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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초상화 |
1. 개요[편집]
2. 약력[편집]
- 1944.3. 희도소학교 졸업
- 1950.2. 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 졸업
- 1956. 중위 진급
- 1958. 대위 진급
- 1959.4. 육군고급부관학교 군사영어반 수료
- 1960.12. 제1공수특전단 제1특전대대 작전과장
- 1961.4. 대한민국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 직무대리
- 1961.12. 중앙정보부 제1국 인사과장 (박정희 정부)
- 1963.9. 대한민국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배속
- 1965.6. 육군대학 수료
- 1966.8.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박정희 정부)
- 1971.11. 제1공수특전단장 (박정희 정부)
- 1976.6. 대통령경호실 보안차장보 겸 작전차장보 (박정희 정부)
- 1977.2. 소장 진급
- 1978.1. 제1보병사단장 (박정희 정부)
- 1979.3. 국군보안사령관 (박정희 정부)
- 1979.10. 합동수사본부 본부장 (박정희 정부)
- 1980.3. 중장 진급
- 1980.5.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최규하 정부)
- 1980.6. 대장 진급
- 1980.8.27.~1981.2.24. 제11대 대한민국 대통령
- 1980.8. 무궁화대훈장 수훈
- 1981.1. 민주정의당 총재
- 1981.2.25.~1988.2.24. 제12대 대한민국 대통령
- 1992.10. 안중근의사 여순순국유적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 고문
3. 일생[편집]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일생 문서 참고하십시오.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11기로 입교했고, 1955년 육사 졸업과 동시에 군생활을 시작하였다. 1961년 서울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육사 생도들을 동원하여 군부 지지 시가행진을 벌였고, 이 일을 계기로 박정희 소장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되었다.
박정희 집권 이후 노태우 등 육사 동기들과 함께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면서 군에서 승승장구하였다. 1979년 3월에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같은 해 10.26 사건이 터지자 계엄법에 의거하여 국군보안사령관으로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 합동수사본부장이라는 직책과 자신이 이끌고 있던 하나회를 위시한 신군부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을 장악하였고, 이듬해 1980년엔 5.17 내란을 일으켜 헌정을 중단하였다. 이후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 광주에서 다수의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그 직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사임하면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치러진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올랐다.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통과시킨 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24] 임기 말,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더욱 거세졌고, 이를 불식시키고자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으나 오히려 역풍이 일어나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당시 여당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 노태우가 6.29 선언을 발표함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진행하였고, 이후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퇴임 후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운 문민정부에 의해 1995년 노태우와 함께 구속 기소되었으며[25], 이후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수수 등으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26]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면 여론이 생기면서 그해 12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사면되었다.[27]
사면 이후로도 건강을 유지했으나 2021년 8월 악성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았고,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 40분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향년 90세를 끝으로 사망하였다.[28]
박정희 집권 이후 노태우 등 육사 동기들과 함께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면서 군에서 승승장구하였다. 1979년 3월에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같은 해 10.26 사건이 터지자 계엄법에 의거하여 국군보안사령관으로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 합동수사본부장이라는 직책과 자신이 이끌고 있던 하나회를 위시한 신군부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을 장악하였고, 이듬해 1980년엔 5.17 내란을 일으켜 헌정을 중단하였다. 이후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 광주에서 다수의 시민들을 학살하였다. 그 직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사임하면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치러진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올랐다.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통과시킨 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24] 임기 말,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더욱 거세졌고, 이를 불식시키고자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으나 오히려 역풍이 일어나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당시 여당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 노태우가 6.29 선언을 발표함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진행하였고, 이후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퇴임 후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운 문민정부에 의해 1995년 노태우와 함께 구속 기소되었으며[25], 이후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수수 등으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26]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면 여론이 생기면서 그해 12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사면되었다.[27]
사면 이후로도 건강을 유지했으나 2021년 8월 악성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았고,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 40분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향년 90세를 끝으로 사망하였다.[28]
3.1. 전두환 정부[편집]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 정부 문서 참고하십시오.
3.1.1.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 정부/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
4. 별명[편집]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별명 문서 참고하십시오.
5. 선거 이력[편집]
역대 선거 공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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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후보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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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소속 정당[편집]
7. 여담[편집]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여담 문서 참고하십시오.
8. 각종 타이틀[편집]
- 임기를 모두 마치고 만기 퇴임한 최초의 대통령[38]
- 가장 높은 형량을 선고 받은 대통령[39]
- 최초의 경남 지역 출신 대통령
- 유일한 전씨 대통령
- 두 번째로 40대에 취임한 대통령[44]
- 대한민국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퇴임(57세)한 대통령이자, 유일하게 50대에 퇴임한 대통령
-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 지낸 시간이 가장 길었던 대통령(33년 9개월)[47]
- 두 번째로 장수한 대통령(90세)[48]
- 마지막으로 사망한 일제강점기 출신 대통령[50]
- 퇴임 후 가장 많은 후임 대통령을 본 대통령[51]
- 역대 대통령 시신 중 3번째로 화장된 대통령[52]
- 처음으로 역대 대통령 중 사망시 화장 의사를 밝힌 대통령[53]
- 화장 된 대통령 중 최초로 시신이 화장 이후 사저에 안치된 대통령[54]
- 기일이 가장 늦는 대통령[56]
9. 어록[편집]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어록 문서 참고하십시오.
10. 다른 대통령과의 관계[편집]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다른 정치인 및 대통령과의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
11. 대중매체에서[편집]
11.1. 영화와 드라마[편집]
- 2001년 한국 영화 썸머타임의 배경이 전두환 독재 체제 시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였다.
- 2005년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영화 평론가이며 한겨레 신문 문화부장이었던 임범이 전두환 역할로 연기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쐈어. 민주주의를 위해서. 알아 인마?"라고 심정을 말하는 김재규를 유리창 너머로 보다가 "어이, 어때? 저 또라이 저, 절마가 지 혼자서 총질하고 지랄한 게 맞제?"라고 상황을 정리하고 퇴장한다.
- 2005년 MBC 특별기획 주말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이덕화가 전두환 역할을 이어받으며 절륜한 연기를 펼쳤다. 비록 외모적인 유사성은 박용식에 미치진 못했지만 주인공으로서의 묵직한 포스를 내며, 특유의 말투까지 음성을 전두환 본인과 비교해도 거의 판박이로 재현해낸대다 특유의 대머리와 날카로운 용모 덕에 박용식에 못 미칠 뿐 전두환의 외모에도 상당한 싱크로율을 선보였다. 본인도 연기에 상당히 만족했다는 것이 후문이다. 이를 위해 집안 친척인 최병서에게 특훈을 받았다는 후문도 전해지기도. 그리고 이덕화 본인이 악역 전문 배우로 명성을 날린 적이 있는 사람인데 조선왕조오백년의 장희재, 사랑의 종말의 남현필, 사랑과 야망의 태수 등 완벽한 인간 말종 연기를 달인 수준으로 실감나게 잘했던 과거가 있어서 여기에서도 전두환의 냉혹한 면모를 잘 살려서 연기한 덕에 외모는 박용식에 비해 미치지는 못했지만 분위기는 되려 박용식을 압도했고, 박용식이 타계한 지금은 전두환 담당 배우 중 전두환과 제일 외모와 음성이 제일 흡사하다고 평가받는다. 확실히 장군 시절의 전두환의 모습은 웃음기 없는 냉철한 분위기로 연기했지만 대통령이 된 후의 모습은 그보다는 다소 희화화된 모습도 보여준다. 전두환은 실제로 이 드라마를 봤다고 한다. #
11.2. 기타[편집]
- 대체역사물인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선 주인공 유진 킴에게 찍혀, 거의 반강제로 군에 전역하게 된다. 대놓고 삼국지의 위연이라면서 까이는 것이 압권. 때문에 사업이나 하면서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며, 재기를 위해 김대중을 비롯한 호남 세력과[66] 손을 잡을 것이 암시된다.
- 스틸레인에선 간접적으로 등장. 휴전선의 북한군 일부가 야밤에 갑자기 평양으로 전차 기수를 돌리자, 국정원장이 1961년 5월 16일과 1979년 12월 12일에 있었던 일이 북한에서 일어난 것 같다며 박정희와 전두환을[69] 회상한다.
- 워게임: 레드 드래곤에서는 부산 포위전 캠페인에서 언급으로만 등장, 부산 포위전 캠페인의 트롤러 취급으로, 6월 항쟁이 일어나자[70] 끝내 군을 진압작전에 투입하는 바람에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지고[71], 전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북한은 다시 한번 남침을 강행해 국군은 5일 만에 경남까지 밀려나게 된다.
12. 관련 문서[편집]
13.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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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대훈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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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929년생 또는 1930년생이라는 설도 있지만 당시에는 영아 사망률이 워낙 높아 출생신고를 뒤늦게 하고 애당초 공교육이 의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다만 2007년 8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자택 방문을 했을 당시에 그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내가 1931년생이니까... 77살이거든?"이라 언급한 바 있기에 1931년생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족보와 민증에는 1931년 12월 6일 출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 물론 전두환 자신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2] 완산 전씨 집성촌이다.[3]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이웃 사촌으로, 연희궁이라는 논란이 있었다. 평소 명절때마다 주변 이웃들에게 고기, 과일등 선물을 돌린걸로 유명하다. 실제로 집 근처에 연희궁로라는 도로 표지가 있었다가 논란이 일자 지워졌다.[임시안치] 전두환 본인은 "북녘 땅이 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 남고 싶다"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이를 실천하려면 대한민국 국방부의 협조가 필요하기에 장지를 정하지 못해 시신이 화장된 후 3년째 자택에 임시안치된 상태다. 경기도 파주시 장산리의 사유지를 매입해 안장을 시도했었으나 # 반대 여론이 많았고 # 이를 의식한 토지주가 매매를 안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 당분간 계속 자택에 보관할 것으로 보인다.[5] 완산 전씨 23세손 ○환(○煥) 항렬이다.(족보)[6] # #[7] 전열환과 전규곤은 전두환이 태어나기 전이였던 어렸을 때 사고로 사망했고 셋째형 전기환만이 본인과 같은 90세까지 장수했다.[8] 만주국 반석현 호란진에 있었던 학교로 1944년 가족들이 대구로 돌아오면서 희도소학교로 전학하였다. # #[9] 현 대구종로초등학교.[10] 당시 6년제였으며, 1950년 4월 대구공업중학교와 대구공업고등학교로 개편하였다가 1951년 7월 대구공업중학교를 폐지하였다.[11] 전두환이 빠른 1931년생임을 감안하면 9기(49학번), 10-1기(49학번), 10-2기(50학번)에 입학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이어서 학교도 겨우겨우 다녔기에 육사에 늦게 입학했다. 동기인 노태우와는 말이 한살 차이지 노태우가 1932년 12월생이므로 사실상 2살 차이다. 그나마 늦게 입학한 덕분에 6. 25때 9~10기 선배들이 전사할 때 후방에서 안전하게 교육받을 수 있었다. [12] 전두환의 종교는 대외적으로는 백담사에서 은거한 시간 때문에 불교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13] 천주교 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기념서인 “아, 김수환 추기경”에서는 전두환이 고등학생 때 천주교 신앙을 가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전두환의 세례명이 베드로라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전두환이 언제 누구한테 어디서 세례를 받았는지 정보가 없다. 이는 전두환의 후임자인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이 언제 누구한테 어디서 세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것과 대비된다. 이들 중에서 확고하게 천주교 신앙을 유지하며 성당에도 출석했던 것은 김대중과 문재인 두 명뿐이지만, 철저히 교적 관리를 하고 있는 가톨릭 특성상 거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나머지 대통령들도 세례받은 기록이 있다면 쉬이 찾을 수 없을 리 없다. 평생 전두환은 자신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 드러내는 행동을 한 적이 일절 없다. 대통령 시절에야 정치적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그렇다 쳐도, 정치적인 것과 좀 거리가 있었던 군인 시절에도 똑같았다.[14] 개신교설: 그는 김장환, 김삼환, 조용기 목사를 비롯한 보수 개신교 인사와도 활발한 교류를 나누고 아들인 전재용이 목사 안수를 받는 것을 허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개신교 신자라고 볼 수도 없다.[15] 불교설: 과거 백담사에서 유배생활을 했으나 정작 전두환은 불교 신자도 아니다. 정식 수계도 받지 않았으며, 신자 생활도 특별히 하지 않았다. 일해는 법명이 아닌 호일 뿐이다. 하지만 전두환의 장례절차 중에 입관식은 불교식으로 진행되었다.[16] 대통령 재임 시절 공식 프로필 기준. 다만 노년에도 키는 크게 변함 없었고 체형은 암 투병 이전까지는 계속 유지가 잘 되었으며 70kg를 넘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할 정도로 건강 관리를 잘 하였다.[17] 당시는 4공이었기에 박정희, 최규하와 같은 내용을 읽었고 8차 개헌을 한 이후 12대 취임 선서에서는 '국헌'을 '헌법'으로 고치고 "민족 문화의 발전"을 추가하여 읽었다.[18] 최초의 4년제 기수라서 처음엔 1기로 불렸다가 후에 11기로 변경. 이들은 1기~10기 선배 기수들과 달리 종전 시까지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후방에서 4년 교육을 받았다. 선배 기수들은 대부분 참전을 했기 때문에 6개월도 되지 않는 교육과정을 마치고 급하게 투입된 경우가 많았으며, 그로 인해 선배 기수들은 11기 이후 기수들을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은 기수라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있고, 11기 이후 기수들은 선배 기수들과 달리 자신들이 4년 정기 과정을 수료한 진정한 기수라는 자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육사 11기는 교육을 받은 자신들이 진정한 1기라고 말하며, 자신들 및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관학교 출신 군인들을 모아 하나회를 만들었으며, 이후 쿠데타 즉 12.12 군사반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였다.[19] 소령에서 중령 진급까지 불과 1년 2개월밖에 안 걸렸다. 이는 박정희의 대단한 신뢰가 있어서 가능했다.[20] 1969년 9월 서종철 대장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서종철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사관생도 시절 훈육요원이었다.[21] 1972년 9월부로 제1공수특전'단'이 제1공수특전'여단'으로 증편되어서 부대장도 대령에서 준장 보직으로 승격되었기 때문에, 당시 대령이었던 전두환은 정식 여단장은 될 수 없어서 일단 '여단장 직무대리'의 형식으로 부대장직을 유지하다가 1973년 1월 임시제 준장이 됨과 동시에 정식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된던 것이다.[22] 취임 2개월여만에 사퇴. 노태우가 취임한 뒤 전두환이 자신의 상왕 노릇을 하는 걸 막기 위해 국가원로자문회의 설치를 하지 않았다. 헌법상 국가원로자문회의는 '설치해야 한다' 라는 의무성 조항이 아닌 '설치할 수 있다' 로 현직 대통령의 선택에 맡기기 때문이다.[23]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노태우와 함께 이름을 올렸는데, 당시 사면된 지 2년여밖에 안 된 시점이라 논란이 많았다. 2002년 기념관이 개관할 때까지 고문직 유지.[24] 제11대 대통령 때는 유신 헌법에 따라 선출되었기에 제4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25] 95고합1280[26]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최종적으로 인정된 죄명은 "반란수괴,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살인, 살인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이다(대법원 1997.4.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이 판결이 확정되어 경호·경비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전면 박탈되었다.[27] 당시 문민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 모두 동의했고 여야 모두 찬성 의사를 밝힌 상태라 전두환의 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 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 전 노씨 사면 화합정치 전개 3당 일제.환영 1997.12.21 한겨레[28]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망 후 딱 4주가 된 시점이었으며, 장례는 가족장으로 진행되었다. 전두환의 사망을 끝으로 20세기에 집권한(임기 시작부터 퇴임까지)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퇴임 후 생존한 기간은 33년으로 역대 대통령 중에서 최장 기록이다.[29]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간접선거[30] 대통령 선거인단제 간접선거(통일주체국민회의 폐지)[31] 윤보선은 제2공화국 헌법에 따라 의원내각제 의회에서 선출하는 명목상 국가원수였으며, 최규하는 10.26 사건 이후 보궐선거로 선출되어 박정희의 잔여 임기만큼만 재임하고 빠른 시간 내에 개헌하여 유신 정권을 민주 정부에 정상적으로 이양한다는 약속을 하고 선출된 대통령이었다. 윤보선, 최규하 모두 각각 5.16 군사정변,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치지 못했다.[32] 간접선거까지 포함하면 이승만은 3회(3.15 부정선거 제외), 박정희는 5회 당선되었다.[33] 백담사 은둔 시기에 탈당. 1988년 11월 23일. 그로부터 정확히 33년 후 사망했다.[34] 첫 번째는 박정희이다. 전두환에 이어 세 번째는 노태우인데, 이들 3명 외에는 대장은커녕 아예 직업군인 출신 대통령 자체가 없다. 참고로 김영삼은 6.25 전쟁 시기 학도병이었고, 노무현과 문재인은 각각 예비역 상병과 병장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병역의무에 따른 병역 수행을 했다.[35] 초임이었던 이승만, 임기가 짧았던 윤보선, 개헌으로 간선제를 만들어 집권했던 박정희, 그 뒤를 이은 최규하에 이어서 마지막이다. 이들 중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제헌 국회에서 간선제로 선출된 초대 선거를 빼고는 2회, 3회 모두 국민의 직접투표로 당선되었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로 정권을 연장하였던 박정희도 제5대 대통령 선거부터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까지는 3회간 국민 투표로 당선되었다.[36] 전두환은 11, 12대 대선 모두 간선제를 통해서 당선됐다. 국민의 직접선거로 단 한 번도 대통령 당선이 된 적이 없다. 전두환처럼 간선제로만 대통령이 된 사례로는 윤보선, 최규하가 있지만 윤보선은 실권이 없는 상징적 국가원수였으며 최규하는 전임자의 갑작스런 궐위로 인한 특수 케이스인 걸 감안하면 사실상 전두환이 유일하게 간선제로만 대통령이 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두환도 최규하의 궐위로 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최규하가 하야하기 전까지 12.12 이후 8개월 가량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이 둘과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없다.[37] 1980년부터 1985년 상반기까지 대한민국은 오늘날의 북한, 중국, 투르크메니스탄과 비슷하게 여당 민주정의당과 관제야당만 허용되는 사실상 일당제 국가였다.[38] 그 이전 대통령들은 모두 임기를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였다.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로 인해 촉발된 4.19 혁명으로 하야하였고, 윤보선은 5.16 쿠데타의 압박으로 사임했고, 박정희는 유신체제와 장기 집권으로 비판을 받다가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재임 중에 사망하였으며, 최규하는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의 압박을 받다가 취임 8개월 만에 사임했다.[39]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재판 1심은 사형, 2심, 3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노태우는 최고형량이 22년 6월, 박근혜는 20년, 이명박은 17년이었다.[40] 첫 번째는 박정희이다.[41] 이후 윤석열이 검찰총장으로서 역대 2번째로 사정기관장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다만 전두환은 10.26으로 인한 대통령 박정희의 사망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구속으로 정식 중앙정보부장은 아니고 중앙정보부장 서리(일종의 직무대행)였다.[42] 마지막으로 이름과 아호를 모두 가진 대통령은 이명박이다. 호는 청계.[43] 굳이 말하면 11대 취임식에서는 수트에 무궁화대훈장을 패용했는데 이것도 공식 석상에서 대통령이 패용한 모습으로는 마지막이었으며 12대 취임식에서는 훈장 패용 없이 모닝코트 차림이었다. 19대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에 취임하여 일반적인 양복 차림으로 취임했으며, 20대 윤석열 대통령 역시 유권해석에 따라 2022년 5월 10일에 취임을 하게 되었다.[44] 첫 번째는 박정희이다. 1980년 11대 대통령 취임 당시 전두환의 나이는 만 49세였다.[45] 훈장 수훈 규정이 바뀌고 무궁화대훈장을 제외한 나머지 훈장들은 2006년 노태우와 함께 전부 취소되었다.[46] 탈모를 앓는 대통령은 있었지만(1970년대의 박정희, 최규하, 이명박, 문재인) 대머리 대통령은 전두환이 유일하다. 다만 이명박은 모발이식을 했고 문재인의 탈모 루머는 불명확하다.[47] 그 다음으로 긴 순서는 노태우(28년 8개월), 윤보선(28년 4개월), 최규하(26년 2개월) 순이다. 다만 전두환과 노태우는 예우가 박탈돼서 예우가 박탈된 대통령을 제외하면 윤보선이 가장 길다. 참고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7년 9개월이고 현재 살아있는 대통령 중 가장 오래 지내고 있는 대통령은 이명박(11년 5개월)이다. 참고로 이명박 역시 뇌물 혐의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아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되었다. 반면에 퇴임 후 전직 대통령으로 지낸 기간이 가장 짧은 대통령은 노무현(1년 3개월, 자살)이며, 자연사한 대통령들 중에서는 이승만(5년 3개월), 김대중(6년 6개월) 순이다. 박정희는 임기 도중 암살 당했으니 논외.[48] 첫 번째는 윤보선. 이승만과 같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개월 수로는 전두환이 7개월 가량 더 오래 살았다.[49] 자세히 말하면 이승만에 이은 두 번째로 국가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른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다. 윤보선도 가족장으로 치렀으나 당시 2공화국은 대통령이 국가원수였을 뿐, 정부수반이 아니었다.[50] 이명박 전 대통령은 시기상 일제강점기 시절 태어났으나 일본 제국 본토(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후에야 입국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았다.[51] 19대인 문재인까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사망했다. 미국의 8대 대통령인 마틴 밴 뷰런과 매우 비슷한데, 그는 퇴임 후 후임 대통령 8명을 보았으며, 전두환과 같이 바로 뒤의 후임자 4명이 사망하는 것을 보고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전두환이 사망한 시점은 20대 대선을 세 달 반 정도 앞둔 시기였기 때문에, 전두환이 6개월만 더 살았다면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는 것까지 봤을 것이므로 마틴 밴 뷰런과 같은 기록을 갱신했을지도 모른다.[52] 2009년 서거한 노무현이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겨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화장되었으며, 노태우 역시 화장 유언을 남겨 화장되었다.[53] 전두환은 대통령까지 지낸 내가 화장을 하면 국민들도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면서, 묘를 쓰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먼저 화장된 노무현은 2009년 사망 직전 유서에서야 화장 의사를 밝혔지만 전두환은 최소 2003년부터 화장 의사를 밝혔기에 이 기준으로는 최초로 볼 수 있다.[54] 노무현은 화장 후 봉하마을에 마련된 묘역에 안장되었고, 노태우는 파주 검단사에 임시 안치되어 있다가 사망 이듬해 동화경모공원에 안장되었다. 반면 전두환은 화장 이후 현재까지 사저에 유골이 보관이 되어 있는데, 전두환이 생전 장지에 대한 유언을 모호하게 남긴 것도 있고 과거사에 대한 진정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사망해서 대중의 여론이 매우 나빠 장지를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안장이 미뤄지고 있다. 사망한 지 2년이 지난 2023년 유족이 파주시 장산리에 위치한 한 사유지를 매입해 묘지 자리를 마련했지만 이 사실이 지역사회에 알려지면서 큰 반발을 불러 결국 땅주인이 땅을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안장이 무산됐다. 이런 사정으로 정식으로 사저에 안치된 것이 아니라 사저에 임시로 안치된 것일 뿐이다.[55] 4주(28일) 만에 사망.[56] 김영삼(11월 22일 사망) 기일의 다음 날에 사망했다.[57] 2005년 제5공화국 방영 당시 생존해있던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수십 차례의 정정보도를 걸었지만 드라마는 내용 수정만 조금해서 문제 없이 방영되었다. 다만 전두환이나 노태우 본인은 드라마에 대해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 전두환은 장세동 역을 맡은 홍학표 배우를 만나 "장세동이 나를 형님이라고 부른 적은 없다.", "내 욕은 조금만 먹게 해달라."는 농담 정도만 했을 뿐이지, 격하게 반발하거나 하진 않았다.[58] 다만 그가 고초를 겪은 것은 전두환이 지시해서가 아니라 당시 방송계 분위기가 워낙 험악했기에 방송사 사람들이 알아서 긴 것이라고 한다. 도리어 전두환 본인은 이 이야기를 듣고 황당하다며 사과까지 했고 한 술 더 떠서 옆에 있던 이순자는 왜 청와대에 탄원서를 넣지 않았느냐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이 박용식에게 "앞으로 내 역할은 박 선생이 다 하시오."라고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59] 다만 정종준은 체구가 푸짐한 터라서 싱크로율은 높지 않다. 윤동환은 인상이 샤프해서 제법 싱크로율이 좋다.[60] 전두환 전담 배우로 유명했던 박용식이 자신의 후배 성우인 박지윤의 친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묘하다. 게다가 둘 다 KBS 성우극회 소속이다.[61] 18대 총선 투표 인터뷰에서 전두환이 했던,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발언도 대사에 수록되었다.[62] 황태섭 역을 이덕화가 맡았는데, 제5공화국에서 이덕화가 전두환 역을 맡아서 배우개그가 성립했다.[63] 이후 염동헌은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환의 선배인 유학성을 모델로 한 배송학 역을 맡아 연기했다.[64] 이름은 작중 서명란에 등장한다.[65] 배우가 이전에 맡았던 수리남의 전요환 목사가 생각난다는 평가가 많았고 반란 성공 후 화장실에서 혼자 박장대소하는 장면에서는 아예 곡성의 악마가 생각난다는 평도 있다.[66] 원 역사를 생각하면 엄청난 나비 효과다. 이 세계관에선 하나회 결성 이전에 군에서 쫓겨나면서, 전라도 지역과 척질 일이 없었다.[67] 작중에서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 기껏해야 마지막에 눈 위치가 살짝 바뀐 것 뿐이다.[68] 열린 결말이다.[69] 박정희는 정변 당시에 차지철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전두환은 그 유명한 신군부 단체 사진으로 나온다.[70] 김일성의 명령으로 북한이 시위대 내부에 간첩을 침투시켜서 현실보다 훨씬 혼란한 시위가 벌어지는 상황이다.[71] 정확히는 계속해서 몰려드는 시위대를 보고 패닉에 빠진 한 현장 지휘관이 독단적으로 휘하 병력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려버리는 바람에 얼마 못가 서울 전역이 5.18과 마찬가지로 피바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