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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
3.1. 1821년 그리스 봉기3.2. 1822년 그리스 제1공화국 수립3.3. 이집트의 개입과 서방 의용군의 참전3.4. 3국 열강(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개입
3.4.1. 나바리노 해전3.4.2. 프랑스군의 모레아 원정3.4.3. 디미트리오스 입실란티스의 최후 공세
4. 종전: 1829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조약5. 전쟁의 영향 및 이후 정세

1. 개요[편집]

1821년부터 1829년까지 전개된 그리스의 독립전쟁으로, 그리스 혁명이라고도 한다.

이를 통해 그리스는 수백년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독립국으로서 역사에 다시 등장했고, 국제적으로는 프랑스 7월 혁명과 벨기에 독립전쟁 등에 영향을 주어 1815년 이래 지속되던 빈 체제에 균열을 가져왔다.

2. 배경[편집]

2.1. 오스만 제국그리스 지배[편집]

2.2. 그리스 내셔널리즘의 발흥[편집]

3. 전개[편집]

3.1. 1821년 그리스 봉기[편집]

3.2. 1822년 그리스 제1공화국 수립[편집]

3.3. 이집트의 개입과 서방 의용군의 참전[편집]

3.4. 3국 열강(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개입[편집]

3.4.1. 나바리노 해전[편집]

3.4.2. 프랑스군의 모레아 원정[편집]

3.4.3. 디미트리오스 입실란티스의 최후 공세[편집]

4. 종전: 1829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조약[편집]

5. 전쟁의 영향 및 이후 정세[편집]

5.1. 그리스[편집]

수백년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마침내 해방되어 자유를 되찾았다.

그러나 자력으로 이룬 독립이 아닌 세 열강의 지원을 통해 얻은 결과였기에, 이후 그리스 독립운동가들은 각자 세 열강 중 한쪽을 지지하는 당[1]을 만들어 내분을 벌였고, 이에 3국이 열강의 개입으로 그리스 제1공화국은 그리스 왕국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당시 독립 그리스의 영토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아티키와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등 중남부에 국한되었고, 상당수의 그리스인이 여전히 오스만 제국 치하에 있었기에 잃어버린 고토를 되찾자는 내셔널리즘 이데올로기인 메갈리 이데아[2]가 대두되었다.

5.2. 오스만 제국이집트[편집]

수백년에 걸쳐 지배하던 그리스를 상실한 것만으로도 오스만 제국에겐 큰 타격이었고, 자국 본토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그리스를 통해 영국, 프랑스, 러시아라는 세 열강이 언제든 본토를 노릴 가능성마저 생겼으니 안보 위협 역시 심화되었다.

한편 이집트는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었지만, 오스만 중앙군 대신 그리스 독립군과 열강 군대를 상대로 활약한 덕분에 실질적으로는 독립국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획득하여,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이득을 보았다.

5.3. 3국 열강[편집]

5.3.1. 영국[편집]

5.3.2. 프랑스[편집]

그리스 독립전쟁에 개입하여 군사적 목표를 달성한 것까진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의 계획대로였다.

그러나 그리스에서 불타오른 혁명의 불길은 빈 회의 이후 사그라들었던 프랑스 혁명 정신에 다시 불을 붙였고, 결국 종전 1년만인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축출당하고 루이 필리프가 즉위하면서, 프랑스라는 국가 입장에서 이익이 됐을지는 몰라도 샤를 10세 개인 입장에서는 남 좋은 일만 시켜준 꼴이 되었다.

5.3.3. 러시아 제국[편집]

[1] 영국을 지지하는 앙글리아당(잉글랜드당), 프랑스를 지지하는 갈리아당(프랑스당), 러시아를 지지하는 로시아당(러시아당).[2] 그리스어로 '위대한 이상'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