심으로 하여 현재의 일본 애니 트렌드를 맞추게 된다.

NBA가 이 해 장기 파업을 하는 바람에 NBA 크리스마스 게임이 유일하게 없었던 해이다.

자이언트판다 밍밍(明明), 리리(莉莉)가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러바오(乐宝), 아이바오(爱宝)가 들어오는 2016년까지 국내에서는 판다를 볼 수 없게 되었다.

2.1. 일본문화 개방한일관계의 대대적인 정상화의 해[편집]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김대중 정부때 이루어졌던 것도 특기할 만한 사건. 사실, 문화개방 당시 일본은 우리의 빚쟁이였던 터라 세간의 반발이 적지 않았지만, 일본 측에서는 이 일을 계기로 DJ 및 한국에게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1998년에는 한일관계에선 전혀 다른 면모를 선보였는데, 일본 정부궁내청에서는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 시 천황과 김대중 대통령의 만찬에서 처음으로 아키히토 천황이 한반도에 대한 '고통'과 '사과' 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언급함으로써 과거 일본의 모습과 다른 면모를 보였다.

역대 정부에서 일제 침략에 대한 앙금으로 일본문화의 국내 유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였으나 이 김대중 정부 들어서 단계적으로 일본문화 개방을 천명하면서 이 때부터 일본문화가 국내에 유입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음지에서 유입됐으나 음지다보니 접한 사람수는 적었다.

이 해에 하나비가 대중문화 개방 후 처음으로 개봉한 일본 영화가 되었으나 흥행을 거두지는 못했으며, 이듬해 1999년에 개봉한 러브레터가 국내 개봉 일본영화 최초로 큰 흥행을 거두었다.[20]

2.2. 타이타닉의 국내 열풍[편집]

또한 이 해는 1997년 말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타이타닉이 국내에 개봉하였던 시기로 영화도 흥행에 성공하면서 관련 팬시들이 출시되며 국내에 타이타닉 열풍을 일으켰다. 주연 배우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케이트 윈슬렛은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아지게 되었으며 감독이 바로 터미네이터 1, 2의 메가폰을 잡았던 제임스 카메론이기도 하여서 80년대 터미네이터에 이어서 90년대에도 흥행 보증수표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또한 타이타닉 OST를 부른 셀린 디옹도 전작의 앨범이 한국에선 부진했지만 타이타닉 OST를 부른 앨범인 Let's Talk About Love가 한국에서 10만장 이상 판매되는 등 나름대로의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당시가 IMF 구제금융의 시기였던지라 타이타닉 영화가 호화적이라는 비판 속에 상영을 반대하거나 관람하지 말자는 반대와 시위 등도 열렸었다.

이 열풍으로 국내에서 최고의 이득을 본 것은 바로 아카데미과학. 전 세게에서 타이타닉 1:350 프라모델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모형 회사였는데, 영화의 대흥행과 함께 모형 키트 또한 날개 돋친 듯이 세계로 팔려나갔다.

2.3. 1세대 아이돌 스타들의 시대[편집]

이 해는 1세대 아이돌 스타들이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였다. H.O.T., S.E.S., 젝스키스, 신화, 베이비복스, 핑클, god, NRG 등의 아이돌 그룹들이 잇따라 데뷔하거나 활동을 하여 국내 최초로 아이돌 문화를 그려나가는 역사를 만들었고 가요사에 있어서도 1세대 아이돌 주역으로 새겨지기도 하였다.

또한 1세대 아이돌들의 전성기에 KBS 2TV에서 뮤직뱅크[21]의 첫방송이 시작되면서 1세대 아이돌들을 선두로 방송시기에 들어갔다.

참고로 이 때 데뷔한 신화는 이 때 태어난 사람들이 성인이 된 2017년까지도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 해의 최대 승자는 바로 H.O.T.로서 정규 3집의 후속곡 의 대히트로 김종환이 대상을 수상한 골든디스크 시상식을 제외하고 방송 3사 가요대상 그랜드슬램서울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22] 지난 해인 1997년에 이어 1998년에도 가요계의 최후의 승리자이자 최종보스로 등극하였다.
[1] 심지어 국내에서 방영하던 해외 애니메이션에서도 IMF 드립을 쳤다. SBS 방영판 슬레이어즈의 주요 장면 다이제스트에서 피리아 울 콥트의 변신장면을 간단하게 보여주고 IMF 절약형 변신이라는 드립을 쳤다. 생각해보면 그 정도로 "만화왕국" 시절의 SBS 영화팀과 번역가 쪽 센스가 뛰어났다.[2] 손정의 회장, 빌 게이츠, 김대중 대통령 접견 회의록[3] 손정의 회장, 孫(손)사장 金(김)대통령 면담 "학생 1인당 1PC 보급정책 펴야"[4] 실제로 한국통신이 본격적으로 ADSL로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두루넷, 하나로통신 등의 민간 사업자는 서울 한복판의 아파트 단지 조차도 재건축이 임박했다는 등의 사소한 이유로 회선 구축을 기피했다. 그러다가 한국통신이 전화가 가능한 모든 곳을 대상으로 ADSL 서비스에 나서면서 비로소 경쟁체제가 시작된 것이다.[5] 가요톱텐 폐지 후 브라보신세대를 방송하지만 그것마저 종영되고 새로이 신설.[6] 생방송 젊은 그대 실패 후 신설.[7] tv가요20 폐지 후 새로이 신설, 이 세 개의 프로그램 중 가장 먼저 신설.[8] 강제 종영된 2005년 그 해에 후신인 쇼! 음악중심을 신설했다.[9] 한 달 새 27만명 실직[10] 3월 실업률 6.5% 폭등[11] 실업률 8.7%... 사상 최악[12] 실업률 8.7%... 사상 최악2[13] 한국에서는 야후코리아→다음→네이버[14] 다만 이게 2022년 이후 현재에 벌어지면 10월 3일(토)~10월 11일(일) 이렇게 샌드위치데이 없이 9일 연속 연휴에다가 한주 통째로 공휴일이 된다.[15] 주 5일 근무 제도 기준이라면 1월 28일 수요일이 설날인 경우 샌드위치 데이 포함 시 1월 24일부터 2월 1일까지 9일 연휴가 가능하다.[16] 에코세대: 1983년~1990년생, 에코붐 세대: 1991년~1997년생[17] 2002년생 ~[18] 김대중 정부 출범 1년차~4년차 사이에 태어난 1998년생, 1999년생, 2000년생, 2001년생이 이에 해당되며 이들은 IMF 외환위기 시절에 각각 미도파 백화점과 한일그룹, 대우그룹, 동아그룹이 각각 해체되던 시기에 태어났다. 일본에서는 버블 붕괴 이후 시작된 잃어버린 10년의 끝무렵과 미국에서는 닷컴 버블 말기에 태어난 세대 역시 이 세대이다.[19] 황장엽 망명사건,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살인사건, 군단 백소령 사건, 정윤철군 살인사건등.[20] 이전에는 '여담으로, SBS에서는 슬램덩크카드캡터 체리를 방영해서 남녀 막론하고 환호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이듬해인 1999년부터는 국내에 본격적으로 일본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했었다. 물론 국내 성우진이 출연한 더빙판으로 방영하였다.'라고 적혀있었지만 애니메이션은 이전에도 철저한 현지화라는 조건 하에 지속적으로 수입되었기 때문에 적절한 예시가 전혀 아니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전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전혀 수입하지 않은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70년대~80년대에 방영한 부모님들의 추억의 애니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현지화한 것이 대부분이다.[21] 1998년 6월이다. 가요톱텐이 강제종영되고 4달 후.[22] 단 서울가요대상 대상은 평생의 라이벌 젝스키스와 공동으로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