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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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 우에츠 본선 탈선사고 JR羽越本線 脱線事故 | ||
탈선 후 전복된 선두차량의 모습 | ||
발생일 | ||
유형 | ||
사고원인 | 돌풍에 의한 탈선 | |
발생 위치 | ||
인명피해 | 사망 | 5명 |
부상 | 33명 | |
운영기관 | ||
사고열차 | 열차번호 | |
차량 | 485계 전동차 3000번대 R24편성 | |
노선 |
1. 개요[편집]
2005년 12월 25일에 발생한 철도사고로 토사 쿠로시오 철도 스쿠모역 충돌사고, JR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와 함께 '2005년 일본철도 3대 참사'로 불린다. 이 사고로 승객과 승무원 포함 5명이 숨지고 3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사건이 일어난 날이 크리스마스 당일인지라 더더욱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2. 전개[편집]
사고가 발생한 2005년 12월, 야마가타현 쇼나이 지방에서는 예년과 비교해도 심한 눈보라가 계속되고 있었다. 사건 당일인 25일에도 마찬가지로 온대 저기압에 의한 전선의 통과로 폭풍우 경보와 파랑 경보가 발령되고 있었으며, 18시에는 사카타시에서 낙뢰가 떨어지는 등 대기 상태가 매우 불안정했다. 사건 당시 사카타시의 기온은 6.3도였으며, 비가 옆으로 내리고 있었다.
이 날 아키타발 니가타행 특급 이나호 14호는 앞서 운행하던 특급 이나호 5호의 포인트 고장으로 아키타역을 61분 지연된 상태로 출발했다. 사카타역을 발차할 즈음에는 68분 지연으로 지연이 더 늘었으며, 사고시역을 통과한 후 강풍 탓에 안전 운행을 위하여 감속, 키타아마루메역을 향해 약 100㎞/h의 속도로 주행하고 있었다. 이 구간은 원래는 최고 120km/h 정도로 통과하는 구간이니 평시 대비 약 20km/h를 덜 밟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감속하여 운행하던 19시 14분경, 갑작스럽게 참사는 발생했다. 모가미강에 위치한 약 600m 길이의 철교 '제2 모가미가와교'를 통과한 직후, 느닷없이 열차가 선로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2호차부터 시작된 재앙은 최종적으로 열차 전체를 덮쳐 열차 전량이 모두 탈선, 그 중 앞쪽 3량은 기울어 선로변으로 쓰러졌다. 특히 선두 차량은 선로 옆에 있던 양돈장의 콘크리트제 퇴비 오두막에 격돌해 대파했고, 이 사고로 선두 차량의 승객 5명이 사망하였고 3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날 아키타발 니가타행 특급 이나호 14호는 앞서 운행하던 특급 이나호 5호의 포인트 고장으로 아키타역을 61분 지연된 상태로 출발했다. 사카타역을 발차할 즈음에는 68분 지연으로 지연이 더 늘었으며, 사고시역을 통과한 후 강풍 탓에 안전 운행을 위하여 감속, 키타아마루메역을 향해 약 100㎞/h의 속도로 주행하고 있었다. 이 구간은 원래는 최고 120km/h 정도로 통과하는 구간이니 평시 대비 약 20km/h를 덜 밟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감속하여 운행하던 19시 14분경, 갑작스럽게 참사는 발생했다. 모가미강에 위치한 약 600m 길이의 철교 '제2 모가미가와교'를 통과한 직후, 느닷없이 열차가 선로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2호차부터 시작된 재앙은 최종적으로 열차 전체를 덮쳐 열차 전량이 모두 탈선, 그 중 앞쪽 3량은 기울어 선로변으로 쓰러졌다. 특히 선두 차량은 선로 옆에 있던 양돈장의 콘크리트제 퇴비 오두막에 격돌해 대파했고, 이 사고로 선두 차량의 승객 5명이 사망하였고 3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3. 원인[편집]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1]의 보고서에 의하면 탈선의 원인으로는 갑작스런 순간 풍속 40m의 돌풍으로 차량이 기울어진 것이라고 결론내렸으며, 이 사고의 예측은 거의 불가능했고 사고는 피할 수 없었다고 발표했다. 또한 향후 대책으로서 기상청과 철도 사업자 간의 행정 제휴나 관측망의 강화 등으로 실효성이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소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사고에서 JR 동일본의 책임이 아예 없는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일본의 일본해[2] 연안 지역은 겨울만 되면 폭설 경보가 발표될 정도로 다설지역으로 유명하며 사고 당시에도 폭설 경보가 발령되었고 대규모 한랭 전선과 통칭 '폭탄 저기압' 발생도 예측되고 있었다. 실시간 기상 레이더에는 한랭 전선 앞에서 일반적으로 겨울에 나타나는 적란운의 2배 이상의 고도에 이르는 대규모 적란운이 사고 현장에 있는 것이 관측되고 있었지만 이 정보를 JR 동일본 측에서는 전혀 이용하지 않았으며 사고 당시 니가타 지사의 지령실에 설치되어 있는 기상청으로부터 기상 정보를 수신하기 위한 팩스가 며칠 전부터 고장났던 상태였기 때문에 폭설 경보를 전달받을 수 없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경보가 발표되어도 기본적인 간선 노선의 유지는 필요하지만 운행조정 등의 조치 없이 운행을 계속한 점에서는 JR 동일본 측의 책임이 있으며 기상정보 활용법의 구체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일본 기상청도 기상정보 공유를 JR 동일본에 제안했으나 사고 시점에는 기상정보 전달도 없었고 당연히 그에 맞는 운행 조정 규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또 사고 현장이었던 제2 모가미가와교 부근에서는 1986년에 일어났던 아마루베 철교 열차 추락 사고 당시 문제가 되었던 패들형 풍차 풍속계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3]
그러나 이 사고에서 JR 동일본의 책임이 아예 없는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일본의 일본해[2] 연안 지역은 겨울만 되면 폭설 경보가 발표될 정도로 다설지역으로 유명하며 사고 당시에도 폭설 경보가 발령되었고 대규모 한랭 전선과 통칭 '폭탄 저기압' 발생도 예측되고 있었다. 실시간 기상 레이더에는 한랭 전선 앞에서 일반적으로 겨울에 나타나는 적란운의 2배 이상의 고도에 이르는 대규모 적란운이 사고 현장에 있는 것이 관측되고 있었지만 이 정보를 JR 동일본 측에서는 전혀 이용하지 않았으며 사고 당시 니가타 지사의 지령실에 설치되어 있는 기상청으로부터 기상 정보를 수신하기 위한 팩스가 며칠 전부터 고장났던 상태였기 때문에 폭설 경보를 전달받을 수 없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경보가 발표되어도 기본적인 간선 노선의 유지는 필요하지만 운행조정 등의 조치 없이 운행을 계속한 점에서는 JR 동일본 측의 책임이 있으며 기상정보 활용법의 구체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일본 기상청도 기상정보 공유를 JR 동일본에 제안했으나 사고 시점에는 기상정보 전달도 없었고 당연히 그에 맞는 운행 조정 규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또 사고 현장이었던 제2 모가미가와교 부근에서는 1986년에 일어났던 아마루베 철교 열차 추락 사고 당시 문제가 되었던 패들형 풍차 풍속계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3]
3.1. 기관사의 과실 여부[편집]
이 열차에는 당시 29세였던 기관사와 당시 26세였던 차장 총 2명이 승무하고 있었다. 사고 발생 당일 사고열차는 아키타역을 발차할 때 이미 1시간 1분 지연이 일어났으나 운행 중 풍랑이 강한 구간에서는 운전지령원의 지시에 따라 25km/h로 운행하는 등 안전 확보를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카타역을 출발한 시점에서 지연이 1시간 8분으로 벌어졌다. 사고 발생 당시에도 일반적으로 시속 120km/h로 주행하는 구간을 기관사는 안전을 위해 자의적으로 시속 100 ~ 105km/h로 감속 운행한 것이 사고 후의 조사로 밝혀졌다. 무리한 정시운행이나 지연회복 강행 등 안전을 무시한 운행을 한 흔적은 없었으며, 오히려 악천후 속에서 가능한 한 안전하게 열차를 운행하려 노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사고 발생 후 기관사는 바로 열차무선으로 니가타 지사의 수송지령소에 탈선사고 발생을 전해 구조요청을 했고 차장과 둘이서 소방 도착까지 구조작업을 했다. 소방대원이 도착했을 때 중상을 입으면서도 "나보다 먼저 고객의 구조를 부탁합니다"라고 말해 구조 작업을 계속했다고 한다.
사고 발생으로부터 반 년 후인 2006년 6월 25일의 아사히 신문 야마가타판 31면에 게재된 검증 기사에 의하면 우에츠 본선에서만 20년 넘게 운전 해 왔던 베테랑 기관사는 인터뷰에서 "돌풍이 원인이었다고 해도, 예측할 수 없으면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 사고는 운전사의 경험이나 능력의 범주를 넘는 돌풍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이니치 신문은 2005년 12월 27일 사설에서 "이 노선을 여러 번 운전한 기관사라면 바람소리를 듣고 바람의 숨결을 느꼈을 것"이라며 사고의 원인은 돌풍이 아니라 운전사의 경험 부족으로 인한 인재라면서 되도 않는 비난을 가했지만, 현실적으로 고속 주행중인 기관사에게 바람의 숨결 따위를 판단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실제로 사설 게재 후 마이니치 신문에는 비난이 쇄도하였고 게재 2개월 후인 2006년 2월 7일에 마이니치 신문은 검증 기사에서 과학적 근거를 무시한 감정에 치우친 지나친 비판이었음을 인정했다. 당시 마이니치 신문의 지면에는 외부인으로 구성된 열린 신문 위원회에서 위원들의 사설에 대한 발언을 사과 기사 대신 게재했다.
또한 사고 발생 후 기관사는 바로 열차무선으로 니가타 지사의 수송지령소에 탈선사고 발생을 전해 구조요청을 했고 차장과 둘이서 소방 도착까지 구조작업을 했다. 소방대원이 도착했을 때 중상을 입으면서도 "나보다 먼저 고객의 구조를 부탁합니다"라고 말해 구조 작업을 계속했다고 한다.
사고 발생으로부터 반 년 후인 2006년 6월 25일의 아사히 신문 야마가타판 31면에 게재된 검증 기사에 의하면 우에츠 본선에서만 20년 넘게 운전 해 왔던 베테랑 기관사는 인터뷰에서 "돌풍이 원인이었다고 해도, 예측할 수 없으면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 사고는 운전사의 경험이나 능력의 범주를 넘는 돌풍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이니치 신문은 2005년 12월 27일 사설에서 "이 노선을 여러 번 운전한 기관사라면 바람소리를 듣고 바람의 숨결을 느꼈을 것"이라며 사고의 원인은 돌풍이 아니라 운전사의 경험 부족으로 인한 인재라면서 되도 않는 비난을 가했지만, 현실적으로 고속 주행중인 기관사에게 바람의 숨결 따위를 판단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실제로 사설 게재 후 마이니치 신문에는 비난이 쇄도하였고 게재 2개월 후인 2006년 2월 7일에 마이니치 신문은 검증 기사에서 과학적 근거를 무시한 감정에 치우친 지나친 비판이었음을 인정했다. 당시 마이니치 신문의 지면에는 외부인으로 구성된 열린 신문 위원회에서 위원들의 사설에 대한 발언을 사과 기사 대신 게재했다.
4. 영향[편집]
이 사고로 인해 우에츠 본선 츠루오카 ~ 사카타 구간의 운행이 중단되었으며 운행 재개는 2006년 1월 19일에 이루어졌다. 완전한 정상운행 시점은 사고현장 전후 2.3km 구간의 방풍설비 설치가 완료된 2006년 11월 30일이었다.
사고 이후 JR 동일본 홈페이지에는 공지 탭의 하단부에 해당 사건에 대한 사과문을 계속하여 개제하고 있다. 2010년 8월경까지는 사이트의 톱 페이지에 해당 사고에 대한 사과문과 대책 실시에 관한 내용을 올려놓고 있었고 2014년까지는 메인 페이지에 해당 사고에 관한 링크를 걸어 놓았으며 이후에는 현재와 같은 방향으로 안내하고 있다.
5. 유사 사고[편집]
- JR 닛포 본선 탈선전복사고(JR日豊本線脱線転覆事故) : 이 사고도 우에츠 본선 탈선사고와 비슷하다. 2006년 9월 17일 JR 큐슈 소속 특급열차 '니치린'이 (벳푸발 미야자키 공항행) 미나미노베오카역에 진입하던 중 전차선의 이상을 발견하고 급정지했는데 정지 직후 회오리 바람에 열차가 날아갔다. 참고로 이 회오리바람은 주위에 접근 중이었던 태풍 산산의 영향으로 발생한 적란운에 동반된 바람이었다. 해당 열차는 이미 태풍의 영향으로 발생한 강풍으로 서행하면서 약 40분 정도 지연되어 노베오카역에 도착했고 강풍이 계속되어 미나미노베오카역에서 운행종료를 할 예정이었다. 사고가 났을 때도 시속 25km로 서행운전. 이 사고로 6명이 부상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