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에서 넘어옴
분류
조선 제22대 국왕 정종 | 正宗 | ||||||||||||||||||||||||||||||
대한제국 추존 황제 정조 선황제 | 正祖 宣皇帝 | ||||||||||||||||||||||||||||||
정조 표준영정[1] | ||||||||||||||||||||||||||||||
출생 | 1752년 10월 28일 (음력 영조 28년 9월 22일) | |||||||||||||||||||||||||||||
즉위 | 1776년 4월 27일 (23세) (음력 영조 52년 3월 10일)[2] | |||||||||||||||||||||||||||||
사망 | 1800년 8월 18일 (향년 47세) (음력 정조 24년 6월 28일)[3] | |||||||||||||||||||||||||||||
능묘 | 건릉(健陵)[4]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손 | |||||||||||||||||||||||||||||
조선 왕세손 | 조선 국왕 대리청정 | ||||||||||||||||||||||||||||||
제 22대 국왕 | ||||||||||||||||||||||||||||||
|
1. 개요[편집]
정조는 조선의 제 22대 왕이다. 원래 휘는 정종이지만, 조선 제 2대 왕 정종과 혼동될 우려가 있어 변경되었다. 본명은 이산이다.
2. 업적[편집]
- 규장각을 통해 인재들을 길러냈다.
- 자신을 암살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장용영이라는 친위 부대를 만들었다.
- 수원 화성 건설을 명하였다.
- 금난전권을 폐지하였다.
- 대전통편을 편찬하였다.
3. 평가[편집]
왕 - 의정부(대신) - 삼사(대간)로 대표되는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 구조는 태조 그리고 정도전이 기반을 다지고 이어 세종과 문종이 열심히 가꾸고 완성한 체제였다. 이러한 왕 - 의정부 - 삼사로 대표되는 삼각 상호 견제 체제는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의 빈번한 대옥사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선조 이후로는 무수한 사화의 숙청이 일어났으며, 선조, 효종, 현종 시절 때나 작동한 시기였지, 숙종 이후 본격화된 환국 정치에서 알 수 있듯 이후의 대부분은 동인, 서인, 북인, 남인, 노론, 소론, 시파, 벽파 할 것 없이 왕의 전제왕권 강화를 위해 숙청의 대상이 되면서 조정에 피바람이 난무했고, 이는 오히려 조선의 합리적인 통치 체계를 망가뜨리는 행위가 되었다.
그래서 영조는 이러한 피를 부르는 숙청보다 온건책인 탕평책을 실시해 각 대간들 간의 강경파인 준노와 준소를 배제하고 온건파인 완노와 완소를 키워서 조정에 대한 견제력을 약화시키고 전제왕권을 강화했다. 하지만 영조는 재위 중후반부에 그 자신의 심각한 권력욕으로 이러한 쌍거호대와 탕평의 도를 무시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척신들을 등용해 조정의 당파를 억업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한 부작용으로 풍산 홍씨로 대표되는 척신 세력의 발호와 전횡이 이어졌다. 이러한 경험을 한 정조는 집권 초반에 영조 시기의 강력한 외척 세력인 풍산 홍씨와 즉위를 위해 도왔던 경주 김씨 세력을 몰아내서 외척과 관련이 없는 신하들을 등용시켜 강력한 척신 세력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인척중심 등용과 측근 홍국영에게 권력을 너무 몰아주어 훗날 세도정치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홍국영이 특정인들만 요직에 앉히고 인사권을 휘둘러 전횡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정조는 홍국영 세력을 밀어내고 준론 탕평을 펼쳤으며, 이는 국왕 - 신료 간의 삼각 상호 견제 체제를 통해 돌아가는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 구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조가 추구한 준론탕평은 옳고 그름을 임금이 가른다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망 이후 순조의 즉위와 함께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고 극단적인 전제왕권은 왕실 외척 가문에 의해 악용되게 이른다. 왕권을 견제할 신권을 탕평으로 약화시켜 그 권한을 잡은 이들을 견제할 세력은 없었다. 분명한 정조의 실책이고, 이로 인해 조선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붕괴했다고 볼 수 있다.
정조의 정치의 특징으로 바로 준론 탕평이라는 것이 있다. 준론 탕평의 명목은 척신 세력의 발호를 막고 당파의 의리를 중요하게 하고 각 당파끼리 당파색이 강한 인물을 등용시켜 다른 당파의 독주를 방지한다는 명분이다. 하지만 준론 탕평은 오늘날 많은 비판이 존재하는데 정조가 완성시킨 극단적인 전제왕권을 견제할 주체가 전무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조선을 멸망으로 몰고 가버린 세도정치의 바탕을 만든 인물이 바로 정조라는 점이다. 정조가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으로 삼으면서 세도 정치, 더 나아가 조선 몰락의 씨앗을 뿌렸다는 평가가 다분하다.
아마 정조는 훗날 세자가 장성하면 자신이 닦아놓은 왕권과 준론 탕평 하에 당파들을 경쟁시켜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가리라고 기대했던 듯하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실제 순조는 명의 만력제 처럼 국정을 놓아 버린다. 세도정치는 임금을 등에 업은 외척 세력이 견제장치가 없는 무소불위의 전제왕권을 행사할 때 얼마나 악용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선례라 할 수 있다. 순조 대에 세도정치의 막을 연 김조순은 정조 말 정조의 지원를 가득 받은 탓에 아들인 김좌근 대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흔히 아는 막장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아도 세도정치는 견제장치가 전무한 극단적인 전제군주제의 폐단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정조가 세도정치의 본격적인 폐단을 만든 안동 김씨에게 그러한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정조의 죽음이 세간에서 떠드는 독살이나 예상치 못 한 사고사, 감염사 같은 것도 아닌 이상 건강관리 못한 것은 그냥 본인의 책임일 뿐이다. 본인이 술담배와 같은 건강에 안 좋은 요소를 최대한 멀리하며 몸관리를 했어야 했고, 다름아닌 자신의 할아버지 영조라는 아주 좋은 선례도 있었는데 제 스스로 수명을 계속 깎아먹었으니.
정조의 전체적인 정치 방식 또한 논란이 될 수 있는데 표면적으로 탕평이라는 이름 아래 정조 자신의 의중으로 옳고 그름을 갈랐을 뿐이고 다수결의 합의제 및 표결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쉽게 말 하자면 다당으로 견제견 되는 정치에서 왕실 척신정치를 열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정조의 정치가 전제왕권과 왕의 능력에만 너무 의존한 정치였다는 게 오늘날 중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조가 현대적 시각에서 과연 개혁적인 군주였느냐는 의문도 존재한다. 정조가 실학자들을 등용하고 외국의 문물을 일부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문체반정을 일으켜 학문의 다양성을 탄압하고 성리학적 정통에 집착하는 등의 행위를 보면 상당히 모순적인 면도 분명 존재한다. 때문에 정조의 행위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중론이다. 서양 문물의 수입과 서학도 이게 다 패관잡문이나 읽어서 그러니 순정고금체만 쓰라는 명령을 내려 사실상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정조는 스스로를 조선 유학의 대통(大統)으로 칭하는 등 전형적인 유교 원리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대중에게 알려진 개혁 군주라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고, 성리학 근본주의로 돌아가 18세기 말의 조선 사회의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보수적 근본주의를 주장하는 군주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도정치의 원인이 된 정조는 개혁 군주로 추앙받는데 반해 세도정치를 척결한 흥선대원군은 수구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것이 어찌 보면 아이러니.
한편 서양 배들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 정조 재위기였다. 《정조실록》을 보면 1797년(정조 21년) 영국 해군 군함인 프로비던스 호가 부산 용당포에 닿은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정조도 흥선대원군과 마찬가지로 이양선이 오면 통상 수교에는 관심이 없었고 물과 식량과 같은 기본적인 것만 빨리 제공하고 쫓아냈다.
정조는 재위 15년차 이후 경연을 사실상 중단했으며 알려진 바처럼 어느 순간부터 권신들과 비밀 어찰을 통해서 막후 정치를 하였다. 경연은 흔히 알려진 왕이 공부하는 자리로서의 성격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신하들과 서로 소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조는 신하들이 무식하니 내가 가르치겠다는 명목으로 경연을 없애고, 초계문신제라는 미명 하에 권신들과의 막후 정치에만 몰두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정조 시대의 한계는 정조 자신이었는데, 박시백이 지적한 것처럼 자질과 실천력 모두 있었지만 그는 개혁 군주이기 이전에 유교원리주의자였다. 그것도 뿌리까지 유학 그자체인 대(大)유학자이며 설사 정조보다 뛰어난 국왕이 권좌에 있었다 하더라도 조선이라는 국가임과 동시에 조선의 체제를 변혁시켰을리는 만무하다. 설령 그럴 의지가 있더라도, 그 자신의 정통성과 여타 상황들 때문에 그럴 수조차 없었고.
정조가 구축한 국가 운영 체제는 견제장치가 상실된 모순점이 가득했고 조선을 멸망으로 몰아간 단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조의 사상 통제도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래서 영조는 이러한 피를 부르는 숙청보다 온건책인 탕평책을 실시해 각 대간들 간의 강경파인 준노와 준소를 배제하고 온건파인 완노와 완소를 키워서 조정에 대한 견제력을 약화시키고 전제왕권을 강화했다. 하지만 영조는 재위 중후반부에 그 자신의 심각한 권력욕으로 이러한 쌍거호대와 탕평의 도를 무시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척신들을 등용해 조정의 당파를 억업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한 부작용으로 풍산 홍씨로 대표되는 척신 세력의 발호와 전횡이 이어졌다. 이러한 경험을 한 정조는 집권 초반에 영조 시기의 강력한 외척 세력인 풍산 홍씨와 즉위를 위해 도왔던 경주 김씨 세력을 몰아내서 외척과 관련이 없는 신하들을 등용시켜 강력한 척신 세력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인척중심 등용과 측근 홍국영에게 권력을 너무 몰아주어 훗날 세도정치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홍국영이 특정인들만 요직에 앉히고 인사권을 휘둘러 전횡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정조는 홍국영 세력을 밀어내고 준론 탕평을 펼쳤으며, 이는 국왕 - 신료 간의 삼각 상호 견제 체제를 통해 돌아가는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 구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조가 추구한 준론탕평은 옳고 그름을 임금이 가른다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망 이후 순조의 즉위와 함께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고 극단적인 전제왕권은 왕실 외척 가문에 의해 악용되게 이른다. 왕권을 견제할 신권을 탕평으로 약화시켜 그 권한을 잡은 이들을 견제할 세력은 없었다. 분명한 정조의 실책이고, 이로 인해 조선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붕괴했다고 볼 수 있다.
정조의 정치의 특징으로 바로 준론 탕평이라는 것이 있다. 준론 탕평의 명목은 척신 세력의 발호를 막고 당파의 의리를 중요하게 하고 각 당파끼리 당파색이 강한 인물을 등용시켜 다른 당파의 독주를 방지한다는 명분이다. 하지만 준론 탕평은 오늘날 많은 비판이 존재하는데 정조가 완성시킨 극단적인 전제왕권을 견제할 주체가 전무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조선을 멸망으로 몰고 가버린 세도정치의 바탕을 만든 인물이 바로 정조라는 점이다. 정조가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으로 삼으면서 세도 정치, 더 나아가 조선 몰락의 씨앗을 뿌렸다는 평가가 다분하다.
아마 정조는 훗날 세자가 장성하면 자신이 닦아놓은 왕권과 준론 탕평 하에 당파들을 경쟁시켜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가리라고 기대했던 듯하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실제 순조는 명의 만력제 처럼 국정을 놓아 버린다. 세도정치는 임금을 등에 업은 외척 세력이 견제장치가 없는 무소불위의 전제왕권을 행사할 때 얼마나 악용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선례라 할 수 있다. 순조 대에 세도정치의 막을 연 김조순은 정조 말 정조의 지원를 가득 받은 탓에 아들인 김좌근 대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흔히 아는 막장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아도 세도정치는 견제장치가 전무한 극단적인 전제군주제의 폐단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정조가 세도정치의 본격적인 폐단을 만든 안동 김씨에게 그러한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정조의 죽음이 세간에서 떠드는 독살이나 예상치 못 한 사고사, 감염사 같은 것도 아닌 이상 건강관리 못한 것은 그냥 본인의 책임일 뿐이다. 본인이 술담배와 같은 건강에 안 좋은 요소를 최대한 멀리하며 몸관리를 했어야 했고, 다름아닌 자신의 할아버지 영조라는 아주 좋은 선례도 있었는데 제 스스로 수명을 계속 깎아먹었으니.
정조의 전체적인 정치 방식 또한 논란이 될 수 있는데 표면적으로 탕평이라는 이름 아래 정조 자신의 의중으로 옳고 그름을 갈랐을 뿐이고 다수결의 합의제 및 표결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쉽게 말 하자면 다당으로 견제견 되는 정치에서 왕실 척신정치를 열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정조의 정치가 전제왕권과 왕의 능력에만 너무 의존한 정치였다는 게 오늘날 중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조가 현대적 시각에서 과연 개혁적인 군주였느냐는 의문도 존재한다. 정조가 실학자들을 등용하고 외국의 문물을 일부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문체반정을 일으켜 학문의 다양성을 탄압하고 성리학적 정통에 집착하는 등의 행위를 보면 상당히 모순적인 면도 분명 존재한다. 때문에 정조의 행위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중론이다. 서양 문물의 수입과 서학도 이게 다 패관잡문이나 읽어서 그러니 순정고금체만 쓰라는 명령을 내려 사실상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정조는 스스로를 조선 유학의 대통(大統)으로 칭하는 등 전형적인 유교 원리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대중에게 알려진 개혁 군주라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고, 성리학 근본주의로 돌아가 18세기 말의 조선 사회의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보수적 근본주의를 주장하는 군주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도정치의 원인이 된 정조는 개혁 군주로 추앙받는데 반해 세도정치를 척결한 흥선대원군은 수구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것이 어찌 보면 아이러니.
한편 서양 배들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 정조 재위기였다. 《정조실록》을 보면 1797년(정조 21년) 영국 해군 군함인 프로비던스 호가 부산 용당포에 닿은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정조도 흥선대원군과 마찬가지로 이양선이 오면 통상 수교에는 관심이 없었고 물과 식량과 같은 기본적인 것만 빨리 제공하고 쫓아냈다.
정조는 재위 15년차 이후 경연을 사실상 중단했으며 알려진 바처럼 어느 순간부터 권신들과 비밀 어찰을 통해서 막후 정치를 하였다. 경연은 흔히 알려진 왕이 공부하는 자리로서의 성격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신하들과 서로 소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조는 신하들이 무식하니 내가 가르치겠다는 명목으로 경연을 없애고, 초계문신제라는 미명 하에 권신들과의 막후 정치에만 몰두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정조 시대의 한계는 정조 자신이었는데, 박시백이 지적한 것처럼 자질과 실천력 모두 있었지만 그는 개혁 군주이기 이전에 유교원리주의자였다. 그것도 뿌리까지 유학 그자체인 대(大)유학자이며 설사 정조보다 뛰어난 국왕이 권좌에 있었다 하더라도 조선이라는 국가임과 동시에 조선의 체제를 변혁시켰을리는 만무하다. 설령 그럴 의지가 있더라도, 그 자신의 정통성과 여타 상황들 때문에 그럴 수조차 없었고.
정조가 구축한 국가 운영 체제는 견제장치가 상실된 모순점이 가득했고 조선을 멸망으로 몰아간 단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조의 사상 통제도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1] 1989년 이길범 作. 상상 어진으로 실제 어진은 부산 용두산 대화재 당시 소실되었다.[2] 세는나이 25세.[3] 세는나이 49세.[4] 정조 생전에 어릴 때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은 슬픔과 그에 따른 미안함으로 왕으로 즉위하고나서도 거의 매년마다 성묘, 참배를 하는 등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그로 인하여 정조 사후에 아들 순조는 효심으로 아버지 정조를 사도세자가 있는 현륭원 옆에 자리하게 한다.[5] 조선 시기에 올려진 묘호. 한글로는 2대 임금의 묘호와 같지만 한자로는 '定'(2대)과 '正'(22대)으로 서로 다르다.[6] 대한제국 시기에 올려진 묘호. 조선 국왕 중 묘호가 바뀐 임금은 여럿이지만 정조를 제외한 모두는 조선 시기에 바뀌었다.[7] 1899년(광무 3년), 대한제국의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