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청나라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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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국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 大淸國 | ||||||||||||||||
1760년 청나라의 최대 강역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상징 | ||||||||||||||||
국호 | 아이신 구룬(ᠠᡳ᠌ᠰᡳᠨ ᡤᡠᡵᡠᠨ, 金國)[4] → 다이칭 구룬(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大淸國) | |||||||||||||||
국가 | ||||||||||||||||
역사 | ||||||||||||||||
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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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환경 | ||||||||||||||||
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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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
통화 | 냥 (~ 1899) 청 위안 (1899 ~ 1912) | |||||||||||||||
현재 국가 |
1. 개요[편집]
2. 특징[편집]
296년(1616년~1912년)[17]이라는 근 300년에 달하는 긴 세월 동안 중국 대륙을 통치한 제국이며, 역대 왕조 가운데 황통의 중단없이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왕조다.[18] 더불어 역대 중국 왕조 중 원나라 다음으로 가장 넓은 강역을 차지한 왕조로, 전성기 기준으로는 그 원나라보다도 넓다. 또한 중국 왕조에서 드물게 제위의 찬탈이 한 번도 없이, 천명제부터 동치제까지 10세대에 걸쳐 부자 직계 세습이 이루어지기도 했다.[19] 또한 단명한 왕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약 400년 동안 29명의 황제[20]가 재위했던 한나라나 약 300년 동안 각각 20명과 18명, 16명의 황제가 재위했던 당나라와 송나라, 명나라에 비해 황제 수가 적고 황제 1인 당 평균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다. 애초에 단 세 명의 황제가 통치한 강건성세의 길이만 해도 한 세기 반이나 되었고[21], 황제로 재위한 기간이 불과 10년 밖에 안된 초대 황제 누르하치도 여진족의 추장으로 추대된 기간부터 세면 무려 43년을 지도자로 있었다.
만주족은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렸다. 그 일부는 12세기에 화베이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 농업을 영위했다.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금(金)[22]이라 하고, 흥경에 도읍했다. 이 사람이 청의 태조이다. 또한 21세기 이전 기준 최후의 퉁구스계 주권국가로, 만주족을 중심으로 몽골인,한족, 티베트인, 위구르인 등 다수의 민족들이 연합한 다민족국가였다.
실질적 시작은 창업주 누르하치의 후금 시기인 1616년부터고, 후금의 2대 군주 홍타이지가 1636년 4월 11일 국호를 '다이칭 구룬(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으로 개칭하면서 청나라가 역사에 등장했다. 이후 1644년에 이자성의 난과 남명을 제압하고 중국 베이징에 입관(入關)했으며,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라는 3명의 걸출한 군주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불리는 장장 120여 년에 가까운 성세를 누렸다.[23] 티베트, 신강, 내외 몽골 등 광활한 번부를 정복하고 통치했다. 18세기 내내 세계 1위의 경제대국으로 군림하며 찬란한 중국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뿌리깊은 부정부패와 만한갈등 탓에 백련교도의 난과 각종 민란들이 터지며 쇠퇴하기 시작했고,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의 이권 침탈이 가속화하며 모든 면에서 망국의 색이 짙어졌다. 1840년에는 아편전쟁이 발발했고, 이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중국은 노골적인 식민열강들의 이권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이후 양무운동(동치중흥)이나 변법자강운동(광서신정) 등으로 근대화 움직임을 시도하였으나 이미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기는 역부족이었고, 19세기 말에 태평천국의 난, 의화단 운동 등 온갖 시련을 겪다가 결국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 이듬해 2월 선통제가 퇴위하면서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다만 제국은 1912년에 붕괴했음에도 청 황실은 1924년까지 자금성에 머무르면서 소조정이라는 형태로 존속했다. 또한 1912년에 퇴위했던 선통제가 1917년에 장쉰이 일으킨 장훈복벽으로 복위하여 잠시 복고하기도 했으나, 10여일 만에 진압되면서 북양정부에 다시 귀속되었다. 결국 소조정마저 1924년 핍궁사건으로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쫒겨나면서 청나라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황성(皇姓)은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아이신교로라고 쓰기도 하며, 현대 중국어로는 '아이신줴뤄'로 발음된다. 한국 한자음으로는 '애신각라'이다.
만주족은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렸다. 그 일부는 12세기에 화베이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 농업을 영위했다.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금(金)[22]이라 하고, 흥경에 도읍했다. 이 사람이 청의 태조이다. 또한 21세기 이전 기준 최후의 퉁구스계 주권국가로, 만주족을 중심으로 몽골인,한족, 티베트인, 위구르인 등 다수의 민족들이 연합한 다민족국가였다.
실질적 시작은 창업주 누르하치의 후금 시기인 1616년부터고, 후금의 2대 군주 홍타이지가 1636년 4월 11일 국호를 '다이칭 구룬(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으로 개칭하면서 청나라가 역사에 등장했다. 이후 1644년에 이자성의 난과 남명을 제압하고 중국 베이징에 입관(入關)했으며,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라는 3명의 걸출한 군주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불리는 장장 120여 년에 가까운 성세를 누렸다.[23] 티베트, 신강, 내외 몽골 등 광활한 번부를 정복하고 통치했다. 18세기 내내 세계 1위의 경제대국으로 군림하며 찬란한 중국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뿌리깊은 부정부패와 만한갈등 탓에 백련교도의 난과 각종 민란들이 터지며 쇠퇴하기 시작했고,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의 이권 침탈이 가속화하며 모든 면에서 망국의 색이 짙어졌다. 1840년에는 아편전쟁이 발발했고, 이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중국은 노골적인 식민열강들의 이권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이후 양무운동(동치중흥)이나 변법자강운동(광서신정) 등으로 근대화 움직임을 시도하였으나 이미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기는 역부족이었고, 19세기 말에 태평천국의 난, 의화단 운동 등 온갖 시련을 겪다가 결국 1911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 이듬해 2월 선통제가 퇴위하면서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다만 제국은 1912년에 붕괴했음에도 청 황실은 1924년까지 자금성에 머무르면서 소조정이라는 형태로 존속했다. 또한 1912년에 퇴위했던 선통제가 1917년에 장쉰이 일으킨 장훈복벽으로 복위하여 잠시 복고하기도 했으나, 10여일 만에 진압되면서 북양정부에 다시 귀속되었다. 결국 소조정마저 1924년 핍궁사건으로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쫒겨나면서 청나라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황성(皇姓)은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아이신교로라고 쓰기도 하며, 현대 중국어로는 '아이신줴뤄'로 발음된다. 한국 한자음으로는 '애신각라'이다.
3. 상징[편집]
3.1. 국호[편집]
언어별 명칭 |
보통은 청나라라고 부르지만 만주어로 다이칭 구룬. '구룬'은 국(國)이란 뜻의 만주어 독음이다. 한자로는 대청국(大淸國)이다. 19~20세기에는 대외 문서에서 '중화대청국'(中華大淸國)이나 '대청제국'(大淸帝國)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영문으로는 '대청'(Great Qing)[32] 또는 '대청제국'(Empire of Great Qing)으로 부르고 현대 중국에서는 '청조'(淸朝)라고 불리고 있다. 다이칭 구룬과 거의 같은 뜻으로 위대하다는 뜻의 '암바'라는 만주어 단어를 써서 '암바 칭 구룬'(Amba Cing Gurun), '암바 다이칭 구룬'(Amba Daicing Gurun)으로 부르기도 했다. 만주족이 지배민족이라 국가라 '만청(満淸)'이라고도 불렸다.
다른 중국 왕조들과 달리 국명이 추상 명사이다. 요(요하), 금(안출호수), 원(대재건원), 명(명교) 등의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중국에 자리잡은 역대 국가들은 춘추전국시대의 각 국명에서 유래한 전통적 지명에서 나라 이름을 따왔기 때문에 매우 이질적이다. 그 이유로는 음양오행설에 따라 '불'을 상징하는 명조(明朝)를 제압하겠다는 뜻에서 물 수(水) 변이 들어간 '청'(淸)을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설로는 청나라의 만주어 원음인 '다이칭'(Daicing)이 몽골어로 '전사'(戰士)를 의미했기 때문에 원래 국명이 '전사의 나라'를 뜻한다는 말이 있다.
다른 중국 왕조들과 달리 국명이 추상 명사이다. 요(요하), 금(안출호수), 원(대재건원), 명(명교) 등의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중국에 자리잡은 역대 국가들은 춘추전국시대의 각 국명에서 유래한 전통적 지명에서 나라 이름을 따왔기 때문에 매우 이질적이다. 그 이유로는 음양오행설에 따라 '불'을 상징하는 명조(明朝)를 제압하겠다는 뜻에서 물 수(水) 변이 들어간 '청'(淸)을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설로는 청나라의 만주어 원음인 '다이칭'(Daicing)이 몽골어로 '전사'(戰士)를 의미했기 때문에 원래 국명이 '전사의 나라'를 뜻한다는 말이 있다.
3.2. 국기[편집]
황룡기(黃龍旗) | |
1862~1889 | 1889~1912 |
원래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정식 국기가 따로 없었다.
청나라는 1862년 서양의 국가들이 국기가 있을 때 자신들은 없는 것을 제국의 문제로 여겼고 삼각 황룡기를 국기로 제정했다. 그러다 1881년, 이홍장이 외국 해군기들 사이에서 삼각기는 너무 튄다며 서태후에게 사각기로의 교체를 주청하였고, 1889년부터 사각 황룡기가 해군기 및 국기로 공식 지정되었다. 그 이전에는 공식적인 국기 또는 국장이 없었고 그나마 의장기나 팔기군의 팔기를 사용했다. 국기의 모티브 역시 팔기였다. 따라서 해당 시기가 배경인 사극에서 팔기군의 깃발들이 아니라 황룡기가 나온다면 이는 고증오류다.
황룡기의 바탕색인 노란색은 황제의 상징이며, 용을 숭상하는 중국답게 용은 청나라 황제를 뜻한다고 한다. 이는 곧 '짐이 곧 국가다'라는 인식을 주기 위한 위엄이라고 한다.
삼각 황룡기를 바탕으로 한 황제기도 있었다.
3.3. 국장[편집]
청나라의 국장
청나라의 국장. 위의 사진을 모티브로 채색된 것.
또 다른 버전.
역대 중국의 국장들. 제일 밑에 청나라의 국장들이 나온다.
청나라도 국기와 함께 국장(나라의 문장)도 쓰였다. 팔기군의 팔기처럼 오각형에 가까운 모양의 노란 깃발에 바깥 테두리는 파란색 계열이며, 배와 등의 비늘, 뿔, 혀가 붉고 몸이 푸른 용이 새겨져 있는데, 청나라 시대의 국기에서 따왔다. 용 주변에 태양, 흰 구름이 연기처럼 표현되어 있다.
청나라의 국장. 위의 사진을 모티브로 채색된 것.
또 다른 버전.
역대 중국의 국장들. 제일 밑에 청나라의 국장들이 나온다.
청나라도 국기와 함께 국장(나라의 문장)도 쓰였다. 팔기군의 팔기처럼 오각형에 가까운 모양의 노란 깃발에 바깥 테두리는 파란색 계열이며, 배와 등의 비늘, 뿔, 혀가 붉고 몸이 푸른 용이 새겨져 있는데, 청나라 시대의 국기에서 따왔다. 용 주변에 태양, 흰 구름이 연기처럼 표현되어 있다.
3.4. 국가(國歌)[편집]
4. 역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
연표 1588년 누르하치, 건주여진 제패 1606년 누르하치, 쿤두런 한 즉위 1616년, 누르하치, 겅옌 한 즉위, 후금 건국 1618년 국호를 '아이신 구룬(대금)'으로 자칭 1619년 사르후 전투 대승, 여진 통일 선포 1621년 요양 천도 1625년 심양 천도 1626년 영원성 전투 패배 1629년 베이징 광덕문 전투 1636년 '다이칭 구룬(대청)' 선포 및 칭제건원 1637년 병자호란 대승 1639년 이자성과 장헌충 재봉기 1640년 - 1642년 송산–금주 전투 승리 1644년 입관, 자금성 함락으로 명 멸망 1645년 양주 공방전, 남경 입성 1646년 이자성, 장헌충의 난 종결 1652년 - 1659년 이정국, 정성공 복명 운동 1654년, 1658년 1,2차 나선정벌 1659년 정성공의 남경 공격, 실패 1662년 남명 멸망 1663년 사천 무산 전투 1660년 - 1799년 문자의 옥 1673년 – 1681년 삼번의 난 1683년 대만 원정, 동녕 왕국 멸망 1684년 해금 철폐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1711년 지정은제 시행 1716년 《강희자전》 완성 1724년 양렴은제 시행 1726년 개토귀류 시작 1727년 캬흐타 조약 체결 1732년 군기처 설치 1735년 《명사》 간행, 공포 1747년 원명원 건설 1755년 - 1758년 준가르 원정 1760년 공행 설치 1777년 《흠정몽고원류》 간행, 공포 1778년 《흠정만주원류고》 간행, 공포 1782년 《사고전서》 완성 1789년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 간행, 공포 1793년 메카트니 사절단, 건륭제 알현 1796년 – 1805년 백련교도의 난 1813년 천리교의 난 1816년 아머스트 사절단, 쫓겨남 1838년 - 1839년 임칙서, 광저우에서 아편 단속 1840년 - 1842년 제1차 아편전쟁, 난징 조약 1844년 황포 조약(프), 망하 조약(미) 체결 1851년 - 1864년 태평천국 운동 1853년 - 1868년 염군의 반란 1856년 – 1860년 에로호 사건, 제2차 아편전쟁 1858년 아이훈 조약, 톈진 조약 체결 1860년 영프연합군의 베이징 점령, 베이징 조약 체결 1861년 - 1895년 양무운동 전개 1863년 상해 공공조계 설정 1864년 - 1877년 야쿱 벡, 위구르 점령 1871년 러시아, 이리 계곡 점령 1881년 이리 조약 체결 1884년 영국, 티베트 침략 1884년 - 1885년 청나라-프랑스전쟁 1894년 - 1895년 청나라-일본전쟁 1897년 독일, 칭다오 점령 1899년 조차 (~ 1919년) 1898년 변법자강운동 전개, 무술 정변 1899년 - 1901년 의화단 운동 1901년 신축조약 체결, 신정 지시 1910년 청나라의 유일한 공항인 난위안 국제공항 개항 1911년 우창 폭동, 신해혁명 1912년 청 멸망, 중화민국 수립 |
5. 영토[편집]
18세기 청의 강역. |
청은 전성기에 북쪽으로는 스타노보이 산맥, 남쪽으로는 난사 군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으며 카슈미르의 라다크 지역과 길기트 발티스탄 지역, 카자흐스탄 잠발리주와 알마티주, 키르기스스탄, 투바 인민공화국, 와칸 회랑, 타지키스탄 일부, 네팔 일부, 부탄 일부, 인도 아루나찰프라데시, 미얀마 카친주, 베트남 북쪽 끝과 박롱비 섬, 라오스 일부, 외만주, 몽골 등[33] 청나라가 18세기 중반까지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하면서 중국의 영역은 만주, 내몽골, 신장, 티베트에 걸치는 광범위한 땅에 걸치게 되었으나 19세기 중반 이후로 이미 국력이 쇠퇴하여 각종 조약을 통해 일부 영토를 상실하였다. 그러나 청 멸망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는 현재까지 외몽골 독립 이외에는 큰 변동없이 영토가 보존되고 있다. 티베트는 청나라 멸망 이후 독립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직후 한국전쟁 당시 다시 합병되었다.
전성기때 청은 지금의 중국보다도 영토가 넓었고 심지어 원나라보다도 영토가 넓었다.[34] 현재 중국의 영토인 내몽골, 티베트와 위구르 뿐만이 아니라 외만주와 외몽골 전체, 더불어 대만, 카자흐스탄 동부 지역까지 전부 청의 영토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의 강역. |
5.1. 총독[편집]
한편 중국은 넓어도 너무 넓었기에 청나라는 성을 몇개씩 묶어 지방의 군사와 민사를 관리할 황제의 대리인을 임명했다. 그 관직이 바로 총독이다. 총독들과 그 관할지역은 이하와 같다.
6. 문화[편집]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문화 문서 참고하십시오.
청 시기의 문화는 가히 중국 역사상 가장 발전한 시기들 중 하나였다. 특히 청나라 조정은 한족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목적으로 문화를 진흥시켰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강희제 시기의 《강희자전》, 옹정제 시기의 《고금도서집성》, 건륭제 시기의 《사고전서》 등이다.
이 시대의 문학 작품 중에는 《홍루몽》이라는 소설이 크게 유명하다. 중국 대륙에서는 《삼국지》보다 더 유명하다고 한다.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연구자가 많은 소설이라고 한다. 《홍루몽》 외에도 《요재지이》, 《유림외사》도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청나라 문학 작품이다. 특히 《요재지이》는 중국의 판타지 소설 모음집 정도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귀신들이 인간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그 특징이며 믿거나말거나 식의 구전 이야기[37]들이 많이 실려 있다. 당대 청나라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허나 이 자유로운 분위기는 오직 순수 문학이나 소설에 한정되어서, 만주족의 권위를 침범하거나 청나라에 반대되는 내용들은 얄짤없이 검열받았다. 건륭제 시기에 특히 문자의 옥이 많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중국 문학이 상대적으로 침체되기도 했다.
오늘날 베이징에 남아 있는 왕조 시대의 대규모 건축물 중 많은 것들이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이화원과 열하의 피서산장이 대표적이다. 명나라 시기의 건축물들은 상대적으로 한족의 양식이 많은 것에 반해, 청나라 시기의 건축물들은 기본적으로 한족의 건축방식을 답습하기는 하였으나 아무래도 동군연합의 영향으로 중앙아시아나 티베트 등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다. 또한 화려함과 정교함을 숭상하여 이전보다도 거대한 크기의 건물들이 많이 지어졌고, 색유리를 사용하여 건물을 꾸미는 것이 유행했다. 다른 민족들의 문화에 대하여 야만적이라고 배척했던 한족의 명나라 시절에 비하여, 자신들 또한 이민족이었던 청나라는 상대적으로 다른 문화에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장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앞서 말한 열하의 피서산장이다. 피서산장에 있는 보타종승사원(普陀宗乘之庙)은 티베트의 포탈라궁을 본따 지었는데, 다른 민족들의 문화를 천시하던 한족의 명나라 시절에는 흔히 보기 어려운 사례였다.
청나라 때도 사회적으로는 일단 기본적으로 유교식 이념들을 깔고 들어갔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중화의 합법한 계승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유교를 더더욱 강조했고, 어떤 면에서는 명나라보다도 엄격한 경우가 잦았다. 당연히 부계중심적인 사회였고,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여성은 남성과 함부로 이혼할 수 없었으며[38] 사회적으로 그 제약도 상당히 심했다. 명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재산을 소유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고 제사를 지내거나 재산을 상속받는 문제들에도 남자에 비해 훨씬 하등한 대접을 받았다. 나중에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권력을 잡으면서 이러한 남녀불평등을 타파한다고 했으나, 이 오랜 폐해는 아직까지도 중국 사회의 뿌리깊은 문제가 되고 있다.
명나라 말기에 유행했던 홍등가, 동성애, 매춘 등 성 관련 풍습들은 청나라 초기에 들어서 크게 탄압받았다. 강희제나 옹정제 등은 황제가 주도해서 이들을 때려잡았고, 이때문에 중국의 매춘 산업은 청나라 초기에 쇠퇴하였다. 허나 인간의 욕망을 억누를 수는 없었던지, 건륭제 시기 말에 이르자 홍등가가 다시 대대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하였고 톈진, 충칭, 항커우 등의 대도시들에는 거대한 규모의 매춘굴들이 자리잡았으며 고위 관료들부터 평민들까지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특히 상하이는 19세기 들어 서양 교류의 중심으로 자리잡으면서 매춘 산업이 크게 발전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18세기 들어서는 젊은 과부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당시 청나라 사회에서는 어린 여성들이 나이 많은 고위급 남성들에게 시집을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는데, 이 남편들이 결혼 후 얼마 살지 못하고 죽어버림에 따라 이 어린 신부들이 과부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여성들은 가문 내에서도 결코 좋은 대접을 기대할 수가 없었는데, 만일 남편이 죽기 전에 아이를 낳았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평생 아이를 낳아 기를 희망도 없이 홀과부로 늙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대를 이을 아이를 낳은 몸도 아니니 가문 내에서 잘해줄 리도 없었다. 청나라 조정도 이 같은 문제점을 인지해서 함부로 어린 딸들을 시집보내지 않는 집들에게 상을 내리며 이 풍습을 없애보려 노력하였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나이 많은 남편이 죽으면 함께 죽어 정조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열녀다'라는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청나라 사회는 갈수록 타락의 길로 빠져들어갔다.
다만 이 내용들을 보고 청나라 시대에 여성 인권이 바닥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면 그것에도 문제가 있다. 청나라 시기에는 무역과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가문의 남성들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잦아졌는데, 이때 남자들이 사업 등의 이유로 집에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되면 집에 남아있던 아내가 집안의 경제권을 쥐는 것이 다반사였으며, 여성들은 남아도는 시간과 돈으로 사회적 활동에 참가하거나 사찰의 법회 등에 참석하고는 했다. 경우에 따라 달랐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한편 청대에는 수많은 한족 여성들이 만주족 남성들의 첩이나 노리개가 되었다. 태평천국 격문에도 언급될 정도이다. 만주족 여성과 한족 남성의 통혼은 청나라 후기 때까지 법률적으로 엄격히 금지된걸 생각하면 청나라의 피지배 민족에 대한 위계질서는 원나라 이상으로 엄격했다고 간주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만주족의 성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만주족 성씨의 방식은 다른 민족들과 조금 다르다. 할라(哈拉, hala)와 무쿤(穆昆, mukun) 및 수명성(隨名姓)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만주족의 성씨를 참고하자.
한국에서 "너 왜 그런 (노출심한)옷을 입고다니냐?"같은 유교적인 말에 "지금이 조선시대야?"라는 표현을 쓰듯 현대 중국에선 "정신 좀 차려라, 청나라는 이미 망했어."라는 표현이 종종 쓰인다.[39] 한국의 조선처럼 가장 가까운 전통적인 전근대 시대이기 때문이다.
청 대의 의복은 만주족의 전통의상인 챵꽈(남성)와 치파오(여성)이다. 물론 한족의 전통 의상인 한푸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기는 하였으나, 청 황실이 만주족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만한차별을 엄격히 하면서 아무래도 한족의 영향보다는 만주족의 의복과 더 닮아있다. 만주족의 기본 의상인 치파오는 기본적으로 원피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여성의 경우에는 허리 아래쪽에 옆트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족의 한푸는 기본적으로 하늘하늘하고 소매가 넓으며 품이 커서 여유가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치파오는 상대적으로 더 몸에 딱 붙어 굴곡을 강조하고 몸매를 더 잘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특히 현대의 치파오는 1910~20년대 서양식 의복의 전래에 따라 근대적으로 개량된 것으로, 청나라 말기에 가서야 등장한 것이기에 청나라 대의 보편적인 의복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청나라는 입관 이후 한족 이후 원나라의 선례를 밟지 않기 위하여 피지배계급이었던 한족의 의복 문화를 근절하고 만주족의 전통 복식을 한족에게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연히 중화 사상을 중심으로 하던 한족에게는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청나라 조정도 할 수 없이 타협, 십종십부종(十從十不從) 원칙을 내세워 남성의 경우에는 무조건적으로 만주족의 복식을 답습하되, 여성과 도사, 승려 등의 경우에는 일부 한족의 복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청나라가 오래 이어지며 만주족의 통치가 당연시되기 시작하자, 점차 여성의 복식 역시 만주족의 복식을 자연스레 닮아가기 시작하였으며 청 말에는 명나라와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였다.
청나라 일반 남성의 경우, 장삼이나 장포(長袍)를 기본적으로 걸친 후, 그 위에 조끼 형태의 마과나 마갑 등을 덧대어 입는 경우가 흔했다. 참고로 장삼은 긴 원피스 형태의 남성용 치파오라고 할 수 있는 옷으로, 옆트임이 존재한다. 또한 마과나 마갑의 경우 본디 만주족이 말을 탈 때 보온용으로 위에 걸치던 조끼 형태의 단상의였는데, 청 초기에는 만주족의 특권으로 여겨져 함부로 입을 수 없었으나 옹정제 연간에 한족 일반 백성들도 입는 것이 허가되었다.[40] 한편 청나라 여성이 입었던 것이 그 유명한 치파오인데, 양옆에만 트임을 주며 허리를 매지 않는 형태였다. 소매끝과 옷깃, 밑단 등에 다양한 색의 천을 달아 포인트를 주었으며, 특히 목선의 경우 둥근 형태가 기본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깃이 올라가는 형태를 띠며 점점 화려해졌다. 또한 그 위에 비갑이나 피풍이라고 하여 소매가 없는 조끼 비슷한 방한용 겉옷을 두르기도 하였으며, 보통 신분이 높을수록 이 비갑과 피풍의 무늬가 화려한 경향이 있었다.
1860년대 청나라 광둥성의 현령(縣令) 부부를 찍은 사진 |
위의 사진에서 보다시피 청나라 시대 여성들의 독특한 머리 모양은 '양파두'라고 부른다. 정수리에서 머리를 길게 두 갈래로 가른 다음, 편방이라는 비녀에 감아 만든 것이다. 모양을 보면 알겠지만 시간과 손이 굉장히 많이 가는 머리 모양이라서 평민들보다는 귀족층이나 돈많은 세가들의 여인들이 주로 하던 머리 스타일이었다. 한편 남성의 경우, 남성이 쓰고 있는 모자는 '양모'라고 부르며, 말꼬리털 등을 붉은색으로 염색한 실을 등나무처럼 가벼운 재질로 만든 원뿔 모양의 모자에 늘어뜨린 것이다. 입고있는 의복은 '조복'이라고 부르며, 현대에서의 군대 예복 정도의 위치에 있으며 종묘제례, 즉위식, 조회 등 중대사에서만 간간히 입고 나오는 의식용 복장이었다. 또한 남성이 어깨에 두르고 있는 저 독특한 모양의 장식도 청나라 시대 인물들이 굉장히 많이 입고 다니던 것인데, 이를 '피령'이라고 부르며, 길복이나 조복 등 공식적인 행사에서만 걸치고 다니는 일종의 예식용 칼라 정도로 보면 된다. [41] 남성이 매고 있는 목걸이의 경우, '조주'라고 따로 구분해서 부르며 108개의 구슬로 이루어져 있다. 구슬들 사이사이에 '불두'라고 하여 좀더 크고 재질이 다른 구슬들을 정확히 4개를 끼우며, 이는 1년의 사계절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조주의 뒤에는 탑모양의 장식과 구슬들을 꿰어만든 기다란 끈을 늘어뜨렸는데, 이를 '배추'라고 불렀다. 신분과 관직에 따라 조주의 품질 역시 달라졌으며, 만인지상의 황제의 경우에는 상아로 만든 조주에 황금을 장식하여 사용했다고도 한다.
또한 현대까지도 중국의 오랜 악습으로 남아있는 전족의 경우, 만주족의 전통이 아니라 명나라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한족의 전통양식이다. 강희제는 오히려 이 전족이 여성의 노동력을 하락시켜 국가에 손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여 전족을 금할 정도였으나, 이 명령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만주족 가문들이 이 풍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결국 근대 시기까지 전해져 왔던 것이다.
흔히 '중국 모자'라고 하면 떠올리는 사발 모양의 모자는 청나라의 관모(官帽)인데, 명나라의 사모, 복두 등과 그 형태가 확연히 달라 '청대관모(清代官帽)라고 따로 부른다. 겨울에는 벨벳으로 안을 덧댔고, 여름에는 등나무나 비슷한 가벼운 재질로 삿갓형 관모를 만들어 사용했다. 모자 위에 있는 단추나 꼭지 부분은 공식적인 석상이거나 예식 상에서만 달았고, 사적인 자리거나 일상에서는 떼고 모자만 썼다. 특히 고위 관료들은 모자 위에 공작새 깃털이나 붉은 술 장식도 달았는데, 이는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으로 그 시대에는 나름대로 대단한 명예였다. 공작새 깃털은 1-3개까지 달 수 있었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공작 깃털을 달 수 있었다.
모자의 꼭지 부분의 색깔과 장식은 계급에 따라 달라졌다. 고위급 관료들은 흔히 진주를 즐겨썼고, 1품 관리들은 루비 등 붉은색 투명 홍옥을, 2품은 산호 등 불투명한 붉은 홍옥을, 3품은 사파이어 등 투명한 푸른 옥을, 4품은 불투명한 푸른 옥을, 5품은 수정 같은 투명한 백색 보석을, 6품은 진주 등의 보석을, 7품부터 9품까지는 종종 황금이나 자줏빛 보석을 즐겨 사용했다.
7. 경제[편집]
위는 1790년 당시 세계 GDP 비교 그래프.[42] 당시 인도 제국 경제력의 두 배일 정도로 청나라의 경제력은 엄청났다.[43]
전근대 중국의 경제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지역 간 사치품, 필수품 교류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송나라 시대고, 두 번째는 1550년~1800년대의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다. 이 시기들을 거치며 교환경제체제에서 시장경제체제로 점진적인 전환이 이루어졌고,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자신들의 권한을 강화해나갔다. 특히 청나라 때는 서양과 교역을 담당하는 상인들이 엄청난 부를 쌓고 권력을 거머쥐었다.
다만 1인당 GDP의 관점으로 보면, 개인이 가장 풍요롭게 살았던 때는 북송 시대다. 1340년 기준으로 26.5테일이었으나, 명나라 시기 들어 19테일로 줄어들었고 청나라 들어서는 14테일 수준에 이르렀다. [44] 1840년 기준 청나라의 1인당 GDP를 당시 초강대국인 대영제국과 비교했을 때, 중국의 1인당 GDP는 영국의 14.95% 수준이었다. 물론, 중국의 물가가 영국보다 훨씬 저렴했다는 점은 고려되어야 한다.
경제적인 면에서 청나라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17세기 말쯤이면 명청교체기에 발생한 경제적 피해가 어느 정도 복구됐다. 청 정부가 대대적인 농업 진흥책을 실시한 영향으로 경작지가 늘었고, 인구는 명 말기에 비해 거의 2배 수준인 3억 명으로 증가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땅콩, 고구마 등이 유입됐고, 해금령을 통해 무역을 차단했던 명나라에 비해 해외교역량도 증가했다. 다만, 교역에 있어서는 '광동 체제'라는 시스템에 입각해 오직 광저우에서만 해외교류가 허가됐다. 광저우에서도 조정의 허락을 받은 공행들만이 서양 상인들과 무역을 할 수 있었다.
강희제 시기에는 황하를 치수하고 대운하를 건설했다. 이 대운하를 이용해 남쪽에서부터 북부의 베이징으로 밀, 소금, 비단 등의 필수품과 사치품들을 운송할 수 있었고, 그러한 거래를 통해 남부의 상인들은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45] 황제들이 직접 치수와 경제를 책임지고 떠맡은 덕택에 청조 때는 중국 전역에서 상품작물 재배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단순한 자급자족을 넘어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농사짓는 경우가 많아졌다. 시장들의 활성화는 중소형 도시들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도시들 중에는 그 역사가 청나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청나라는 광산 산업의 사유화도 장려했다. 명나라 시기에 광산 사업가들은 사업으로 얻은 이익의 15분의 1을 나라에 바쳤고, 그 외에도 상당수의 이익이 보호비나 뇌물 등의 형태로 관료들의 뱃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래서 개인 사업가들은 광산 산업을 기피했고, 나라가 광산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해 생산력이 낮아졌다. 그러나 청조는 광산업에서 손을 뗐고, 무기나 동전 따위를 주조하는 데에 필요한 철, 금, 은 같은 금속들을 대부분 시장에서 사들이는 방안으로 선회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광산업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광둥성을 중심으로 광산업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전세계에서, 특히 유럽 지역의 상인들이 중국으로 몰려들어 비단, 차, 도자기 등의 고급 상품들을 사가면서 중국에는 은이 쏟아졌다. 스페인 제국이 아메리카 광산에서 채굴한 은의 20~30%가 필리핀을 거쳐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는 통계 자료가 있을 정도다.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웠던 강남 지방에서는 멕시코에서 흘러들어온 은을 이용한 무역이 가능했다. 옹정제 시기에는 유입된 은을 이용해 은본위제를 본격적으로 실시하기도 했다. [46] 이같은 조세 제도는 곧잘 유지되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서양의 침탈이 본격화되어 은의 유출이 심각해지며 무너졌다. 그에 따른 사회 불안정이 청나라의 멸망을 촉진한 한 이유였다.
청 중반기에 들어서부터는 초기 형태의 은행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장거리 무역이 발전하면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 상인들의 수가 늘었다. 이 상인들은 무거운 금과 은 따위를 계속 가지고 다니기가 힘드니 돈을 모아 상단을 설립했고, 출발 전에 미리 은을 맡겨놓고 차용증을 받은 후 목적지에 도착한 뒤 해당 상단 지점을 찾아가 증서를 보여주고 은을 받았다. 18세기 즈음에는 이런 식의 은행 네트워크가 전국적으로 확대됐고, 자본의 유동성이 증가함에 따라 중국 대륙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서 정부는 늘 재정난에 시달렸다. 이는 서구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에 따른 막대한 배상금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낙후된 행정과 부정부패가 원인이었다. 토지세인 전세만 하더라도 청 멸망 직전 시기를 기준으로 3,500만냥이었는데, 100년 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조세제도가 100년 동안의 경제상황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더군다나 많은 토지는 토지 대장에서 누락되거나 실제와 맞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국의 토지와 수확량을 체계적으로 정확히 조사해야 했다. 그렇지만 영토가 워낙 광대해 조사사업을 실시했다간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서 실행되지 못했다. 만성적인 부패로 세리들과 고위관리들이 착복하는 세금도 엄청났다. 무작정 세금을 인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농민의 반발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말기 청나라의 재정 시스템은 멸망할 때까지 개혁되지 못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일본은 1873년 7월부터 지조개정법을 실시해 해마다 모든 토지에서 토지가격의 3%에 해당하는 세금을 걷어 근대화와 군비에 쓰일 재정을 마련했다.[47] 청나라 말기에 일본보다 재정 근대화가 뒤쳐진 것은 여러모로 아쉬운 일이었다.[48]
8. 종교[편집]
이민족이 주축이 된 왕조다보니 그 이전의 중국 왕조보다 불교의 영향력이 강해졌으며 청나라가 티베트를 흡수하면서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서 중국 내에서 티베트 불교 신자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청나라 황제들도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강희제는 베이징에서 규모가 제일 큰 티베트 불교 사원인 옹화궁을 설치했다. 이슬람교 역시 윈난성의 회족들과 신강의 위구르인 등에 의해 명맥을 이었다. 명말부터 가톨릭교 역시 예수회 등의 선교로 유입되었다. 청나라 정부는 가톨릭 선교를 통제하려고 들었고 청나라 민간사회에서도 1870년대 천진 교안 등의 사건이나 의화단의 난 등으로 반기독교 박해가 일어나는 등 불교나 이슬람교에 비해 교세 확장에 어려움이 많았다. 홍수전이 기독교에 기반한 사상을 내걸고 봉기한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나면서 결국 기독교 역시 청나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9. 군대[편집]
청나라 군대 관련 정보, 청군 편제
역사는 누르하치가 창건한 만주족의 팔기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누르하치는 팔기제를 확립하여 단순한 군대 역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역할도 겸하게 하였고, 거의 호적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맡겼다. 러시아 제국이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많은 시베리아의 이민족들이 몽골과 만주족이 있는 만주 지역으로 몰려 갔고 이들은 만주족이 원나라 옥새를 발견한 이후부터 군대에 편입되었다. 이후 홍타이지는 만주팔기를 본따 몽골족으로만 이루어진 몽골팔기를 새롭게 만들어 군력을 강화하였다.
1644년에 청나라가 베이징을 점령하고 난 이후에 투항해온 투항한 명나라 군인들을 이용해 녹영군을 창설했지만 명나라 한족은 만주족을 이민족으로 폄하했기 때문에 투항한 명나라 군인들 숫자는 많지 않았다. 팔기군 자체가 만주족이 대부분이였지만 몽골족도 포함된 이후 여러 이민족으로 결성되었기 때문에 팔기군에는 조선인들과 소수 한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명나라의 한족 가운데 명나라를 버리고 만주족 군대에 투항한 자들은 소수였다. 명나라 한족 입장에서 만주족 군대들은 정복하러 온 이민족 군대였으며 명나라 시절 한족과 한족 군인들은 명나라에 충성하며 만주족에 심하게 대항하였다. 홍타이지는 심하게 대항하는 명나라인들을 전멸시킬 생각으로 대규모의 만주족 군인들을 명나라로 보내 원정 공격을 하였다. 명나라를 공격할 때 당시 만주족 군인 규모는 역사상 최대의 군사 규모였으며 이것은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였던 오현제 시기 정복 군주였던 트라야누스 시기 로마군 숫자가 많은 것이였다.[49]
청나라 초기의 군대는 명나라 시절에 물려받은 화기를 나름대로 활용하여 그 전성기에는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 등과 겨루어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 허나 평화기가 지나치게 오래가자, 팔기군이나 녹영이나 요새에 짱박혀있는 경우가 많아지며 자연스럽게 훈련과 실전 경험이 줄어들며 기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강희제 때와 옹정제 시기, 그리고 건륭제 시기에도 서부 지역으로 몇 차례 군사 원정이 있기는 했으나, 18세기 말 즈음에 들어서는 청군의 규모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반면 효율성은 거의 바닥을 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가경제 시기에는 낫과 곡괭이 따위로 무장한 한족 반란군에게도 쩔쩔맸고, 태평천국의 난 때에도 반란군들을 제대로 진압하기는 커녕 쫓겨다니기에 급급했다.[50][51] 청군의 최대 약점은 무기의 열세였다. 명나라를 진압한 이후 청나라의 화포와 무기 등은 거의 진보하지 못했고, 19세기 초가 되면 유럽에서 산업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며 총, 군함, 대포,군사사상 등이 혁신적으로 발전한 데에 반하여 중국의 군사는 거의 17세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 화력의 열세 때문에 수십만 청병이 단 2만 명도 되지 않는 서구식 군대에 무너지기도 했다. 단, 오해가 있는게 1차 아편전쟁때의 서양열강은 나폴레옹 전쟁 시절의 머스킷 소총과 전장식 야포를 그대로 들고왔고 기관총도 없었다. 당연히 전술 역시 나폴레옹 전쟁때의 전열보병이 기본이었고 이 전열보병으로 중동,인도,중국 등의 타 문명권들을 제압한거지 기관총과 속사대포는 생각보다 훨씬 한참 이후에나 쓰였다. 2차 아편전쟁부터 그나마 신무기라 할 수 있는 퍼커션 캡이 쓰였으며 후장식 총과 맥심 기관포, 주퇴복좌기 속사포 등 흔히 '근대의 신무기' 하면 떠오르는 무기들은 의외로 거의 20세기가 가까워진 의화단 전쟁부터 본격적으로 투입됐다.
나라가 망할 기운이 들자 더이상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청나라 조정은 드디어 노후화된 군대를 개혁하기로 결심한다. 1860년에 베이징이 함락당하고 몇 만도 안되는 서구 열강 군대에게 청군이 농락당하자, 증국번, 이홍장, 만주족 출신 문상 등은 서구식 무기들을 수용하여 서양식 훈련을 받고 제식을 갖춘 신군의 창설을 결정하였다. 이홍장은 지방에서 회군을 조직했고, 문상과 몇몇 청 황친들은 베이징에서 신기영(神機營)을 창설하여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에서 무기를 수입했다. 신기영은 대략 2,500여 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이 손쉽게 수많은 강도떼를 진압하자 황실도 이에 마음이 움직여 대대적인 서구식 군대 창설을 결심하게 된다.
이후 만주족 관료들은 피지배민족인 한족과 힘을 합쳐 서구식 함대와 군대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고, 푸저우에 군항을 설치하여 15척에 달하는 군함들을 생산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난징, 톈진, 란저우 등에도 새로운 군사기지들이 설치되며 외형상으로는 현대화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 했다. 한편 서구 열강들은 비상이 걸렸다. 열강들은 중국이 힘을 키우면 자신들이 공을 들이고 있는 아시아 식민지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우려했고, 중국에서의 자신들의 이권을 빼앗기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52] 청일전쟁 이후 건설된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이 바로 군대 근대화의 최종 결과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안스카이는 신해혁명때 혁명군과 타협을 하고 오히려 청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하게 된다.
신건육군이라고 하기도 하는 청나라 북양군은 청일전쟁 패배 이후 위안스카이의 주도로 건설되었다. 신해혁명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편성을 완료한 신군은 16개 사단,14개 혼성여단,4개 독립연대,금위군 2개 여단 소속 30만 1,800여명에 달했다. 각 사단의 병력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1개 사단에 해당하는 1만 2천명 정도였다. 신군은 무기만 현대적인 소총과 중화기를 갖췄다 뿐이지 체계는 근대 이전 동아시아 군대인 이홍장의 회군 등과 대조적으로 제복부터 편제,훈련,전술까지 완전히 서구화된 진정한 근대 군대였다. 물론 러일전쟁을 거치며 각 사단 총원을 1만 8,400명이 넘게 증원하고 각종 신무기를 국산화한 동시기 일본 육군을 상대하긴 부족했다. 그러나 내부 반란 진압이나 제한적인 국외 개입은 어느정도 가능한 전력이었다. 일본에게 패배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잃고 의화단의 난 당시 열강 연합군에 또 패전한 청나라 입장에서는 그동안의 한족에 대한 불신감을 떨치고 마지막 쇄신을 시도한 셈이었다. 폐쇄적인 팔기와 대조되는 근대적인 현대 육군을 건설하려면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에게 많은 비중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창 봉기를 시작으로 신군이 결국 이반하면서 청나라를 멸망시키고야 만다. [53]
역사는 누르하치가 창건한 만주족의 팔기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누르하치는 팔기제를 확립하여 단순한 군대 역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역할도 겸하게 하였고, 거의 호적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맡겼다. 러시아 제국이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많은 시베리아의 이민족들이 몽골과 만주족이 있는 만주 지역으로 몰려 갔고 이들은 만주족이 원나라 옥새를 발견한 이후부터 군대에 편입되었다. 이후 홍타이지는 만주팔기를 본따 몽골족으로만 이루어진 몽골팔기를 새롭게 만들어 군력을 강화하였다.
1644년에 청나라가 베이징을 점령하고 난 이후에 투항해온 투항한 명나라 군인들을 이용해 녹영군을 창설했지만 명나라 한족은 만주족을 이민족으로 폄하했기 때문에 투항한 명나라 군인들 숫자는 많지 않았다. 팔기군 자체가 만주족이 대부분이였지만 몽골족도 포함된 이후 여러 이민족으로 결성되었기 때문에 팔기군에는 조선인들과 소수 한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명나라의 한족 가운데 명나라를 버리고 만주족 군대에 투항한 자들은 소수였다. 명나라 한족 입장에서 만주족 군대들은 정복하러 온 이민족 군대였으며 명나라 시절 한족과 한족 군인들은 명나라에 충성하며 만주족에 심하게 대항하였다. 홍타이지는 심하게 대항하는 명나라인들을 전멸시킬 생각으로 대규모의 만주족 군인들을 명나라로 보내 원정 공격을 하였다. 명나라를 공격할 때 당시 만주족 군인 규모는 역사상 최대의 군사 규모였으며 이것은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였던 오현제 시기 정복 군주였던 트라야누스 시기 로마군 숫자가 많은 것이였다.[49]
청나라 초기의 군대는 명나라 시절에 물려받은 화기를 나름대로 활용하여 그 전성기에는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 등과 겨루어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 허나 평화기가 지나치게 오래가자, 팔기군이나 녹영이나 요새에 짱박혀있는 경우가 많아지며 자연스럽게 훈련과 실전 경험이 줄어들며 기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강희제 때와 옹정제 시기, 그리고 건륭제 시기에도 서부 지역으로 몇 차례 군사 원정이 있기는 했으나, 18세기 말 즈음에 들어서는 청군의 규모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반면 효율성은 거의 바닥을 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가경제 시기에는 낫과 곡괭이 따위로 무장한 한족 반란군에게도 쩔쩔맸고, 태평천국의 난 때에도 반란군들을 제대로 진압하기는 커녕 쫓겨다니기에 급급했다.[50][51] 청군의 최대 약점은 무기의 열세였다. 명나라를 진압한 이후 청나라의 화포와 무기 등은 거의 진보하지 못했고, 19세기 초가 되면 유럽에서 산업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며 총, 군함, 대포,군사사상 등이 혁신적으로 발전한 데에 반하여 중국의 군사는 거의 17세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 화력의 열세 때문에 수십만 청병이 단 2만 명도 되지 않는 서구식 군대에 무너지기도 했다. 단, 오해가 있는게 1차 아편전쟁때의 서양열강은 나폴레옹 전쟁 시절의 머스킷 소총과 전장식 야포를 그대로 들고왔고 기관총도 없었다. 당연히 전술 역시 나폴레옹 전쟁때의 전열보병이 기본이었고 이 전열보병으로 중동,인도,중국 등의 타 문명권들을 제압한거지 기관총과 속사대포는 생각보다 훨씬 한참 이후에나 쓰였다. 2차 아편전쟁부터 그나마 신무기라 할 수 있는 퍼커션 캡이 쓰였으며 후장식 총과 맥심 기관포, 주퇴복좌기 속사포 등 흔히 '근대의 신무기' 하면 떠오르는 무기들은 의외로 거의 20세기가 가까워진 의화단 전쟁부터 본격적으로 투입됐다.
나라가 망할 기운이 들자 더이상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청나라 조정은 드디어 노후화된 군대를 개혁하기로 결심한다. 1860년에 베이징이 함락당하고 몇 만도 안되는 서구 열강 군대에게 청군이 농락당하자, 증국번, 이홍장, 만주족 출신 문상 등은 서구식 무기들을 수용하여 서양식 훈련을 받고 제식을 갖춘 신군의 창설을 결정하였다. 이홍장은 지방에서 회군을 조직했고, 문상과 몇몇 청 황친들은 베이징에서 신기영(神機營)을 창설하여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에서 무기를 수입했다. 신기영은 대략 2,500여 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들이 손쉽게 수많은 강도떼를 진압하자 황실도 이에 마음이 움직여 대대적인 서구식 군대 창설을 결심하게 된다.
이후 만주족 관료들은 피지배민족인 한족과 힘을 합쳐 서구식 함대와 군대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고, 푸저우에 군항을 설치하여 15척에 달하는 군함들을 생산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난징, 톈진, 란저우 등에도 새로운 군사기지들이 설치되며 외형상으로는 현대화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 했다. 한편 서구 열강들은 비상이 걸렸다. 열강들은 중국이 힘을 키우면 자신들이 공을 들이고 있는 아시아 식민지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우려했고, 중국에서의 자신들의 이권을 빼앗기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52] 청일전쟁 이후 건설된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이 바로 군대 근대화의 최종 결과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안스카이는 신해혁명때 혁명군과 타협을 하고 오히려 청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하게 된다.
신건육군이라고 하기도 하는 청나라 북양군은 청일전쟁 패배 이후 위안스카이의 주도로 건설되었다. 신해혁명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편성을 완료한 신군은 16개 사단,14개 혼성여단,4개 독립연대,금위군 2개 여단 소속 30만 1,800여명에 달했다. 각 사단의 병력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1개 사단에 해당하는 1만 2천명 정도였다. 신군은 무기만 현대적인 소총과 중화기를 갖췄다 뿐이지 체계는 근대 이전 동아시아 군대인 이홍장의 회군 등과 대조적으로 제복부터 편제,훈련,전술까지 완전히 서구화된 진정한 근대 군대였다. 물론 러일전쟁을 거치며 각 사단 총원을 1만 8,400명이 넘게 증원하고 각종 신무기를 국산화한 동시기 일본 육군을 상대하긴 부족했다. 그러나 내부 반란 진압이나 제한적인 국외 개입은 어느정도 가능한 전력이었다. 일본에게 패배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잃고 의화단의 난 당시 열강 연합군에 또 패전한 청나라 입장에서는 그동안의 한족에 대한 불신감을 떨치고 마지막 쇄신을 시도한 셈이었다. 폐쇄적인 팔기와 대조되는 근대적인 현대 육군을 건설하려면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에게 많은 비중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창 봉기를 시작으로 신군이 결국 이반하면서 청나라를 멸망시키고야 만다. [53]
9.1. 해군[편집]
입관 이전부터 청나라는 수전에 약했다. 병자호란 전후로는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 등의 명나라 항장들이 원래부터 사병처럼 부리던 포병대와 수군을 써먹었고 이들이 팔기한군의 모태가 되었을 정도. 입관 후에도 청나라는 명나라의 사례를 그대로 이어받아 엄격한 해금령을 펼쳤다. 또한 만주족은 주로 말을 타던 기병 위주였기에, 배를 타야하는 수전에는 미숙했고 이때문에 당시 육군 대부분은 만주족이였지만 청나라의 수군은 명나라에서 귀순하거나 흡수한 한족 투항병의 비중이 높았다. 청나라는 항저우와 전장에 수군 기지를 두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이들이 주로 대만 섬으로 도망간 정성공의 약탈 부대나 동남아의 해적들, 그리고 왜구들로부터 청나라 해안가를 방비하는 역할을 했다.
1661년에는 러시아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서 지린에 해군 기지를 새롭게 세웠으며, 팔기군을 해군에 배치하기도 했다. 1677년에는 푸젠에 동녕 왕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독자적인 해군 기지를 따로 창설하였으며, 이 덕분에 얼마지나지 않아 동녕 왕국을 꺾고 타이완섬을 청나라의 지배 하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청나라는 명나라와 비슷하게 해군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유럽과 다르게 대양 해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대부분이 해안가에 주둔하면서 외적들의 침입을 막고 방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강희제는 청나라의 해안을 크게 4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크게 황해 쪽과 가까운 보하이해, 장쑤성과 저장성 인근 해안, 대만해협 인근 해안, 그리고 광둥성 해안으로 나누었다. 보하이해에는 덩저우 함대, 자오저우 함대, 뤼순 함대, 톈진 함대 등이 주둔했으며, 장쑤성과 저장성에는 장난 함대와 저장 함대, 타이완섬에는 푸젠 함대, 광동 해안에는 광동 총독 직속 함대와 광동 함대가 각각 주둔했다. 강희제 시기의 청나라 해군선에는 각각 대략 40여 명의 수병들이 승선하였으며, 네덜란드 양식으로 만들어진 대포와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청나라 해군은 건륭제 말기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으나, 백련교도의 난과 묘족의 난 등이 연이어 터지자 청나라 조정은 해군보다 육군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안그래도 기강이 날로 무너져가던 해군은 붕괴에 가속도가 붙으며 유명무실한 상태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이때문에 아편 전쟁 때에 이르자 청나라의 해군은 서구식 무기를 갖춘 함선들에게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빈약한 군력을 갖추게 되었다. 유럽 수병들마저 '이렇게 약했었나?'라고 놀랐다. 나름 한가닥 하는 해군력과 혈전을 각오하고 왔던 서양 해군의 입장에선 의아할 수밖에.
양무운동기에는 여러 서양식 전함을 매입하고 수병들을 훈련시켜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육성했다. 해군력 육성이 어느정도 안정된 성과를 내던 1888년에는 배수량이 2,600톤에 달하는 방호순양함 평원급 장갑순양함을 진수하는 등 자체적인 건함 능력도 갖추었다. 평원 함의 건조비도 52만냥 이하로 억제되어 독일에서 직수입한 비슷한 크기의 방호순양함들에 비해 0.6배 수준의 건조비만 드는 등 무리한 국산화로 건함 비용이 천정부지로 올라간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양적인 조선 능력에서는 청나라가 양무운동 당시에는 놀랍게도 청일전쟁 이전의 일본 제국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청나라의 거대한 국력으로 당시로선 아시아 최고 수준 함선이던 독일제 정원급 장갑순양함을 구매하는 등 장비들도 나름 괜찮았으나, 어수선한 근대화의 한계와 근본적인 실력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청불전쟁, 청일전쟁으로 모조리 수장되었다. 양무운동 당시 청나라가 건설한 해군의 총 톤수는 8만 3,900톤에 각종 군함 78척에 달했다.
서태후가 사망하고 의화단의 난 역시 청나라의 참패로 돌아간 이후인 섭정 짜이펑의 집권 기간에는 어느정도 복구는 시도된다. 이를 위해 유럽과 미국에서 현대적인 구축함과 방호순양함 10척 등을 수입해 전체 인원 8,500명에 달하고 총 배수량 4만 5,000톤의 함대를 급하게 재건했다. 전근대 수군의 면모가 많이 남아있었던 양무운동 시기 북양함대에 비해 철저히 구미와 일본의 군사사상과 체제를 모방한 완전한 신식 군대였다는 점에서는 북양 신군과 같다. 그러나 청나라가 청일전쟁과 의화단의 난 패배 충격에 헤롱거리는 동안 일본 해군은 드레드노트급에 포함되는 2척의 카와치급 전함 가와치와 셋쓰를 1912년에 건조하는 등 압도적인 전력으로 부상했다. 그래서 재건된 청나라 함대는 서류상으로라도 일본 해군을 압도하던 북양해군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중국인 수병들의 주도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해군 함선이 세계 일주를 도전하는 등 청일전쟁에 완패한 청나라로서는 어느정도 자존심은 세웠다. 둥사 군도를 놓고 일본과 분쟁이 벌어지자 군함을 파견하는 등 구색만 갖춘 존재가 아니라는걸 증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해혁명이 발발하면서 중앙정부가 붕괴하며 청나라의 해군 재건 계획 역시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54]
1661년에는 러시아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서 지린에 해군 기지를 새롭게 세웠으며, 팔기군을 해군에 배치하기도 했다. 1677년에는 푸젠에 동녕 왕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독자적인 해군 기지를 따로 창설하였으며, 이 덕분에 얼마지나지 않아 동녕 왕국을 꺾고 타이완섬을 청나라의 지배 하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
청나라는 명나라와 비슷하게 해군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유럽과 다르게 대양 해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대부분이 해안가에 주둔하면서 외적들의 침입을 막고 방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강희제는 청나라의 해안을 크게 4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크게 황해 쪽과 가까운 보하이해, 장쑤성과 저장성 인근 해안, 대만해협 인근 해안, 그리고 광둥성 해안으로 나누었다. 보하이해에는 덩저우 함대, 자오저우 함대, 뤼순 함대, 톈진 함대 등이 주둔했으며, 장쑤성과 저장성에는 장난 함대와 저장 함대, 타이완섬에는 푸젠 함대, 광동 해안에는 광동 총독 직속 함대와 광동 함대가 각각 주둔했다. 강희제 시기의 청나라 해군선에는 각각 대략 40여 명의 수병들이 승선하였으며, 네덜란드 양식으로 만들어진 대포와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청나라 해군은 건륭제 말기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으나, 백련교도의 난과 묘족의 난 등이 연이어 터지자 청나라 조정은 해군보다 육군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안그래도 기강이 날로 무너져가던 해군은 붕괴에 가속도가 붙으며 유명무실한 상태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이때문에 아편 전쟁 때에 이르자 청나라의 해군은 서구식 무기를 갖춘 함선들에게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빈약한 군력을 갖추게 되었다. 유럽 수병들마저 '이렇게 약했었나?'라고 놀랐다. 나름 한가닥 하는 해군력과 혈전을 각오하고 왔던 서양 해군의 입장에선 의아할 수밖에.
양무운동기에는 여러 서양식 전함을 매입하고 수병들을 훈련시켜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육성했다. 해군력 육성이 어느정도 안정된 성과를 내던 1888년에는 배수량이 2,600톤에 달하는 방호순양함 평원급 장갑순양함을 진수하는 등 자체적인 건함 능력도 갖추었다. 평원 함의 건조비도 52만냥 이하로 억제되어 독일에서 직수입한 비슷한 크기의 방호순양함들에 비해 0.6배 수준의 건조비만 드는 등 무리한 국산화로 건함 비용이 천정부지로 올라간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양적인 조선 능력에서는 청나라가 양무운동 당시에는 놀랍게도 청일전쟁 이전의 일본 제국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청나라의 거대한 국력으로 당시로선 아시아 최고 수준 함선이던 독일제 정원급 장갑순양함을 구매하는 등 장비들도 나름 괜찮았으나, 어수선한 근대화의 한계와 근본적인 실력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청불전쟁, 청일전쟁으로 모조리 수장되었다. 양무운동 당시 청나라가 건설한 해군의 총 톤수는 8만 3,900톤에 각종 군함 78척에 달했다.
서태후가 사망하고 의화단의 난 역시 청나라의 참패로 돌아간 이후인 섭정 짜이펑의 집권 기간에는 어느정도 복구는 시도된다. 이를 위해 유럽과 미국에서 현대적인 구축함과 방호순양함 10척 등을 수입해 전체 인원 8,500명에 달하고 총 배수량 4만 5,000톤의 함대를 급하게 재건했다. 전근대 수군의 면모가 많이 남아있었던 양무운동 시기 북양함대에 비해 철저히 구미와 일본의 군사사상과 체제를 모방한 완전한 신식 군대였다는 점에서는 북양 신군과 같다. 그러나 청나라가 청일전쟁과 의화단의 난 패배 충격에 헤롱거리는 동안 일본 해군은 드레드노트급에 포함되는 2척의 카와치급 전함 가와치와 셋쓰를 1912년에 건조하는 등 압도적인 전력으로 부상했다. 그래서 재건된 청나라 함대는 서류상으로라도 일본 해군을 압도하던 북양해군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중국인 수병들의 주도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해군 함선이 세계 일주를 도전하는 등 청일전쟁에 완패한 청나라로서는 어느정도 자존심은 세웠다. 둥사 군도를 놓고 일본과 분쟁이 벌어지자 군함을 파견하는 등 구색만 갖춘 존재가 아니라는걸 증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해혁명이 발발하면서 중앙정부가 붕괴하며 청나라의 해군 재건 계획 역시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54]
10. 평가[편집]
만약 청 제국의 직성 지역에서만 시료를 채취해서 보면 청나라 황제는 한화에 성공한 '중국'의 수명천자(受命天子)처럼 보이지만 직성 이외의 지역에서 시료를 채취해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떠오른다. 내몽골 유목민의 초원 세계에서는 대칸의 이미지, 티베트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 불교도의 세계에서는 불법(佛法)의 수호자인 전륜성왕이자 '문수보살 황제'라는 이미지, 타림 분지의 위구르 무슬림 세계에서는 이슬람의 보호자라는[55] 이미지를 각각 갖게 된다. 그리고 기인의 세계에서는 누르하치의 계승자인 한(汗)으로 표상되었다.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중
지배층은 대부분 만주족이었지만 소속 민족이 다양했던 만큼 다양한 속성을 가진 나라였다. 민족마다 청 군주의 이미지가 다양했는데 만주에선 금나라를 계승한 한[56]으로, 북방의 몽골 지역에선 원나라를 계승한 칸으로, 중원에선 명나라를 계승한 천자로, 티베트에선 불법을 수호하는 전륜성왕으로, 신강과 영하에선 이슬람의 수호자로[57], 서남 지역에서는 토사들의 우두머리로 여겨졌다. 청나라의 황제는 이러한 위치를 이용해 국가를 통치했는데, 만주족과 몽골족의 칸으로서 얻은 군사력을 중원의 엄청난 재력으로 유지, 통솔했다.
청나라의 정치는 문자의 옥과 화기 연구 및 제조 금지[58] 등으로 비판을 받는다. 특히 청이 유럽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청의 자체적인 병서나 화기 수준을 보면 잘 봐줘도 명나라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가경 4년에 명나라 화포를 개조하니 성능이 더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해전에서도 명나라는 청나라만큼 어이없게 패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예가 랴오뤄 만 해전/요라만 해전(料羅灣海戰). 명나라가 다른 문명권과 다르게 유럽 세력과 해전에서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르네상스가 진행되면서 다른 문명들을 압도적인 속도로 능가하기 시작하던 유럽 문물을 따라가고 있어서 그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청나라 지배층은 비판받을 점이 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 전 6권이 간행되어 중국 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던 게 명나라 때의 일이고 군사학, 농업, 천문학 등에서의 서적이나 훈련 방법 등에서 유럽 문물이 의외로 이미 인정을 받고 있었다. 망조가 들어서 어이없게 날아가기는 했지만 명나라는 유럽식 훈련으로 수학과 과학이 동원된 사격술 등을 익힌 군대가 더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정예병으로 육성하고 있었다.
다만 명나라와 싸웠던 당시 네덜란드는 전근대 시절이었고, 독립을 위해 온 힘을 유럽에 쏟던 30년 전쟁 와중이었다는 점에서 청이 만난 영국과 차원이 달랐다. 특히 영국은 당대 최강대국 중 하나인데다 산업 혁명을 일으킨 근대 국가인지라 청나라와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당시 네덜란드도 개혁을 통해 근대 국가로 나아가던 국가라 해전에서 비유럽은 물론 유럽까지 아주 탈탈 털고 다녔으나, 세계 제국인 대영제국과 결국 중소국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네덜란드는 체급 자체가 다르다.
특히 건륭제는 평생에 걸쳐 전제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노력했고, 이를 위해 반청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별별 시덥잖은 이유로 트집잡아 목숨을 앗아갔다. 이에 중국 학계는 자생능력을 잃은 채 오래되고 오래된 고문을 다루는 고증학에만 치중하며 망해가고 있었다. 말기에도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 황족은 대부분 황제국의 최상위 지배 계급으로서 누리는 권력에 탐닉할 뿐 근본적인 개혁에는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청나라 입장에서도 할 말이 있는 것이, 청나라의 지배는 독자적으로 창시한 제도도 있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유교를 필두로 하는 한족의 사상과 문화가 기반이었고, 인문학을 중시하는 유교 사회에서 자연과학은 원래 관심 밖이었다. 명나라에서 서양 문물을 적극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이는 뒤집어 말하면 명나라 시절부터 이미 기술력이 뒤쳐지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며, 청나라 역시 압도적인 격차를 맞닥뜨린 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것은 명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애당초 여진족은 유목민족이 아니라 농경, 어업, 수렵, 채집 등 다양한 경제 활동을 해왔고, 청나라도 유목 제국이 아니라 엄연한 농업국이었다.
객가를 비롯한 장강 이남의 대한족주의자들은 청나라를 매우 싫어하여 "명망지후무화하(明亡之後無華夏, 명나라가 망한 뒤 화하(중국)는 없다)"라며 흑역사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59] 청나라 전통 복장이나 헤어 스타일을 경멸하고 명나라까지의 전통이 진짜 중국이라고 생각하며, 19세기 중국이 근대화에 실패하고 열강에게 밀린 것도 만주족의 통치 때문이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한편 이런 대한족주의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만주족은 중국의 산타클로스’라는 말도 있다. 사실 명조까지 중국의 강역이 아니었던 만주, 위구르, 티베트, 내몽골 등은 전부 만주족이 정복하여 중국에 붙인 지역이기 때문. 만주족 왕조가 한족 왕조보다 유능했다고 돌려까는 것이다. 맞기만 한 말은 아니지만 틀리기만 한 말도 아닌 게, 청나라는 명나라 등 한족 왕조들에 비해 영토가 매우 넓고 민족도 더욱 다양한 데다 지배민족이 다수의 한족이 아니라 소수의 만주족인 상황에서 한족 왕조와 같은 중앙집권제를 추구했기에 통치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만주족에 대한 이러한 반감은 비단 한족뿐만 아니라 동시대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외몽골의 몽골족에게도 보이는 경향[60]이 있는데, 외몽골 입장에선 청나라의 지배로 인해 같은 알타이계에 뿌리를 둔 내몽골과 탄누투바, 위구르를 잃었기 때문이다.[61] 물론 투바와 위구르는 튀르크계 언어를 사용하고 위구르는 10세기부터 이슬람화되어 몽골인들과 문화적 이질감이 있으니 그러려니 해도 언어도 같고 원래부터 함께 살아온 내몽골이 분리된 건 외몽골 할하인들 입장에서 정말 뼈아프다.
이 때문에 유튜브 등지에서 만주족은 중국인과 몽골인들 사이에서 자주 다굴당하는 편인데, 처음엔 원나라vs송나라 떡밥 논쟁에서 시작했다가 갑자기 청나라가 끼면 합심해서 청나라를 까는 재밌는 현상이 종종 나타나곤 한다.[62] 중국인은 만주족이나 몽골족이나 다 같은 주변 오랑캐로 치부해버리고 몽골인은 만주족이 중국 좋은 일만 시켜놓았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중국 영토는 청나라 때 확정된 것이고 적어도 외몽골인 입장에선 같은 알타이계인 내몽골이나 튀르크 등을 잃었으니 화날만 하다.
하지만 이는 역사를 모르고 하는 소리로, 내몽골의 차하르인들은 차하르 칸국의 에제이가 후금 칸인 숭덕제 홍타이지에게 대원진국옥새를 바치면서 항복을 선언하자 천명이 대원에서 대청으로 계승되었다며 에제이를 배신하고 후금에 합류했다. 그리고 후금은 스스로를 중국 황제국으로 선포해 국호를 청으로 바꾼다. 특히 내몽골의 차하르인들은 후금 때부터 만주에 합류한 데다 청나라 치하에서 우대를 받기까지 해서 만주족에 대한 반감이 강한 할하인과 달리 만주족을 되려 친척 민족이라고 생각하며 청나라는 한족 왕조가 아니며 한족은 만주-몽골의 신민이었음을 강조한다. 실제로도 청나라는 사실상 만몽 연합정권이라 보는 분석이 자주 이루어진다.
무엇보다 현재 중국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한족 왕조인 송나라나 명나라 뿐만이 아닌 몽골족 원나라, 만주족 청나라 등 이민족에서 비롯된 것도 많다. 우선 변발이라는 특유의 머리 스타일부터 해서, 우리가 흔히 UFO 모자로 아는 모자는 사실 몽골인들의 전통의상 델에서 유래한 것이었고, 치파오 역시 만주족 복식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춘절 때 거는 재복을 비는 민화 역시 관우와 함께 나오는 동자의 헤어 스타일이 몽골족 변발이다. 사실 칭기즈 칸의 임팩트와 서구와 접촉한 마지막 중국왕조가 청인 연유 등으로 외국에 이들 유목민족의 인상이 너무 강하게 남아 버린고로 이민족의 왕조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죽하면 러시아어 등에서 중국을 일컫는 또 다른 명칭이 거란이 기원인 키타이일 정도.[63]
반면 서양에서는 신청사라는 사조를 이룰 정도로 청나라가 가졌던 만주족 중심 세계제국의 정체성에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며, 이쪽이 국제 중국사학계의 주류 시각이다. 영미권, 구미 출신 중국사학자가 쓴 청사 대중서가 시중에 많이 소개될 정도인데, 비슷한 시기를 다룬 중국 학자들의 서적과 함께 읽다 보면 미묘하게 다른 태도를 많이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국내 중국사학계와 중앙아시아사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국어였던 만주어 문헌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만주어의 학술적 위상이 서양사에서 라틴어가 차지하는 위상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매우 높아졌고, 급기야는 한국의 여러 대학들이 역사 전공자들을 위해 만주어 강좌를 열고 만한사전을 내거나 한국의 여러 대중매체에서 만주어 고증을 시도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중국의 어용 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이 보이는 반응도 몹시 흥미로운데, 청나라를 중화민족이 이룩한 중화제국이 아닌 만주족의 세계제국으로 평가하는 신청사를 하나의 중국을 깨부수려는 서양 반중주의자들의 분탕질이라며 분개한다거나, 조선 배경의 한국 사극에서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강조하며 청나라에게 무릎 꿇는 것을 치욕스러워하는 현상에 혼란스러워하거나, 그러면서도 청나라가 중국의 판도로 확보한 신강, 영하, 청해, 티베트, 내몽골, 만주 등의 지역은 원래부터 중화민족의 무대였다며 역사왜곡을 시도하는 등의 다채로운 반응을 엿볼 수 있다.
어찌되었든 중국인들은 만주족의 중원 정복으로 세워진 이민족 왕조인 청나라를 마냥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 편이지만 사실 중국 입장에서 청나라는 매우 고마운 나라인데, 그 이유는 현재의 만주, 내몽고, 신장, 티베트 등 중화 문명과 별개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지역들이 청나라 때 중국의 일부로 편입됐기 때문이다.[64] 현 중화인민공화국이 전통적인 중국 영역보다 2배 이상 넓은 강역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청나라 시기 영토 확장의 성과 덕분으로, 만약 청나라가 없었다면 만주, 신장, 티베트 등 현재 중국이 지키려고 하는 소수민족 지역들은 모두 독립국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명청전쟁의 진정한 승전국은 청나라가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한국에서는 한때 환빠들의 맹목적인 찬양에 따른 영향으로 같은 침략자였던 일본 도요토미 정권 및 일본 제국과 달리 조선의 주권을 보존해준 관대한 침략자라는 이미지가 강해져 그야말로 찬양 수준의 호평을 받았으나, 최근에는 환빠들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평가가 점차 낮아지고 있다.
여러모로 인도의 무굴 제국과 공통점이 많았던 나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두 나라의 지배층은 몽골의 영향을 받고 몽골제국의 계승을 지향한 소수의 유목민족들이었고 피지배민을 배려해주는 위대한 성군을 배출했다는 점이 유사하다.[65] 강대했던 무굴 제국이 후기에는 토후들이 지배하는 느슨한 연합체에 마라타 동맹에게 하대당하는 등의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것에 비해 청나라는 마지막 순간까지 중국의 부정할 수 없는 지배자였다는 차이는 있다.
11. 역대 황제[편집]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왕사 문서 참고하십시오.
12. 외교[편집]
조공 및 책봉 체제로 대표되던 전근대적 외교가 아닌, 근대적 의미로서 체결된 세계 국가들과 외교 관계 수립일이다. 중국어 위키백과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했다.
- 영국 - 1842년 8월 29일
- 파일:미국 국기(1837-1845).svg 미국 - 1844년 7월 3일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 1844년 10월 24일
- 파일:스웨덴 국기(1844).svg.png 스웨덴 - 1847년 3월 20일
- 파일:노르웨이 국기(1844).svg.png 노르웨이 - 1847년 3월 20일
- 파일:러시아 제국(1858-1896) 국기.svg 러시아 제국 - 1858년 6월 13일
- 독일 제국 - 1861년 9월 2일
- 파일:포르투갈 왕국 국기.svg 포르투갈 왕국 - 1862년 8월 13일
- 덴마크 - 1863년 7월 13일
- 네덜란드 - 1863년 10월 6일
- 스페인 왕국 - 1864년 10월 10일
- 벨기에 - 1865년 11월 2일
- 이탈리아 왕국 - 1866년 10월 26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1869년 9월 2일
- 일본 제국 - 1871년 9월 13일
- 파일:페루 국기(1884–1950).svg 페루 - 1874년 6월 26일
- 파일:브라질 제국 국기.svg 브라질 제국 - 1881년 10월 3일
- 대한제국 - 1899년 9월 11일
- 파일:멕시코 국기(1880-1909).png 멕시코 - 1899년 12월 14일
- 파일:쿠바 국기(1902-1906, 1909-1959).svg 쿠바 - 1902년 9월 16일
- 파일:Red_Ensign_of_South_Africa_(1912–1951).svg 남아프리카 연방 - 1904년 11월 4일
- 파일:호주 국기(1903-1908).svg 호주 자치령 - 1908년 5월 21일
- 뉴질랜드 - 1908년 5월 21일
-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868-1921).svg 캐나다 자치령 - 1909년 1월 9일
- 파나마 - 1910년 1월 16일
13. 대외 관계[편집]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대외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
14. 같이보기[편집]
14.1. 주요 사건 (시대순)[편집]
14.2. 인물 (시대순)[편집]
15. 둘러보기[편집]
[1] 청룡 그림은 국장 역할도 맡았다.[2] 대청제국지새(大淸帝國㞢璽). 청나라 전성기에는 만주 문자와 한자가 모두 새겨진 국새였으나, 청나라 말기 1909년에 만주족 대다수가 정체성을 제외하고 거의 한족화되면서 한자만 새겨진 위의 국새로 바뀌었다.[3] 법적으로는 1993년 3월 23일까지로 볼 여지도 있다. 법적으로 청나라의 영토인 곳이 남아있었기 때문. 구룡성채 문서 참조.[4] 편의상 후금(後金)이라고 칭하는 것일 뿐, 공식 국호는 ‘아이신 구룬’, 즉 금국이었다.[5] 퍼 아라성은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 용링진 얼다오허쯔촌 남산-하얼사산 북쪽 기슭의 가장 높은 언덕에 그 터가 남아 있다.[6] 자이퍈성은 랴오닝성 푸순시 구 동부 혼허 중상류의 다훠팡 저수지 동남쪽의 톄베이산에 위치한다.[7] ᠪᡝᡤᡳᠩ(Beging)[8] 강동육십사둔을 제외한 외만주 영토를 상실한 후의 면적, 출처[9] 천신 압카이 한을 섬기는 만주족의 고유 종교.[10] 1908년 대청제국의 헌법인 《흠정 헌법 대강》이 발행되었으나 군주의 권력을 보장하는 내용이 많아 그냥 발행 이후에도 전제군주제를 시행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흠정 헌법 대강》은 대한제국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와 달리, 대놓고 전제군주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은 없었다.[11] 중국 후기로 갈수록 '황제'라는 칭호가 너무 많이 쓰인 나머지 청나라 때에는 외국을 상대로 자국의 황제를 가리켜 '대황제'(大皇帝)라는 극존칭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12] 이 시기 국호는 청이 아닌 금이었다.[13] 입헌군주제로 변경 이후[14] 전신[15] 실질적 승계[16] 정확히는 만주족이 세운 국가라 한족 왕조와 구분된다. 게다가 명나라가 끝내 흡수하지 못한 몽골 세력 등까지 흡수하면서 황제가 몽골 칸까지 겸해 사실상 소수민족이 우위에 있는 다민족 국가였다.[17] 국호가 청나라로 바뀌기 전 후금 시절까지 합한 시간. 순 국호가 청나라였던 1636년을 기준으로 하면 276년이겠지만 애초에 왕조가 바뀐 게 아닌 단순 국호 변경이므로 당연히 후금까지 포함된다.[18] 참고로 통일 왕조 중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나라는 한나라고 그 다음이 송나라다. 다만 한은 신나라의 건국으로 세조 광무제가 왕조를 복구하기 전까지 15년간 끊겼었고, 송은 정강의 변으로 황제가 잡혀간 뒤 북송이 멸망하고 이후 남송이 건국되는 바람에 황통이 한 번 끊겼다. 당나라 역시 왕조 존속 기간은 긴 편이지만 중간에 측천무후가 국호를 무주로 바꾸고 본인이 직접 황제가 되어 황통이 끊긴 적이 있었다. 중국사를 통틀어 봤을때 이민족이 세운 나라가 약 300년이란 장기간 동안 광활한 국토를 지배하며 다스린 것은 가히 특기할 만하다.[19] 부자 직계 세습의 법칙을 깨고 방계로 즉위한 황제는 마지막 두 황제인 광서제와 선통제밖에 없다. 선통제도 혈통상 그런 거지 호적상으로는 백부 광서제의 양자 자격으로 제위를 받았다. 광서제는 동치제와 같은 항렬이라서 1항렬 1황제의 원칙에 따라 원래는 제위에 오를 수 없었으나 서태후의 강력한 주장으로 함풍제의 양자 자격으로 사촌형의 뒤를 이었다.[20] 촉한 제외[21] 명나라 또한 40년 이상 통치한 황제가 없진 않았으나,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암군 내지 폭군이었다. 현재는 말년의 건륭제가 사치 등으로 아버지 및 할아버지와 비교되어 박한 평가를 받는 편이나, 그런 건륭제조차도 명나라 F4와 비교하면 예전 초기의 건륭제급의 명군인 수준이다.[22] 이전 시대의 금과 구별을 위해 주로 후금(後金)이라 부른다. 태종 시기에 국호를 청으로 변경했다.[23] 참고로 청조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전성기를 누린 나라이다. 명나라는 영락제부터 선덕제까지 평화로운 전성기가 40여 년을 채 못 갔고, 이후 토목의 변 등 천재지변과 임진왜란 그리고 외부로는 몽골과 만주 세력들의 침노를 받으면서 점차 몰락의 길을 걷는다. 물론 이 기간 동안 대외원정은 활발했기에 엄밀히 따지면 전쟁이 없는 시대는 아니었다.[24] 암바 아이신 구룬(대금국)[25] 만주 구룬(만주국)[26] 다이칭 구룬(대청국)[27] 암바 칭 구룬(대청국)[28] 두림바이 구룬(중국)[29] 다이칭 울루스(대청국)[30] 당시에는 현대 중국과 같은 China(차이나).[31] 그레이트 칭[32] 한어병음 표기로 qing은 '칭'으로 발음한다.[33] 지도상에서 청의 판도를 중국 대륙을 넘어서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포함시키는 경우도 간혹 있다.[34] 인류 역사상 6번째로 거대했던 나라로, 우마이야 왕조, 프랑스 식민제국, 스페인 제국보다도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35] 및 대만(중화민국을 독립국으로 볼 경우)[36] 1907년 신설[37]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간을 하다가 찢겨 죽은 여자와 개 이야기다. 《요재지이》에 따르면 이 여자가 관청으로 압송되어가던 중에, 민중들이 이 여자가 수간을 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자 간수가 돈을 받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수간을 시켰다고 한다.[38] 정말 심각한 상해를 입히거나 여성의 가문이 매우 지위가 높으면 예외다.[39] 가끔씩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의 사진을 넣어서 푸이가 이 말을 하는식으로 비꼬기도 한다. 실제로 한 말은 아니겠지만 푸이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사상개조를 받아서 황제가 아닌 시민으로 살게 되었는지라 묘하게 현실성과 설득력이 있는 부분.[40] 한편 중국 청나라 대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것이 이 마과인데, 이 마과도 아무나 입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특히 황제의 색이던 황색마과의 경우, 황제의 친위대나 황제가 친히 하사한 사람만이 입을 수 있었던 것으로, 일반인이 입었을 경우 곧바로 끌려가 경을 쳤다.[41] 청나라 황제의 초상화를 보면 하나같이 저 피령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42] 해당 영상[43] 청 건국 초기에는 전란으로 인해 피폐한 상황이라 잠시 무굴 제국에 밀려 2위였었다. 하지만 무굴 제국은 샤 자한 사후 실정을 거듭한 반면 청나라는 착실히 내실을 다져 역전하였다.[44] 이는 도량형의 변화와 원자재 가격의 변동, 인구 증가분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된다. 북송 시기가 중국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던 것은 어느정도 사실이나, 북송의 경제력이 더 강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근대 이전의 도량형은 수백년의 세월 동안 표기상 같은 단위어도 실질적인 측정량이 변할 수 있고 화폐경제의 핵심이었던 금속의 가격은 언제나 유동적이다. [45] 청 조정은 세금을 주로 밀이나 은의 형태로 거두었으며, 이 때문에 운하를 운행하는 선박들은 운송품과 함께 조정에 바칠 세금도 함께 실어날랐다. 이 과정에서 거두는 세입도 엄청났다.[46] 은본위제가 본격적으로 작동하려면 기본적으로 은이 충분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실시하기 어렵다. 조선만 해도 19세기까지 은본위제는커녕 물물교환을 벗어나기조차 녹록찮았다.[47] 다만 일본의 근대화는 1895년 청나라와의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2억 냥의 배상금을 받아내면서 본격적으로 성사되었다. 이때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받아낸 배상금 2억 냥은 당시 일본 정부의 4년치 예산에 해당되는 거액이었다. 그나마 이 액수도 원래는 3억 냥이었는데, 당시 청나라측 협상 대표인 이홍장이 일본인한테 습격을 당해 눈에 부상을 입은 사고를 입어서 일본 측이 2억 냥으로 줄여준 것이었다.[48] 출처 : 권성욱 저 <중국 군벌 전쟁> 1부 4장.[49] 다만 로마공화국 이래 오현제 시기까지 중 로마군의 숫자가 제일 많았던 시기는 트라야누스 시대가 아닌 카이사르 사후 내전기 시대였다. 5000만명 정도의 인구를 보유했었다고 추정되는 이 시기 로마군은 무려 60개의 군단, 50만명의 군단병을 보유하고 있었고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25개 군단 30만명 수준으로 군축하였고 해당규모는 오현제 시기때까지 유지되었다.[50] 이때문에 태평천국의 난 때에는 한족 세력가들이 자치적으로 군대를 모아 반란군을 진압하기도 했다. 국가의 정규군이 무너지니 스스로 알아서 지켜야 했던 것이다.[51] 다만 이를 두고 달리 보는 의견도 있는데, 정말로 청군이 쇠약해져서 한족 반란군한테 쩔쩔맨게 아니라, 청군의 장수들이 부패해서 조정한테 더 많은 예산을 받아내어 횡령해 먹으려는 속셈으로 일부러 반란군을 진압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다.[52] 미국과 러시아의 대사들은 각국에 중국의 군비 증강에 대비해야 한다고 긴급 전보를 쳤고, 나중에는 심지어 미국과 중국의 군사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백 년을 앞서 예측했다.[53] 출처는 권성욱 저 중국 군벌 전쟁 1부 4장.[54] 출처는 권성욱 저 중국 군벌 전쟁 1부 6장.[55] 이리장군(伊犁將軍, ili jiyanggiyūn)을 통한 간접적인 지배자. 다만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이미지는 호자들과 위구르인과 회족들에게 잘 먹히지 않았다.[56] 칸의 만주어 발음이다.[57] 물론 청나라 황제는 티베트 불교를 더욱 선호했으며, 이슬람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사실상 힘으로 누르고 있었다.[58] 중원의 천자로서 청나라 황제들 가운데 화기 연구 및 제조에서 제대로 된 업적을 남긴 청나라 황제는 강희제 뿐이며, 이쪽도 치세 후기부터는 화기 연구 및 제조를 금지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그리고 강희, 옹정 연간의 문자의 옥은 건륭제 때마냥 막나가지는 않았다.[59] 또한 몽골족이 세운 중화제국도 매우 싫어하여 "애산지후무중국(崖山之後無中國, 애산 전투 이후 중국은 없다)"이라 하기도 한다.[60] 사실 몽골인들도 청나라가 들어서기 전에는 여진족을 하찮은 족속이라 무시하던 역사가 있었다. 특히 이 경향은 외몽골의 할하 부족이나 오이라트가 심했다. 북원은 여진족이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어서 딱히 신경쓰진 않았다.[61] 청나라는 몽골족의 일파인 준가르부의 씨를 말리기도 했다. 물론 오이라트 계열도 몽골과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쨌든 현 외몽골에서 할하인과 함께 두 번째로 많은 부류가 이 오이라트인들이다.[62] 물론 몽골 제국의 중국 정복에 대해서는 반대로 대한족주의자들과 만주족이 합심해서 몽골 제국을 까기도 한다. 전자는 남송의 멸망과 관련해서, 후자는 금나라의 멸망과 관련해서 몽골 제국을 깐다.[63] 홍콩의 캐세이퍼시픽항공의 캐세이는 거란이고 퍼시픽은 잘 알다시피 태평양으로, 굳이 뜻을 해석하면 중화태평양항공 내진 중국태평양항공이라는 뜻이다. 남방의 홍콩에 소재한 회사에 거란 이름이 붙은 건 중국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키타이가 거란에서 유래해서이다. 이 표현은 미국은 원래 아메리카라 일컫지만 시적으로 일컬을 땐 컬럼비아라고 일컫는 것과 같다. Warhammer(구판)에 등장하는 세력 캐세이 역시 중국을 모티브로 했지만 이름은 거란족에서 유래하였다. [64] 청나라의 최대 강역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보다 훨씬 넓었다. 현재의 중국이 가지지 못한 대만, 몽골, 연해주 및 서부 영토 일부를 더 가지고 있었다.[65] 악바르 대제와 강희제. 무굴 제국은 제국의 국명부터 몽골 제국의 계승을 지향했고,청나라도 대원제국 전국옥새를 장악하고 몽골 제국의 정통성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