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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제5대 하와이 국왕
카메하메하 5세
Kamehameha V
파일:Ak9E69fg9xU6mXATpRnm5qh5v9nE0dOvLdxd6x3soL4A-MCjjnRATSVL52aNslMvqYawQGbR3bw_utW3ZoM_uZ66qiautqSvBpAzcG94ZC0JkgpV4yoHxRCADiGvSIQlqmh3DiXBjsC6NCS648jS5Q.webp
이름
카푸아이와 칼라니마쿠아 알리치올라니 칼라니쿠푸아파 칼라니누이
(Kapuāiwa Kalanimakua Aliʻiōlani Kalanikupuapaʻīkalaninui)
출생
1830년 12월 11일
사망
1872년 12월 11일 (향년 42세)
묘소
마우나 알라 왕릉
재위
1863년 11월 30일 ~ 1872년 12월 11일
서명
파일:카메하메하 5세의 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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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케쿠아나오샤
어머니 키나우
종교
하와이 교회

1. 개요2. 생애3. 업적4. 평가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카메하메하 5세[1]카메하메하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 전통 왕권의 회복을 추구했던 인물이다. 그는 형 카메하메하 4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직후, 입헌군주제 아래 약화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1864년 새 헌법을 공포하여 왕권을 증대시키고 정부 체제를 재편함으로써, 할아버지 카메하메하 1세 시절의 강력한 왕권을 어느 정도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하와이의 전통 문화를 장려하고 근대화를 추진하였으나, 직계 후사가 없이 서거하여 카메하메하 왕통은 그의 사망과 함께 막을 내렸다. 무게 있고 완강한 성격으로 묘사되는 그는 즉위 때 “나는 변화보다는 전통을 선택한다”고 선언했을 만큼 보수적 통치 철학을 지녔다.

2. 생애[편집]

로트 카푸아이와, 즉 카메하메하 5세(1830~1872)는 1863년 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전통과 근대화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한 군주였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선왕(카메하메하 4세) 때의 1852년 헌법으로는 왕권이 너무 약화된다고 판단하여, 즉각 그 헌법의 준수를 거부하고 새로운 헌법 제정을 추진했다​.

1864년 왕은 입법회를 소집해 헌법 개정을 논의하였으나 협상이 난항을 겪자, 스스로 헌법 초안을 마련하여 이를 공포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이렇게 제정된 1864년 헌법은 상하 양원을 하나로 합쳐 단원제를 구성하고, 하원의 선거권에 재산·소득 요건과 문해 시험을 도입하는 등 유권자 자격을 제한했다. 또한 쿠히나 누이 직책을 폐지하여 행정권을 온전히 국왕에게 귀속시키고, 왕실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런 변화로 왕권은 크게 신장되었으나, 일부 서구인들은 그가 친미(親美) 대신 친프랑스 행보를 보인다며 우려하기도 했다.[2]

카메하메하 5세는 한편으로 하와이 전통 문화와 지식의 부흥에도 관심을 가졌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금지되었던 하와이 전통 무용 훌라의 공연을 부활시키는 등 문화를 장려하고, 토착 치료법에 대한 금지법을 폐지하여 하와이 카후나 [3]들의 활동을 다시 허용했다. 그는 하와이 전역에서 뛰어난 카후나들을 초빙하여 그들의 약초 치료 비법을 기록하게 하고, 하와이 의학위원회를 설치하여 전통 의술의 지위를 회복시켰다. 이러한 노력은 급감하는 원주민 인구를 구하고 전통 지식을 보전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주류 남용으로 인한 악영향을 경계하여, 1865년 외국 상인들이 하와이인들에게 술을 직접 판매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법안이 입법회에서 통과되었을 때 왕은 이를 끝내 재가하지 않았다. 그는“내 국민의 사망 선고서에 서명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이 법안을 거부했는데, 이는 알코올 남용이 토착민 인구 감소의 한 원인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카메하메하 5세는 국민 건강과 전통을 생각하는 군주이기도 했다.그러나 그의 치세 말미에는 후계 문제가 불거졌다. 누이동생이던 빅토리아 카마말루 공주가 요절하고, 본인도 끝내 자녀를 두지 못한 채 건강이 악화되었다. 1872년 12월, 병상에 누운 왕은 사촌 동생인 베르니스 파우아히에게 왕위를 이어줄 것을 제안했으나 파우아히가 이를 사양하였고, 카메하메하 5세는 결국 직계 후사 없이 붕어하였다. 이로써 카메하메하 대왕으로 시작된 왕통이 단절되어, 하와이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한 국왕 선출이 이루어지게 된다. 카메하메하 5세는 재위 기간 동안 절대왕정에 가까운 통치를 복원하고자 했으나, 동시에 하와이의 전통과 정체성을 지키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그의 죽음 이후 하와이 왕국은 새로운 왕조인 칼라카우아 가문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3. 업적[편집]

카메하메하 5세의 재위 기간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1864년 헌법 제정이다. 그는 1852년 헌법이 국왕의 권한을 지나치게 제약한다고 보고, 입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의적으로 1864년 헌법을 반포하였다​. 새 헌법은 상원[4]을 국왕 임명제로 전환하고 하원의 재산 자격 요건을 높였으며, 국왕이 의회를 해산할 권리 등을 부여하여 왕권을 대폭 강화하였다.

또한 행정부의 내각에 대한 통제권을 늘리고, 사법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규정을 포함시켰다. 이로써 카메하메하 3세 이래 입헌주의적 자유가 일부 후퇴했다는 비판이 있었으나, 왕은 이를 통해 급변하는 국내외 환경에서 왕국의 안정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여겼다. 실제로 1864년 헌법으로 인해 이후 20여년간 하와이 정치에서 국왕의 주도권이 강화되어, 개혁과 보수 사이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는 전통 문화의 부흥에도 기여하였다. 비록 청년기에는 선교사 교육을 받아 개신교 신앙을 지녔지만, 국왕이 된 후 하와이 고유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하고자 노력했다. 재위 기간 동안 공식 행사에서 하와이어 사용을 장려하고, 한때 금지되었던 훌라 춤 공연을 부분적으로 허용하여 전통 예술이 다시 무대에 오를 길을 열었다. 카메하메하 5세가 주최한 대관식 등 의식행사에서는 옛 방식을 부활시켜 왕실 의전을 전통과 접목하였고, 이는 이후 칼라카우아 시대의 문화 르네상스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했다.

국가 사회 경제 정책 면에서, 그는 이민 정책과 인프라 개발에 관심을 보였다. 급감한 노동력을 보충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해외 이민자 도입을 추진하였는데, 그의 치세에 중국인 노동자들이 사탕수수 농장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 정부와의 교섭을 통해 일본인 이민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실제 대규모 이주는 본인이 사망한 후에 실현되었다. 인프라 측면에서는, 호놀룰루 거리에 가로등을 설치하고 도로를 정비했으며, 이올라니 궁전의 전신인 새로운 왕궁 건립을 계획하였다[5].

외교적으로 카메하메하 5세는 미국과의 관계를 관리하면서 주권 수호에 힘썼다. 재위 중 미국은 남북전쟁(1861-1865)으로 한동안 하와이에 적극 개입하지 못했으나, 그는 틈을 타 영국, 프랑스와의 외교를 강화하며 어느 한 나라에 예속되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했다. 1867년에는 러시아 제국의 요청으로 알래스카를 거쳐 하와이에 온 러시아 함대를 환대하는 등 다각적인 외교로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4. 평가[편집]

카메하메하 5세는 강인한 보수 군주로 평가된다. 그의 즉위와 함께 비교적 자유주의적이었던 전 왕의 시대가 끝나고, 전통과 권위가 중시되는 새로운 통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역사학자들은 그를 두고 “왕권을 지키려 한 마지막 카메하메하”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그는 카메하메하 가문의 직계로서는 마지막 통치자였다. 그가 추진한 1864년 헌법은 당대에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한편으로 하와이 왕권의 권위 회복과 정부 운영의 효율성 제고에 기여한 면도 있다​.

이로 인해 일부 평가는 그를 개혁 이전의 전통을 중시함으로써 왕국의 정체성 수호자 역할을 했다고 본다.그러나 1864년 헌법으로 정치적 자유가 후퇴한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선거권 제한으로 다수의 평민 하와이인들이 정치에 참여할 길이 좁아졌고, 왕이 의회를 장악함으로써 권력 견제 장치가 약화되었다. 야권에서는 이를 전제군주제로의 회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다수 백성들은 그를 강직하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로 받아들였으며, 실제로 그의 통치 기간에 대내 치안과 질서는 안정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개인적 성품으로 볼 때, 카메하메하 5세는 거구의 체격과 과묵한 성격으로 위엄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근면성이 뛰어나 국가 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후사(後嗣)를 남기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는 생전에 조카이자 카메하메하 4세의 딸인 빅토리아 공주 등을 후계자로 고려했으나 모두 자신보다 먼저 요절하였고, 최종적으로는 먼 친척인 베르니스 파우아히에게 왕위를 제안했으나 그녀가 고사하였다. 1872년 그의 별세로 카메하메하 왕조의 직계가 단절되고, 이듬해 민선 군주제로 전환되어 루날릴로가 선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왕위 계승의 혼란은 후대에 하와이 왕국의 불안정을 키운 요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종합하면 카메하메하 5세는 하와이 왕국 말기에 왕조의 마지막 빛을 발한 군주로서, 전통을 지키고자 노력한 보수적 개혁가였다. 그의 통치로 하와이의 자주성이 한층 강조되었으나, 동시에 변화하는 세계에 완벽히 대응하지는 못한 과도기의 왕으로 평가된다.

5. 관련 문서[편집]

[1] 로트 카푸아이와[2] 실제로 왕은 프랑스인인 샤를 드 바르니를 재무장관 및 외무장관에 임명하였는데, 이에 대해 미국계 주민들이 반발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인 대외정책은 이전과 다름없이 중립 노선을 지켰다.[3] 토착 치료사[4] 귀족원[5] 그가 세운 알리이올라니 홀 건물은 훗날 정부 청사로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