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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육국춘추 | 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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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량 제3대 황제
靈帝 | 영제
없음
영황제(靈皇帝)
함녕(咸寧, 399년 ~ 401년)
여(呂)
찬(簒)
영서(永緒)
생몰
? ~ 401년
재위
399년 ~ 401년

1. 개요2. 생애3. 참고 항목


1. 개요[편집]

오호십육국시대 후량의 제3대 황제. 여광과 숙원(淑媛) 조씨(趙氏)의 아들, 여소의 이복동생이다.

2. 생애[편집]

어려서부터 기마, 궁술에 능했으나 독서는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383년, 여광이 서역 원정에 나섰을 때, 여찬은 전진의 도읍 장안(長安)에 머물렀다. 이후 전진 황제 부견비수대전에서 참패하자 상방(上邽)[1]로 피신했다. 그리고 여광이 서역에서 돌아와 후량을 건국하자 386년 후량의 도읍 고장(姑臧)[2]으로 가서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이 되었다.

396년, 여광이 천왕으로 즉위하자 태원공(太原公)에 봉해졌다. 이듬해 양궤(楊軌)와 함께 서진(西秦)을 공격해 금성(金城)[3]을 점령하는 공을 세웠으나 여광은 그 전투에서 동생 여연(呂延)[4]이 전사하자 그 책임을 물어 같이 종군한 저거라구(沮渠羅仇)와 저거국죽(沮渠麹粥)을 처형하였다. 그러자 그들의 일족인 저거몽손, 저거남성(沮渠男成)이 반란을 일으켜 단업북량을 세워 후량과 대립하자 여찬은 북량 토벌에 나섰으나 곽논(郭黁)이 고장에서 난을 일으키자 군대를 돌려 곽논을 진압했다.

399년, 여찬은 여소와 같이 북량을 공격했다. 하지만 단업이 남량에 구원을 요청하여 독발이녹고가 군대를 이끌고 오자 철수했다. 동년 여광의 병이 심해지자 태자 여소에게 황위를 넘겼고, 여찬은 태위, 여홍(呂弘)은 사도로 임명해 그들의 보좌를 받으라는 유조를 남기고 죽었다. 여광이 죽자 여소는 그 사실을 비밀로 하라 했으나 여찬은 그를 무시하고 빈소로 들어가 곡을 했다. 군권을 장악한 여찬을 두려워한 여소는 그에게 양위하고자 하였으나 여찬이 거부했고, 여광의 조카 여초(呂超)가 여소에게 여찬의 병권을 뺏을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여소는 부황의 유고를 존중하여 무시하였다.

그러나 여찬은 여홍과 정변을 일으켜 궁에 쳐들어갔고 여소가 자살하자 천왕으로 즉위하여 함녕(咸寧)으로 개원하였다. 400년 여홍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붙잡아 처형했으며 이후에는 남량 정벌을 시도했으나 독발녹단에게 패했다. 그러자 북량 공격에 나서 장액(張掖)[5]을 공격했으나 녹단이 고장을 공격해오자 철수했다.

여찬은 재위동안 주색, 사냥을 탐하고 신하들의 간언을 무시했다. 401년 여찬은 사촌 여초가 멋대로 선비족의 사반(思盤)을 공격하자 그를 책망했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여초가 여륭과 합심하여 술에 취한 여찬을 죽였다. 이후 여륭이 즉위했으며 여찬의 시호를 영황제(靈皇帝)라 하고 그를 백석릉(白石陵)에 매장했다.

3. 참고 항목[편집]

[1]간쑤성 텐수이.[2] 現 간쑤성 우웨이.[3] 現 간쑤성 란저우.[4] 여광의 동생으로 여찬의 숙부다.[5] 現 간쑤성 장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