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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제4대 하와이 국왕
카메하메하 4세
Kamehameha 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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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34년 2월 9일
1863년 11월 30일 (향년 29세)
마우나 알라 왕릉
재위
1855년 1월 11일 ~ 1863년 11월 30일
배우자
아버지
케쿠아나오샤
어머니
종교
하와이 성공회
어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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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업적4. 평가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카메하메하 4세[1]하와이 왕국의 4대 국왕으로,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인도주의와 문화 발전에 힘쓴 군주였다. 그는 형 카메하메하 3세의 뒤를 이어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왕위에 올랐으며, 서구 열강의 영향력이 증대하는 가운데 하와이의 주권 수호와 국민 복지 향상을 목표로 통치했다. 왕비 엠마 칼라니카우마카아마노와 함께 백성들의 건강과 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절반 이하로 감소한 하와이 원주민 인구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1856년 영국 성공회 신자를 자처하며 성공회 선교사를 초청하여 하와이에 성공회 교구를 설립하는 등 종교적으로도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는 다정하고 교양있는 군주로서 “낭만적인 젊은 왕”이라는 인상을 남겼으나, 불과 2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비교적 이른 시기에 통치가 막을 내렸다.

2. 생애[편집]

알렉산더 리홀리호, 즉 카메하메하 4세(1834~1863)는 1855년 1월 즉위하여 1863년까지 통치하는 동안 외세 속에서 하와이의 주권 수호와 국민 복지 향상에 힘쓴 군주였다. 그는 전임 왕인 카메하메하 3세의 양자로서 어린 시절부터 서구식 교육을 받았고, 젊은 시절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왕위에 오른 뒤 카메하메하 4세와 왕비 에마 여왕은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을 견제하고 영국 등 우호적인 강대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노선을 취했다​. 두 사람은 영국 국교회[2]를 하와이에 공식 초청하였고, 1862년 영국에서 토마스 스탈리 주교를 파견받아 하와이 성공회를 설립하였다​.

카메하메하 4세는 직접 성공회 공동기도서를 하와이어로 번역할 정도로 열의를 보이며 새로운 국교로서 성공회 신앙을 장려했다. 이러한 노력은 영국의 입헌 군주제를 본받아 하와이 왕권을 지키고, 미국에 의한 합병을 막고자 한 외교 전략의 일환이었다​. 실제로 왕실 부부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친분을 쌓았으며, 외아들인 앨버트 왕자의 대부모로 빅토리아 여왕을 맞이할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이를 통해 영국의 우호적 지원을 이끌어내어 하와이의 국제적 입지를 높이고자 했던 것이다.카메하메하 4세 치세의 또 다른 큰 업적은 보건 의료 개선이다. 그는 즉위 당시 급속한 하와이 원주민 인구 감소에 깊은 위기감을 느꼈다. 카메하메하 1세 당시 약 30만 명에 이르던 하와이 인구가 1850년대 중반 7만여 명 수준으로 줄어들자, 왕과 에마 여왕은 백성들의 건강을 지키는 것을 중요 과제로 삼았다. 왕실은 1855년 콜레라 등 외국 질병의 유행에 대응하고자 검역법을 제정하고 위생 개선을 추진했다. 나아가 1859년에는 퀸즈 병원(Queen’s Hospital)을 호놀룰루에 설립하였다. 퀸즈 병원은 에마 여왕의 주도로 모금 활동을 벌여 세운 것으로, 형편이 어려운 하와이인들에게 무료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첫 근대식 병원이었다.

이 병원의 설립은 하와이 민족의 생명을 연장할 유일한 방법은 의료 도움을 주는 것이라는 의사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으며, 왕실과 하와이 원주민 사회가 협력하여 이루어낸 초기 공중보건 운동의 성과로 평가된다. 이처럼 카메하메하 4세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외교적으로는 영국과의 유대 강화, 국내적으로는 의료 개혁을 통해 국민의 안위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그의 외아들이 1862년에 요절한 데 이어, 정작 본인도 29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왕위 계승에 문제가 생겼다. 그 결과 왕의 동생 로트 카푸아이와가 다음 군주로 지명되어 카메하메하 5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3. 업적[편집]

카메하메하 4세의 가장 큰 업적으로 흔히 거론되는 것은 퀸즈 병원의 설립이다. 그는 왕비 엠마와 함께 급감하는 하와이 원주민의 인구를 대단히 걱정하였고, 서양 의학을 통한 치료 시설이 절실함을 깨달았다. 두 군주는 사재를 출연하고 직접 마을을 다니며 기부금을 모금하는 열의를 보였으며, 마침내 1859년 호놀룰루에 퀸즈 병원을 개원하였다​. 이 병원은 가난한 하와이인들에게 무료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여 원주민의 생명을 구제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고, 당시 하와이에서 가장 현대적인 의료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카메하메하 4세는 이 병원의 설립을 두고 “하와이 인종의 생존을 연장할 유일한 수단”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이는 그의 휴머니즘적 통치 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그는 교육과 복지 분야에도 힘썼다. 왕립 학교들을 후원하고 서양식 교육 커리큘럼을 강화하였으며, 하와이 청년들을 해외로 유학 보내는 장학 사업을 장려했다. 또 한편으로는 고아와 빈민을 위한 사회복지 제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교회 및 민간단체와 협력하여 도움을 주었다.

문화적으로, 카메하메하 4세는 영국 문화를 선호하여 1862년 영국 성공회 리처드 암스덴 주교를 초빙하고 성공회 하와이 교구를 세웠다. 그는 성공회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하와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직접 주도하는 등 신앙심 깊은 면모를 보였다. 1867년에는 호놀룰루에 세인트 앤드루 대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하와이 건축 문화에 고딕 양식을 도입하는 등 건축과 예술 방면에도 발자취를 남겼다. 이러한 노력은 개신교 일변도였던 하와이 종교계에 다양성을 불어넣고, 영국과의 우호관계를 강화하여 국제 외교에도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외교 면에서 카메하메하 4세는 미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며 균형 외교를 펼쳤다.

그는 전임군주 시절 추진되던 미국과의 하와이 합병 논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대신 영국프랑스와 친선을 도모하였다. 이로써 하와이는 19세기 중엽 독립 왕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예컨대 1854년 카메하메하 3세 말기에 추진되던 미국과의 통상조약[3]을 즉위 후 철회하였고, 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서신을 교환하며 협력 관계를 다졌다. 그의 재위 동안 하와이는 영국 해군 함정의 순회 방문 등을 통해 영국의 비공식 보호를 누리는 효과를 거두었다.

4. 평가[편집]

카메하메하 4세는 자비로운 왕으로 기억된다. 그는 병원을 세워 백성을 구휼하고 교육을 장려한 군주로서 국민 복지에 헌신한 이미지가 강하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당시 하와이 국민들 사이에서는 친근하고 인정많은 왕으로 사랑받았으며, “엠마와 알렉산더”라는 왕비와 함께한 젊은 왕실 부부의 행보는 국민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특히 퀸즈 병원 설립은 지금까지도 높이 평가받아, 현대 하와이 의료 기관인 퀸즈 메디컬 센터의 모태가 되었음을 많은 이들이 기리고 있다.그러나 짧은 치세로 큰 정치적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는 한계도 있다. 그가 시행한 정책들은 주로 내부 안정과 복지에 집중된 것이어서,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하와이의 장기 전략을 세우거나 왕권을 강화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카메하메하 4세는 형의 자유헌법[4]을 그대로 준수하여 왕권에 제약을 받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되돌리려 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유화적 태도는 왕권 약화를 우려하는 보수 세력에게 아쉬움으로 남았으나, 역설적으로 그의 포용력과 합리적 통치는 내정 안정을 유지하는 밑바탕이 되었다.그의 갑작스런 죽음 역시 역사에 비운의 군주로 남게 된 요인이다.

1862년 외아들인 왕세자 앨버트가 어린 나이에 요절한 데 이어, 이듬해 카메하메하 4세 자신도 만성적인 건강 악화와 정신적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29세에 요절함으로써 개혁의 많은 부분이 미완으로 끝났고, 동생 로트[5]가 뒤를 이으면서 정책의 연속성에도 변화가 생겼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카메하메하 4세를 우아하고 박식하지만 요절한 군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의 재위기간은 짧았지만, 의료와 자선, 종교와 문화 방면에서 남긴 영향은 깊고 긍정적이다. 하와이인들은 그를 통해 군주의 측은지심과 책임감을 보았다고 평가하며, 오늘날 호놀룰루의 한 거리[6]와 학교 이름 등에 그의 이름이 남아있어 그 유산을 기리고 있다.

5. 관련 문서[편집]

[1] 알렉산더 이올라니 리홀리호[2] 성공회[3] 사실상 합병 가능성을 내포한 협상[4] 1852년 헌법[5] 카메하메하 5세[6] 리홀리호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