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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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공화국 전두환 정부 全斗煥 政府 | Chun Doo-hwan Government | ||
출범 이전 | 이후 | |
대통령 | 전두환 / 제11·12대 | |
국무총리 | 박충훈 / 서리 (~1980.9.1.) | |
남덕우 / 서리 (1980.9.2.~1980.9.21.) | ||
남덕우 / 제14대 (1980.9.22.~1982.1.3.) | ||
유창순 / 서리 (1982.1.4.~1982.1.22.) | ||
유창순 / 제15대 (1982.1.23.~1982.6.24.) | ||
김상협 / 서리 (1982.6.25.~1982.9.20.) | ||
김상협 / 제16대 (1982.9.21.~1983.10.14.) | ||
진의종 / 서리 (1983.10.15.~1983.10.16.) | ||
진의종 / 제17대 (1983.10.17.~1985.2.18.) | ||
노신영 / 서리 (1985.2.19.~1985.5.15.) | ||
노신영 / 제18대 (1985.5.16.~1987.5.25.) | ||
이한기 / 서리 (1987.5.26.~1987.7.13.) | ||
김정렬 / 서리 (1987.7.14.~1987.8.6.) | ||
김정렬 / 제19대 (1987.8.7.~) | ||
여당 |
▲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 전두환 취임 선서 |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2.1. 국정지표[편집]
- 정치 - 민주주의 토착화
- 경제 - 복지사회 건설
- 사회 - 정의사회 구현
- 문화 - 교육개혁과 문화창달
2.2. 시대적 특징[편집]
이 정부의 모토이자 캐치프레이즈는 선진조국 창조와 정의사회 구현으로, "선진조국 창조" 의 경우, 이 시절 만들어진 공익광고를 보면 '선진조국'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의사회 구현"의 경우는 각급 경찰서 현판 바로 밑에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달린 것은 물론 동사무소 등 관공서에 버젓이 걸려 있었고 당시 국민학교 외벽에도 걸려 있었던 문구. 이 정부의 태생부터 따져보자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치프레이즈다.[2] 그리고 여당의 이름 또한 정부의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민주정의당이었다.[3][4]
한편으로는 사회 각 분야와 문화에 있어서, 제한적으로나마 여러 통제를 풀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이 집권 후반기때 국민들의 사소한 옷차림과 머리카락까지 일일히 단속했다가 오히려 반발을 거세게 사서 결국 패망한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도 있었고, 거기에 집권정당성 부재로 인해서 독재정권이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박정희와 대비되는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하는 이유와 함께 올림픽 개최로 인해서 보여주기식이라도 서방 선진국들의 눈치를 어느 정도 봐야했으며, 전두환 본인도 축구와 유흥을 좋아했던 인물이어서 이런 제한적 자유화 정책이 전두환 본인 성격과 구미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즉, 올림픽 개최와 정권정당성 부재로 눈치를 봐야되는 상황과 전두환 본인의 취향이 합쳐져 꽤 진일보한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5]
대표적으로 'Sports, Sex, Screen'으로 대표되는 '3S 정책'과 야간통행금지령 해제, 해외여행 단계적 자유화[6] 조치, 교복 자율화, 과외 금지령, 컬러TV 보급 등의 업적이 있다. 그리고 이 당시에는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여긴 국민이 가장 많았던 시기였다.[7]
교육정책도 당시 기준으로 진보적인 정책을 도입해서, 과외금지조치를 폄과 동시에, 1982년에 교복자율화 및 두발자유화 조치를 발표, 일선 중고등학교의 두발규정은 2000년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완화되었고,[8] 교복 역시 철도고등학교와 해양고등학교같은 일부 특수목적 학교들의 제외한 나머지 학교에서 의무착용조항을 폐지했기 때문에, 2010년대에 집권한 진보교육감들의 정책을 선행해서 시행했다는 평이 나온다.
물론 자유화 조치를 취한다고 해도, 이전보다 검열수위가 낮아진 수준이지, 검열 자체가 사라진것은 전혀 아니었다. 주요 언론의 경우에는 보도지침으로 기사를 어느 정도까지 내야되는지를 안기부한테 일일히 지시받았고,박정희 후반기 때와 마찬가지로 시사잡지와 뉴스, 시사 프로그램에서 정권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은 여전히 금지되었으며, TV개그 프로그램에서 대머리를 소재로 쓰는 것을 암묵적으로 금지했다. 한수산 필화사건처럼 작품썼다가 심기에 거슬려서 고문당하거나 감옥가는 일은 여전히 벌어졌으며, 또한 가요나 만화, 영화도 검열은 여전해, 1980년대를 대표하는 만화인 아기공룡 둘리와 달려라 하니도 첫 작품설정이 검열담당기관에서 불허를 당해서 결국 설정을 변경해야 했다. [9]그리고 이 당시에는 노동시간 단축같은 조치는 없어서 연간 노동시간이 여전히 3천시간에 육박할 정도로 매우 길었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들은 저런 문화를 즐길 여유가 없던 경우가 태반이었고, 이는 교육정책에 있어서도 매한가지여서 체벌제한이나 체벌금지 조치같은것은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10] 두발규정이나 복장규정이 박정희 시대에 비해 획기적으로 완화되었다고는 해도, 규정에 어긋나면 매를 맞거나 강제로 머리를 밀리고 다니는것은 이 당시에도 매한가지였으며, 또한 아무리 과외금지 조치를 취한다 한들,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 대학에 보내는 학생들을 늘리기 위할 목적에서 야간자율학습 및 0교시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고등학생들이 이른아침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있어야 했었고,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하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참여하게 만들기 일쑤였고,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매를 휘두르기 일쑤였다.
당시 최고 인기 코미디언이었던 김병조는 민주정의당 전당대회 및 차기 대선 후보 지명식에서 "민정당은 국민에게 정(情)을 주는 당, 통일민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당"이라고 말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11][12] 이 발언이 터져나왔던 장소는 잠실실내체육관이었으며, 그날은 하필 1987년 6월 10일이었다.
"정의사회 구현"의 경우는 각급 경찰서 현판 바로 밑에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달린 것은 물론 동사무소 등 관공서에 버젓이 걸려 있었고 당시 국민학교 외벽에도 걸려 있었던 문구. 이 정부의 태생부터 따져보자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치프레이즈다.[2] 그리고 여당의 이름 또한 정부의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민주정의당이었다.[3][4]
한편으로는 사회 각 분야와 문화에 있어서, 제한적으로나마 여러 통제를 풀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이 집권 후반기때 국민들의 사소한 옷차림과 머리카락까지 일일히 단속했다가 오히려 반발을 거세게 사서 결국 패망한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도 있었고, 거기에 집권정당성 부재로 인해서 독재정권이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고 박정희와 대비되는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하는 이유와 함께 올림픽 개최로 인해서 보여주기식이라도 서방 선진국들의 눈치를 어느 정도 봐야했으며, 전두환 본인도 축구와 유흥을 좋아했던 인물이어서 이런 제한적 자유화 정책이 전두환 본인 성격과 구미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즉, 올림픽 개최와 정권정당성 부재로 눈치를 봐야되는 상황과 전두환 본인의 취향이 합쳐져 꽤 진일보한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5]
대표적으로 'Sports, Sex, Screen'으로 대표되는 '3S 정책'과 야간통행금지령 해제, 해외여행 단계적 자유화[6] 조치, 교복 자율화, 과외 금지령, 컬러TV 보급 등의 업적이 있다. 그리고 이 당시에는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여긴 국민이 가장 많았던 시기였다.[7]
교육정책도 당시 기준으로 진보적인 정책을 도입해서, 과외금지조치를 폄과 동시에, 1982년에 교복자율화 및 두발자유화 조치를 발표, 일선 중고등학교의 두발규정은 2000년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완화되었고,[8] 교복 역시 철도고등학교와 해양고등학교같은 일부 특수목적 학교들의 제외한 나머지 학교에서 의무착용조항을 폐지했기 때문에, 2010년대에 집권한 진보교육감들의 정책을 선행해서 시행했다는 평이 나온다.
물론 자유화 조치를 취한다고 해도, 이전보다 검열수위가 낮아진 수준이지, 검열 자체가 사라진것은 전혀 아니었다. 주요 언론의 경우에는 보도지침으로 기사를 어느 정도까지 내야되는지를 안기부한테 일일히 지시받았고,박정희 후반기 때와 마찬가지로 시사잡지와 뉴스, 시사 프로그램에서 정권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은 여전히 금지되었으며, TV개그 프로그램에서 대머리를 소재로 쓰는 것을 암묵적으로 금지했다. 한수산 필화사건처럼 작품썼다가 심기에 거슬려서 고문당하거나 감옥가는 일은 여전히 벌어졌으며, 또한 가요나 만화, 영화도 검열은 여전해, 1980년대를 대표하는 만화인 아기공룡 둘리와 달려라 하니도 첫 작품설정이 검열담당기관에서 불허를 당해서 결국 설정을 변경해야 했다. [9]그리고 이 당시에는 노동시간 단축같은 조치는 없어서 연간 노동시간이 여전히 3천시간에 육박할 정도로 매우 길었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들은 저런 문화를 즐길 여유가 없던 경우가 태반이었고, 이는 교육정책에 있어서도 매한가지여서 체벌제한이나 체벌금지 조치같은것은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10] 두발규정이나 복장규정이 박정희 시대에 비해 획기적으로 완화되었다고는 해도, 규정에 어긋나면 매를 맞거나 강제로 머리를 밀리고 다니는것은 이 당시에도 매한가지였으며, 또한 아무리 과외금지 조치를 취한다 한들,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 대학에 보내는 학생들을 늘리기 위할 목적에서 야간자율학습 및 0교시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고등학생들이 이른아침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있어야 했었고,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하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참여하게 만들기 일쑤였고,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매를 휘두르기 일쑤였다.
당시 최고 인기 코미디언이었던 김병조는 민주정의당 전당대회 및 차기 대선 후보 지명식에서 "민정당은 국민에게 정(情)을 주는 당, 통일민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당"이라고 말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11][12] 이 발언이 터져나왔던 장소는 잠실실내체육관이었으며, 그날은 하필 1987년 6월 10일이었다.
2.3. 대한민국 제5공화국 헌법[편집]
제5공화국 헌법은 1980년 10월 22일 국민투표를 거쳐 10월 27일 개정되었다. 제2공화국 다음으로 가장 짧은 국가 체제였다. 전두환이 투표 직전에 기권은 반대보다 더 나쁘다는 극언을 했던 까닭에 투표장에 환자가 앰뷸런스를 타고 나타나서 투표를 하고 간 것이 대서특필되었던 미담 아닌 미담이 있다.
제5공화국 대통령의 선출 방식은 간선제이고 임기는 7년 단임제[13][14]였는데, 이는 전두환 자신이 장기 집권을 한 이승만, 박정희와는 차별화되는 대통령이라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의 12대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언급이 등장할 정도.
다만 본인의 임기는 단임으로 하되 후술하듯이 자신의 측근을 후임 대통령으로 내세워 상왕으로 군림하려고 시도하였다.[15]
국회의원 선거 방식은 전국 92개의 중대선거구 지역구에서 최다와 차다 득표자를 뽑고(184명), 지역구에서 받은 의석에 비례해서 비례대표인 전국구를 92명 뽑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역구 제1당이 비례대표의 2/3인 61석을 무조건 먹는다. 즉 여당이 전 지역구에서 2등 안에 들어 지역구 절반을 먹고 들어간다 + 여당이 지역구에서 제1당이 되지 않을 리가 없으니, 61석을 먹는다 = 여당이 5/9인 153석, 즉 150석 언저리는 먹고 들어가므로 여당은 결코 과반(총 의석 276석 중 138석)을 놓칠 수 없다. 이를 두고 11대 총선 당시 민정당 초대 대표위원 이재형[16]은 "지역구와 전국구를 다 합쳐 봤자 55%밖에 안 되는데 무슨 비민주적이라는 거냐."라고 발언했다.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는 선명야당을 표방한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득표율은 신민 29.3% + 민한19.7% = 49.0% > 민정 35.2% 였는데도 민정당이 148석[17]을 차지하여 과반을 넘겼다. 만약 전국구를 지역구 득표율에 따라 정확히 배분했다면 신민+민한 120석 VS 민정 119석이 될 수 있었는데, 이것만 봐도 선거제도가 얼마나 불공정했었는지 잘 알 수 있다.
제5공화국 대통령의 선출 방식은 간선제이고 임기는 7년 단임제[13][14]였는데, 이는 전두환 자신이 장기 집권을 한 이승만, 박정희와는 차별화되는 대통령이라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의 12대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언급이 등장할 정도.
다만 본인의 임기는 단임으로 하되 후술하듯이 자신의 측근을 후임 대통령으로 내세워 상왕으로 군림하려고 시도하였다.[15]
국회의원 선거 방식은 전국 92개의 중대선거구 지역구에서 최다와 차다 득표자를 뽑고(184명), 지역구에서 받은 의석에 비례해서 비례대표인 전국구를 92명 뽑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역구 제1당이 비례대표의 2/3인 61석을 무조건 먹는다. 즉 여당이 전 지역구에서 2등 안에 들어 지역구 절반을 먹고 들어간다 + 여당이 지역구에서 제1당이 되지 않을 리가 없으니, 61석을 먹는다 = 여당이 5/9인 153석, 즉 150석 언저리는 먹고 들어가므로 여당은 결코 과반(총 의석 276석 중 138석)을 놓칠 수 없다. 이를 두고 11대 총선 당시 민정당 초대 대표위원 이재형[16]은 "지역구와 전국구를 다 합쳐 봤자 55%밖에 안 되는데 무슨 비민주적이라는 거냐."라고 발언했다.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는 선명야당을 표방한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득표율은 신민 29.3% + 민한19.7% = 49.0% > 민정 35.2% 였는데도 민정당이 148석[17]을 차지하여 과반을 넘겼다. 만약 전국구를 지역구 득표율에 따라 정확히 배분했다면 신민+민한 120석 VS 민정 119석이 될 수 있었는데, 이것만 봐도 선거제도가 얼마나 불공정했었는지 잘 알 수 있다.
2.4. 헌정 사상 초유의 일당독재[편집]
이 시기 야당들은 안기부의 통제 하에 탄생한 관제야당이었다. 사실상 전두환 대통령이 소속된 민주정의당의 일당제 체제였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18] 3김[19]으로 대표되는 유력 야당 정치인은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1985년이 되어서야 해금이 되었다. 구 신민당 계열의 민주한국당(2중대), 구 민주공화당 계열의 한국국민당(3소대), 그 외 신정치사회당, 민권당, 농민당, 민족당, 거기에 민주사회당(사회민주당) 등의 진보 정당까지 만들었다. 참고로 2중대, 3소대라는 조롱에서 민주정의당은 1대대였다. 실질적인 야당이 부활한 것은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이 창당되면서 시작이 되었기에 전두환 정부는 헌정 사상 유일무이하게 일당독재를 한 정부였다.[20]
심지어 1981년 국회의원 선거 당시 민주정의당으로 공천신청을 했더니 제1야당 민주한국당 후보로 공천된 사례도 있다. 당시 정부가 여당뿐만 아니라 야당의 창당 및 공천, 당직 임명까지 관여했기 때문인데 여야 모두가 당시 정부의 꼭두각시였던 셈이다. 자세한 건 민주한국당 참조. 이것이 어원이 되어서 현재에서도 특정 단체/집단/커뮤니티의 멀티라는 의미를 비꼴 때도 이 2중대라는 용어가 가끔 쓰인다.[21]
당시 민주한국당 총재였던 유치송의 회상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심지어 1981년 국회의원 선거 당시 민주정의당으로 공천신청을 했더니 제1야당 민주한국당 후보로 공천된 사례도 있다. 당시 정부가 여당뿐만 아니라 야당의 창당 및 공천, 당직 임명까지 관여했기 때문인데 여야 모두가 당시 정부의 꼭두각시였던 셈이다. 자세한 건 민주한국당 참조. 이것이 어원이 되어서 현재에서도 특정 단체/집단/커뮤니티의 멀티라는 의미를 비꼴 때도 이 2중대라는 용어가 가끔 쓰인다.[21]
당시 민주한국당 총재였던 유치송의 회상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창당 후 야당 총재들이 전두환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조찬을 한 적이 있다. 전씨 앞에서는 야당이라는 용어를 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대화 중에 야당 총재와라는 말을 무심코 썼더니 전씨가 "야당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1, 2, 3당이지요."라고 정색을 했다. 전씨의 이 말에 아무런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고, 또 그러는 야당 총재도 없었다.'
실제로 여야라는 표현은 국론분열을 부추긴다며 나라일을 사이좋게 함께 논의하는 친구 정당이라고 "우(友)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3. 대외관계[편집]
3.1. 대미관계[편집]
미국과의 관계는 대체로 돈독했다. 전두환은 로널드 레이건의 대소정책에 부응하여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체제를 강화하며 전술핵무기 배치, 팀 스피릿 훈련 강화 등 긴장고조 정책을 추진했고 미사일 개발 정책 폐기와 함께 박정희 정부 때 추진했던 핵개발 정책도 폐기했다.[22] 이를 바탕으로 집권 당위성을 인정받았지만 당시 민주화 세력 사이에선 '한반도 핵 볼모화' 우려가 커져갔고, 미군 주둔 비용도 늘어나 1986년 존 위컴의 미 의회 증언 기준으로 매년 10억 달러로 증가했다. 더군다나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압력으로 농/축산물 수입 개방이 시작되어 농민들도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이에 농민과 운동권들은 반미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 내에서는 전두환 정부를 향한 비판도 이어졌는데, 이미 1979년 12.12 군사반란 때부터 미국 측과 협의를 거치지 않아 마찰이 심했다. 전두환은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박정희가 집권 말에 미국과 마찰을 겪어 무너진 것과는 다르게, 상술했듯 미국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함으로서 대미관계를 회복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관련해서는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의 워싱턴 방미를 조건으로 김대중의 사형을 반대했고, 1985년 김대중이 귀국할 때 동행한 미국 정치 인사[23]들과 안기부 요원들 사이에 몸싸움마저 있었다. 미국 정계 인사들이 김대중과 동행한 이유는 바로 전 해에 비슷한 경로로 귀국했던 필리핀 정객 아키노가 공항에서 마르코스에 의해 암살되었기 때문에 김대중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한국 경찰과 안기부 요원이 김대중을 데려간답시고 미국 인사들에게까지 무력을 행사한 데 대해 미국은 내부적으로 매우 언짢아했으며 엘살바도르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로버트 화이츠는 아예 "한국 경찰이 저 모양인데, 3년 후에 미국인들이 안심하고 서울 거리를 다닐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는 말까지 하며 전두환 정부를 무안의 극치로 몰아넣었다.
한편 미국 내에서는 전두환 정부를 향한 비판도 이어졌는데, 이미 1979년 12.12 군사반란 때부터 미국 측과 협의를 거치지 않아 마찰이 심했다. 전두환은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박정희가 집권 말에 미국과 마찰을 겪어 무너진 것과는 다르게, 상술했듯 미국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함으로서 대미관계를 회복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관련해서는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의 워싱턴 방미를 조건으로 김대중의 사형을 반대했고, 1985년 김대중이 귀국할 때 동행한 미국 정치 인사[23]들과 안기부 요원들 사이에 몸싸움마저 있었다. 미국 정계 인사들이 김대중과 동행한 이유는 바로 전 해에 비슷한 경로로 귀국했던 필리핀 정객 아키노가 공항에서 마르코스에 의해 암살되었기 때문에 김대중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한국 경찰과 안기부 요원이 김대중을 데려간답시고 미국 인사들에게까지 무력을 행사한 데 대해 미국은 내부적으로 매우 언짢아했으며 엘살바도르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로버트 화이츠는 아예 "한국 경찰이 저 모양인데, 3년 후에 미국인들이 안심하고 서울 거리를 다닐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는 말까지 하며 전두환 정부를 무안의 극치로 몰아넣었다.
3.2. 대일관계[편집]
전두환은 미국만 아니라 일본과도 관계가 깊었는데, 1983년 1월 나카소네 방한 및 11월 레이건 방일/방한을 계기로 '안보경제협력'이란 명분 하에 7년 동안 매년 40억 달러씩을 받도록 합의했다. 이를 전후해 1982년 일본 문부성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이 터지면서 반미뿐만 아니라 반일투쟁도 더해갔다. 전두환 정부 출범 이전에도 5.18 민주화운동 진압에 대해서 옹호하는 듯한 외무성 발언이 드러나기도 했다.#
4.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 정부/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진의종 총리가 뇌출혈로 쓰러져 국무총리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어 임시로 임명했다.[2] 정의사회 구현에 앞장선다고 사회정화위원회라는 행정 부서를 전국 읍면동 단위까지 만들었다. 민주화 이후 1989년에 해체되어 기존 구성원은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라는 민간 단체에 흡수되었다.[3] 정당의 명칭과는 별개로 정작 제5공화국의 출범 과정과 5공화국 핵심 인사들의 집권 과정은 아예 정당성과 정통성이 결여된 점이 아이러니한 점이다.[4] 이후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통해 당권을 잡고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거쳐 새누리당이 되었다가 자유한국당, 바른정당으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바른정당은 다시 바른미래당, 새로운보수당을 거쳐 미래통합당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자유한국당과 다시 합쳐지게 되고 이것이 현재 국민의힘으로 이어졌다.[5] 재미있게도 당시 북한에서도 김정일의 지도하에서 문화자유화 움직임이 불었다. 두발자유화나 여행자유화도 이때 잠깐 시행했었기도 했고, 대중문화 진흥에 나름대로 공을 들여서 북한 기준에서는 나름대로 파격적인 수위의 영화가 개봉되거나, 전자음악을 활용한 대중가요가 널리 불러지기 시작했는데, 이 점에 있어서 김정일과 전두환이 서로 상호간 영향을 받았다는것을 유추할 수 있다.[6] 다만 이것도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장노년층이나 자유화한 것이고, 젊은층들은 자유화 조치에서 예외였다. 완전한 해외여행 자유화는 민주화 이후인 1989년에 이루어진다.[7] 다만 이건 언론통제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물론 이웃 일본과 대만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잘 알려져 있었고, 사회인프라도 많이 낙후된 시절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의식수준을 개혁해야된다는 식의 캠페인을 벌이거나 사회의 어두운 면을 검열삭제하는 식으로 대응하였으며 언론자유가 풀어진 노태우와 김영삼 때에도 경상수지 적자로 한국경제가 위기에 빠졌다는 식의 기사가 많이 남발되었다.[8] 이 당시에는 두발자유화 조치였지만, 이 당시 두발자유화 지침에 의거하면 염색과 파마는 금지대상이었고, 남학생들의 머리길이도 옷깃에 닿거나, 귀를 덮어서는 안된다는 기준이 적용되었다. 또한 이외에도 학교장 재량에 일임한다는 조항으로 인해 각 학교에서 학교장 재량으로 학생들의 머리길이를 규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보통은 남학생은 뒷머리, 여학생은 생머리까지 할수있는 수준이었으며, 엄격한 학교들은 3cm 이내의 스포츠머리와 5cm 이내 단발머리를 강제했기 때문에 두발자유화 조치가 통일적으로 적용되지 않았다.[9] 물론 이 당시에도 심술통이나 꺼벙이, 코망쇠 같은 다른 명랑만화는 멀쩡히 출판했기 때문에, 당시 기준이 오락가락했다는것을 알 수 있었다.[10] 물론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체벌을 규제한다는 공문이나 치침이 내려온 적이 있었기는 했지만, 일선학교에서는 무시되었다.[11] "일요일 밤의 대행진"(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전신)을 진행하면서 현재 유재석이나 강호동 이상의 인기를 누렸던 코미디언이었으나 이 발언으로 전국민의 공분을 샀으며 그 이후 거의 연예계 생명이 끝났다고 할 정도로 타격을 받았고, 조용히 지내다가 SBS 개국 때 이적했다.[12] 다만 이는 엄연히 당시 정부와 MBC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대사였으며, 실제 김병조 본인은 대본을 보는 순간 매우 당혹스러웠다고. 리허설 때 이 모습을 지켜본 정권 관계자는 "그 부분이 곤란하면 빼라."는 말을 했다.[13] 원래는 6년 단임제였고 선출 방식은 직선제였으나 전두환 본인이 당시 프랑스의 예시를 들며 숫자는 럭키 세븐#이라며 임기는 7년 단임제, 선출 방식은 간선제로 변경시켰다.[14] 만약 임기는 7년으로 변경시켰어도 선출 방식이 직선제였다면 정치적으로 최소한의 집권 정당성은 확보되었겠지만 간선제로 시행했고, 이 결정은 결국 전두환 본인이 대한민국 대통령 중 가장 집권 정당성이 부족한 대통령으로 남는 아킬레스건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역사 바로세우기때 소급입법 논리중 가장 결정적인 것이 전두환의 집권과정중 민의를 대변한 직선제가 없다는 것이었다.[15] 사실 전두환은 자신의 임기 말엽에 단임 결정을 후회하면서 내각제 개헌을 통해 수상 취임을 하는 방안도 고려했고, 6.29 선언 이후에는 제6공화국 헌법에 국가원로자문회의 조항을 삽입하여 자신이 자문회의 의장으로 막후 실세로서 사실상의 대통령이 되려고 했지만 친구인 노태우가 뒤통수를 쳤다. 결국 전두환은 노태우 임기 중에는 백담사에 유배를 갔다가, 김영삼 임기 중에는 친구와 함께 감옥으로 들어가게 된다.[16] 야당에서 변절해 5공화국에 참여했고 12대 국회의장이 되었다.[17] 지역구 87 + 전국구 61.[18] 북한, 중국, 투르크메니스탄이 관제야당을 둔 일당독재 국가로 5공 대부분 시기 대한민국과 비슷하다.[19]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20] 하다 못해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유신 독재 시기에도 실질적인 야당은 존재했다.[21] 대표적인 표현은 김용갑이 2000년에 사용한 "조선로동당 2중대"로서 북한의 멀티, 친북파라는 표현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김용갑은 5공화국의 핵심인사로서, 이 표현을 다시 띄운 대표인사가 되었다는 것이다.[22] 전두환은 비밀리에 핵개발 자체는 시도하였으나 레이건의 압력으로 1983년에 아예 포기했다.[23] 민주/공화 양당의 상원 의원들은 물론이고 전직 외교관, 학자들이 대거 동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