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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하와이 국왕 루날릴로 Lunalilo | |
이름 | 윌리엄 찰스 루날릴로 (William Charles Lunalilo) |
출생 | 1835년 1월 31일 |
사망 | 1874년 2월 3일 (향년 39세) |
묘소 | 카와이아하오 교회 |
재위 | 하와이 왕국의 왕 |
1873년 1월 8일 ~ 1874년 2월 3일 | |
아버지 | 샤를 카나치나 |
어머니 |
1. 개요[편집]
루날릴로는 하와이 왕국의 6대 국왕으로, 최초의 선거로 선출된 군주였다. 그는 카메하메하 대왕의 후손 중 한 명으로 혈통적 명망이 높았고, '백성의 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민심의 지지를 받았다. 1872년 카메하메하 5세가 후계 없이 붕어하자, 헌법에 따라 입법부에서 실시된 왕위 선거에서 경쟁자 데이비드 칼라카우아를 큰 표 차로 누르고 왕위에 올랐다. 루날릴로는 술병과 결핵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재위 기간 동안 보다 자유주의적 통치를 펴고자 애썼다. 그러나 즉위 후 약 1년 1개월 만에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의 통치는 하와이 역사에서 가장 짧은 군주 통치로 기록되었다.
2. 생애[편집]
윌리엄 찰스 루날리로(1835~1874)는 카메하메하 왕조가 단절된 후 1873년 선거를 통해 즉위한 하와이 최초의 선출 군주였다. 왕위 공석 상황에서 하와이 입법부는 국민적 인기가 높고 카메하메하 가문의 피를 이은 루날리로 왕자를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로 선출하였다. 루날리로는 즉위 직후 보다 민주적인 통치를 지향하여, 전임 카메하메하 5세가 강화했던 왕권을 일정 부분 내려놓고 국민의 참여를 확대하는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즉위 메시지에서 1864년 헌법의 개정을 촉구하며, 왕 자신이 임명하던 상원의원[2]을 부활시켜 입법부를 다시 상·하 양원제로 복귀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왕의 거부권 행사 시 서면 사유를 명시하도록 하고, 각료들이 하원에서 발언권을 가지도록 하는 등 입헌군주제적 요소를 강화하는 조항들을 헌법에 추가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입장은 백성들 사이에서 루날리로가 “민주의 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경제 분야에서 루날리로는, 당시 포경 산업 쇠퇴로 침체된 경기의 대안으로 사탕수수 설탕 산업을 육성하려는 상인들의 건의를 받았다. 미국 시장에 하와이 설탕을 무관세로 수출하기 위한 통상 조약이 추진되었는데, 미국에서는 그 대가로 진주만 할양을 요구할 가능성이 거론되었다.
이 문제를 두고 국내 여론이 들끓자, 루날리로는 진주만을 외국에 내어주는 것을 반대하며 통상 조약 논의를 중단시켰다. 그는 작은 섬나라의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는 것이 주권 수호의 핵심이라 여겼던 것이다. 루날리로 치세 중 특기할 만한 사건으로는 군대 반란과 그에 대한 조치가 있다. 1873년 왕국의 소규모 상비군 일부가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키는 일이 발생했는데, 루날리로 왕은 직접 반란 군인들을 면담하여 무기를 내려놓도록 설득한 뒤, 과감하게 국왕 직속 군대를 해산해 버렸다. 훈련교관의 가혹행위에서 비롯된 이 소동을 수습한 후 그는 왕실 군악대를 제외한 모든 군인을 해고함으로써 상비군을 없앴으며, 그 결과 이후 칼라카우아 왕이 즉위할 때까지 하와이는 실질적인 비무장 국가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루날리로 왕의 말년은 안타깝게도 건강 악화로 얼룩졌다. 그는 평소 과음 습관이 있었고, 즉위 후 1년 남짓 지난 1874년 초에 폐결핵이 심각해져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3개월 만에 향년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재위 기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계획한 헌법 개혁을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왕은 서민적이고 개방적인 통치 스타일로 국민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사유 토지를 하와이 민족을 위한 자선 사업에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따라 하와이 원주민 노년층을 돌보는 루날리로 홈[3]이 세워졌다. 또한 루날리로는 예술적 소질이 있어 여러 음악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하와이 왕국 최초의 국가(國歌)인 〈E Ola Ke Aliʻi Ke Akua〉(에 올라 케 알리ʻi 케 아쿠아, “왕이시여, 하나님 은총 아래 오래 사시옵소서”)를 작곡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 곡은 영국의 국가인 〈God Save the King〉 선율에 가사를 붙여 하와이어로 번안한 것으로, 1863년 카메하메하 4세의 생일을 기념하는 작곡 공모전에 출품되어 채택된 바 있다.
이러한 업적으로 미뤄볼 때 루날리로 왕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민주적 개혁 의지와 사회사업 정신을 보여준 군주로 평가된다. 그의 서거로 왕위는 다시 한 번 공석이 되었고, 두 번째로 입법부에 의해 새로운 국왕을 선출하게 되었다.
또한 왕의 거부권 행사 시 서면 사유를 명시하도록 하고, 각료들이 하원에서 발언권을 가지도록 하는 등 입헌군주제적 요소를 강화하는 조항들을 헌법에 추가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입장은 백성들 사이에서 루날리로가 “민주의 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경제 분야에서 루날리로는, 당시 포경 산업 쇠퇴로 침체된 경기의 대안으로 사탕수수 설탕 산업을 육성하려는 상인들의 건의를 받았다. 미국 시장에 하와이 설탕을 무관세로 수출하기 위한 통상 조약이 추진되었는데, 미국에서는 그 대가로 진주만 할양을 요구할 가능성이 거론되었다.
이 문제를 두고 국내 여론이 들끓자, 루날리로는 진주만을 외국에 내어주는 것을 반대하며 통상 조약 논의를 중단시켰다. 그는 작은 섬나라의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는 것이 주권 수호의 핵심이라 여겼던 것이다. 루날리로 치세 중 특기할 만한 사건으로는 군대 반란과 그에 대한 조치가 있다. 1873년 왕국의 소규모 상비군 일부가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키는 일이 발생했는데, 루날리로 왕은 직접 반란 군인들을 면담하여 무기를 내려놓도록 설득한 뒤, 과감하게 국왕 직속 군대를 해산해 버렸다. 훈련교관의 가혹행위에서 비롯된 이 소동을 수습한 후 그는 왕실 군악대를 제외한 모든 군인을 해고함으로써 상비군을 없앴으며, 그 결과 이후 칼라카우아 왕이 즉위할 때까지 하와이는 실질적인 비무장 국가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루날리로 왕의 말년은 안타깝게도 건강 악화로 얼룩졌다. 그는 평소 과음 습관이 있었고, 즉위 후 1년 남짓 지난 1874년 초에 폐결핵이 심각해져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3개월 만에 향년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재위 기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계획한 헌법 개혁을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왕은 서민적이고 개방적인 통치 스타일로 국민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사유 토지를 하와이 민족을 위한 자선 사업에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따라 하와이 원주민 노년층을 돌보는 루날리로 홈[3]이 세워졌다. 또한 루날리로는 예술적 소질이 있어 여러 음악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하와이 왕국 최초의 국가(國歌)인 〈E Ola Ke Aliʻi Ke Akua〉(에 올라 케 알리ʻi 케 아쿠아, “왕이시여, 하나님 은총 아래 오래 사시옵소서”)를 작곡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 곡은 영국의 국가인 〈God Save the King〉 선율에 가사를 붙여 하와이어로 번안한 것으로, 1863년 카메하메하 4세의 생일을 기념하는 작곡 공모전에 출품되어 채택된 바 있다.
이러한 업적으로 미뤄볼 때 루날리로 왕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민주적 개혁 의지와 사회사업 정신을 보여준 군주로 평가된다. 그의 서거로 왕위는 다시 한 번 공석이 되었고, 두 번째로 입법부에 의해 새로운 국왕을 선출하게 되었다.
3. 업적[편집]
루날릴로는 정치 개혁 의지를 보이며 즉위하였다. 그는 왕위 선거 과정에서부터 백성을 위하는 통치를 약속했고, 실제로 즉위 후 곧바로 1864년 제정된 보수적인 헌법을 개정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루날릴로는 재집권한 왕권을 다시 제한하고 국민 참정권을 확대하는 방향의 새 헌법을 구상하였는데, 이는 곧 보편적 남성 참정권의 실현을 의미했다. 비록 그가 생전에 헌법 개정까지 이루지는 못했으나, 재위 중 의회를 통해 재산 요건을 폐지하여 모든 남성 시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하와이 왕국은 다시 입헌민주주의적인 색채가 짙어졌고, 루날릴로 본인은 “하와이의 민주의 왕”이라 불리게 되었다.그는 또한 행정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즉위 초기에 카메하메하 5세가 임명한 친왕권적 내각을 해산하고, 비교적 자유주의 성향의 인물들을 새 내각에 기용하여 내정 쇄신을 꾀했다. 이를 통해 왕권 중심에서 내각 중심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균형을 일부 회복하였다. 언론의 자유도 어느 정도 확대되어, 그의 치세에 하와이의 신문들이 왕정에 대해 비교적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외교 면에서, 루날릴로는 미국과의 조약 문제로 중요한 결정을 남겼다. 미국은 하와이산 설탕에 대한 관세 혜택을 주는 통상 조약 대가로 진주만 사용 권리를 요구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영토 양도에 준하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루날릴로는 초기에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 협상을 검토하였으나, 하와이 국민의 강한 반대 여론을 접하고 이를 수용하여 1873년 말 미국과의 진주만 양도 협상을 철회하였다. 그는 국민을 “나의 참된 지도자”라고 부르며 민의를 존중하겠다고 밝힐 정도로 민주적 면모를 보였는데, 이 결정은 하와이의 영토 보전과 자주 외교를 지킨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사회적으로, 루날릴로는 왕권보다는 민생 안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재위 기간이 짧아 큰 정책을 시행할 시간은 없었으나, 서민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궁정 경비를 절감하고 왕실 토지의 일부를 백성에게 개방하는 친민 정책을 폈다. 또한 알코올 남용으로 고생한 본인 경험을 바탕으로, 지나친 음주를 경계하는 교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로써 하와이 왕국은 다시 입헌민주주의적인 색채가 짙어졌고, 루날릴로 본인은 “하와이의 민주의 왕”이라 불리게 되었다.그는 또한 행정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즉위 초기에 카메하메하 5세가 임명한 친왕권적 내각을 해산하고, 비교적 자유주의 성향의 인물들을 새 내각에 기용하여 내정 쇄신을 꾀했다. 이를 통해 왕권 중심에서 내각 중심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균형을 일부 회복하였다. 언론의 자유도 어느 정도 확대되어, 그의 치세에 하와이의 신문들이 왕정에 대해 비교적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외교 면에서, 루날릴로는 미국과의 조약 문제로 중요한 결정을 남겼다. 미국은 하와이산 설탕에 대한 관세 혜택을 주는 통상 조약 대가로 진주만 사용 권리를 요구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영토 양도에 준하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루날릴로는 초기에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 협상을 검토하였으나, 하와이 국민의 강한 반대 여론을 접하고 이를 수용하여 1873년 말 미국과의 진주만 양도 협상을 철회하였다. 그는 국민을 “나의 참된 지도자”라고 부르며 민의를 존중하겠다고 밝힐 정도로 민주적 면모를 보였는데, 이 결정은 하와이의 영토 보전과 자주 외교를 지킨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사회적으로, 루날릴로는 왕권보다는 민생 안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재위 기간이 짧아 큰 정책을 시행할 시간은 없었으나, 서민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궁정 경비를 절감하고 왕실 토지의 일부를 백성에게 개방하는 친민 정책을 폈다. 또한 알코올 남용으로 고생한 본인 경험을 바탕으로, 지나친 음주를 경계하는 교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4. 평가[편집]
루날릴로에 대한 평가는 매우 호의적이다. 그는 선출 당시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아낸 만큼, 하와이 역사상 가장 민주적 정통성을 지닌 군주였다. “민주의 왕”이라는 별명대로, 즉위 후에도 권위적인 통치보다 소통과 여론 존중을 중시하여, 하와이인들에게 큰 호감을 얻었다. 실제로 그가 별세했을 때 하와이 전역이 슬픔에 잠겼고, 왕실 묘소 대신 그가 유언으로 남긴 대로 일반 하와이인들이 많이 묻힌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을 정도로, 백성과 자신을 동등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루날릴로는 하와이 민족주의자들과 역사가들로부터 이상적인 군주의 상(像)으로 기억되는 면이 있다.
정치적으로 그는 개혁 군주로서 짧지만 의미있는 족적을 남겼다. 만약 그의 건강이 허락하여 더 오래 통치했다면, 1864년 헌법을 완전히 대체하는 더욱 자유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하와이가 입헌군주제로 안정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그는 재위 기간 중 이미 모든 남성에게 투표권을 인정함으로써 사실상의 보통선거를 이룩했고, 이는 그 시대 세계적으로도 앞선 민주적 조치였다.
또한 미국과의 진주만 협상 포기 결정은 국익과 민의를 최우선한 용단으로 평가받는다. 한편, 그의 짧은 재위는 하와이 왕국에 새로운 불확실성을 안겼다. 루날릴로 역시 후사를 지정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붕어한 탓에, 왕국은 또 다시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겪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1874년 입법부가 두 번째 왕위 선거를 실시하여 칼라카우아를 선출했으나, 이 과정에서 국내 정치 갈등과 이익 다툼이 노출되었고, 심지어 호놀룰루에서는 외국 군대[1]가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상륙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는 루날릴로의 급작스런 서거가 가져온 부정적 영향으로 지적된다.그럼에도 루날릴로에 대한 전반적 평가는 긍정 일색이다. 온화하고 개방적인 성품, 백성을 위하는 마음, 민주주의적 통치로 인해 그는 하와이 국민들의 깊은 신망을 얻었다. 오늘날 호놀룰루 근교에는 그의 유산으로 루날릴로 홈(Lunalilo Home)이 설립되어 하와이 원주민 노인을 돌보는 복지 시설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유산을 사회복지에 쓰라고 유언을 남긴 덕분이다. 이러한 사실은 루날릴로가 생전에 얼마나 이타적 지도자였는지를 보여준다. 요컨대, 루날릴로는 비록 통치는 짧았으나 하와이의 이상을 구현한 군주로 길이 남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그는 개혁 군주로서 짧지만 의미있는 족적을 남겼다. 만약 그의 건강이 허락하여 더 오래 통치했다면, 1864년 헌법을 완전히 대체하는 더욱 자유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하와이가 입헌군주제로 안정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그는 재위 기간 중 이미 모든 남성에게 투표권을 인정함으로써 사실상의 보통선거를 이룩했고, 이는 그 시대 세계적으로도 앞선 민주적 조치였다.
또한 미국과의 진주만 협상 포기 결정은 국익과 민의를 최우선한 용단으로 평가받는다. 한편, 그의 짧은 재위는 하와이 왕국에 새로운 불확실성을 안겼다. 루날릴로 역시 후사를 지정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붕어한 탓에, 왕국은 또 다시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겪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1874년 입법부가 두 번째 왕위 선거를 실시하여 칼라카우아를 선출했으나, 이 과정에서 국내 정치 갈등과 이익 다툼이 노출되었고, 심지어 호놀룰루에서는 외국 군대[1]가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상륙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는 루날릴로의 급작스런 서거가 가져온 부정적 영향으로 지적된다.그럼에도 루날릴로에 대한 전반적 평가는 긍정 일색이다. 온화하고 개방적인 성품, 백성을 위하는 마음, 민주주의적 통치로 인해 그는 하와이 국민들의 깊은 신망을 얻었다. 오늘날 호놀룰루 근교에는 그의 유산으로 루날릴로 홈(Lunalilo Home)이 설립되어 하와이 원주민 노인을 돌보는 복지 시설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유산을 사회복지에 쓰라고 유언을 남긴 덕분이다. 이러한 사실은 루날릴로가 생전에 얼마나 이타적 지도자였는지를 보여준다. 요컨대, 루날릴로는 비록 통치는 짧았으나 하와이의 이상을 구현한 군주로 길이 남게 되었다.
5. 관련 문서[편집]
[1] 미국 및 영국 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