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대중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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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제15대 대통령 |
서명 | |
공식 초상화 |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이다.
2. 그의 행보[편집]
3. 논란[편집]
북한을 무작정 지원했다가 그로 인해 북한이 핵무기로 무장하게 됐고, 이 떄문에 중도~거의 모든 우파 계열의 정치인들은 이로 인해 김대중을 좋지 않게 보는 편이며, 결국 핵대중이라는 멸칭까지 생겼다.
[1] 1923년 음력 12월 1일.[2] 신분상 공식적으로는 1926년 1월 6일인데 사망 당시 생년월일이 기사마다 제각각으로 보도하여 김대중 측근에서 1924년 1월 6일로 통일적으로 표기해달라고 부탁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에는 1925년 12월 3일생으로 되어 있는데, 음력 1925년 12월 3일이 양력으로 1926년 1월 16일에 해당하므로 양음력 변환 과정에서 어떤 이유로 오류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43년 당시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와 상의 끝에 생년월일을 1925년 12월 3일로 정정했다고 자서전에 기록되어 있었다.[3] 원적은 신안군 하의면 대리. 인근의 오림리와 함께 김해 김씨 집성촌이며 이곳에 선영이 있다.[4] 생전 거주지. 동교동계의 뜻이 바로 이 집이다.[5] 안경공파 14세손. 증조부 김태현(金台鉉), 조부 김제호(金濟浩), 아버지 김운식(金雲植)이 각각 경파(京派) 17세손, 18세손, 19세손 항렬자를 사용한다.[6] 개명전 이름은 장노도다.[7] 1927년 4월 28일생으로, 1945년 김대중과 결혼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1959년 6월 25일 사망했다.[8] 2019년 6월 10일 사망했다.[9] 김대중이 차용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지만 어린 나이에 사망함.[10] 지금의 목포북교초등학교.[11] 사회 생활을 하면서 대학을 다니지 못한 것에 대해 상당한 콤플렉스를 느꼈다고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등원한 6대 국회 시절부터 소속된 위원회(재정경제위원회)에서 '1시간 발언을 위해 10시간 이상을 준비'하는 노력을 기울였고, 덕분에 차츰 입지를 넓혀나갈 수 있었다고. 그리고 이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외교대학원에서 논문(한국 사회에서의 민주주의, 진보원칙의 발생 및 발전에 관하여(1945~1991))을 제출하고 구두시험을 거쳐, 정식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출처: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 203 ~ 210쪽)[12]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 시절 일본군에 차출될 뻔 했으며 6.25 전쟁 시절 북한군에게 잡혀 죽을뻔한 일화는 유명하다.[13] 6.25 전쟁 당시 해군 예하 전남지구 해상방위대 소속으로 전투 일선에 참여했다고 본인이 주장했으나, 대한민국 해군 측에서는 "해군 본부"에는 이와 관련한 기록이 없다고 밝혔고, 언급되었던 '전남지구 해상방위대'는 부대가 창설된 목포 지역의 해군에 그 문서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미뤄봤을 때 해당 부대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경에 해체하였고, 처음부터 정식 해군 편제된 조직이 아니라 "목포 현지에서 창설"되어 군 조직과 협력하는 자경단에 가까운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인이 민원만 넣어도 주장의 진위를 바로 확인할 수 있고, 이 점을 본인이 모를 리가 없기 때문에 해상방위대 주장이 거짓일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한편 일제강점기 시절 김대중의 병역사항은 '고령으로 인한 징집면제'이다.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해운회사에 들어가 일했기 때문이다.[14] 김대중의 대부가 바로 장면 전 총리이었다. 김대중은 굉장히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일부 민주당계 의원들 및 그의 대부분의 측근들은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천주교로 개종하거나 천주교를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의 약 30% 이상 되는 의원들 종교가 천주교 신자이며, 당연히 세례명까지 받는다.[15] 호는 '후광(後廣)'으로 그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따와 지은 것이다.[16] 현재는 폐지된 여성가족부의 전신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