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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CCCXCIV |
1. 개요[편집]
한국 근·현대사, 동아시아사의 상징이 되는 해.
새해 벽두에 전라도 일개 고을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가 한국사는 물론 동아시아사, 나아가 세계사를 뒤흔들게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악정에 항거하여 일어난 농민 봉기는 갑오농민전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에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면서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청나라는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그나마 명목상으로 가지고 있던 동아시아 중심 국가의 지위를 상실하고 국가 막장 테크를 타게 되었으며, 일본 제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하여 주변국에 대한 공격적인 침략 정책에 열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조선의 운명은 누란지위. 결국 이 해를 기점으로 동아시아의 정세는 결정적으로 뒤바뀌게 되었고, 다음 갑오년(1954년)이 오기까지 전무후무한 격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편 조선은 이 해에 갑오개혁을 시행하여 1392년 개국 이래 커다란 변경 없이 유지되어 온 국가 체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근대 국가로 나아갈 첫 발을 내딛게 된다.(물론 필요에 의한 자발적인 개혁이 아니라, 외세의 개입에 의한 타율적인 개혁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해 여름철 날씨는 정말 기록적이었다고 한다. 장마철 강수량이 겨우 88mm에 그쳐 가장 메마른 장마였다고 하며, 6~8월 내내 강수량 없이 뜨거운 폭염과 열대야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고 한다. 이에 당시 국왕이던 고종이 "조선의 여름은 더운 것이 정상이나, 금년 여름은 유별나게 덥다"고 말한 기록이 남아있다.
새해 벽두에 전라도 일개 고을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가 한국사는 물론 동아시아사, 나아가 세계사를 뒤흔들게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악정에 항거하여 일어난 농민 봉기는 갑오농민전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에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면서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청나라는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그나마 명목상으로 가지고 있던 동아시아 중심 국가의 지위를 상실하고 국가 막장 테크를 타게 되었으며, 일본 제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부상하여 주변국에 대한 공격적인 침략 정책에 열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조선의 운명은 누란지위. 결국 이 해를 기점으로 동아시아의 정세는 결정적으로 뒤바뀌게 되었고, 다음 갑오년(1954년)이 오기까지 전무후무한 격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편 조선은 이 해에 갑오개혁을 시행하여 1392년 개국 이래 커다란 변경 없이 유지되어 온 국가 체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근대 국가로 나아갈 첫 발을 내딛게 된다.(물론 필요에 의한 자발적인 개혁이 아니라, 외세의 개입에 의한 타율적인 개혁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해 여름철 날씨는 정말 기록적이었다고 한다. 장마철 강수량이 겨우 88mm에 그쳐 가장 메마른 장마였다고 하며, 6~8월 내내 강수량 없이 뜨거운 폭염과 열대야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고 한다. 이에 당시 국왕이던 고종이 "조선의 여름은 더운 것이 정상이나, 금년 여름은 유별나게 덥다"고 말한 기록이 남아있다.
2. 사건[편집]
2.1. 실제[편집]
- 2월 15일(1월 10일): 고부 민란이 일어났다. 봉기한 농민들이 고부 관아를 점거하였으나, 조병갑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 3월 25일(2월 19일): 제2차 고부 민란이 일어났다.
- 3월 31일(2월 25일): 전라도 순천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 4월 3일(2월28일): 전라도 영광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 4월 6일(3월 1일)
- 전봉준이 이끄는 수백의 농민군이 줄포(현 부안군 줄포면) 전운소를 습격하여 세고(稅庫)를 파괴하였다.
-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가 기독교 선교와 교육을 위해 평양에서 광성중학교를 개교함.
- 4월 8일(3월 3일): 신임 고부 군수 박원명이 부임하여 수습책을 발표하자, 농민군이 해산했다.
- 4월 16일(3월 11일): 충청도 황간, 영동, 옥천, 보은 등지의 동학도들이 봉기하였다.
- 4월 21일(3월 16일): 농민군, 전라도 무장현 동음치면(현 고창군 공음면)에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다.
- 4월 25일(3월 20일): 무장에 집결한 농민군이 ‘무장 포고문’을 발표하고 봉기하였다(무장기포).
- 4월 28일(3월 23일): 농민군이 고창, 흥덕을 거쳐 고부 관아를 점거하였다.
- 4월 30일(3월 25일): 농민군, 고부군 백산(현 부안군 백산면)에 집결하여 백산창의대소를 발표,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지도부를 구성하여 조직적인 봉기에 나섰다.
- 5월 3일(3월 28일): 농민군이 태인 관아를 점거했다.
- 5월 7일(4월 3일): 진산(현 금산군 진산면)에서 봉기한 농민군이 유림 및 보부상으로 구성된 민보군의 습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다.
- 5월 8일(4월 4일)
- 농민군이 부안 관아를 점거했다.
-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이 제물포를 출발했다.
- 5월 10일(4월 6일)
- 농민군, 황토현(현 정읍시 덕천면)에서 전라 감영군을 물리치고 승리하였다(황토현 전투).
-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 선발대가 군산에 도착했다.
- 5월 11일(4월 7일)
- 농민군이 정읍 관아를 점거했다.
-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 선발대가 전주에 도착했다.
- 전라도 동복(현 화순군 동복면)에서 동학도들이 관아를 습격했다.
- 5월 12일(4월 8일)
- 농민군이 고창 관아를 점거했다.
- 경군 본대가 군산에 도착했다.
- 5월 13일(4월 9일)
- 농민군이 무장 관아를 점거했다. 이후 16일까지 농민군은 무장에 머물렀다.
- 경군과 전라 감영군, 보부상대로 구성된 토벌대가 홍계훈의 인솔 하에 전주를 출발, 농민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 전라도 옥과(현 곡성군 옥과면)에서 봉기한 농민군이 본진과 합류하기 위해 정읍으로 향했다.
- 5월 14일(4월 10일): 충청도 회덕(현 대전광역시 대덕구)에서 봉기한 농민군이 충청 감영군에 진압되었다.
- 5월 16일(4월 12일)
- 농민군이 영광 관아를 점거했다. 이후 19일까지 농민군은 영광에 머물렀다.
- 홍계훈, 병력 증원을 위해 전주로 돌아갔다.
- 농민군 지도부, 대적시 약속 4항과 12조 계군호령을 제정, 반포하였다.
- 5월 18일(4월 14일): 농민군, 법성 구수포에 정박 중인 한양호를 나포, 일본인 선장과 전운국 위원인 김용덕 등을 체포하고 돈을 빼앗은 다음 일본인 선장을 석방시켰다.
- 5월 19일(4월 15일): 조정에서 제2차 고부 민란의 원인을 제공한 안핵사 이용태를 파직시켰다.
- 5월 20일(4월 16일)
- 농민군이 병력을 나누어 본대는 영광에 남고 별대는 함평으로 진군했다. 함평에서 수성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함평 관아를 점거했다.
- 전봉준, 창의소 명의의 통문을 홍계훈 앞으로 보내 자신들이 봉기한 목적을 밝혔다.
- 5월 22일(4월 18일)
- 함평 주둔 농민군이 나주부의 공형(公兄)에게 봉기의 목적을 알리는 통문을 보냈다.
- 조정에서 전라 감사 김문현을 경질하고 외무협판 김학진을 후임 전라 감사로 임명하였다.
- 조선 주재 일본 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3]가 조선이 청에 원병을 청할 가능성이 있음을 본국에 보고했다.
- 5월 23일(4월 19일): 함평 주둔 농민군이 8개 조항의 폐정 개혁안을 홍계훈에게 전달했다. 이에 나주 목사 민종렬이 홍계훈을 대신하여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답변을 전달했다.
- 5월 25일(4월 21일): 함평 주둔 농민군이 장성으로 이동하여 월평리(현 장성군 황룡면)에 진을 쳤다.
- 5월 26일(4월 22일):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 본진이 장성으로 이동했다.
- 5월 27일(4월 23일): 농민군, 장성 황룡촌에서 경군과 교전을 벌여 승리하였다(황룡촌 전투). 경군을 물리친 농민군은 방향을 돌려 전주성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 5월 29일(4월 25일): 농민군이 정읍, 태인을 거쳐, 금구 원평(현 김제시 금산면)에 이르렀다. 원평에서 농민군은 고종의 윤음을 가지고 온 이효응, 배은환을 살해했다.
- 5월 31일(4월 27일)
- 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했다.
- 6월 1일(4월 28일)
-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이 완산에 진을 치고 전주성을 포위, 압박을 개시했다.
- 농민군이 전주성 남문으로 나와 경군과 교전을 벌였다가 격퇴당하고 성 안으로 철수했다.
- 6월 2일(4월 29일)
- 농민군이 전주성 북문으로 나와 경군과 교전을 벌였다가 경군의 포격을 받고 성 안으로 철수했다.
- 조정에서 시원임대신회의를 열고 청군 파병 요청을 논의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이미 사전에 청군 차병(借兵)을 요청하는 외교 공문을 원세개를 통해 청나라에 전달해 놓고 있었다.
- 일본 제국, 조선이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는 스기무라의 보고를 접수한 즉시 임시 각료 회의를 열고 중의원 해산 및 조선에 혼성 여단 파병을 결정하였다.
- 6월 4일(5월 1일): 농민군이 전주성 남문으로 나와 경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고 성 안으로 철수하였다.
- 6월 6일(5월 3일): 농민군이 전주성 북문으로 나와 경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전봉준은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 6월 7일(5월 4일)
- 농민군이 홍계훈에게 27개 조의 폐정 개혁안과 함께 귀순 의사를 밝히는 소지를 전달했다.
- 조선 주재 일본 대리공사인 스기무라가 조선 측에 일본의 조선 출병을 통보했다.
- 6월 8일(5월 5일)
- 농민군 측의 제안에 홍계훈은 농민군이 자진하여 성문을 열고 신속히 해산하면 안전한 귀향을 보장하겠다는 뜻을 전달했으나, 폐정 개혁안에 대해서는 언질을 주지 않았다.
- 일본 제국, 청나라에 조선 출병을 통보했다.
- 청나라 섭사성이 지휘하는 청군 선발대가 충청도 아산만에 당도했다.
- 6월 11일(5월 8일)
- 전주 화약이 체결되다.
- 홍계훈, 농민군 측에 폐정 개혁안을 왕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였고, 농민군이 철수한 후 전주성을 접수한 홍계훈은 각 읍에 영을 내려 농민군이 귀환하는 대로 잡아들일 것을 명령했다.
- 6월 12일(5월 9일)
- 신임 전라 감사 김학진과 순변사 이원회가 전주에 도착했다.
- 일본군 혼성 여단 선발대가 제물포에 도착했다.
- 6월 18일(5월 15일)
- 조선의 마지막 과거 시험이 치러졌다. 이후 제1차 갑오개혁으로 인해 과거 시험은 폐지되었다.
- 7월 27일(6월 25일)
- 제1차 갑오개혁이 단행되었다.
- 군국기무처 신설되다.
2.2. 가상[편집]
- 게임 Fallen London의 배경이 되는 해이다.
3. 탄생[편집]
3.1. 실제[편집]
- 10월 27일 - 프리츠 자우켈
- 일자불명
- 정기선
- 안경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