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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카마호 선상 살인 사건
인원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조선족 선원 6명
날짜
장소
태평양 해상 원양어선 페스카마 15호
원인
태업, 쌍방 폭행, 회항 등
목적
선박 탈취 후 일본 밀입국(도주)
결과
전원 체포 후 압송
판결
1심
전원 사형 선고
2심
전재천 제외 무기징역으로 감형
3심
상고 기각, 원심 확정[1]
1. 개요2. 경위
2.1. 경제적 문제
3. 재판4. 논란
4.1. 주범 논란4.2. 변호인 논란
5. 대중매체6. 여담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96년 6월 3일 온두라스 선적 참치잡이 원양어선 페스카마(PESCA MAR) 15호에서 중국 조선족 선원들에 의해 벌어진 선상 반란으로 한국인, 인도네시아인 선원들이 살해당한 사건이다.

당시 전국적으로 이슈가 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여전히 남아있는 원양어선 내에서 벌어진 가혹행위의 실상이 알려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이 사건이 국내에 알려지자, 페스카마 호가 한국으로 입항하기 전부터 초미의 관심사였다.

흉악한 집단 살해사건이라 거의 아무도 변호를 맡으려 하지 않았으나, 당시 변호사였던 문재인이 변호인을 맡아 1심에서 사형이었던 형벌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사건으로 유명하다.

본 문서의 내용은 그다지 자세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으므로 다음 링크를 참조해도 된다. 페스카마호 사건 한국어 위키백과

고등학교 수준이나 일반인 대상의 생활법률 서적에서 국제관할권에 대한 예를 들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판례이기도 하다. 보다시피 관련된 국가들이 무척 많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에서 재판이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2. 경위[편집]

1996년 6월 3일 부산을 출발, 을 경유해 태평양에서 조업중이던 "페스카마 15호"라는 원양 참치어선에서 성과급을 받는 어선사관들이 아닌 고정 월급만을 받는 외국인 선원들 중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조선족 선원들이 하루 8시간 노동 등 근로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작업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이전부터 선원들에게는 하루 24시간 중 21시간에 달하는 가혹한 노동과 심한 폭행과 기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분위기가 흉흉해지며 양자간의 상호 폭행이 일어나며 조업실패시 막대한 손실이 발생하자 선장 최모씨는 해당 선원들을 교체하기로 하고 근처 어선에 "사모아로 회항하겠다"고 교신했으며 회사 측에서는 대체 선원 8명을 준비시켜 놨지만...약속된 일정인 8월 13일이 되도록 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해당 조선족 선원들은 을 내어 현지 업자에게 뇌물을 주고 불법적인 경로로 취업을 알선받았던지라 하선할 시 그 빚을 갚을 수 없고, 선장이 사모아까지 가는 비용과 그 기간중 조업중단으로 인한 손해분을 모두 청구한다고 협박하고 나서야 현실을 직시했다. 선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하고 다시 업무에 복귀시켜주기를 요청했으나 선장이 거부하자, 차라리 모두 살해하고 배를 탈취해 일본으로 밀입국하자는 생각으로 조선족인 2등 항해사 전재천 등 조선족 선원 6명이 선상 반란(8월 3일 저녁으로 추정)을 일으켜서 한국인 선원 7명, 인도네시아인 선원 3명, 중국 조선족 선원 1명 총 11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심야에 1명씩 차례로 불러내어 흉기로 죽이거나 찔러서 바다에 던지는 식으로 계획적으로 살해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같은 중국 조선족인 선원 1명도 자신들에게 반대하자 입을 막기 위해 살해하고 타 선박에서 맹장염으로 옮겨져 육지로 후송중이던 한국인 고등학생 실습생 환자를 산채로 바다에 던져 살해하는 등 총 11명을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살해하였고, 나머지 인도네시아 선원들에게도 칼을 들이대고 같이 살인에 동참하도록 협박하였다.

결국 한국인은 항해에 필요한 1등 항해사 1명만 살려두고 일본으로 향하는 동시에 인도네시아 선원들을 냉동창고에 가두어 최종적으로는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전부 죽이려 하였으나 1등 항해사가 선박을 멈추고 고장난 것처럼 가장해 수리하겠다며 조선족들을 창고로 유인한 후 인도네시아 선원들과 힘을 합쳐 문을 닫아 걸어 감금했다. 그리고 항해사가 직접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까지 헤엄쳐 가서 신고하여, 범인들은 출동한 일본 해상보안청 직원들에게 전원 체포되어 대한민국 해양경찰에 인계, 한국으로 압송되었다.

2.1. 경제적 문제[편집]

시사저널 1996년 기사에 따르면 범인들은 경제적인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
"계산해 보니 오가는 항공비 3만위안, 사모아까지 가는 비용 5만위안, 구류소에서 3개월간 먹고 자는 비용 2만위안, 중국에서 올 때 보증금으로 친구의 백평짜리 집을 눌러 놓은 것까지 총합계가 15만위안이었습니다. 이 많은 돈을 집에서 어떻게 부담하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2년 만기를 채워도 집으로 중국돈 2만위안밖에 가져가지 못하는데 한 사람 앞에 20만위안이라는 손해배상비가 다 무엇입니까. 자자손손 10대를 갚아도 못갚습니다."

이들이 받기로한 월급은 190달러로 연봉으로 환산하면 약 1.9만위안정도 된다. 당시 중국의 가구당 연간소득은 도시 6000위안 농촌 2000위안정도 되었다. # 즉 갑자기 가구소득의 25배~100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더미에 앉게 생긴다고 하니 궁지에 몰린 나머지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대량살인이라는 참혹한 결말로 끝난 탓에 이 사건에서 자주 간과되곤 하지만, 사실 흉악범죄나 선상 가혹행위가 아니라도 이 케이스에서는 해고, 강제하선, 손해배상 등과 관련하여 민사법적, 노동법적 쟁점이 많이 존재한다.

일단 먼저 선장 측에서 폭행, 가혹행위를 저지른 이상 근로자가 근로를 거부하는 것은 정당하고, 이것에 대한 해고, 강제하선은 물론 손해배상도 위법하며, 살해협박 뿐만 아니라 손해배상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협박죄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사모아에서 강제하선 후 한국까지 귀환하는 비용을 본인에게 부담시키는 것 역시 위법의 소지가 있다. 선원측이 요구한 8시간 근로가 정당한 요구인지 역시 선주 측의 이익이나 군대식 사고방식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규범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물론 정확한 것은 당시의 노동법뿐만 아니라 계약, 취업규칙, 단체규약, 노동관행 등을 살펴봐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나 현재로서는 어렵다.

3. 재판[편집]

피고인들은 전부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고, 선박은 온두라스 선적이었으며, 피해자들은 대한민국, 중국, 인도네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법원에 재판권이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검찰은 보호주의를 적용하여 대한민국 형법 등을 적용하고 해상강도살인, 사체유기,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하였다.

6명 모두 1심에서는 사형이 선고됐으나, 2심에서는 문재인 변호사가 변호를 맡았으며[2] 전재천을 제외한 나머지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97년 7월 25일, 대법원에서는 피고인들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 판결문

전재천은 이후 주동자가 아니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2007년[3] 노무현 대통령 특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6명 모두 지금도 무기수의 신분으로 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인도네시아 선원들 중 한국인 미성년자 실습생 살인에 연관된 3명에 대해서 수사한 검찰은 이들을 불구속 상태로 수사하였으나 이들이 조선족 선원들의 강압을 거부할 경우 본인의 생명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인정하여 형법 제12조[4]를 적용해 불기소처분했다.

이 사건에 대해 가해자측은 한국 선원 측의 무자비한 폭력이 원인제공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선원들에게 가혹한 폭력과 기합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재판과정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된다. 즉 조선족 선원들은 살인을 저지르기 전까지만 해도 이미 선행범죄를 당한, 가해자가 된 피해자인 상황이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군필자 남성들은 군사주의와 복종에 익숙한 나머지 억압과 인권침해를 정당화하곤 했다.

판결문에서도 판사는 “피고인은 선장과 갑판장에게 폭행당하면서 ‘게밥이나 되거라’라는 말을 듣자 살해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범행을 저질렀다. 선장과 갑판장의 폭언과 구타에 못이겨 복수의 일념으로 벌인 선상 살인극이었는데, 좀 모자라는 사람이었다”라고 설시했으며, 검사들도 '선원들이 집을 팔아 배를 탔고, 범행의 직접 동기가 가혹 행위·하선 명령 때문인 것으로 드러나 동정이 갈 만한 부분도 있다'고는 했다.

다만 결과가 엄청나기 때문에 정상 참작 여지가 없다며 극형을 요구하였다. 그들이 살해한 선원 중에는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 선원도 있었고 당시 19세의 미성년자이자 타 선박에서 병원으로 급하게 이송중이던 환자였던 해사고 한국인 실습생도 포함된 등, 총 11명에 달하는 희생자 중 절반 가까이인 피해자 5명은 조선족 선원들이 당했던 폭력과 전혀 무관한 이들이었다. 이 사실을 피고인들 스스로도 인정했다. 특히 한국인 미성년자 실습생은 살해당한 날 그들을 처음 만났는데 그 배에 탄지 단 6시간만에 산 채로 바다에 던져지는 변을 당했다.

이들은 계획적으로 피해자들을 야간에 1명씩 불러내 도끼로 내리치거나 참치처리용 칼로 난자한 후 바다에 내던졌고, 칼에 찔린 채 선박의 난간에 매달려 살려 달라고 발버둥치는 피해자의 양손을 칼로 찔러 바다에 떨어뜨리고, 범행을 목격한 인도네시아인 선원 3명을 공범으로 만들어 범행 폭로를 못하게 할 목적으로 이들을 위협하여 강제로 실습생 피해자를 살해하도록 하였으며, 중국 조선족 선원 1명과 인도네시아인 선원 3명을 동사하게 만들려고 어창에 5일간 감금하였으나 동사하지 않자 다시 끌어내어 바다에 내던져 살해하는 등 범행 내용이 너무나 잔혹했기에 이를 감안하여 재판에서 사형, 무기 등 중형이 선고되었다.[5]
그 잔혹함이 도저히 인간의 행동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이고, 이 사건 범행이 한국인 선원들의 가혹행위에 의하여 유발되었다는 점을 참작한다고 하더라도 상상하기 어려운 가공할 범행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대법원 판결문 중

4. 논란[편집]

4.1. 주범 논란[편집]

2006년 7월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선상 폭력에 대해 방송하면서 페스카마호 사건에 대해 다시 거론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사형수였던 전재천[6]이 자신은 주동자가 아니라고 주장한 내용을 방송했다. 물론 살인에 가담한 것은 인정했고 처벌에 대해서도 당연하다고 했으나, 단지 자신이 사건을 주도한 것이 아니라 조선족 선원들 사이에서 형성된 살해 분위기가 형성된 상태에서 선원들이 2등항해사였던 그를 압박했고, 결국 같이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증언했던 것이다. 실제로도 2등항해사인 전재천은 직위상 선상 폭력의 대상도 아니고 단순 노무자들이었던 다른 일반 선원들과는 입장이 많이 달랐기에 적극 가담했다고 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또한 당시 사건을 담당하던 변호인도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다른 선원들이 살기 위해 전재천을 주동자로 몰아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무기수로 복역 중인 다른 선원들은 전원 전재천이 사건을 주도했다고 하거나, 아예 대답을 하지 않겠다고 증언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고 이를 뒤집을 만한 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재심은 어려워 보인다. 2021년 현재도 재심을 할 정도의 증거는 없는 상황이며 전재천과 다른 선원들 모두 무기수로 교도소에서 25년째 복역 중이다.

파일:전재천0.png

전재천은 이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돼서 다른 조선족 선원들이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을 때 혼자만 사형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알고싶다의 취재와 재판 내역에 따르면 전재천은 주범이 될만한 동기가 없다. 선상 폭력이 일어났을 때 용서를 구하는 화해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를 작성하게 한 것이 전재천이다. 평소에 중재자 역을 맡았다는 것은 조선족 선원들도 인정하였다. 당시 변호를 맡던 문재인도 이를 지적해 전재천은 다른 조선족 선원과 달리 2등항해사였고 학력이 있어 조선족 선원을 대표를 한것은 맞으나 살인을 일으킨 주범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전재천은 지금까지도 일관되게 자신은 주범이 아니라고 주장하나 나머지 선원들은 대답을 회피하고 말을 바꾸는 모습을 보인다.

파일:전재천1.png

전재천이 주범이라고 묻는 질문에 대답을 회피한다.

파일:전재천2.png

다른 조선족은 전재천이 주범이 맞다고 이야기 하나

파일:전재천3.png

파일:전재천4.png

당시에는 수사관이 중국으로 보내버린다고 하여 살기위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편지로 전재천에게 사과하였다.

따라서 전재천이 주범일 가능성은 매우 적었으나 주범이 필요했던 당시 사법부는[7] 지위가 높고 나이가 가장 많은 전재천을 주범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정말 주동자가 맞는가에 대한 의심이 들기는 하다. 합리적 의심이 드는 만큼 노무현 정권에서 특별 사면으로 유일한 사형수였던 전재천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물론 전재천이 살인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고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주범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을 뿐이다.

4.2. 변호인 논란[편집]

당시 문재인 변호사가 2심에서 이 사건에 대해 변호를 맡았다. 문재인 변호사는 '평등주의'가 강한 중국인들의 우발적 살해였다고 옹호를 하였고 재판이 끝난 이후에도 영치금을 넣어주는 등 가해자들을 돕는데 앞장섰다고. 그리고 이 사실은 훗날 2012년 12월 17일에 있었던 18대 대선 TV토론에서 언급되며 논란이 일었다.

이와 관련하여, 변호사윤리규칙 제19조 제1항은 '변호사는 의뢰인이나 사건의 내용이 사회 일반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수임을 거절하여서는 아니 된다' 라는 규정이 거론된다.

문재인 측이 먼저 변호를 자처했다는 설이 있는데, 실제로는 일부 조선족 인사들이 문재인 변호사에게 사건 수임을 부탁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흉악범에게도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필요할까

문재인이 2008년 1월 전재천의 감형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었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감형 결정에 있어 그가 중대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2015년에도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이 이 사건을 다시 거론했다.

그리고 이후로도 문재인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종종 거론하는 사건이 되었다.

다만, "이 사건의 가해자들도 동포로서 따뜻하게 품어줘야 하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는 발언은 인권변호사로서 문제가 없는 발언이기에 별로 회자되지 않다가, 2019년 탈북 선원 강제 북송 사건 이후 다시 논란이 됐다. 살인범이기 때문에 강제북송했다는 문정권 주장과 정면배치되기 때문.

5. 대중매체[편집]

박인권이 이 사건을 토대로 그린 만화 '선상반란'이 있다. 선상 위에서의 사건 진행만 따로 떼놓고 본다면 박인권 작가 특유의 설정부여를 고려하고 본다면 의외로 상당히 중립적인 시각에서 사건을 논한 작품이다. 사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자세하면서도 알기 쉽게 제작되었다. 박인권 만화 선상반란 표지가 있는 곳.

하지만 사건 이전 주인공의 배경 설정은 70년대 한국 농촌과 중국 공산당 치하의 농촌을 구분 못해서 자극적 설정 아무거나 갖다쓴 막장 드라마이며 박인권 만화답게 다른 만화 캐릭터들이 짜깁기해서 등장해서 무려 변호사 캐릭터는 신현철이다.

문제는 만화를 본 사람들이 당시에 나무위키에 기여했더니만 뭐같은 분쟁이 상당히 터졌다. 링크라도 남겼다면 계정이 경고먹을수도 있었던 시대였다.

6. 여담[편집]

  • 참혹한 대량살인 사건이었음에도, 당시 한중수교 초기라 조선족에 대한 인식이 동포라는 이유로 호의적인 편이었으며[8] 당시 시대상 선상 폭력[9]이 일상이었다는 점에 동정을 사서 사회 분위기는 이들에게 상당히 괜찮았다.[10] 그래서 피해자들이 아닌 살인자들에게 전국에서 성금이 답지했고 어느 독지가는 당시 돈으로 2천만원을 희사할 정도였다. 단 비난여론이 생기자 그 돈은 반환되었다. 미궁에 빠질뻔한 사건을 밝혀내고 범인들을 검거하게 한 1등항해사는 폭력 가해자로만 알려져 숨어 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 범인들의 부인들은 대부분 원래부터 가정 형편이 어려워 외국에 가서 가족을 면회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나, 사형수 교화 담당을 맡은 삼중(승려)의 도움으로 다 함께 대한민국을 방문해 남편을 면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으로 돌아가는 출국날 전재천의 부인은 공항에 나오지 않고 잠적했다. 돈 벌어오던 남편이 감옥에 처박혀 경제 활동을 전혀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으니, 고향에 쌓인 빚과 자식들 학비를 위해서 자신이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당연하지만 불법체류자였다. 1년 후 그녀는 다시 삼중스님을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는 교도소로 이혼 서류를 보냈다. 그 이유는 한국인과 혼인신고를 하여 한국 내 자신의 체류 신분을 보장받기 위해서(...). 전재천은 울면서 도장을 찍어줬다. 편지 500통 보내온 선상반란 조선족사형수- 박삼중 스님 대증언
  • 전재천은 "석방이 된다면 조선족을 위하고 남북통일을 위해 있는 힘 다할 것" 담담히 밝히며 "20년을 살았다. 출소시켜 달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담당 변호사 조봉은 "한국에서 무기수들이 20년 이상 형을 산 전례가 없다"[11]면서 전재천 등 6명의 출소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 승조원에 의한 선상 폭력 사건은 그 뒤에도 끊이지 않고 있다. 논란을 우려한 선사와 업계에서는 쉬쉬하는 분위기이며, 관할권 문제나 수사의 어려움 등을 핑계로 정부도 강건너 불구경 식으로 방치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원양어선과 화물선 선원이 거의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잘 드러나지도 않고 있다.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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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7도1142판결문[2] 문재인뿐 아니라 중국조선족 출신의 변호사인 조봉(당시 44세) 고급율사(高級律師)가 무료변론을 자처, # 두 사람이 공동 변론을 했다.[3] 사건을 변호한 문재인 대통령이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시절이다.[4]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이나 자기 또는 친족의 생명, 신체에 대한 위해를 방어할 방법이 없는 협박에 의하여 강요된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5] 오히려 이 경우는 한국에서 재판을 한 게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한다. 중국이었으면 정상참작의 여지도 없이 바로 사형이었다. 중국은 일반살인범은 정상참작의 사유가 없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조건 사형을 선고하고 있는 곳이다.[6] 일제강점기에 김복대, 김학철이 이끄는 독립유격대 소속이던 독립운동가 전정기의 아들이다. 14살에 아버지를 뇌출혈로 여의고 중국 천진대학 사범대를 졸업한 뒤 길림성 조선학교에서 13년간 교사생활을 한 엘리트 출신. 딸을 대학에 보내려는데 교사 월급으로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돈을 벌기 위해 항해사 시험을 쳐서 자격증을 따고 배를 탔다가 일이 이렇게 됐다.[7] 확실히 주범 찾기에 혈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재천은 "두목만 말하면 나머지 5명은 살려주겠다"고 형사가 말했다고 하는데 나머지 조선족 선원들도 편지에서 '살기 위해 거짓으로 주모자로 형님을 지목했다', '수사관이 주범을 말하지 않으면 중국에 보내겠다고 해서 지목했다 죄송하다'고 말한다.[8] 정확히는 한국의 나쁜 사장님들에게 착취당하는 '약자'의 이미지였는데 이후 조선족이 늘어나면서 오원춘 등 조선족의 엽기범죄가 늘어남에 따라 다소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주변국을 무시한다는 여론이 있는 시진핑 집권 이후에는 '적국'을 옹호한다는 인식에 더 나빠졌다. 이번 사건의 동정여론은 한강 몸통시신 사건처럼 가해자가 된 피해자로서 받아들였기에 생긴 것이지, 만약 이들이 오원춘처럼 무고한 피해자들을 단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살해했다면 딱 오원춘만큼 욕을 먹었을 것이다. 즉 옹호여론은 국적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한강 사건의 가해자 장대호도 오원춘마냥 선량한 조선족 여성 투숙객을 성폭행한 뒤 잔혹하게 죽였다면 딱 오원춘만큼 욕을 먹었을텐데, 자신보다 어린 험악한 조선족 남성에게 반말에 신체적 폭력까지 온갖 능욕을 당했음에도 '투숙비라도 내면' 참고 넘어가려다 먹튀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폭발했기에 페스카마호 가해자들과 유사한 면이 있다.[9] 아마 바다일 하는 사람 중에서는 먼 바다에서 조용히 살해당한 사람도 많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 인식이었고, 일리가 없는 말이 아니었다.[10] 사실 당시에는 베트남 전쟁 등에 대해서도 한국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반성해야 된다는 여론이 이념을 가리지 않고 국민 다수에게 있었던 시대이고, 여러 면에서 한국의 잘못도 인정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것이 2010년대 이후에는 국뽕과 국까, 우월감과 열등감이 섞인 유사 내셔널리즘으로 변한 것이다.[11] 사실이 아니다. 2009년에 보도된 바로는 당시 20년 이상 수감중인 무기수가 70여 명이었으며 23년이 9명, 24년이 5명, 25년이 1명 있었고 1982년부터 27년이나 지난 1명까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