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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하와이 국왕 카메하메하 3세 Kamehameha 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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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이케아올리 칼리오파파 (keaeweʻula kʻwalaīo Kauikeaʻoli Kaliopapa) | |
출생 | 1814년 3월 17일 |
하와이 왕국 노스 코나의 키아우후 만 | |
1854년 12월 15일 (향년 40세) | |
마우나 알라 왕릉 | |
재위 | 하와이 왕국의 왕 |
1825년 6월 6일 ~ 1854년 12월 15일 | |
배우자 | 칼라마 (1837년 결혼) |
아버지 | |
어머니 | 케오푸올라니 |
어압 |
1. 개요[편집]
카메하메하 3세(카우이케아올리)는 하와이 왕국 역사상 최장기 재위 군주로, 약 30년 간 나라를 다스리며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주도한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초반에는 섭정들의 보좌를 받았으나, 성년이 된 후에는 강한 개혁 의지를 가지고 왕국을 현대화하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하와이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근대적 법률과 행정 제도를 확립하였으며, 국제적으로 독립국 지위를 인정받았다. “나라의 생명은 정의에 있다.” (Ua mau ke ea o ka ʻāina i ka pono)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을 정도로, 그는 법치와 정의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1843년 영국 해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주권을 침탈당하는 위기도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같은 해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공식 승인받아 하와이의 주권을 수호하였다.
2. 생애[편집]
카우이케아올리, 즉 카메하메하 3세(1813~1854)는 1825년 왕위에 올라 하와이 왕국의 근대화를 본격 추진한 국왕이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그는 초기에는 계모 카아후마누 섭정과 다른 고위 추장들의 도움을 받으며 나라를 다스렸다. 이 시기 하와이는 전통과 서구 문화 사이에서 방황했는데, 카메하메하 3세는 한때 전통을 중시하는 세력과 개신교 선교사 세력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는 서양식 통치 제도를 도입하는 데 점차 뜻을 모았다. 재위 중반이던 1830년대 말, 왕은 서구인 고문들과 함께 통치 구조 개혁에 나섰다. 1839년에는 먼저 인권 선언을 공포하여 백성들의 기본 권리를 천명하고[2], 곧이어 1840년에는 하와이 최초의 헌법을 반포하였다. 1840년 헌법은 왕권 아래 입법부와 사법부를 설치하여 권력 분립을 도모하고, 근대적 법치주의 도입을 선언한 획기적인 문서였다. 이 헌법으로 하와이 왕국은 전제 군주국에서 입헌 군주국으로 거듭났으며, 이후 쿠히나 누이를 포함한 내각과, 추장 계층으로 구성된 상원 격인 귀족원 및 국민이 선출하는 하원의 양원 입법체제가 서서히 갖추어졌다. 왕은 또한 기존의 토지 소유 개념을 재정립하여, 1848년 역사적인 대마헬레(Māhele) 개혁을 단행하였다. 대마헬레란 토지를 왕실, 추장, 평민, 외국인 등에 분배하여 사유지 제도를 도입한 것으로, 이로써 하와이의 토지는 처음으로 매매와 개인 소유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개혁은 당시 급속히 늘어나는 서구인 거주자와 사업가들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하와이 토착민 다수가 토지를 상실하는 결과를 낳아 훗날까지 큰 논란이 되었다.
카메하메하 3세 재위기에 하와이 왕국은 국제적 승인을 받고 주권을 지키기 위한 외교적 시험도 겪었다. 1843년 영국 해군의 포울렛 경 캡틴이 사소한 분쟁을 구실로 하와이 왕국에 무력 압박을 가해, 카메하메하 3세는 일시적으로 주권을 영국에 양도하는 선언을 해야 했다. 이 소위 포울렛 사건 기간 동안 왕은 영국 본국에 항의 서한을 보내 주권 회복을 호소하였고, 다행히도 같은 해 7월에 영국 군 최고 지휘관인 토머스 제독이 캡틴 포울렛의 행위를 취소시켜 왕국의 독립이 회복되었다. 이때 기쁨에 찬 카메하메하 3세는 “우라 마우 케 에아 오 카 아이나 이 카 포노”(Ua Mau ke Ea o ka ʻĀina i ka Pono) 즉 “땅의 주권은 정의로 영원하리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문구는 훗날 하와이의 국가 좌우명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28일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하와이 왕국의 독립을 공식 승인하였고, 왕국은 이를 라 쿠오코아(Lā Kūʻokoʻa), 즉 독립기념일로 지정해 경축했다. 한편 이 시기 인구 감소도 두드러졌는데, 1778년 캡틴 쿡이 처음 하와이에 왔을 때 30만 명으로 추산되던 하와이 원주민 인구는 서구 질병의 유입 등으로 1850년경 약 8~10만 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이러한 위기를 느낀 왕은 1851년 공중보건 향상을 위해 서양식 병원을 설립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1854년 42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하기까지 카메하메하 3세는 29년간 재위하며, 근대 법률 체계 정비와 국제적 지위 확보라는 두 과업을 달성하였다. 그의 통치 덕분에 하와이 왕국은 법률, 행정, 입법 제도를 갖춘 근대 국가로 자리매김하였고, 이후 군주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토대가 확립되었다.
카메하메하 3세 재위기에 하와이 왕국은 국제적 승인을 받고 주권을 지키기 위한 외교적 시험도 겪었다. 1843년 영국 해군의 포울렛 경 캡틴이 사소한 분쟁을 구실로 하와이 왕국에 무력 압박을 가해, 카메하메하 3세는 일시적으로 주권을 영국에 양도하는 선언을 해야 했다. 이 소위 포울렛 사건 기간 동안 왕은 영국 본국에 항의 서한을 보내 주권 회복을 호소하였고, 다행히도 같은 해 7월에 영국 군 최고 지휘관인 토머스 제독이 캡틴 포울렛의 행위를 취소시켜 왕국의 독립이 회복되었다. 이때 기쁨에 찬 카메하메하 3세는 “우라 마우 케 에아 오 카 아이나 이 카 포노”(Ua Mau ke Ea o ka ʻĀina i ka Pono) 즉 “땅의 주권은 정의로 영원하리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문구는 훗날 하와이의 국가 좌우명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28일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하와이 왕국의 독립을 공식 승인하였고, 왕국은 이를 라 쿠오코아(Lā Kūʻokoʻa), 즉 독립기념일로 지정해 경축했다. 한편 이 시기 인구 감소도 두드러졌는데, 1778년 캡틴 쿡이 처음 하와이에 왔을 때 30만 명으로 추산되던 하와이 원주민 인구는 서구 질병의 유입 등으로 1850년경 약 8~10만 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이러한 위기를 느낀 왕은 1851년 공중보건 향상을 위해 서양식 병원을 설립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1854년 42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하기까지 카메하메하 3세는 29년간 재위하며, 근대 법률 체계 정비와 국제적 지위 확보라는 두 과업을 달성하였다. 그의 통치 덕분에 하와이 왕국은 법률, 행정, 입법 제도를 갖춘 근대 국가로 자리매김하였고, 이후 군주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토대가 확립되었다.
3. 업적[편집]
카메하메하 3세의 업적은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다양하며, 그중에서도 근대 입헌군주제 확립이 가장 두드러진다. 그는 1839년 인권 선언(Hawaiian Bill of Rights)을 반포하고 이듬해 1840년 하와이 왕국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여 왕권 아래 입법부와 사법부를 규정하는 삼권분립 체제를 도입했다.
이 헌법으로 하와이는 절대 군주제에서 탈피하여 법에 따른 통치가 시작되었고, 추장 계층으로 구성된 상원과 국민이 선출하는 하원으로 구성된 의회가 설치되었다. 이는 하와이가 폴리네시아는 물론 전세계적으로도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초의 입헌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는 의의를 지닌다.그는 또 토지 개혁, 즉 대토지 분할[1]을 단행하였다. 1848년 시행된 마헤레를 통해 왕실, 귀족(알리이), 평민에게 토지 소유권을 분할하였는데, 이는 기존에 왕과 추장들이 집단적으로 지배하던 토지 제도를 개인 소유 개념으로 전환한 혁명적인 조치였다.
이 개혁으로 외국인들도 토지를 소유할 길이 열려 하와이 경제에 자본이 유입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하와이 원주민들이 복잡한 사유화 절차에 적응하지 못해 많은 땅을 잃는 부작용도 초래되었다. 그럼에도 이 토지개혁은 사유 재산권의 확립이라는 근대화 과정의 일환으로 평가된다.카메하메하 3세는 교육과 종교의 자유 등 사회 개혁에도 업적을 남겼다.
그의 치세에 개신교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하와이에는 높은 문자교육 보급률이 달성되었고, 1830~40년대에 하와이인은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을 누리게 되었다. 1839년에는 가톨릭 신자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종교의 관용을 선포하여, 천주교 신부들의 전교를 허용함으로써 종교적 다원화를 인정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다양한 기독교 교파가 공존할 수 있게 되었고, 서양식 학교와 병원이 설립되는 등 사회 인프라 발전에도 기여했다.
또한 국가 외교 분야에서도 중요한 성취가 있었다. 1843년 영국의 포렛 경 사건으로 하와이 국기가 강제로 내려지고 왕국이 잠시 영국에 양도되는 사태가 발생했으나, 카메하메하 3세는 이에 항의하고 협상을 추진하여 몇 달 만에 주권을 회복했다. 그는 이를 기념하여 “나라의 생명(주권)은 정의에 있다”라는 말을 남겼고, 이는 오늘날 하와이 주(State of Hawaii)의 모토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28일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하와이의 독립을 승인하는 조약이 체결되어, 하와이는 공식적으로 국제사회가 인정한 독립 주권국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 날[2]은 이후 하와이의 독립 기념일로 기념되었다.경제적으로 카메하메하 3세 시대에는 포경업과 농업이 발달하였다. 뉴잉글랜드 포경선들이 태평양에서 고래를 잡을 때 하와이를 보급 기지로 삼으면서, 라하이나와 호놀룰루는 번성하는 항구 도시로 성장했다. 또한 선교사들과 이주자들이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등 플랜테이션 농업을 시작하여, 하와이의 상품 작물 재배 경제가 태동했다. 그는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1848년 마헤레 이후 정부 공공 토지를 장려 정책에 활용하고, 외국인 노동자[3]을 초빙하는 등 경제 기반을 다졌다. 이 시기 하와이는 근대 경제 구조로 전환하며 이후 번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 헌법으로 하와이는 절대 군주제에서 탈피하여 법에 따른 통치가 시작되었고, 추장 계층으로 구성된 상원과 국민이 선출하는 하원으로 구성된 의회가 설치되었다. 이는 하와이가 폴리네시아는 물론 전세계적으로도 아시아·태평양 지역 최초의 입헌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는 의의를 지닌다.그는 또 토지 개혁, 즉 대토지 분할[1]을 단행하였다. 1848년 시행된 마헤레를 통해 왕실, 귀족(알리이), 평민에게 토지 소유권을 분할하였는데, 이는 기존에 왕과 추장들이 집단적으로 지배하던 토지 제도를 개인 소유 개념으로 전환한 혁명적인 조치였다.
이 개혁으로 외국인들도 토지를 소유할 길이 열려 하와이 경제에 자본이 유입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하와이 원주민들이 복잡한 사유화 절차에 적응하지 못해 많은 땅을 잃는 부작용도 초래되었다. 그럼에도 이 토지개혁은 사유 재산권의 확립이라는 근대화 과정의 일환으로 평가된다.카메하메하 3세는 교육과 종교의 자유 등 사회 개혁에도 업적을 남겼다.
그의 치세에 개신교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하와이에는 높은 문자교육 보급률이 달성되었고, 1830~40년대에 하와이인은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을 누리게 되었다. 1839년에는 가톨릭 신자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종교의 관용을 선포하여, 천주교 신부들의 전교를 허용함으로써 종교적 다원화를 인정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다양한 기독교 교파가 공존할 수 있게 되었고, 서양식 학교와 병원이 설립되는 등 사회 인프라 발전에도 기여했다.
또한 국가 외교 분야에서도 중요한 성취가 있었다. 1843년 영국의 포렛 경 사건으로 하와이 국기가 강제로 내려지고 왕국이 잠시 영국에 양도되는 사태가 발생했으나, 카메하메하 3세는 이에 항의하고 협상을 추진하여 몇 달 만에 주권을 회복했다. 그는 이를 기념하여 “나라의 생명(주권)은 정의에 있다”라는 말을 남겼고, 이는 오늘날 하와이 주(State of Hawaii)의 모토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28일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하와이의 독립을 승인하는 조약이 체결되어, 하와이는 공식적으로 국제사회가 인정한 독립 주권국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 날[2]은 이후 하와이의 독립 기념일로 기념되었다.경제적으로 카메하메하 3세 시대에는 포경업과 농업이 발달하였다. 뉴잉글랜드 포경선들이 태평양에서 고래를 잡을 때 하와이를 보급 기지로 삼으면서, 라하이나와 호놀룰루는 번성하는 항구 도시로 성장했다. 또한 선교사들과 이주자들이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등 플랜테이션 농업을 시작하여, 하와이의 상품 작물 재배 경제가 태동했다. 그는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1848년 마헤레 이후 정부 공공 토지를 장려 정책에 활용하고, 외국인 노동자[3]을 초빙하는 등 경제 기반을 다졌다. 이 시기 하와이는 근대 경제 구조로 전환하며 이후 번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4. 평가[편집]
카메하메하 3세는 성공적인 근대화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의 치세 동안 하와이는 입헌 군주제로의 이행, 법치 확립, 국제적 승인 등 근대 국가의 요건을 거의 모두 갖추었다. 특히 1840년 헌법 제정은 절대 군주였던 왕이 스스로 권력을 법으로 제한하고 백성의 권리를 인정한 진일보한 행보로서, 이는 개혁군주로서의 카메하메하 3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또한 약소국 하와이 왕국이 열강의 압박 속에서도 외교 수완을 발휘해 독립을 지켜낸 점은 그의 외교적 성공으로 높이 평가된다. 실제로 하와이는 그의 통치 하에 태평양 제도에서 유례없이 주권을 인정받은 왕국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반면 그의 정책이 초래한 일부 부정적 결과도 지적된다.
대토지 개혁[4] 이후 많은 토지가 외국인 손에 넘어가고, 하와이인의 전통적 공동체 토지 보유 체제가 붕괴된 것은 장기적으로 원주민들의 경제 기반 약화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현대 하와이에서는 마헤레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당시로서는 사유재산 제도의 도입이 불가피한 근대화 과정이었다는 이해가 일반적이다.또한 그의 치세에 인구가 급감한 것도 한계로 꼽힌다. 서양 질병으로 하와이 원주민 인구는 급속히 줄어들었는데, 이를 적극 막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으나, 이는 당시 의학 수준으로 왕의 통치력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오히려 그는 퀸즈 병원 설립의 기초를 놓는 등 보건에 관심을 기울였다.전반적으로 카메하메하 3세는 안정과 번영의 시대를 연 군주로 기억된다. 그가 30년에 걸쳐 다진 입헌군주의 토대 위에서, 이후 하와이 왕국은 19세기 말까지 독립국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하와이 현지에서는 그를 일컬어 “케 알리이 로이호 리호리호”라 부르며 존경하는데, 이는 그의 너그러움과 장수한 통치를 기리는 애칭이다. 그의 무덤은 마우나 알라 왕족묘지에 안장되어 있으며, 하와이 역사 속 성군(聖君)의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된다.
또한 약소국 하와이 왕국이 열강의 압박 속에서도 외교 수완을 발휘해 독립을 지켜낸 점은 그의 외교적 성공으로 높이 평가된다. 실제로 하와이는 그의 통치 하에 태평양 제도에서 유례없이 주권을 인정받은 왕국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반면 그의 정책이 초래한 일부 부정적 결과도 지적된다.
대토지 개혁[4] 이후 많은 토지가 외국인 손에 넘어가고, 하와이인의 전통적 공동체 토지 보유 체제가 붕괴된 것은 장기적으로 원주민들의 경제 기반 약화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현대 하와이에서는 마헤레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당시로서는 사유재산 제도의 도입이 불가피한 근대화 과정이었다는 이해가 일반적이다.또한 그의 치세에 인구가 급감한 것도 한계로 꼽힌다. 서양 질병으로 하와이 원주민 인구는 급속히 줄어들었는데, 이를 적극 막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으나, 이는 당시 의학 수준으로 왕의 통치력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오히려 그는 퀸즈 병원 설립의 기초를 놓는 등 보건에 관심을 기울였다.전반적으로 카메하메하 3세는 안정과 번영의 시대를 연 군주로 기억된다. 그가 30년에 걸쳐 다진 입헌군주의 토대 위에서, 이후 하와이 왕국은 19세기 말까지 독립국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하와이 현지에서는 그를 일컬어 “케 알리이 로이호 리호리호”라 부르며 존경하는데, 이는 그의 너그러움과 장수한 통치를 기리는 애칭이다. 그의 무덤은 마우나 알라 왕족묘지에 안장되어 있으며, 하와이 역사 속 성군(聖君)의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