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생전 조위의 광릉군승(廣陵郡丞)을 지냈으며, 479년 6대손 소도성이 남제를 건국하자 소표는 광릉부군(廣陵府君)으로 추존되어 칠묘에 위패가 안치되었다. 이후 7대손인 양무제 시기엔 칠묘의 범위를 넘긴 조상이기에 그의 아들인 소예까지만 칠묘에 배향되고 소표 본인은 더이상 모셔지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소휴(蕭休)로 생전 효렴(孝廉)이었고, 소표의 조부는 소규(蕭逵)이며 주종사(州從事)를 지냈다. 소표의 증조부는 소교(蕭矯)로 사구장(蛇丘長)이었으며, 소표의 고조부는 후한의 박사(博士)를 지낸 소주(蕭周)이고 후한의 중산상(中山相)을 지낸 소포(蕭苞)의 아들이었다. 소표의 아들인 소예는 태중대부(太中大夫)의 관직에 있었으며 사후 소제가 건국되자 태중부군(太中府君)으로 추존되어 칠묘에 모셔졌고, 소량이 건국되자 황조태중부군(皇祖太中府君)으로 재추존되어 양의 칠묘에도 모셔졌다.
그의 아버지는 소휴(蕭休)로 생전 효렴(孝廉)이었고, 소표의 조부는 소규(蕭逵)이며 주종사(州從事)를 지냈다. 소표의 증조부는 소교(蕭矯)로 사구장(蛇丘長)이었으며, 소표의 고조부는 후한의 박사(博士)를 지낸 소주(蕭周)이고 후한의 중산상(中山相)을 지낸 소포(蕭苞)의 아들이었다. 소표의 아들인 소예는 태중대부(太中大夫)의 관직에 있었으며 사후 소제가 건국되자 태중부군(太中府君)으로 추존되어 칠묘에 모셔졌고, 소량이 건국되자 황조태중부군(皇祖太中府君)으로 재추존되어 양의 칠묘에도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