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中華民國 Republic of China | |||||
국기 | |||||
연방기[1] | |||||
국호 | |||||
수도 | 난징(南京) | ||||
상징 | 국가 | ||||
국화 | |||||
국조 | |||||
정치 | 정치체제 | ||||
인문환경 | 인구 | (2017년 인구밀도 /㎢ (2016) | |||
공용어 | 만다린(보통화/표준 중국어)[3] | ||||
국교 | 없음 | ||||
자연환경 | 면적 | ㎢ | |||
경제 | |||||
1인당 GDP | 5조6000억$ (2017년 추정치) | ||||
GDP(PPP) | 12조4000억$ (2017년 추정치) | ||||
1인당 GDP(PPP) | |||||
화폐 단위 | 위안 (元) | ||||
ccTLD[4] | |||||
국가 예산 | 1년 세입 | ||||
1년 세출 | |||||
단위 | 국제전화번호 | ||||
외교 | 대한수교현황 | ||||
국제연합 가입 | 1945년[5] | ||||
국가원수 • 국가핵심인물 | |||||
부총리 겸 행정원장 | |||||
입법원장 | |||||
사법원장 | |||||
감찰원장 | |||||
고시원장 | |||||
1. 개요[편집]
중화민국은 가상지구 알파 세계관의 중국계 국가이며, 중화민국 건국 이전의 중국 역사는 대체적으로 현실 지구의 중국사와 동일하다. 그러나, 이 세계관에서는 중화민국이 현재(시간대는 현실 지구의 시간대와 동일)까지 중국 대륙에 존속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 지구와 비교했을 때 중대한 차이점이다.
2. 정치체제 특징[편집]
가상지구 알파의 중화민국은, 국부 쑨원의 영향을 받아 오권분립 체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계관에서는 천중밍이 손문과 대립하지 않고 타협, 협력하여 하나의 중화민국에 협력하였고, 타협의 결과로 천중밍이 주장한 연성자치론이 중화민국의 헌법과 오권분립 체제에 융합되어 있어, 이 세계관의 중화민국은 각 성들을 구성원으로 두는 연방제 국가이다. 세계관의 설정 상 청나라 붕괴 후의 혼란기에 남경의 중앙정부가 거대한 중국 대륙의 수억 인구를 일일이 중앙집권으로 통제할 여력이 없고, 설령 통제하려 하더라도 지방의 반발을 불러올 것이 우려되어, 높은 수준의 지방자치-연방제를 택한 것은 필수불가결이라는 견해가 있다.
3. 정부 구성[편집]
3.1. 국민대회[편집]
- 국민대회(National Assembly)
천중밍의 연성자치론이 중화민국 체제에 받아들여진 결과로, 국민대회는 각 성 단위로 존재하는 지방의회의 총회이다. 4년 단위로 중화민국 전역에서 국민대회총선거가 진행되고 이 선거를 통해 중화민국을 구성하는 각 성의 국민대회원을 선출한다. 국민대회원은 자신이 속한 성의 지방자치를 담당하며, 해당 성에 적용되는 '성법城法'을 제정한다. 그러나 국민대회가 단순한 '지방의회' 내지는 미국식 '주 의회'와 구분지어지는 특별한 점은, 전 국민대회원으로 구성된 국민대회의 총의, 국민대회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권한을 갖기 때문이다.
- 중화민국의 총통 선출
국민대회총선거를 통해 전 중국의 국민대회원이 정해지면, 그 즉시 국민대회총회가 소집되어 국민대회원들의 간선을 통해 중화민국 총통을 선출한다.
- 중화민국 헌법 개정안 발의권
중화민국 헌법 상, 국민대회에서는 필요하다고 인정될 시 임시 국민대회총회를 소집하여 개헌안을 논의할 수 있고, 국민대회원들의 의결을 통해 개헌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킬 수 있다. 이후 이 헌법안은 입법원에서의 의결을 거친 후, 총통의 명의로 국민투표에 회부된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만 국민대회에 발의권이 있을 뿐, 이 세계관의 중화민국에서 국민대회의 주도로 개헌안의 발의된 적은 없다.
- 중화민국 헌법 개정안 의결권
중화민국 헌법 상, 개헌안을 발의할 권한은 국민대회와 입법원 양쪽에 있으며, 입법원이 먼저 개헌안을 발의 후 입법원에서 가결했을 경우, 해당 개헌안이 총통의 명의로 국민투표에 회부되기 위해서는, 입법안에서 가결된 후에 신속히 임시 국민대회총회를 소집하여 해당 개헌안에 대해 국민대회원 과반수의 동의로 국민대회에서도 의결되어야 한다.
국민대회는 각 성 단위로 존재하는 것이 기본이나, 민국수도 남경을 포함한 특별시(북경, 상해 등)들은 성과 독립되어 존재하는 광역 행정구역이므로 이러한 지역은 별도의 국민대회를 조직하며, 소수민족 자치구도 자체적인 국민대회를 조직한다.(단, 특별시, 자치구의 국민대회에서 제정한 지방자치법도 '성법'으로 지칭된다.) 그러나 각종 일부 자치구역[8]는 헌법에 규정된 국민대회법에 귀속되지 않은 채, 별도의 자치 기구를 구성할 수 있다.
중화민국 중앙정부가 내각제로 구성되듯, 각 지역의 지방자치정부 또한 해당 성/특별시/소수민족 자치구의 국민대회가 기반이 되는 내각제로 구성된다.
국민대회원의 임기는 4년으로 규정되어 있다.
국민대회는 각 성 단위로 존재하는 것이 기본이나, 민국수도 남경을 포함한 특별시(북경, 상해 등)들은 성과 독립되어 존재하는 광역 행정구역이므로 이러한 지역은 별도의 국민대회를 조직하며, 소수민족 자치구도 자체적인 국민대회를 조직한다.(단, 특별시, 자치구의 국민대회에서 제정한 지방자치법도 '성법'으로 지칭된다.) 그러나 각종 일부 자치구역[8]는 헌법에 규정된 국민대회법에 귀속되지 않은 채, 별도의 자치 기구를 구성할 수 있다.
중화민국 중앙정부가 내각제로 구성되듯, 각 지역의 지방자치정부 또한 해당 성/특별시/소수민족 자치구의 국민대회가 기반이 되는 내각제로 구성된다.
국민대회원의 임기는 4년으로 규정되어 있다.
3.2. 입법원[편집]
- 입법원Legislative Yuan
입법원은 연방제 국가 중화민국의 '연방의회'에 해당하며, 연방법에 해당하는 '민국법民國法'을 제정한다. 입법의원들은 다른 의회제 국가의 국회의원에 대응되며,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진행되는 입법의원선거가 4년마다 진행되며, 이를 통해 입법의원들을 선발한다. 입법의원선거를 통해 중화민국의 정부수반이자 실질적인 국가통치자인 민국수상을 선출하고, 민국수상이 내각을 구성한다. 국민대회의 경우 특별자치구의 국민대회는 존재하지 않으나(대신, 별도의 자치기구를 설립할 수 있다), 입법의원의 경우 각 자치구의 민의를 대변할 입법의원이 존재한다.
입법원의 권한은 다음과 같다.
입법원의 권한은 다음과 같다.
- 입법의원선거를 통한 민국수상 선출과 내각 구성
- 민국법 제정
- 중화민국 헌법 개정안 발의권
국민대회 문단에서 설명되었듯 입법원에서 발의되고 통과된 개헌안은 국민대회에서 의결되어야 국민투표에 회부될 수 있다.
- 중화민국 헌법 개정안 의결권
국민대회 문단에서 설명되었듯 국민대회총회에서 개헌안이 의결되었을 경우 입법원에서도 의결되어야 국민투표에 회부될 수 있다.
- 중화민국 예산안 승인권 및 추경 권한
- 내각 인사 승인권
중화민국의 입법원에는 타국의 국회의장에 대응되는 직책인 입법원장이 존재하며, 입법의원선거로 새로운 입법의원들이 선출되어 임기를 시작하면 원내 위원회들의 선출 과정과 동시에 입법의원들의 투표로 선출한다. 대부분 이런 절차를 통해 입법원장은 원내 1당에서 중진인 인사가 선출되나, 내각제 국가의 특성 상 나타나게 되는 연립정부에서, 같이 연립할 소수당을 끌어들이기 위한 정치적 거래의 결과물로서, 소수당에서 입법원장을 배출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인 내각제 국가에서는 고도의 민주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총리의 임기 제한이 따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데, 중화민국의 경우 1972년의 헌법 개정을 통해 한 사람이 민국수상을 할 수 있는 기간을 일생 동안 누적하여 12년을 넘을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다. 중화민국 초기, 실질적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아 민국수상이 사실상 20, 30년 이상 집권하며 천자와 같은 권한을 누린다는 문제 때문이었다.
3.3. 행정원[편집]
중화민국의 행정부이다
행정원의 수장은 민국수상이며 행정원장은 행정원 관료들의 대표로써 수상이 입법원의 동의를 거쳐 임명한다. 행정원장은 민국 부수상을 겸한다.
내각 구성으론 정부기관이 4가지 분류로 나뉘게 되고 주요한 정부 회의로는 민국최고민생회의, 민국국치회의, 민국행정총회의가 있다.
중화민국은 내각제 국가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입법의원이 내각 관료를 겸하나, 팔청장의 경우에는 입법의원 신분이 아닌 사람이 임명될 수 있다.
행정원의 수장은 민국수상이며 행정원장은 행정원 관료들의 대표로써 수상이 입법원의 동의를 거쳐 임명한다. 행정원장은 민국 부수상을 겸한다.
내각 구성으론 정부기관이 4가지 분류로 나뉘게 되고 주요한 정부 회의로는 민국최고민생회의, 민국국치회의, 민국행정총회의가 있다.
중화민국은 내각제 국가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입법의원이 내각 관료를 겸하나, 팔청장의 경우에는 입법의원 신분이 아닌 사람이 임명될 수 있다.
3.3.1. 오성장관[편집]
중화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정부부서들로는 각각 재무성, 방위성, 내무성, 외무성, 농림성이 있으며 이들을 오성으로 통칭하고 그 수장들을 오성장관들로 호칭한다.
- 재무성 : 중화민국의 예산배정, 예산집행, 회계, 예산사용내력 감찰등을 수행한다.
- 방위성 : 중화민국의 육해공을 통튼 방위를 담당한다.
- 내무성 : 중화민국의 치안, 법의 집행등을 담당한다.
- 외무성 : 중화민국의 대외관계, 대내관계를 통튼 외교를 담당한다.
- 농림성 : 중화민국의 근간이자 최대유권자층인 농민들과 농업의 관리, 연구, 개선, 개발과 포간도호법에 따른 토지분배와 관리 집행, 자원개발과 보호, 수목림들의 관리들을 담당한다.
3.3.2. 십부장관[편집]
민생과 관계된 부서들을 5생, 민권과 관계된 부서들을 3권으로 부르며 이를 합쳐 5생3권으로 부른다. 그러나 타 2개 부서 또한 그 중요가 막중하기에 5생3권과 타 2개 부서들을 합쳐 10부라 부르고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 5생 : 노동부, 보건복지부, 국영관리부, 국토개발부, 토지부
- 노동부 : 전국의 노동자, 노동 관리들을 총괄하며 노동 개선, 노동권 보장, 노동문제 해결등을 담당한다.
- 보건복지부 : 중화민국의 국토와 국민 특성상 중화민국 전국토의 복지를 관할하기 힘들기에 주로 전국의 보건개선과 유지등에 힘 쓰며 실질적으로 연방직할령과 일부 남부주들과 자치공화국들에 제한된 복지사업을 펼친다.
- 국영관리부 : 중화민국의 수많은 국영기업들과 소비재기업들을 총괄하고 생산을 담당한다.
- 국토개발부 : 중화민국 국토의 개발과 공공사업, 공공시설 유지보수를 담당한다.
- 토지부 : 중화민국 전역의 토지현황, 토지관리, 교통시설 부설과 관리를 담당한다.
- 3권 : 교육부, 가정평등부, 환경부( 72년 창설)
- 교육부 : 중화민국 전민의 교육, 계몽, 교육환경 개선, 민주주의 의식 성장등을 담당하나, 실질적으로 중화민국의 끝없는 국토와 그 국토를 뛰어넘는 인구때문에,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직할령, 남부의 몇몇 주와 자치공화국들을 제외하곤 불안정한 제한된 교육을 시행한다.
- 가정평등부 : 전통적으로 뿌리박혀 있던 반인권적 의식들과 반동들을 교정하고 ,만민평등의 실현을 위해 설치된 부서로써, 엄격하고 가차없는 집행에도 불구하고, 북부와 변경에서의 교정에 난관을 겪고 있다.
- 환경부 : 환경에 대한 관심과 자연재해의 폭등으로 신설된 부서로 전국의 환경 유지개선과 자연재해 예방을 위한 환경 복구를 담당한다.
- 그 외 2부
- 해양부 : 중화민국의 영해와 해양자원, 해양사고예방등을 담당한다
- 방첩부 : 중화민국의 방첩과 국제범죄자 추격, 민주주의 체제 국내수호를 담당한다.
3.3.3. 팔청장[편집]
팔청은 부보다는 중요성이나 규모가 떨어지는 행정기구들이다.
- 인권규범청 : 인권규범들의 제정과 집행 그리고 반인권 문제들의 처리등을 맡는다.[9]
- 조세청 : 조세집행과 회계를 담당한다.
- 선전공포청 : 법률과 선거결과, 시행령, 규범, 조례등의 공포와 민주주의및 인권, 삼민주의등을 선전하고 국가행보를 홍보한다.
- 소방청 : 화재예방과 진화
- 경찰청 : 경찰업무와 치안확립, 군중통제
- 검찰청 : 범죄자 기소와 재판수행
- 공정시장관리청 : 공정거래 확립과 시장에서의 위법행위적발, 소비재 통제를 맡는다.
- 문화예술청 : 중화민국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예술을 지원하며 국민교양교육도 담당한다.
3.4. 사법원[편집]
- 사법원Judical Yuan
사법원은 중화민국의 중앙 사법 기권이다. 가상지구 알파의 중화민국에서는 법원 체계가 이원화되어 있는데, 이는 연방제를 실시하여 각 성의 국민대회에서 성법을 입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법은 중화민국 헌법에 의해 민국법으로 일원화되어 있어서, 민법의 경우 각 성/특별시/자치구 별로 상이하나, 형법은 전 중화민국에서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러한 구조로 인하여 중화민국에는 각 성의 관할하에 있는 일반법원(성법에 따라 민사재판을 진행함)과, 사법원의 관할 하에 있는 형법원(민국법에 따라 형사재판을 진행함)과 민국법원이 있다.
일반법원, 형법원과 구별되는 민국법원의 독자적인 영역은 다음과 같다.
일반법원, 형법원과 구별되는 민국법원의 독자적인 영역은 다음과 같다.
- 일반적으로는 각 성의 성법으로, 일반법원에서 진행되어야 할 민사재판이 법률상 특이점/사안의 중대성이 있을 경우, 민국법원에서 민국 민법에 근거하여 최종심급을 담당할 수 있다.
- 민국법과 성법이 중화민국 헌법에 위배되는지의 여부를 심사한다.
- 민국법과 성법이 상호간에 충돌될 경우, 충돌되는 법률 간의 중재를 담당하고, 두 법이 조화될 수 있도록 개선입법할 것을 국민대회와 입법원에 통보할 수 있다.
- 입법원에서 중화민국 총통에 대한 탄핵소추가 가결되었을 경우 탄핵 심판을 담당한다.
3.5. 감찰원[편집]
- 감찰원Control Yuan
감찰원은 중화민국 정부의 반부패기구로, 각 국가기관들을 감사하고 부패한 공직자에 대한 수사를 진행할 수 있다. 감찰원장은 민국수상이 지명하며, 입법원의 동의로서 임명된다. 입법원은 민국수상이 지명한 감찰원장 후보를 거부하였을 경우, 입법원에서 자체적으로 감찰원장 후보를 지명할 수 있다.
3.6. 고시원[편집]
- 고시원Examination Yuan
고시원은 중화민국 정부기구의 공무원에 대한 심사, 채용 기구로서, 모든 공무원에 대한 임용시험은 고시원에서 주관한다. 고시원장은 민국수상이 지명하며, 입법원의 동의로서 임명된다.
3.7. 총통[편집]
중화민국의 총통은 '국민대회' 문단에서 설명된 것과 같이 국민대회 총선거에 의해 새로운 국민대회가 출범하면 그 즉시 국민대회총회를 소집하여 전 중국 국민대회원의 간선제에 의해 선출되며, 그 임기는 국민대회원의 임기와 같은 4년이다. 중화민국의 총통은 연임 제한이 없으며, 이론상으로는 국민대회 총회에서 지속적으로 선출된다면 무제한 집권-연임이 가능하나. 현실적으로는 국민대회 구성이 일당 우위가 지속적이지 않으며 국민대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정당이 항상 변한다는 점에서 무제한 연임 현상은 실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중화민국의 총통의 권한은 국가 원수로서의 권한으로서 다음과 같다.
1. 외국과의 조약체결권
2. 외교사절의 파견 및 접수권
3. 법령의 서명 및 관보를 통한 공포권
4. 연방 입법원에 대한 수상 후보 추천권
5. 연방 입법원에 의해 수상으로 선출된 자에 대한 임명권
6. 민국 수상의 제청에 따른 내각 각료 임면권
7. 연방판사, 연방공무원, 군장교 및 하사관의 형식상 임면권
8. 사면권
9. 민국 수상의 제청에 따른 입법원 해산권
4. 정치적 상황[편집]
중화민국은 국제적으로 형식적, 제도적 차원에서 민주주의가 널리 실행되고 있는 국가로 인정되고 있으며, 애국심이 넘치는 어떤 중국인들은 '아시아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인 중화민국'이라는 것에 아주 큰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중화민국의 정치가 결코 덮어놓고 자랑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체제는 아니다. 각 성들은 제각기 반독립적인 자치의회 즉 국민대회를 구성하고, 자체적인 행정권과 (형법을 제외한) 재판권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 성의 이익관계에 따라서 알력다툼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며, 중앙정부의 주된 과제는 이들의 등쌀에 휘말리며 각 지방자치단체들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타협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중화민국 입법원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민주선거'에 의해 선출되는데, 이는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이 몇 억명이나 된다'는 말 또한 성립한다. 중화민국은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 지역의 이해관계를 중앙정부인 입법원에 반영하고 싶어하는 지역정당들이 해당 성 거주자들의 상당한 지지로 입법원 의석을 달성하고, 특히 자치공화국의 경우에는 중화민국 '본토'의 거대 정당들이 자치공화국에 진출하여 해당 지역의 민심을 석권하지 못하고, '자치' 공화국 답게 중화민국 본토에는 없는 정당들이 자치공화국에 배정된 권역별 비례대표 의석을 석권하며, 주요 정당들은 집권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치구역의 정당들과 연정하는 것이 반 필수인 상황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화민국 입법원에는 웬만한 다당제 국가들보다도 많은 정당이 입법원의 '원내정당'이며, 이는 입법원에서의 논의와 입법과정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연정을 꾸릴 때도 2개 정당의 연정이 아닌, 그보다 더 많은 정당들이 연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중화민국 입법원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민주선거'에 의해 선출되는데, 이는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이 몇 억명이나 된다'는 말 또한 성립한다. 중화민국은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 지역의 이해관계를 중앙정부인 입법원에 반영하고 싶어하는 지역정당들이 해당 성 거주자들의 상당한 지지로 입법원 의석을 달성하고, 특히 자치공화국의 경우에는 중화민국 '본토'의 거대 정당들이 자치공화국에 진출하여 해당 지역의 민심을 석권하지 못하고, '자치' 공화국 답게 중화민국 본토에는 없는 정당들이 자치공화국에 배정된 권역별 비례대표 의석을 석권하며, 주요 정당들은 집권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치구역의 정당들과 연정하는 것이 반 필수인 상황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화민국 입법원에는 웬만한 다당제 국가들보다도 많은 정당이 입법원의 '원내정당'이며, 이는 입법원에서의 논의와 입법과정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연정을 꾸릴 때도 2개 정당의 연정이 아닌, 그보다 더 많은 정당들이 연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4.1. 정당들[편집]
가상지구 알파 세계관 중화민국에서, 상기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여러 군소정당들이 존재하나, 그 중에서 특기할 만한 주요 정당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 국민자유당의 상징 |
- 국민자유당國民自由黨: 국민당은 중화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이고, 가장 오래 집권한 정당 중 하나이다. 국민당은 중화민국의 국부 쑨원의 위명에 힘입어 중화민국 초기에 오랫동안 장기집권하고, 입법원 내에서도 강한 위세를 떨쳤으나. 장기집권이 지속되고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자 거대 정당내에서 이념 차로 인하여 국민당 좌파는 삼민당으로 분당하고 국민당 우파는 국민자유당으로 분당하게 된다. 1990년대 이후로는 손문의 본래 계획을 따라 현 중화민국의 내각제 체제에서, 총통의 권한을 더욱 확대하는 이원집정부제 내지는 대통령제 국가화를 꾀하고 있다.
- 삼민당三民黨: 국민당은 중화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이고, 가장 오래 집권한 정당 중 하나이다. 국민당은 중화민국의 국부 쑨원의 위명에 힘입어 중화민국 초기에 오랫동안 장기집권하고, 입법원 내에서도 강한 위세를 떨쳤으나. 장기집권이 지속되고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자 거대 정당내에서 이념 차로 인하여 국민당 좌파는 삼민당으로 분당하고 국민당 우파는 국민자유당으로 분당하게 된다. 삼민당은 송경령을 위시한 국민당 좌파 계열들이 국민당에서 분당한 정당으로, 대체적으로 사회민주주의-사회자유주의-(소수) 중도파 계열세력들의 빅텐트 정당이다.. 큰 틀에서는 사회민주주의 계열 진보주의 좌파 정당이지만[11], 상황에 따라 타협적 태도로 보수적인 정책을 펼치는 경우가 있어(독일 사회민주당의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극단적인 좌파 계열 운동가들에게는 삼민당은 '국민당 좌파의 이름을 깎아먹는 정당'이라고 비난받기도 한다(이들은 대다수 삼민당 분열로 인해 생긴 공산당의 후계들이 많다.). '국민당의 분열' 당시 국민당 좌파 계열을 따라 삼민당에 참여한 인원들이 더욱 많아, 삼민당은 현재 중화민국 내에서 대체적으로 1당에 가까운 상황이다.
중국 연합당 당기[12] |
- 중국 연합당中國 黨: 중국 연합당은 천중밍의 연성자치론을 위주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자본가 계열 및 우파 계열 지식인들이 주축이 된 정당으로, 중화민국 초창기 친 천중밍 계열 '치공당'에서, 기타 비 국민당계 우파들이 연합한 세력이다. 중화민국 내에서 중도우파-우파 계열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연합당은 현 중화민국이 연방제 국가화 되는 것에 대해 영향을 많이 미쳤으며, 중화민국 연방 체제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들이다. 대체적으로 중국 연합당은 국민당이 분당하기 전까지는 국민당내에서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현 중국자유당의 전신인 국민당 우파들과 현 중화 삼민당의 전신인 국민당 좌파들과 상당히 대립했으나 때에 따라선 연립했다 , 국민당이 분당하고 중앙집권과 대통령제를 원하는 일부 우파들에 의해 국민자유당과 그리 가깝지는 않았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국민자유당이 보다 연방주의적으로 변해 국민자유당과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으며, 국민자유당-연합당 연립 정권도 간혹 나타난 적 있었다.
중국공산당의 당기 |
- 중국 공산당中國共産黨: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을 위시한 공산주의 정당이다. 이 세계관에서는 모택동은 현실 세계에서 장개석의 중화민국과 대립할 만큼 중화민국 중앙정부와 강하게 날을 세우지 않았고 공산주의자들 또한 국민당에 속해있었고 삼민당 대분열 전까지는 삼민당에 속해 연립했었기에 멀쩡히 활동중이다, 중화민국의 국민당이 삼민주의를 기치로 어느정도 사회주의적(쑨원은 공지주의자라는 평이 우세하지만) 정책을 펼치면서 중화민국 체제 내에서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다만 가상지구 알파의 중국 공산당은 현실과 유사하게 산업 사회를 전제로 하는 일반적 마르크스주의 노선보다는, 여전히 산업화가 미비하고 저개발된 지역이 많은 중화민국의 특성 상 농민 등을 주축으로 하는 '변형된' 사회주의 노선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대변 또한 자처하고 있으며 상당한 노동자 네트워크를 소유하고 있다. 오히려 포간도호 정책을 1978년까지 반대하고 토지 국유화를 주장하면서 농민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근로인민당 당기 |
-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 근로인민당은 중화민국의 사회주의 정당이지만, 공산당이 농촌이나 저개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수정주의' 노선을 수용했다면, 근로인민당은 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비교적 '정통적' 마르크스주의 계통에 가까우며, 노동조합의 분권과 중앙에서의 약한 통제를 지향하는 정당이다. 근로인민당의 주요 활동가들은 대부분 모택동의 노선에 반대한 공산주의자들인데, 장궈타오를 위시한 '정통적' 마르크스주의 세력 다수가만주 소비에트로 넘어가면서 산업 노동자들만을 기반으로 하는 정통 사회주의 세력은 상당히 위축되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 삼민당 내에서 비교적 강성한 좌파들이 삼민당이 '우경화' 되고 있다면서 삼민당을 비판하고 탈당하면서, 이들과 비 공산당계 강경 좌파들이 연합하여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였다. 근로인민당의 주 지지 계층들은 공업도시의 노동자 계층이며,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산업노조들이 근로인민당의 강한 지지자들이다. 공산당과는 국가통제적인 공산당의 노동 이념과 조합분권적인 근로인민당의 노동 이념이 반대되기에 대립중이고 서로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으려 다툼을 벌이고 있다. 비교적 노동자 이기주의적인 근로인민당은 하층 공장 노동자들의 지지면에서 우세하고 통제적인 공산당은 노동자 간부들이나 상급자의 지지면에서 우세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 중앙당中央黨: 중앙당은 중화민국 정계의 강성우파 성향 소수 정당으로,이들의 당명이 '중앙'당인 이유는 그들의 중앙집권적 성향 때문이다. 이들은 중화민국 중앙정부의 힘이 지극히 미약하기 때문에 지방정부간 분쟁이 중화민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아주 큰 장애물이라고 주장하며, 국민대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입법원, 행정원의 권한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태화당太和黨: 태화당은 중화민국의 종교 정당으로, '종교' 문단에서 설명될 중화민국의 신흥 민족종단인 '상청교'에서 기반한 정당이다. 태화당의 이념은 상당히 복합적인데, 종교 교리를 기반으로 정치적 의견을 개전하다 보니, 이들의 종교적 성향에 의해 특정 정책은 극보수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동시에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좌파적인 교리를 내는 등 상당히 기묘한 행보를 보이는 정당이다.
- 전중국불교연합全中國佛敎聯合: 전중국불교연합은 중화민국의 불교 정당으로, 중화민국 알파 세계관의 소림사를 주축으로 한 불교 우파들이 정치세력화한 정당이다.
- 중화불심개혁회: 중화불심개혁회는 세속에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하여 일부러 주요 정당에 대한 지지를 회피하면서 전중국불교연합에 대항하기 위해 불교 좌파들이 정치세력화한 정당이다. 전중국불교연합과 티베트에서 온 티베트 불교인들의 지지를 두고 다투고 있기도 하다.
- 기독교강성회 : 송경령을 비롯한 기독교인 좌파들은 삼민당에 있으나 기독교 우파세력들은 기독교 강성회라는 극단주의 정당을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건안동맹과 유사하나 건안동맹과의 사이는 극단적으로 벌어져 있다.
5. 자치구역[편집]
중화민국은 연방제 국가이고, 각 성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지방자치를 국민대회를 통한 의원내각제를 영위하며 제도적으로 보장받고 있으나, 중화민국의 일부 지역들은 특수 자치구역으로서[15], 더욱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받는다.
자치구역들을 두가지 분류로 나누는데, 첫번째는 자치공화국, 두번째는 특별행정구역, 세번째는 소수민족 자치구이다.
자치구역들을 두가지 분류로 나누는데, 첫번째는 자치공화국, 두번째는 특별행정구역, 세번째는 소수민족 자치구이다.
- 자치공화국 : 내몽골 자치공화국, 닝샤 자치공화국, 신장 자치공화국, 광시 자치공화국, 만주 자치공화국, 대만 자치공화국
이들은 중화민국 헌법에 기반한 자체헌법을 제정하며 민국법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치법을 작성한다. 일명 나라 안의 나라 방침에 따라서 이들은 중화민국 헌법상의 기본권에 저촉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 한 구역내에서 국가급의 위상을 갖는다. 이들은 자체 국기를 제정하며, 연방기와 함께 자체 국기를 계양한다. 현실 세계에서 중화인민공화국-홍콩/마카오처럼, 이러한 자치공화국들은 중화민국 '본토'와 별개의 여권을 발행하고, 일부 국제기구에서 중화민국과 별도의 명의로 활동한다.[16]
만주 자치공화국의 국기 |
- 만주 자치공화국: 신 만주 공화국이 중화민국에 병합된 후, 약 1억 인구의 만주인들을 중화민국에 그대로 병합시키기가 어렵다는 문제로 인하여 자치공화국화 되었다. 만주 자치공화국은 중화민국의 여러 자치공화국 중 가장 최근에 생겨났고, 가장 거대한 자치공화국이다. 만주 자치공화국에서는 표준중국어 이외에, 만주어가 복수 공용어로 공식 지정되어 있으나,, 이는 신 만주 공화국이 자신들이 '중국의 일부'임을 거부하고 '만주에 살던 제민족의 후예'임을 내세워, 만주어를 공용어 중 하나로 내세우고, 만주족 문화에 대한 국가적 연구를 시행한 영향일 뿐, 실제로는 만주어를 입말로 구사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실질적 의미는 없다시피하다. 만주 자치공화국에 만주어가 공용어인 이유는, 신 만주 공화국이 만주어를 공용어로 지정했다는 것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대만 자치공화국의 국기[17] |
- 대만 자치공화국: 대만은 19세기 말부터 일본의 식민지였으나, 이 세계관에서도 2차대전 종전 후 중화민국령으로 반환되었다. 그러나 대만 거주민들이 비교적 일본의 식민통치에 우호적이었고, 이로 인하여 '친일 관료 청산', '대만 성의 국민대회 설치'등의 문제가 대만 현지 거주자들에 의해 난항을 겪자. 중화민국 정부는 '대만 성'에 대한 직속 통치(다른 성과 동등한 행정구역화)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일제시대부터 유지된 현지인 관료 조직을 유지하고, 자체적인 제도를 유지하는 자치공화국을 두었다. 대만 자치공화국에는 복수 공용어가 지정되어 있지 않으나, 대만 원주민들은 대만어를 복수 공용어로 지정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대만 자치공화국 및 중화민국 본토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현실 세계의 대만이 20세기 중후반에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룬 것처럼, 가상지구 알파의 대만 자치공화국도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며, 자치공화국들 간에 경제력 규모를 비교했을 때 대만은 가장 부유한 자치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인 개개인의 삶의 질을 비교했을 때, 대만인의 삶의 질이 평균적으로 상위권에 위치해 있다. 이런 점으로 인하여 대만은 어느 자치공화국보다도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크고 대만이라는 자치공화국의 자체적 위상도 높다.
그 예시 중 하나로, 가상지구 알파 세계관의 중화민국은 1964년에 상하이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나[18], 2008년에는 대만 자치공화국에서 적극적으로 올림픽을 유치하여 2008년에 다카오 올림픽을 개최하는 데 성공하였다.[19] 이 기세에 힘입어 자치공화국이 개별 명의로 출전 가능한 월드컵 대회를 노리고 대만 자치공화국은 대만 단독으로 월드컵을 개최하는 것까지 노리고 있다.
신장 자치공화국의 국기 |
내몽골 자치공화국의 국기 |
닝샤 자치공화국의 국기 |
- 닝샤 자치공화국: 영하 자치공화국은 현실의 닝샤 후이족 자치구와 거의 비슷한 위치, 비슷한 영역을 가진 자치공화국으로, 회족 주도의 자치구역이다. 회족은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한족과 거의 같으므로, 닝샤 자치공화국에는 표준중국어 이외의 공용어가 지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슬람교도가 많은 영하에서 종교적 목적에서 아랍어는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광시 자치공화국의 국기 |
- 특별행정구역 : 홍콩과 마카오등은 외국들에게서 비교적 최근 반환된 영토이다. 이들은 비록 중앙정부의 영향이 짙게 미치는 지리에 자리잡고 있고, 본토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나 행정상의 절차와 상당히 이질적으로 변한 문화, 그리고 경제적 격차등으로 인해서 특별행정구역으로써 존재한다. 이들은 일종의 '특별시장'격인 행정청장을 직선제로 선출하는데, 행정청장 제도는 독자적인 외교권과 군통수권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대통령제 국가와 유사한 면이 있다. 특별행정구역 내에서는 중화민국 헌법과 민국법을 따르며 국민대회에 대표를 보낸다. 그러나 직접적인 중앙정부의 직할 시도는 엄금되어 있으며 중앙정부의 경제정책과 같은 정책들에 영향받지 않고 별도의 복지와 교육을 운영한다. 그러나, 이 세계관 중화민국의 특별행정구역은, 현실의 홍콩과 마카오가 중국과 별도의 여권을 발행하고, 국제기구 에서 중국과 분리된 별도 명의로 활동하는 수준의 자치권은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가상지구 알파의 중화민국은 영국, 포르투갈 등과 냉전으로 대립하는 세력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비록 국경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언어적, 문화적 동질성으로 인해 홍콩에서 제작된 홍콩 영화나 홍콩 내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들이 중화민국 본토에 일찍이 수출, 유입되었고[20], 중화민국과 홍콩-마카오의 왕래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으며, 결정적으로 두 나라 모두 민주주의 체제와 일정한 시장경제 체제를 택했다는 큰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현실의 중국-홍콩처럼 명백한 이질적인 체제가 한 국가 내에 공존하는 '일국양제' 같은 모델이 필요가 없었고, 현실보다 낮은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합의가 되었기 때문이다.
- 소수민족 자치구 : 자치공화국급으로 편성하기 힘든 소규모 소수민족들에 대해서 더 광범위한 자치권을 인정하여 편성된 자치구들이다. 대표적으로 연변 조선인 자치구등이 있으며 이들은 특별행정구역보다는 일반적으로 낮지만 성보다는 높은 자치권을 받는다. 직선제로 자치장을 선출하며 별도로 의원들을 뽑아 국민대회에 보내고 중앙정부의 정책에 대한 거부권과 특별보조금수여권, 자체문화정책권을 가질 수 있다.
- 조선족자치구: 조선족자치구는 현실의 간도 내지는 연길 지역에 위치한 중국조선족의 자치구이다. 지도상으로 그렸을 때 조선족자치구는 만주 자치공화국을 사이에 두고 중화민국 '본토'에서 사실상의 월경지인데, 이렇게 특이한 배치가 생겨난 데는 역사적인 사유가 있다. 연변-연길 지역은 가상지구 알파 세계관의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만주 소비에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중국조선족 또한 '만주 소비에트인'이라는 국적을 부여받게 되었다. 만주 소비에트 정권 하에서는 공산주의적 이념 하에 명목상으로 소수민족인 조선족 또한 '노동자 인민'으로 다수파를 차지하던 중국인-한족과 비교적 동등하게 대우받았으나, 만주 소비에트 정권이 붕괴되고 새로 권력을 잡은 신 만주 공화국== 자치구역 ==
중화민국은 연방제 국가이고, 각 성들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지방자치를 국민대회를 통한 의원내각제를 영위하며 제도적으로 보장받고 있으나, 중화민국의 일부 지역들은 특수 자치구역으로서[21], 더욱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받는다.
자치구역들을 두가지 분류로 나누는데, 첫번째는 자치공화국, 두번째는 특별행정구역, 세번째는 소수민족 자치구이다.
자치구역들을 두가지 분류로 나누는데, 첫번째는 자치공화국, 두번째는 특별행정구역, 세번째는 소수민족 자치구이다.
- 자치공화국 : 내몽골 자치공화국, 닝샤 자치공화국, 신장 자치공화국, 광시 자치공화국, 만주 자치공화국, 대만 자치공화국
이들은 중화민국 헌법에 기반한 자체헌법을 제정하며 민국법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치법을 작성한다. 일명 나라 안의 나라 방침에 따라서 이들은 중화민국 헌법상의 기본권에 저촉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 한 구역내에서 국가급의 위상을 갖는다. 이들은 자체 국기를 제정하며, 연방기와 함께 자체 국기를 계양한다. 현실 세계에서 중화인민공화국-홍콩/마카오처럼, 이러한 자치공화국들은 중화민국 '본토'와 별개의 여권을 발행하고, 일부 국제기구에서 중화민국과 별도의 명의로 활동한다.[22]
만주 자치공화국의 국기 |
- 만주 자치공화국: 신 만주 공화국이 중화민국에 병합된 후, 약 1억 인구의 만주인들을 중화민국에 그대로 병합시키기가 어렵다는 문제로 인하여 자치공화국화 되었다. 만주 자치공화국은 중화민국의 여러 자치공화국 중 가장 최근에 생겨났고, 가장 거대한 자치공화국이다. 만주 자치공화국에서는 표준중국어 이외에, 만주어가 복수 공용어로 공식 지정되어 있으나,, 이는 신 만주 공화국이 자신들이 '중국의 일부'임을 거부하고 '만주에 살던 제민족의 후예'임을 내세워, 만주어를 공용어 중 하나로 내세우고, 만주족 문화에 대한 국가적 연구를 시행한 영향일 뿐, 실제로는 만주어를 입말로 구사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실질적 의미는 없다시피하다. 만주 자치공화국에 만주어가 공용어인 이유는, 신 만주 공화국이 만주어를 공용어로 지정했다는 것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대만 자치공화국의 국기[23] |
- 대만 자치공화국: 대만은 19세기 말부터 일본의 식민지였으나, 이 세계관에서도 2차대전 종전 후 중화민국령으로 반환되었다. 그러나 대만 거주민들이 비교적 일본의 식민통치에 우호적이었고, 이로 인하여 '친일 관료 청산', '대만 성의 국민대회 설치'등의 문제가 대만 현지 거주자들에 의해 난항을 겪자. 중화민국 정부는 '대만 성'에 대한 직속 통치(다른 성과 동등한 행정구역화)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일제시대부터 유지된 현지인 관료 조직을 유지하고, 자체적인 제도를 유지하는 자치공화국을 두었다. 대만 자치공화국에는 복수 공용어가 지정되어 있지 않으나, 대만 원주민들은 대만어를 복수 공용어로 지정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대만 자치공화국 및 중화민국 본토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현실 세계의 대만이 20세기 중후반에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룬 것처럼, 가상지구 알파의 대만 자치공화국도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며, 자치공화국들 간에 경제력 규모를 비교했을 때 대만은 가장 부유한 자치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인 개개인의 삶의 질을 비교했을 때, 대만인의 삶의 질이 평균적으로 상위권에 위치해 있다. 이런 점으로 인하여 대만은 어느 자치공화국보다도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크고 대만이라는 자치공화국의 자체적 위상도 높다.
그 예시 중 하나로, 가상지구 알파 세계관의 중화민국은 1964년에 상하이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나[24], 2008년에는 대만 자치공화국에서 적극적으로 올림픽을 유치하여 2008년에 다카오 올림픽을 개최하는 데 성공하였다.[25] 이 기세에 힘입어 자치공화국이 개별 명의로 출전 가능한 월드컵 대회를 노리고 대만 자치공화국은 대만 단독으로 월드컵을 개최하는 것까지 노리고 있다.
신장 자치공화국의 국기 |
내몽골 자치공화국의 국기 |
닝샤 자치공화국의 국기 |
- 닝샤 자치공화국: 영하 자치공화국은 현실의 닝샤 후이족 자치구와 거의 비슷한 위치, 비슷한 영역을 가진 자치공화국으로, 회족 주도의 자치구역이다. 회족은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한족과 거의 같으므로, 닝샤 자치공화국에는 표준중국어 이외의 공용어가 지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슬람교도가 많은 영하에서 종교적 목적에서 아랍어는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광시 자치공화국의 국기 |
- 특별행정구역 : 홍콩과 마카오등은 외국들에게서 비교적 최근 반환된 영토이다. 이들은 비록 중앙정부의 영향이 짙게 미치는 지리에 자리잡고 있고, 본토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나 행정상의 절차와 상당히 이질적으로 변한 문화, 그리고 경제적 격차등으로 인해서 특별행정구역으로써 존재한다. 이들은 일종의 '특별시장'격인 행정청장을 직선제로 선출하는데, 행정청장 제도는 독자적인 외교권과 군통수권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대통령제 국가와 유사한 면이 있다. 특별행정구역 내에서는 중화민국 헌법과 민국법을 따르며 국민대회에 대표를 보낸다. 그러나 직접적인 중앙정부의 직할 시도는 엄금되어 있으며 중앙정부의 경제정책과 같은 정책들에 영향받지 않고 별도의 복지와 교육을 운영한다. 그러나, 이 세계관 중화민국의 특별행정구역은, 현실의 홍콩과 마카오가 중국과 별도의 여권을 발행하고, 국제기구 에서 중국과 분리된 별도 명의로 활동하는 수준의 자치권은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가상지구 알파의 중화민국은 영국, 포르투갈 등과 냉전으로 대립하는 세력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비록 국경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언어적, 문화적 동질성으로 인해 홍콩에서 제작된 홍콩 영화나 홍콩 내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들이 중화민국 본토에 일찍이 수출, 유입되었고[26], 중화민국과 홍콩-마카오의 왕래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으며, 결정적으로 두 나라 모두 민주주의 체제와 일정한 시장경제 체제를 택했다는 큰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현실의 중국-홍콩처럼 명백한 이질적인 체제가 한 국가 내에 공존하는 '일국양제' 같은 모델이 필요가 없었고, 현실보다 낮은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합의가 되었기 때문이다.
- 소수민족 자치구 : 자치공화국급으로 편성하기 힘든 소규모 소수민족들에 대해서 더 광범위한 자치권을 인정하여 편성된 자치구들이다. 대표적으로 연변 조선인 자치구등이 있으며 이들은 특별행정구역보다는 일반적으로 낮지만 성보다는 높은 자치권을 받는다. 직선제로 자치장을 선출하며 별도로 의원들을 뽑아 국민대회에 보내고 중앙정부의 정책에 대한 거부권과 특별보조금수여권, 자체문화정책권을 가질 수 있다.
- 조선족자치구: 조선족자치구는 현실의 간도 내지는 연변 지역에 위치한 중국조선족의 자치구이다. 지도상으로 그렸을 때 조선족자치구는 만주 자치공화국을 사이에 두고 중화민국 '본토'에서 사실상의 월경지인데, 이렇게 특이한 배치가 생겨난 데는 역사적인 사유가 있다. 연변지역은 가상지구 알파 세계관의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만주 소비에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중국조선족 또한 '만주 소비에트인'이라는 국적을 부여받게 되었다. 만주 소비에트 정권 하에서는 공산주의적 이념 하에 명목상으로 소수민족인 조선족 또한 '노동자 인민'으로 다수파를 차지하던 중국인-한족과 비교적 동등하게 대우받았으나, 만주 소비에트 정권이 붕괴되고 새로 권력을 잡은 신 만주 공화국의 군사 정권은, '만주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극우 민족주의적 성향을 내세우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하여 소수민족이던 조선족들은 공직에서의 노골적인 배제와 숙청, 사회적인 배척, 만주의 중국계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린치 등 생존적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만주 소비에트 공산정권 시절에도 현실의 탈북자에 해당하는 '탈만자'들이 존재했고[27] 그들 중 조선족 출신들은 주로 민족적으로 동질감이 있는 한국행을 택했으나, 냉전 시대의 탈만자는 주로 반공주의자, 또는 내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자들이었다. 그러나 냉전 이후 신 만주 공화국 시기에는 이와 같은 만주 민족주의 극우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생존적' 탈출자들이 탈만자의 주류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신 만주 공화국이 붕괴되고 중화민국 산하의 '만주 자치공화국'이 될 때, 조선족 자치구의 처우는 대한민국 및 국제 인권단체들의 목소리에 의해 주된 화두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중화민국 정부가 내세운 3가지 선택지는 '1) 간도 지역은 만주 자치공화국의 영토로 잔존하며 만주 자치공화국의 다른 거주자들과 완벽히 동일한 권리를 받는다', '2) 간도 지역을 대한민국의 영토로 할양한다' '3) 간도 지역을 중화민국 산하의 소수민족 자치구로 지정하여, 만주 자치공화국에서 분리된 행정단위로 삼는다' 였으며, 이 중 3번 선택지가 받아들여져 연변 지역은 만주에서 분리되 중앙정부의 일정한 통제를 받는 소수민족 자치구로 변경되었다.
이렇듯 자치구역들은 헌법 자체의 부칙에 의해 기존 헌법에 영향받지 않는 면이 있으나 중화민국의 헌법중 최고조항 상 모든 자치구역들은 삼민주의에 따른 민주적인 체제를 따를 것이 의무이다.
6. 국기와 연방기[편집]
이 세계의 중화민국은 '국기'와 '연방기'가 별도로 존재하는데, 중화민국 '국기'는 현실 역사의 중화민국에서 국민정부 시기 이후 제정된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으나, 국기와 별개의 '연방기'도 공식적으로 청천백일만지홍기와 공존한다. 중화민국의 연방기는 실제 역사에서 중화민국 초창기, 북양정부 시절 사용되던 오색기 중앙에 국민당의 청천백일 문양이 자리잡은 형태이다. 가상지구 알파의 세계관에서도 중화민국 탄생기에는 민족단합과 광범위한 중화권을 상징하기 위해서 오색기를 사용하였다가, 티베트와 몽골이 독립하고 신강과 내몽골이 군벌의 손에 놓여 남경의 민국정부의 손길이 닿지 않자, 국부 쑨원의 주장으로 삼민주의중 민족주의에 따라 비록 민족이 다르게 구분될지라도 그들은 모두 같은 중국인이며, 결국 한족에 흡수될 것이라 하여 청천백일만지홍기로 국기를 변경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이 북벌과 지방유력자 지식인들의 봉기로 신강과 영하, 내몽골, 회족 구역들을 수복함에 따라 중화민국 내 민족간의 갈등 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중국 내 제민족의 화합'을 상징하는 오색기를 다시 되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었고,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중앙정부의 상징기인 중화민국 '국기'로 유지하되 오색기에 삼민주의를 상징하는 청천백일 문양을 더한 '연방기'라는 형태로 재도입하였다.
중화민국의 국기는 '중화민국 중앙정부 관할'로 여겨지는 성과 특별시 지역만의 깃발이라면[28], 중화민국의 국기는 국민대회가 소집되는 '중앙정부 관할영역' 이외의 자치공화국까지 모두 포함하는 연방 중화민국 전체를 상징하는 깃발이다 현실세계에 비유하자면 한 가족이 있는데, 독립 안한 자식들에게 집의 방이 배정된 형식이 성이나 특별시고, 독립해서 새집살림을 차린 자식들은 자치공화국과 같은 자치구역들이니 가능한 일이다. 타 국가의 사례에 비교하자면 청천백일만지홍기는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의 국기로, 중화민국 연방기는 연합 왕국의 국기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29]
중화민국의 일반 지방자치구역(성과 특별시) 관공서에는 중화민국의 국기로써 중앙정부를 상징하는 청천백일만지홍기가 게양되고(해당 지역의 성법에 따라서 성/특별시의 상징기가 동시에 게양될 수도 있다), 중화민국의 특수 자치구역(자치공화국/특별행정구역/소수민족 자치구)에의 경우에는 각 특수자치구역의 깃발과 중화민국 연방기가 동시에 게양된다. 그리고 중화민국 중앙정부의 기관(각 정부청사, 입법원, 형법원과 민국법원 등)에는 중화민국 중앙정부의 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와 중화민국 연방기를 동시에 게양한다.[30] 중화민국의 주요 경제 도시 중 하나이자. 일자리를 찾아서 여러 자치공화국, 소수민족 자치구에서 이주해온 타 민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상하이에서는, 상하이 국민대회의 다수파인 진보주의자들의 표결에 의해 '상해 특별시의 상징기 + 중화민국 중앙정부의 관할을 나타내는 국기 + 상해에 거주하는 여러 민족들의 화합의 상징인 연방기' 모두를 게양해야 한다는 성법이 제정되어 있다.
중화민국 초창기에는 중화민국 국민혁명군에서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사용하였으나, 중화민국이 한족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들의 국가이고, 국민혁명군 내에 위구르인, 몽골인 등 여러 민족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중화민국 본토'만의 상징을 기타 민족 병사들에게 충성의 상징으로 내세우기에는 부적합하다는 문제 끝에, 중국군 내에서는 오직 연방기만을 게양하고 있다.[31] UN 등의 전연방이 하나로 참여하는 국제기구에서도 중화민국을 대표하는 깃발로서 연방기를 내세우고 있어, 현재의 중화민국에서는 중화민국 연방기가 국기보다 더욱 높은 위상의 깃발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보수-수구주의자들이나 중앙주의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는 점은 여전히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는, 올림픽처럼 중화민국이 '단일 국가'로 참가하는 경우에는 연방기를 사용하나, 월드컵의 경우에는 '중화민국 명목상 중앙정부 권역'와 각 자치공화국들(자치공화국은 중화민국 본토와 별개의 여권을 발행하며, 일부 국제기구에는 중화민국과 별도로 활동할 만큼의 자치권을 보장받는다)이 별개로 참전할 수 있어서, 이 경우에는 '중화민국' 대표팀은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사용하고, 각 자치공화국 대표팀은 자치공화국의 상징기를 사용한다.
7. 종교[편집]
중화민국 헌법은 근대국가 체제를 받아들여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중화민국 정부에서 조사했을 때, 중화민국 국적 보유자들 중 약 35%는 자신을 무종교 인으로 밝혔다. 그러나 중화민국 전체에 완벽한 세속주의가 자리잡은 것은 아니며,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져 오는 민간신앙의 영향력은 막대하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업소에서 무속신앙적인 상징물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불교는 중화민국에서 막대한 민간/정치/문화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종교 중 하나이며, 상당수의 중화민국인들은 자신을 불교도라고 지칭하였다. 이 세계관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전통 사찰들과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불교는 중국의 민간신앙에도 암암리에 접합되어 있다. 중화민국 내 불교도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오랫동안 정착해 있던 대승불교 계열이지만, 내몽골 자치공화국이나 티베트에서 이주한 사람들, 동남아시아에서 이주한 사람들 위주로는 상좌부 불교나 티베트 불교 공동체와 사찰이 형성되어 있다.
이슬람교는 중화민국의 영하 자치공화국, 신강 자치공화국에서 세가 강하며, 회족과 위구르족이 일거리를 찾아 대도시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대도시에서도 이슬람교도들이 소수 존재한다. 하지만 이슬람공포증 정서의 문제는 중화민국 내에서도 존재하며, 이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와 결탁하여 중화민국에 테러를 일으킬 것이라는 공포의식은 중화민국 내 주요한 갈등요소이며 중앙정부에게 매우 난처한 사회문제로 남아 있다.
기독교는 상대적으로 중화민국 내 소수종파이지만, 현실의 중화인민공화국의 반기독교 정책과 비교한다면 가상지구 알파의 중화민국에서는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으며, 이 세계관의 중화민국은 교황청과 공식적인 수교 관계를 맺었고, 가톨릭 교회에는 중국인 추기경들도 존재한다. 홍콩과 마카오에는 기독교인 신자의 비율이 매우 높으며, 대한민국, 미국 등 기독교 국가에서의 선교 열풍으로 인하여 젊은 층 위주로 기독교인의 인구 비율은 유의미하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확장에 대해서 불교계가 극히 반감을 가지고 있고, 이슬람 계열과도 충돌이 생겨나는 등 이 점에 있어서도 잠재적 국가 불안 요소로 지적받고 있다. 또한 근대화시기부터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택하고 국부 쑨원과 그 장인, 부인인 쑹칭링까지 모두 기독교도이었기에 지식인과 정치인중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중화민국 정부에서 조사했을 때, 중화민국 국적 보유자들 중 약 35%는 자신을 무종교 인으로 밝혔다. 그러나 중화민국 전체에 완벽한 세속주의가 자리잡은 것은 아니며,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져 오는 민간신앙의 영향력은 막대하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업소에서 무속신앙적인 상징물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불교는 중화민국에서 막대한 민간/정치/문화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종교 중 하나이며, 상당수의 중화민국인들은 자신을 불교도라고 지칭하였다. 이 세계관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전통 사찰들과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불교는 중국의 민간신앙에도 암암리에 접합되어 있다. 중화민국 내 불교도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오랫동안 정착해 있던 대승불교 계열이지만, 내몽골 자치공화국이나 티베트에서 이주한 사람들, 동남아시아에서 이주한 사람들 위주로는 상좌부 불교나 티베트 불교 공동체와 사찰이 형성되어 있다.
이슬람교는 중화민국의 영하 자치공화국, 신강 자치공화국에서 세가 강하며, 회족과 위구르족이 일거리를 찾아 대도시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대도시에서도 이슬람교도들이 소수 존재한다. 하지만 이슬람공포증 정서의 문제는 중화민국 내에서도 존재하며, 이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와 결탁하여 중화민국에 테러를 일으킬 것이라는 공포의식은 중화민국 내 주요한 갈등요소이며 중앙정부에게 매우 난처한 사회문제로 남아 있다.
기독교는 상대적으로 중화민국 내 소수종파이지만, 현실의 중화인민공화국의 반기독교 정책과 비교한다면 가상지구 알파의 중화민국에서는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으며, 이 세계관의 중화민국은 교황청과 공식적인 수교 관계를 맺었고, 가톨릭 교회에는 중국인 추기경들도 존재한다. 홍콩과 마카오에는 기독교인 신자의 비율이 매우 높으며, 대한민국, 미국 등 기독교 국가에서의 선교 열풍으로 인하여 젊은 층 위주로 기독교인의 인구 비율은 유의미하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확장에 대해서 불교계가 극히 반감을 가지고 있고, 이슬람 계열과도 충돌이 생겨나는 등 이 점에 있어서도 잠재적 국가 불안 요소로 지적받고 있다. 또한 근대화시기부터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택하고 국부 쑨원과 그 장인, 부인인 쑹칭링까지 모두 기독교도이었기에 지식인과 정치인중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상청교의 상징[32] |
상청교는 가상지구 알파 세계관에서 발흥한 신흥 민족종교이며, 중국의 도가 사상과 현대의 철학, 그리고 기독교적 교리가 혼합된 종교이다. 상청교는 중화민국 내에서 수천만의 신도를 두고 있는 큰 종교 중 하나이며, 교단 내의 조직력은 상당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조직력을 기반으로 상청교는 교단에서 발원한 정당인 태화당을 두고 있으며, 일부 성의 국민대회에서 주요 세력을 차지하고 있고, 입법원에도 의석을 배출한다.[33] 그러나 중국 내의 무신론자들과 세속주의 정치세력은 상청교가 중화민국의 헌법 정신을 해치며, 즉각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정계를 떠날 것을 외치고 있다.
또한, 종교인 통계를 낼 때 자신의 종교를 유교라고 말하는 유림 계층들이 있다.
8. 가상지구 알파의 표준 중국어 표기법[편집]
현실의 중국어 표기법에서는 중국 내 기타 소수민족의 이름들도 모두 '소수민족어 이름을 표준중국어 표기로 옮긴 것의 발음을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함'을 원칙으로 하지만, 가상지구 알파에서는 중국어 방언을 제외한 다른 언어로 된 이름의 경우, 해당어의 발음을 한국어로 옮겨 적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현재 가상지구 알파의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중화민국 거주 민족들의 언어에 대해 표기법을 마련하지 못했으며, 여전히 일부 민족의 명칭은 중국어에 기반해 표기하고 있는 상황이다.[34]
8.1. 표기 예시[편집]
가상지구 알파 내에서의 중화민국 내 고유명사 표기와, 현실에서의 국립국어원 표기법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한자 표기 | 원어 | 현실의 표준 중국어 표기법 | 가상지구 알파에서의 표준 표기법 |
乌鲁木齐 | 위구르어 | 우루무치 | 위륌치 |
古力娜扎尔·拜合提亚尔 | 위구르어 | 귈네제르 베흐티야르 | |
呼和浩特 | 몽골어 | 후허하오터 | 후흐호트 |
白青刚 | 한국어(중국조선족) | 바이칭강 |
9. 역사적 사건[편집]
9.1. 1911년[편집]
1911년 중국의 정세는 들불같이 들끓는 불만들과 그리고 중국을 외세로부터 지켜야한다는 민족주의 열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이런 와중 1911년 개혁 청조는 정부 관료의 대다수를 만주족, 그것도 황족으로 채워 버려 입헌파를 비롯한 많은 개혁파 신사들을 실망시켰다. 이 정도였다면 청조가 쉽게 무너지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철도였다. 우전부대신 성선회는 철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는데, 철도가 분산되고 나뉘면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이는 즉슨 현 상태의 철도들은 국력약화를 불러온다는 것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지어지고 있던 철도들은 중국의 상상을 초월하는 넓이에 고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상류층부터 최하층민들의 재산까지 긁어모아 꽤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 물을 끼얹는 행동이 있었으니, 앞서 말한 철도를 분산을 국력약화라 본 성선회가 결심을 한 것이다. 국유화된 철도는 중국의 국력강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성선회는 즉시 국유화를 추진하게 된다. 발상은 좋으나 문제는 중국의 민영 철도는 민족자본의 총집합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었다. 단숨에 민족자본이 날아가 버리고, 투자자들의 재산도 몇십년은 걸려야 다 완성될 것 같은 철도를 전부 완성하였을 때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종이조각같은 증서를 받음과 함께 날라갔다.
거기에 청조는 외세로부터 차관을 엄청난 담보들과 함께 들여왔다. 온갖 국가기반,광산,기타등등이 저당잡힌 꼴을 본 중국인들은 성선회가 나라를 팔아먹고 있다는 겉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이에 사천성에선 대규모 시위와 폭동이 발생하였으며 사천의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호북성, 무창(우창, 武昌)의 군대를 청조는 사천으로 긴급 파견했고, 이는 우창에 있던 혁명파들에게 최고의 기회였다.
마침내 1911년 10월 10일 무창의 군대와 함께 혁명파 엘리트들의 주도로 중화민국이 건국되고 청조에 대한 대대적인 봉기가 시작되었다. 이 날은 중화민국의 건국절로 기념된다.
그러나 보수적 신사층들은 무창으로 집결했고, 손문의 동맹회는 양자강 하류지역의 공화파 대표들을 난징에 집결시켰다. 이 두 중심 모임들은 논쟁을 벌였고 단합은 요원했다.
강력한 중앙정부와 대통령중심제를 지닌 국가를 원하던 손문의 꿈은 어쩌면 이때부터 연방적, 지방자치적으로 변했을 지도 모른다. 비록 그 의도가 공화파, 좌파 주도의 실력양성 후의 보수세력 일소를 위한 보수세력 떼어놓기일지 몰라도... 이상주의자 손문은 미래에 건국될 가장 풍요로운 중국을 위해 지금 당장의 중국중 일부를 포기했던 것일지 모르고, 지금 당장의 중국 지배층들의 명목상이나마의 통합을 위해 그의 이상의 실현을 조금 늦췄을지 모르겠다.
9.2. 1912년[편집]
- 남북협상
신해 혁명은 비록 내부에서 분열이 지속되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14개주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으며 성공했다. 혁명가들이 부족했음에도 말이다!
분열과 군벌들의 난립에도 불구하고 중화민국은 일단은 남부 14개주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 남부 14주 지역들을 기초로 개최된 중화민국 연합회의에서 14개성중 13개성의 찬성으로 중화민국은 임시 대총통 즉 국가원수를 손문에게 부탁하였으며 손문은 허락하였다.
손문이 남부 14개성에서 지지를 얻는 동안 청조는 불만 가득한 민심을 진정시키지 못하며, 혁명파는 점점 득세해가고 있었다. 혁명세력들에 의해 난징까지 점령된 과정을 본 진압군 수장 원세개는 항전 의지를 잠시 내려놓는다. 이 시기에 양자강 인근 지역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던 영국은 이런 내전 상황이 더 오래 지속되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혁명세력과 원세개 세력의 화의를 주선했다.
앞서 말했듯이 임시 대총통 즉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국가원수에 선출된 손문은 원세개와의 협상에서 조금 유하게 대응할 의지가 있었고 이는 혁명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 사실을 파악한 원세개는 손문이 타협안에서 제시한. 원세개를 임시 대총통에 추대한다는 제의를 거절하고 보수적인 입헌파들이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 생각하여 중화제국의 황제위를 요구한다. 그러나 손문을 포함한 공화국을 꿈꾸는 중화민국의 혁명파들은 분개하였으며 입헌파들 또한 원세개의 제안에 냉소와 냉대를 아끼지 않았다.
입헌파들의 눈치를 살펴본 군벌들은 전통적으로 사회안정을 추구한 자본가들과 지주 등 당시 중국의 자본 세력들이 원세개가 민중 그리고 혁명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 원세개를 지지하지 않는다 보고, 오히려 반 원세개를 내세우게 되었다/
- 제 1차 무창전투
지방의 군벌들은 진지하게 전투에 임할 생각은 없었으나 적어도 원세개가 선제공격을 행하진 않을 것이란 판단에 각자의 군세를 무창으로 집결시켜 무력시위를 하기로 결의한다. 이로써 무창으로의 행진이 거행되었다. 군부 엘리트들의 주도로 군벌들은 조금씩이나마 속속 무창에 모이기 시작했고 이들이 모이자 연합군은 큰 군세를 이룬다. 그러자 중화민국 정부측과 손문은 의기양양해져 원세개와의 협상을 파기하였고, 이에 분노한 위안스카이는 무창으로 북양 군대를 진군시킨다. 한구(漢口, 한커우)가 함락되고 한양에서 혁명군들 위기에 처했다. 원세개는 한양에서 싸우고 있는 전위부대와 합류하지 않기로 하고 무창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의하여 이에 무창 전투가 발발하게 된다.
무창에서는 제각기 독립적인 군벌이 모인 탓에 지휘권을 일원화하지 못하고, 단합력이 지극히 약한 상태에서 상당히 풀린 분위기로 시가지를 노다니고 있던 군벌들의 군대가 있었고 이들은 북양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하며 대응했다. 본래 병력대로면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지만, 기적적으로 조금씩이나마 군벌들은 전열을 갖추고 반격하였고. 원세개가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던 군벌들을 포섭하지 않은 채 공격을 행하였기에 큰 희생을 치루고 그를 막을 수 있었다. 더불어 난징에서 한양으로 급히 파견된 의용군이 원세개의 본군이 무창으로 빠져 생긴 틈으로 한양을 공격하던 북양 군대를 급습하는데 기적적으로 성공했고, 한양에서조차 원세개의 진압군은 패배한 채 후퇴했다.
중화민국은 이로써 무창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영국 자본이 대량으로 있던 무창-한구-한양이 큰 피해를 입고 시가지가 초토화됨에 따라 영국 또한 원세개를 위험 인물로 판단했다.
- 원세개의 급사
무창-한양에서의 있을 수 없는 패배를 전해 들은 원세개는 분개했고 이에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혁명군을 치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원세개는 북경에서 후속부대를 이끌고 출발, 곧 하남에 도착하였으나 하남에서 노령의 몸으로 급히 달려와 지친 몸 상태에서 먹은 여름 식사가 문제가 되어 배탈이 나게 되고 이에 제 2차 침공은 취소된다. 원세개와 그의 군대는 북경으로 급히 이동했고, 얼마 후 그는 염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의 급작스러운 사망은 가상지구 알파의 중국사가 현실과 매우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 중국 국민당 결성
중국의 지식인, 정치인, 혁명가들은 거대한 반동세력에 맞서 대규모의 단합을 이뤄야한다는 것을 통감했고, 이는 동맹당을 전신으로 한 중화 국민당의 탄생에 기여했다. 혁명가들과 서구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은 상당한 위협을 지역 신사층들로부터 받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의 보수성과 당대 중국 사회의 악습들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혁명의 세력을 불리고 크게 보이게 할 필요가 대두되었고 그 때문에 국부 쑨원을 중심으로 동맹당을 전신으로 한 국민당을 출범시키게 된다. 국민당은 모든 중국 혁명 지지 세력들의 연립정권으로서 서구식 보수주의자부터 공산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까지 합류했다.
- 삼민헌법 제정
난징에 정부를 꾸린 후 혁명가들의 최대관심사는 헌법에 쏠려 있었다. 새 나라 중화민국의 헌법은 새로운 가치들과 인간의 권리를 중점으로 쓰여져야했다. 하지만 문제는 향토세력들이었다. 반인권적이고 권위적인 그들은 일단 혁명이 성공하자 국민당 정부에 협력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인식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중앙정부는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의 관할권을 포기하고 대규모의 자치권을 헌법에 넣어 주들의 자치를 보장하게 되고 그들의 힘이 뻗히는 곳들까지만 직할령으로 형성하게 된다. 이로 인해서 지방에선 혁명이 오고 황제 대신 중앙정부 국민당이 통치자로 올랐으며 근대적 지식인들과 장발족들이 고개를 뻣뻣히 들게 되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큰 혜택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요인에 의해 혁명에 대한 열광과 두려움은 커서 어수룩한 사람들이 벌벌 떨고 지역 유지들은 국민당에 대한 협력을 맹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의 상황을 루쉰은 아Q정전을 저술하여 서술한다.
9.3. 1913년[편집]
- 은 수출 특수 본격화
1913년 서구는 멕시코의 새로운 대통령인 마데로를 암살하는데 일조했고 그 결과 멕시코의 대통령과 부통령이 동시에 암살되는 참극이 일어나게 된다. 곧 연방군 지도자인 우베르타가 밀약을 통해 대통령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새로운 미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은 우베르타를 도와준 미국 대사를 경질하고 우베르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또한 멕시코의 국내 소요로 인해서 은 생산이 불투명해질 가능성이 보임에 따라서 서구는 은 공급 부족의 위협을 받게 된다. 은광산이 폐쇄되는 일마저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당시 중화민국을 비롯한 중국의 정부들은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중화민국에서 미국인 자본가들의 실버러쉬가 불거짐에 따라서 중화민국의 경제는 상승 곡선을 타게 된다. 중국 화폐의 가치가 높아짐에 따라 자본가, 국영기업들은 시설 설비를 외국에서 보다 쉽게 수입해올 수 있었고, 서구 사치품들로 인한 무역적자가 줄어들었으며, 은의 수출로 광산업자, 유지, 정부, 광업공사들은 상당한 외화를 획득했다. 또한 체계적인 중화민국 중앙은행이 설립되고 합리적인 서구 은행들이 중화민국 자본가들에 의해 중화민국으로 유치되면서 저축과 대출은 안정화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자본가들은 상당한 빚을 떠안고 살아야했고 상당수의 설비를 국가, 은행, 공기업, 타자본가들로부터 빌려 써야했어서 한계가 있었다.
9.4. 1914년[편집]
포간도호 법안 제정
9.5. 1917년[편집]
- 1차세계대전 경기특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국에서 유통되던 외제품들은 전쟁 수행을 위해 자국으로 향했고, 중국의 경제는 이제 중국 국산품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 자본가들과 공기업들은 큰 수익을 얻게 되어 투자가 증대되었고, 온갖 설비들은 늘어났다. 또한 전선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들을 수출하고 1차세계대전에 중화민국 정부는 영프러의 압력에 따라 협상국으로 참전하고 비전투인력들을 파견함에 따라서 중화민국의 위상과 대외수출 수입은 높아졌다.
북벌 개시
제 2차 우창전투
개봉 진공작전
손문 서거
삼민주의 내각제헌법 제정
국민당 좌우대립 사건
제 1 중화민국 내각총선
국민당 민정기 논란
3월 송경령 단결 호소 연설
중미 곡물무역협약 체결
10. 외교 요약[편집]
혼란스러운 국내정세와 겹친 어중간한 외교적 위치, 그러나 동아권의 지도국이자 세계적인 물주
10.1. 서구[편집]
중화민국은 자본구성중 해외자본 특히 영미 자본의 비중이 높은데다가 북중국 대기근동안의 원조와 2차대전 이전부터 1950년대까지 지속된 군사고문단을 비롯한 군사지원, 그리고 미중 곡물협약으로 인해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하지만 2차대전이후 좌파정권들이 들어설 때마다의 중화민국의 미묘한 국제에서의 자리매김, 우파정권들이 들어설 때마다의 미중 곡물협약 폐기 논란, 소련과 붕괴후 러시아의 중화민국에 대한 친선 노력들로 인해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의 신뢰를 잃고 있으며 중화민국측도 중화민국 없인 제 1세계의 비교적 저물가 또한 없기에 배째라는 식으로 나서 그리 큰 관계 진전은 없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서구의 가장 큰 곡물시장으로서 위험부담 없는 중화민국 연방곡물준비제도의 대규모 선물매입을 통해 막대한 양의 곡물을 사들이고 있으며 서구는 이를 통해 상당한 이득과 사회안정을 얻고 있다. 게다가 중화민국은 상당한 양의 서구권 국채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는 무시 못할 수준이다. 그리고 세계적인 저물가 현상을 조정하고 있는 중화민국 공업은 서구에게 있어서 매력적이면서도 필수적이기에 서구와 중화민국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다.
10.1.1. 중성관계[편집]
상호적인 물주관계
성화민국은 중화민국의 최대곡물수입국으로서 중국의 수많은 노동자들을 순식간에 기아에 시달리게 하고 중국이 전시배급제에 준하는 식량배급제를 펼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중화민국이 그로써 붕괴할 위협에 처하면 중화민국은 대구,대아,대러 곡물수입을 최대한도로 늘리고 그에 의존하게 될 것이고 성화민국 국채에 쏟은 돈을 빼서 국내 전반 산업의 국영화와 전시경제화에 쏟거나 타국 국채나 금, 달러등을 대량매입하는 등 국내안정에 전력을 다하려 노력할 것인데다가 중화민국이 선도하는 저물가 공업의 쇠퇴를 불러 일으킬 것이므로 성화민국에도 상당한 타격이 가해져 그리 좋지만은 않다. 이에 성화민은 중화민국에 나라의 존망이 흔들릴 정도의 위협은 가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
중화민국 입장에서 성화민국은 주요 고객이다. 중화민국의 공업은 상당한 대외저가대량수출을 행하고 있으며 거대한 소비능력을 갖춘 성화민국은 그런 중화민국의 주요 고객으로서 중국의 경제의 한 면을 꽉 잡고 있다. 그 돈으로 미국의 국채를 매입해 성화민국의 무역적자를 메워주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자국만의 생존시나리오가 가능한 미국보단 대외의존 없인 자국민들의 대규모 사망이 예약되어 있는 중화민국이 아무래도 성화민국에 밉보이고 싶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중에 정찬영이 성화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성화민국은 딜레마에 빠졌는데, 중국에서 미국 국채를 사지 않은다면 감세가 불가능해지고 곡물을 사지 않으면 성화민국에서의 농민들의 지지와 경제가 큰 위협을 얻게 된다. 그러나 반중이민정책만큼은 그대로 실행될 가능성이 높은데 중화민국에서 의도적으로 자국의 폭발적인(국가를 폭발시킬 정도의) 인구들을 줄이기 위해 빈민층의 해외이민을 무조건 장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성화민국에는 매우 많은 중국인들이 들어왔고 이에 성화인들이 위협을 받아 정찬영의 반이민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성화민국은 중화민국의 최대곡물수입국으로서 중국의 수많은 노동자들을 순식간에 기아에 시달리게 하고 중국이 전시배급제에 준하는 식량배급제를 펼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중화민국이 그로써 붕괴할 위협에 처하면 중화민국은 대구,대아,대러 곡물수입을 최대한도로 늘리고 그에 의존하게 될 것이고 성화민국 국채에 쏟은 돈을 빼서 국내 전반 산업의 국영화와 전시경제화에 쏟거나 타국 국채나 금, 달러등을 대량매입하는 등 국내안정에 전력을 다하려 노력할 것인데다가 중화민국이 선도하는 저물가 공업의 쇠퇴를 불러 일으킬 것이므로 성화민국에도 상당한 타격이 가해져 그리 좋지만은 않다. 이에 성화민은 중화민국에 나라의 존망이 흔들릴 정도의 위협은 가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
중화민국 입장에서 성화민국은 주요 고객이다. 중화민국의 공업은 상당한 대외저가대량수출을 행하고 있으며 거대한 소비능력을 갖춘 성화민국은 그런 중화민국의 주요 고객으로서 중국의 경제의 한 면을 꽉 잡고 있다. 그 돈으로 미국의 국채를 매입해 성화민국의 무역적자를 메워주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자국만의 생존시나리오가 가능한 미국보단 대외의존 없인 자국민들의 대규모 사망이 예약되어 있는 중화민국이 아무래도 성화민국에 밉보이고 싶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중에 정찬영이 성화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성화민국은 딜레마에 빠졌는데, 중국에서 미국 국채를 사지 않은다면 감세가 불가능해지고 곡물을 사지 않으면 성화민국에서의 농민들의 지지와 경제가 큰 위협을 얻게 된다. 그러나 반중이민정책만큼은 그대로 실행될 가능성이 높은데 중화민국에서 의도적으로 자국의 폭발적인(국가를 폭발시킬 정도의) 인구들을 줄이기 위해 빈민층의 해외이민을 무조건 장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성화민국에는 매우 많은 중국인들이 들어왔고 이에 성화인들이 위협을 받아 정찬영의 반이민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10.2. 중-한 관계[편집]
항일전쟁으로 회복된 전통적 우방
대한제국의 1910년 멸망은 중국에 큰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아니 기실 새로운 일만은 아니었다. 청일전쟁의 패배와 같은 충격적인 일들은 수차례 일어났고 전통적인 우방인 조선의 멸망은 그에 막타를 가했다. 청조의 위신 저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리고 이는 중화민국 성립후 많은 정치인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다. 중화중심주의는 광범위한 의식이었고 이때문에 '전통적인 중화중심 아시아 회복'과 '제후국 조선의 해방'이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수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에서 유학을 했었고 중일 관계는 북부의 난립하고 있는 군벌들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이에 중화민국은 직접적인 개입은 불가했다. 대신 중화민국 정부는 중화민국 영역내의 독립운동가들을 직접 지원하고 한국인 지식인들을 동지로서 대우했다. 상하이의 중국령내에서는 한인들이 모여사는 곳들이 생길 수 있도록 행정적 지원이 더해졌고 일본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했다. 이는 중일관계에 큰 악영향을 줄 수 있었으나 일본의 야욕을 눈여겨보던 미국의 외교적 지원과 영일동맹과 영중조약으로 인한 '내 친구의 친구는 친구' 논리, 그리고 중화민국 정부의 일본의 만주와 베이징권 영향력 확대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묵인과 그에 대한 일본의 보상인 '중화민국 내 반일행위에 대한 일시적 묵인'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로 가상지구 알파 세계관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영토 내에 존재했으며, 윤봉길 의사의 폭탄테러에 대해서도 중화민국 정부는(비록 당시의 총통이 장제스가 아니었지만) 그의 항일 투쟁에 대해서 깊이 감명을 받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나름대로 베풀 수 있는 호의를 베풀었다. 결정적으로, 가상지구 알파의 세계관에서는 그 몰락 작전이 실제로 시행되면서[35], 일본 본토를 향한 침공이 진행될 때 한반도 또한 중화민국의 침공권 안에 들어왔고, 한국 광복군과 중화민국군의 서울 합동 진군을 통해 총독부를 점거, 대한민국의 해방을 선전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지녔기 때문에 중화민국과 한국 정부는 매우 친밀한 관계이다. 그러나 가상지구 알파 세계관의 대한민국은 현실 세계처럼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도 있기 때문에, 미국과 중화민국 간에 외교적으로 불편한 기류가 생겨난다면 이로 인해 정치적으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난관에 빠지는 요소이기도 하다.
대한제국의 1910년 멸망은 중국에 큰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아니 기실 새로운 일만은 아니었다. 청일전쟁의 패배와 같은 충격적인 일들은 수차례 일어났고 전통적인 우방인 조선의 멸망은 그에 막타를 가했다. 청조의 위신 저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리고 이는 중화민국 성립후 많은 정치인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다. 중화중심주의는 광범위한 의식이었고 이때문에 '전통적인 중화중심 아시아 회복'과 '제후국 조선의 해방'이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수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에서 유학을 했었고 중일 관계는 북부의 난립하고 있는 군벌들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이에 중화민국은 직접적인 개입은 불가했다. 대신 중화민국 정부는 중화민국 영역내의 독립운동가들을 직접 지원하고 한국인 지식인들을 동지로서 대우했다. 상하이의 중국령내에서는 한인들이 모여사는 곳들이 생길 수 있도록 행정적 지원이 더해졌고 일본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했다. 이는 중일관계에 큰 악영향을 줄 수 있었으나 일본의 야욕을 눈여겨보던 미국의 외교적 지원과 영일동맹과 영중조약으로 인한 '내 친구의 친구는 친구' 논리, 그리고 중화민국 정부의 일본의 만주와 베이징권 영향력 확대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묵인과 그에 대한 일본의 보상인 '중화민국 내 반일행위에 대한 일시적 묵인'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로 가상지구 알파 세계관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영토 내에 존재했으며, 윤봉길 의사의 폭탄테러에 대해서도 중화민국 정부는(비록 당시의 총통이 장제스가 아니었지만) 그의 항일 투쟁에 대해서 깊이 감명을 받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나름대로 베풀 수 있는 호의를 베풀었다. 결정적으로, 가상지구 알파의 세계관에서는 그 몰락 작전이 실제로 시행되면서[35], 일본 본토를 향한 침공이 진행될 때 한반도 또한 중화민국의 침공권 안에 들어왔고, 한국 광복군과 중화민국군의 서울 합동 진군을 통해 총독부를 점거, 대한민국의 해방을 선전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지녔기 때문에 중화민국과 한국 정부는 매우 친밀한 관계이다. 그러나 가상지구 알파 세계관의 대한민국은 현실 세계처럼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도 있기 때문에, 미국과 중화민국 간에 외교적으로 불편한 기류가 생겨난다면 이로 인해 정치적으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난관에 빠지는 요소이기도 하다.
[1] 국기와 연방기의 차이는, '중화민국국기와 연방기' 문단에 설명되어 있다.[2] 통칭으로는 중국(China)이 가장 널리 쓰이며, 중화민국 내에서는 '민국民國' 이라는 표기도 흔히 쓰인다.[3] 단, 통용되는 언어는 만다린 이외에 각종 중국어 방언이 있고, 소수민족 자치구에서는 각 민족의 고유어가, 홍콩 특별행정구에는 영어, 마카오 특별행정구에는 포르투갈어가 복수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4] 국가코드 최상위 도메인(country code top-level domain).[5] 이 세계관의 중화민국도 2차대전의 승전국이고, UN 상임이사국이다.[6] 가상지구 알파 세계관의 중화민국은 의원내각제 국가이므로, 총통은 실권이 없다.[7] 가상지구 알파 세계관의 중화민국은 의원내각제 국가이므로, 내각제 국가의 총리에 해당하는 민국수상이 정부수반이자 실질적 국가 통치자이다.[8] 밑의 자치구역 문단 참조.[9]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인권규범청을 더욱 높은 위치로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0] 애초에 대만에서는 President를 '총통'으로 번역하므로, 한국에서의 '대통령'과 중화민국에서의 '총통'은 동의어이다.[11] 손문의 삼민주의 자체가 일정부분 좌파적인 경향이 있어, 삼민당은 자신들이 국부 손문의 직계 후계세력이라고 선전하고 이는 손문이 공지주의자로 평가 받으며 소련식 경제 모델을 도입하고 소련에서 상당한 지원을 받은 점과 민생주의를 기반으로 된 근거에 의해 뒷받침 된다. 그리고 부인인 쑹칭링의 정당이기도 했다..[12] 이 당기는 현실세계 중화인민공화국에 실제로 존재하던 '불법화된' 정당 중국 민주당(영어 위키백과)의 상징이다.[13] 특히 중화민국 내에서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영하, 신강 자치공화국은 이들의 주된 증오선전 대상이며, 현실 세계에서 비유할 수 있는 것은 일베저장소가 전라도를 대상으로 하는 지역드립의 노골적인 강화판이라고 볼 수 있다.[14] 기독교 또한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의 끄나풀로 간주하고, 중국의 기독교 신도들 또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첨병이라고 배격한다.[15] 각 자치구역마다 별도의 명칭이 부여되어 있다.[16] 이 세계관에서는 각 자치공화국들은 국가별 최상위 도메인(.kr, .us, .jp 같은 인터넷 주소)도 별개로 부여받고 있다.[17] 19세기 말에 잠깐동안 실제로 존재했던, 타이완 민주국의 국기이다.[18] 현실에서는, 1964년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었다.[19] 다카오는 현실 세계관에서는 중일전쟁 이후 중화민국에 반환되어 가오슝으로 개명되었고, 현실에서는 2008년에 베이징 올림픽이 개최되었다.[20] 아예 홍콩의 미디어 자본들이 일찍이 중화민국에 지사를 설립하여 홍콩 영화, 방송 등을 직접 배급하였다.[21] 각 자치구역마다 별도의 명칭이 부여되어 있다.[22] 이 세계관에서는 각 자치공화국들은 국가별 최상위 도메인(.kr, .us, .jp 같은 인터넷 주소)도 별개로 부여받고 있다.[23] 19세기 말에 잠깐동안 실제로 존재했던, 타이완 민주국의 국기이다.[24] 현실에서는, 1964년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었다.[25] 다카오는 현실 세계관에서는 중일전쟁 이후 중화민국에 반환되어 가오슝으로 개명되었고, 현실에서는 2008년에 베이징 올림픽이 개최되었다.[26] 아예 홍콩의 미디어 자본들이 일찍이 중화민국에 지사를 설립하여 홍콩 영화, 방송 등을 직접 배급하였다.[27] 주로 육로로 이어진 중화민국이나 대한민국으로 탈출하였다.[28] 중화민국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지방자치제가 유지되는 연방제 국가이지만, 각 성과 특별시는 명목상으로는 중앙정부의 관할 하에 있다.[29] 다만, 그나마 가장 비슷한 경우일 뿐, 현실의 영국-잉글랜드의 관계는, 잉글랜드가 영국의 '중앙정부 직할 구역'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30] 이에 대해서, 소수민족의 자치구역과 자치공화국에서는 자신들의 깃발 또한 모두 동등하게 게양할 것을 요구하는 불만의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31] 그러나 일부 부대들의 군기내에서는 중앙정부기인 국기부터 각 자치공화국의 군기들이 여럿 변형되어있기도 하다[32] 원본은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 모드의 중국계 종교국가 상청천국의 국기이며, 본 설정 또한 해당 Mod에서 일부 모티브를 얻었다.[33] 현실 일본의 창가학회의 조직력, 그리고 공명당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34] 심지어는 중국 내에서 가장 수가 많은 소수민족인 장족의 장어마저도 장어-한국어 대응 표기가 없는 상황이다. 사실은 이 문서 편집자가 장어의 한국어 표기 사례를 구하지 못한 탓이다[35] 집단창작:가상지구 알파/일본인민공화국 및 집단창작:가상지구 알파/일본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