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량 제3대 군주 景王 | 경왕 | |
없음 | |
경왕(景王) | |
홍창(弘昌, 402년 ~ 404년) | |
독발(禿髮) | |
녹단(禿髮) | |
생몰 | ? ~ 402년 |
재위 | 399년 ~ 402년 |
부친 | 독발사복건(禿髮思復鞬) |
왕후 | 절굴씨(折掘氏) |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402년, 형 독발이록고가 죽자 즉위하여 양왕(凉王)을 칭하고 연호를 바꾸었다. 이듬해 서평(西平)에서 낙도(樂都)로 천도하고 낙도성을 보수했다. 그가 즉위하자 후진의 황제 요흥은 독발녹단을 광무공(廣武公),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했다. 독발녹단은 후량에 대해선 적대 관계를, 후진에게 칭신하여 404년 연호를 폐지하였다.
406년, 북량왕 저거몽손과 하서(河西)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였기에 군대를 보냈으나 저거몽손이 응전하지 않아 철수했다. 동년 독발녹단은 후진에 3천 필의 말과 3만 마리의 양을 공물로 보내자 요흥은 녹단을 사지절(使持節), 도독하우제군사(都督河右諸軍事),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영호흉노중랑장(領護匈奴中郎將), 양주자사(涼州刺史)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후진에 보낸 양주자사 왕상(王尙)을 소환해 녹단이 고장(姑臧)으로 입성하게끔 도와주게 했다. 요흥은 갑자기 이 명을 취소했으나 녹단이 이미 입성하여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녹단은 고장으로 천도하였다.
407년, 녹단은 북량을 공격했으나 패했고 서군(西郡)의 일륵(日勒)[1]까지 북량군이 쳐들어온데다 서군태수(西郡太守) 양통(楊統)이 북량에 투항하였다. 동년 북하의 황제 혁련발발이 혼인으로 동맹을 맺자고 했으나 거부하였고, 혁련발발이 군대를 이끌고 북량을 공격해 지양(支陽)[2]일대를 약탈했다. 녹단은 그를 정벌하려 했으나 양무(陽武)[3]에서 크게 패했고 연달아 두 나라에 패한 북량은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
408년, 다시 양왕을 칭하면서 가평(嘉平)이란 연호를 선포하여 연호제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북량 공격에 잇달아 실패하고 410년 후진에 멸망당한 서진(西秦)이 다시 재건되면서 북량은 더더욱 위축되었다. 410년 친정하여 북량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북량군이 수도인 고장을 포위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동년 남량의 우위장군(右衞將軍)이던 절굴기진(折掘奇鎮)이 반란을 일으키자 녹단은 낙도로 천도했으며 버려진 고장은 남량에게 빼앗기고 만다.
북량이 계속해서 낙도를 공격해오자, 녹단은 아들 독발안주(禿髮安周)를 인질로 보내 화의를 청했다. 북량군이 철수하자 녹단은 바로 북량을 공격했으나 대패했고, 낙도가 포위당하자 이번에는 다른 아들 독발염간(禿髮染干)을 인질로 보내 화의를 청했다. 413년에도 녹단은 북량을 공격했지만 패했다.
414년, 을불부(乙弗部)가 반란을 일으키자 친정하여 토벌에 나섰으나 이전의 잦은 전쟁으로 남량군은 식량 부족에 시달렸으며 남쪽에는 서진(西秦), 북쪽에는 북량에 포위되어 상황이 매우 안좋았다. 그래서 신하들은 서진과 연합해 토벌에 나설 것을 건의했으나 녹단은 이를 무시했다. 친정한 결과 을불부 토벌은 성공했으나 세력이 크게 약해져 서진왕 걸복치반의 공격으로 낙도가 함락당했다. 녹단은 서쪽에서 세력을 모으려 했으나 그의 무리는 이미 흩어진 뒤였다. 결국 녹단은 후진에 투항하여 북량이 멸망했고, 걸복치반에 의해 좌남공(左南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독살당했다.
406년, 북량왕 저거몽손과 하서(河西)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였기에 군대를 보냈으나 저거몽손이 응전하지 않아 철수했다. 동년 독발녹단은 후진에 3천 필의 말과 3만 마리의 양을 공물로 보내자 요흥은 녹단을 사지절(使持節), 도독하우제군사(都督河右諸軍事),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영호흉노중랑장(領護匈奴中郎將), 양주자사(涼州刺史)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후진에 보낸 양주자사 왕상(王尙)을 소환해 녹단이 고장(姑臧)으로 입성하게끔 도와주게 했다. 요흥은 갑자기 이 명을 취소했으나 녹단이 이미 입성하여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녹단은 고장으로 천도하였다.
407년, 녹단은 북량을 공격했으나 패했고 서군(西郡)의 일륵(日勒)[1]까지 북량군이 쳐들어온데다 서군태수(西郡太守) 양통(楊統)이 북량에 투항하였다. 동년 북하의 황제 혁련발발이 혼인으로 동맹을 맺자고 했으나 거부하였고, 혁련발발이 군대를 이끌고 북량을 공격해 지양(支陽)[2]일대를 약탈했다. 녹단은 그를 정벌하려 했으나 양무(陽武)[3]에서 크게 패했고 연달아 두 나라에 패한 북량은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
408년, 다시 양왕을 칭하면서 가평(嘉平)이란 연호를 선포하여 연호제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북량 공격에 잇달아 실패하고 410년 후진에 멸망당한 서진(西秦)이 다시 재건되면서 북량은 더더욱 위축되었다. 410년 친정하여 북량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북량군이 수도인 고장을 포위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동년 남량의 우위장군(右衞將軍)이던 절굴기진(折掘奇鎮)이 반란을 일으키자 녹단은 낙도로 천도했으며 버려진 고장은 남량에게 빼앗기고 만다.
북량이 계속해서 낙도를 공격해오자, 녹단은 아들 독발안주(禿髮安周)를 인질로 보내 화의를 청했다. 북량군이 철수하자 녹단은 바로 북량을 공격했으나 대패했고, 낙도가 포위당하자 이번에는 다른 아들 독발염간(禿髮染干)을 인질로 보내 화의를 청했다. 413년에도 녹단은 북량을 공격했지만 패했다.
414년, 을불부(乙弗部)가 반란을 일으키자 친정하여 토벌에 나섰으나 이전의 잦은 전쟁으로 남량군은 식량 부족에 시달렸으며 남쪽에는 서진(西秦), 북쪽에는 북량에 포위되어 상황이 매우 안좋았다. 그래서 신하들은 서진과 연합해 토벌에 나설 것을 건의했으나 녹단은 이를 무시했다. 친정한 결과 을불부 토벌은 성공했으나 세력이 크게 약해져 서진왕 걸복치반의 공격으로 낙도가 함락당했다. 녹단은 서쪽에서 세력을 모으려 했으나 그의 무리는 이미 흩어진 뒤였다. 결국 녹단은 후진에 투항하여 북량이 멸망했고, 걸복치반에 의해 좌남공(左南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독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