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2. 역사[편집]
2.1. 현대(근대) 그리스인 정체성의 형성[편집]
2.2. 그리스 독립전쟁[편집]
2.3. 메갈리 이데아(위대한 이상)[편집]
독립 직후의 그리스 왕국은 지금의 그리스보다도 협소한 아티키[1]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등 그리스 중남부 지역만을 보유한 상태였고, 상당수의 그리스인들이 여전히 오스만 제국 치하에 남아있었다.
이에 따라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중세 동로마 제국 시대까지 그리스인의 땅이였고, 여전히 그리스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지역들을 모두 해방시킴으로써, 고대와 중세의 영광을 재현해야 한다는 사상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그리스어로'위대한 이상'이라는 의미를 가진 메갈리 이데아였다.
흔히 내셔널리즘 또는 팽창주의가 우파 이념으로 인식되는 현대 유럽 정치권과 달리, 이 당시 그리스의 메갈리 이데아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정치인과 국민들이 공유한 범국민적 이데올로기였고, 국내 정치에 있어서는 자유주의[2]와 진보주의를 추구한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등 당대 그리스의 주요 좌파 정치인들도 메갈리 이데아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이러한 이념에 따라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한 그리스 왕국은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 종료 시점에 이르러서는 북쪽으로 마케도니아와 서트라키아 일대까지 영토를 수복하고, 크레타와 이오니아 제도[3]를 비롯한 도서지역도 상당 부분 수복하여 오늘날 그리스 영토 대부분을 완성했으며, 1차 대전에 협상국(연합국) 측에 서서 승리한 이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4][5]를 제외한 동트라키아와 스미르나[6]를 비롯한 소아시아 해안지대까지 상당 부분 수복했다.
그러나 1919~1922년 동안 진행된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에서[7]는 소아시아 내륙 및 흑해 연안까지 확보하려고 무리하게 동진을 계속하다가 역으로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튀르키예 독립군에게 패퇴당했고, 결국 1923년 로잔 조약으로 동트라키아와 소아시아를 반환하고 인구 교환까지 실시하여 수백만의 그리스계가 튀르키예 땅에서 추방당하는 결과까지 야기되었다.
이에 따라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중세 동로마 제국 시대까지 그리스인의 땅이였고, 여전히 그리스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지역들을 모두 해방시킴으로써, 고대와 중세의 영광을 재현해야 한다는 사상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그리스어로'위대한 이상'이라는 의미를 가진 메갈리 이데아였다.
흔히 내셔널리즘 또는 팽창주의가 우파 이념으로 인식되는 현대 유럽 정치권과 달리, 이 당시 그리스의 메갈리 이데아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정치인과 국민들이 공유한 범국민적 이데올로기였고, 국내 정치에 있어서는 자유주의[2]와 진보주의를 추구한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등 당대 그리스의 주요 좌파 정치인들도 메갈리 이데아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이러한 이념에 따라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한 그리스 왕국은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 종료 시점에 이르러서는 북쪽으로 마케도니아와 서트라키아 일대까지 영토를 수복하고, 크레타와 이오니아 제도[3]를 비롯한 도서지역도 상당 부분 수복하여 오늘날 그리스 영토 대부분을 완성했으며, 1차 대전에 협상국(연합국) 측에 서서 승리한 이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4][5]를 제외한 동트라키아와 스미르나[6]를 비롯한 소아시아 해안지대까지 상당 부분 수복했다.
그러나 1919~1922년 동안 진행된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에서[7]는 소아시아 내륙 및 흑해 연안까지 확보하려고 무리하게 동진을 계속하다가 역으로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튀르키예 독립군에게 패퇴당했고, 결국 1923년 로잔 조약으로 동트라키아와 소아시아를 반환하고 인구 교환까지 실시하여 수백만의 그리스계가 튀르키예 땅에서 추방당하는 결과까지 야기되었다.
2.4.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이후의 내셔널리즘 운동[편집]
튀르키예와의 인구 교환 이후, 실지회복주의에 기반한 메갈리 이데아는 유의미한 정치 이념으로서 힘을 잃었으나 내셔널리즘 자체는 여전히 그리스 정계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2.4.1. 메탁사스주의[편집]
1930년대 그리스 제2공화국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한 퇴역 군인 출신 요안니스 메탁사스는 고대 그리스와 동로마 제국에 이은 세번째 그리스 문명을 이룩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그는 1935년 왕정복고 이후 복위한 국왕 요르요스 2세의 신임을 바탕으로 1936년 총리직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8월 4일에는 국왕의 묵인하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모든 정당을 금지시키고 '8월 4일 체제'라 불리는 전체주의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그의 정권은 노골적으로 파시즘을 모방했으나, 정작 원조 파시스트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는데, 1940년에는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하기에 이르자 메탁사스는 이를 격퇴한 후 '메탁사스 라인'이라 불리는 방어선을 설정했다가 이탈리아 등 추축국의 2차 침공 이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따라서 메탁사스주의는 민주주의의 본고장인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훼손시킨 전체주의/파시즘 사상이라는 부정적 평가와 외세의 침략에 단호하게 맞선 사상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메탁사스 개인 역시 독재자와 애국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정권은 노골적으로 파시즘을 모방했으나, 정작 원조 파시스트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는데, 1940년에는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하기에 이르자 메탁사스는 이를 격퇴한 후 '메탁사스 라인'이라 불리는 방어선을 설정했다가 이탈리아 등 추축국의 2차 침공 이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따라서 메탁사스주의는 민주주의의 본고장인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훼손시킨 전체주의/파시즘 사상이라는 부정적 평가와 외세의 침략에 단호하게 맞선 사상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메탁사스 개인 역시 독재자와 애국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2.5. 2차 대전기의 그리스 국민(민족)저항[편집]
2.6. 2차 대전 이후의 그리스 내셔널리즘[편집]
2.6.1. 공산당 계열의 좌익 내셔널리즘[편집]
2.6.2. 그리스 왕국의 우익 내셔널리즘[편집]
2.6.3. 그리스-키프로스 통일(이노시스) 운동[편집]
2.7. 1974년 민주화 이후의 그리스 내셔널리즘[편집]
2.7.1. 그리스 본토의 내셔널리즘[편집]
2.7.2. 그리스계 키프로스인 내셔널리즘[편집]
3. 그리스 내셔널리스트[편집]
3.1. 그리스 독립운동가[편집]
3.2. 그리스 독립 이후의 사상가/정치인[편집]
3.2.1. 그리스 본토[편집]
3.2.2. 키프로스[편집]
4. 그리스 내셔널리즘 정당[편집]
4.1. 그리스 본토[편집]
4.1.1. 현존 정당[편집]
- 그리스 해법
- 스파르타인당
4.1.2. 역사적 정당[편집]
- 초기 그리스 3대 정당
- 앙글리아당(잉글랜드당)
- 갈리아당(프랑스당)
- 로시아당(러시아당)
- 그리스 왕국 시대 정당
- 그리스 제3공화국 시대 정당
4.2. 키프로스[편집]
4.2.1. 현존 정당[편집]
4.2.2. 역사적 정당[편집]
[1] 아테네를 비롯한 수도권.[2] 사회주의의 확산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자유주의는 범좌파 사상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3] 이쪽은 제3국인 영국 지배하에 있다가 1864년 그리스 왕국에 반환되었다.[4] 현재 튀르키예의 이스탄불.[5] 영국군이 무혈입성하여 점령했기에 그리스군이 접수할 수 없었다.[6] 튀르키예어로는 '이즈미르'.[7] 이미 영국 등 협상국의 허수아비로 전락한 오스만 제국 정부가 아닌 튀르키예 민족주의자들이 중앙정부 통제에서 이탈하여 결성한 튀르키예국을 상대했다.[8] 그리스 총리를 역임한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와 그의 정치적 후계자들에 의해 정립된 그리스 특유의 자유주의 사상.[9] 중도우파 보수 정당.[10] 중도 정당.[11]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당.[12] 극우 메탁사스주의 정당.[13] 중도좌파 녹색 정당.[14] 그리스계 키프로스인과 튀르키예계 키프로스인이 함께 그리스인도 튀르키예인도 아닌 키프로스 국민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