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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하와이 국왕 카메하메하 2세 Kamehameha 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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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니누이쿠아 리홀리호이케 카푸 이올라니 (Kalaninui kua Liholihoi kapu ʻ Iolani) | |
출생 | 1797년 11월 |
1824년 7월 14일 (향년 26세) | |
재위 | 하와이 왕국의 왕 |
1819년 5월 20일 ~ 1824년 7월 14일 | |
배우자 | 카마말루 (1819년 결혼 / 1824년 사망) |
키나우 (1819년 결혼) | |
아버지 | |
어머니 | 케오푸올라니 |
어압 |
1. 개요[편집]
카메하메하 2세(본명 리홀리호)는 카메하메하 1세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은 하와이 왕국의 2대 국왕이다. 비교적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급격한 문화 변혁이 일어난 것이 그의 치세의 가장 큰 특징이다. 1819년 즉위 직후, 카메하메하 2세는 섭정이었던 계모 카아후마누와 함께 수세기간 이어져 온 카푸 제도[1]를 철폐하여 [2] 체제를 무너뜨렸다.
이로써 남녀가 함께 식사하는 것을 금지하던 등 다양한 금기가 공식적으로 해제되었고, 하와이 사회는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리홀리호는 서구식 생활 양식을 빠르게 받아들여 궁정의 복식과 예법도 변화했으며, 하와이 전통 신전(헤이아우)과 우상들을 파괴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옛 종교를 사실상 종식시켰다. 이러한 변화 직후인 1820년에 첫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하와이에 도착하여 기독교 포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카메하메하 2세 치세에 이루어진 중요한 사회 변화의 하나이다. 그는 하와이 역사상 최초로 서구를 공식 방문한 군주이기도 하다. 1823년 왕비 카마말루와 함께 영국 런던을 방문하여 세계 무대에 하와이 왕국의 존재를 알렸으나, 그곳에서 홍역에 걸려 둘 다 이듬해 요절하고 말았다.
이로써 남녀가 함께 식사하는 것을 금지하던 등 다양한 금기가 공식적으로 해제되었고, 하와이 사회는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리홀리호는 서구식 생활 양식을 빠르게 받아들여 궁정의 복식과 예법도 변화했으며, 하와이 전통 신전(헤이아우)과 우상들을 파괴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옛 종교를 사실상 종식시켰다. 이러한 변화 직후인 1820년에 첫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하와이에 도착하여 기독교 포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카메하메하 2세 치세에 이루어진 중요한 사회 변화의 하나이다. 그는 하와이 역사상 최초로 서구를 공식 방문한 군주이기도 하다. 1823년 왕비 카마말루와 함께 영국 런던을 방문하여 세계 무대에 하와이 왕국의 존재를 알렸으나, 그곳에서 홍역에 걸려 둘 다 이듬해 요절하고 말았다.
2. 생애[편집]
카메하메하 2세, 본명 리호리호(1796~1824)는 1819년 부친 카메하메하 1세의 사망 후 왕위에 올라 하와이 사회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즉위 당시 리호리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계모 카아후마누를 쿠히나 누이로 모셨는데, 이들은 함께 하와이 전통 사회의 근간이던 카푸 제도를 폐지하는 혁신을 단행하였다. 1819년 아이가 금기를 깨고 함께 식사하는 상징적 사건을 통해 카푸를 무너뜨림으로써, 오래된 토착 종교와 사회 질서를 해체한 것이다. 이는 하와이인들의 생활 양식을 규정하던 금기를 없애고 우상(偶像)을 파괴하며 기존 신전에 제사 지내는 의식을 중단시킨 획기적 조치였다. 이로써 수세기 이어진 하와이 전통 종교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고, 사회는 큰 혼란과 분열을 겪었다. 그러나 카아후마누 등 개혁 세력은 이를 서구식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곧이어 1820년 처음으로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을 공식 초청하여 하와이 섬들에 정착하도록 허용하였다. 이는 하와이에 기독교가 본격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리호리호의 치세는 전통의 종언과 함께 서구화의 시작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었다. 젊은 왕은 아버지와 달리 옛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하였고, 여러 젊은 추장들과 평민들까지 측근으로 기용하여 자신의 궁정을 꾸렸다. 한편으로는 왕권을 지탱하던 전통 규범의 붕괴로 권위가 약화되었고, 이는 일부 보수 세력이 반란을 꾀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1824년 카우아이 섬에서는 옛 추장 카우무알리이의 아들이 전통 부활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리호리호 자신은 유희와 사치에 빠졌다는 평가도 있는데, 서구 배에서 들여온 증류주를 가까이하며 사치품 소비를 늘린 탓에 평판이 손상되었다.
그러던 중 1823년 그는 부인 카마몰루 여왕과 함께 영국 국왕을 알현하고 서구 외교를 배우고자 영국 런던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는 하와이 군주로서는 첫 해외 공식 방문이었다. 그러나 런던 체류 중 두 사람 모두 홍역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왕과 왕비가 갑작스럽게 영면한 1824년, 하와이 왕국은 큰 충격에 빠졌으며, 결국 임시 국정회의를 열어 리호리호의 동복 동생 카우이케아올리를 다음 왕으로 추대하였다. 비록 카메하메하 2세의 통치는 5년 남짓으로 짧았지만, 전통적 카푸 질서의 종결과 기독교 도입이라는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하여 하와이 사회의 향후 방향을 서구화의 길로 돌려놓았다.
리호리호의 치세는 전통의 종언과 함께 서구화의 시작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었다. 젊은 왕은 아버지와 달리 옛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하였고, 여러 젊은 추장들과 평민들까지 측근으로 기용하여 자신의 궁정을 꾸렸다. 한편으로는 왕권을 지탱하던 전통 규범의 붕괴로 권위가 약화되었고, 이는 일부 보수 세력이 반란을 꾀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1824년 카우아이 섬에서는 옛 추장 카우무알리이의 아들이 전통 부활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리호리호 자신은 유희와 사치에 빠졌다는 평가도 있는데, 서구 배에서 들여온 증류주를 가까이하며 사치품 소비를 늘린 탓에 평판이 손상되었다.
그러던 중 1823년 그는 부인 카마몰루 여왕과 함께 영국 국왕을 알현하고 서구 외교를 배우고자 영국 런던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는 하와이 군주로서는 첫 해외 공식 방문이었다. 그러나 런던 체류 중 두 사람 모두 홍역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왕과 왕비가 갑작스럽게 영면한 1824년, 하와이 왕국은 큰 충격에 빠졌으며, 결국 임시 국정회의를 열어 리호리호의 동복 동생 카우이케아올리를 다음 왕으로 추대하였다. 비록 카메하메하 2세의 통치는 5년 남짓으로 짧았지만, 전통적 카푸 질서의 종결과 기독교 도입이라는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하여 하와이 사회의 향후 방향을 서구화의 길로 돌려놓았다.
3. 업적[편집]
카메하메하 2세의 업적은 주로 사회·문화적 개혁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하와이 고유의 종교·관습이었던 카푸 제도의 폐지이다. 1819년, 그는 전통적인 금기를 깨고 한 자리에서 남녀가 함께 식사함으로써 옛 관습에 도전하였고, 이것이 신호탄이 되어 카푸 체제가 공식적으로 무너졌다. 그 결과 하와이의 토착 다신교 신앙과 신성 불가침의 계급 질서에 큰 변화가 생겼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신전 제사가 중단되고, 섬 곳곳의 신상과 사원이 파괴되었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풍습이 퍼져나갔다. 이러한 종교 혁파는 하와이 사회를 급진적으로 세속화하여, 이후 들어오는 기독교 문화를 수용할 기반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외교 면에서, 카메하메하 2세는 서구와의 친선 교류를 시도하였다.
그는 1823년 영국 국왕 조지 4세를 알현하고자 왕비와 함께 영국으로 항해하는 과감한 외교를 펼쳤다. 비록 런던 도착 후 전염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으나, 이 왕실 유럽 방문 시도는 하와이가 독립된 왕국으로서 국제 외교 무대에 등장한 첫 사례였다. 이는 훗날 하와이 왕국이 서구 열강들로부터 독립국으로 승인받는 노력의 선구적 걸음이 되었다.카메하메하 2세는 또한 하와이 최초로 술에 대한 규제를 도입한 군주이기도 하다.
왕위에 오른 직후인 1819년, 서구 상인들과 선원들에 의해 알코올 남용이 확산되자, 리홀리호는 백성들의 건강과 질서를 해치는 음주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엄격한 주류 단속령을 공표하였다. 이는 하와이 사회에 서구 문물이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통제하려는 시도로서,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린 의미있는 정책으로 꼽힌다.경제적으로 큰 정책을 펼칠 기회는 많지 않았으나, 통상에 있어 부왕(父王)이 맺은 외국 상인들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포경 산업의 발전 조짐에 주목하여, 리홀리호 시대에 라하이나 등지가 태평양 포경선들의 중요한 기항지가 되는 기반을 닦았다. 이는 이후 하와이 경제의 한 축이 된다.
그는 1823년 영국 국왕 조지 4세를 알현하고자 왕비와 함께 영국으로 항해하는 과감한 외교를 펼쳤다. 비록 런던 도착 후 전염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으나, 이 왕실 유럽 방문 시도는 하와이가 독립된 왕국으로서 국제 외교 무대에 등장한 첫 사례였다. 이는 훗날 하와이 왕국이 서구 열강들로부터 독립국으로 승인받는 노력의 선구적 걸음이 되었다.카메하메하 2세는 또한 하와이 최초로 술에 대한 규제를 도입한 군주이기도 하다.
왕위에 오른 직후인 1819년, 서구 상인들과 선원들에 의해 알코올 남용이 확산되자, 리홀리호는 백성들의 건강과 질서를 해치는 음주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엄격한 주류 단속령을 공표하였다. 이는 하와이 사회에 서구 문물이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통제하려는 시도로서,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린 의미있는 정책으로 꼽힌다.경제적으로 큰 정책을 펼칠 기회는 많지 않았으나, 통상에 있어 부왕(父王)이 맺은 외국 상인들과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포경 산업의 발전 조짐에 주목하여, 리홀리호 시대에 라하이나 등지가 태평양 포경선들의 중요한 기항지가 되는 기반을 닦았다. 이는 이후 하와이 경제의 한 축이 된다.
4. 평가[편집]
카메하메하 2세에 대한 평가는 논쟁적이다. 그는 전통 사회 해체의 문을 연 개혁 군주로서 후대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옛 종교 폐지를 추진한 과감함은 긍정과 부정 두 측면으로 평가된다. 하와이 내부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조치는 수천 년 이어진 관습과 신앙을 단숨에 없앤 것으로, 문화적 충격과 정체성 혼란을 초래했다. 실제로 일부 원주민들은 전통 신들의 노여움을 두려워하거나 사회 규범의 상실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결단 덕분에 하와이는 불과 몇 년만에 기독교 국가로 변모할 정도로 새로운 사상을 빠르게 수용할 수 있었고, 세계사적 흐름에 발맞추어 근대화의 길에 들어섰다는 긍정적 해석도 있다.
당시 그의 결정은 섭정 카아후마누를 비롯한 실권자들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일각에서는 리홀리호 본인은 강한 주도권을 보이지 못한 약체 군주였다는 시선도 있다. 실제 통치는 카아후마누 등에게 좌우되었고, 젊은 왕은 주로 서구식 유흥과 사치에 몰두했다는 묘사도 전해진다. 그러나 급변하는 시대에 대응하여 과감한 변혁을 승인한 용인은 그 자체로 지도자의 결단이었으며, 이후 하와이 왕국의 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동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국외적으로 카메하메하 2세는 짧은 재위로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특히 런던 방문 중 요절한 사건은 그의 통치가 비극적으로 끝났음을 상징한다.
영국에서 홍역으로 사망한 그는 하와이 군주들 중 최초로 외국 땅에서 별세한 군주가 되었고, 시신은 영국 군함 블론드 호의 호송을 받아 귀국했다. 이렇듯 갑작스러운 왕의 죽음으로 그의 사후 하와이에는 한때 정치 공백과 혼란이 있었으나, 곧 동생 카우이케아올리[3]가 왕위에 올라 왕국의 체제가 이어졌다. 전반적으로 카메하메하 2세는 과도기적 통치자로서, 전통 하와이에서 근대 하와이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당시 그의 결정은 섭정 카아후마누를 비롯한 실권자들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일각에서는 리홀리호 본인은 강한 주도권을 보이지 못한 약체 군주였다는 시선도 있다. 실제 통치는 카아후마누 등에게 좌우되었고, 젊은 왕은 주로 서구식 유흥과 사치에 몰두했다는 묘사도 전해진다. 그러나 급변하는 시대에 대응하여 과감한 변혁을 승인한 용인은 그 자체로 지도자의 결단이었으며, 이후 하와이 왕국의 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동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국외적으로 카메하메하 2세는 짧은 재위로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특히 런던 방문 중 요절한 사건은 그의 통치가 비극적으로 끝났음을 상징한다.
영국에서 홍역으로 사망한 그는 하와이 군주들 중 최초로 외국 땅에서 별세한 군주가 되었고, 시신은 영국 군함 블론드 호의 호송을 받아 귀국했다. 이렇듯 갑작스러운 왕의 죽음으로 그의 사후 하와이에는 한때 정치 공백과 혼란이 있었으나, 곧 동생 카우이케아올리[3]가 왕위에 올라 왕국의 체제가 이어졌다. 전반적으로 카메하메하 2세는 과도기적 통치자로서, 전통 하와이에서 근대 하와이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