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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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총론[편집]
- 제목인 파묘(破墓)는 묘를 이장하거나 화장하기 위해 기존에 만든 무덤을 파(破)하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묫바람[1]이 일어났다고 여겨지면 파묘를 진행하기도 한다. 또한 파묘를 하기 전 "파묘요~!", "파관이요~!"라고 외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는 묘에 묻힌 고인이 파묘 과정에서 나는 소리에 놀라지 마시라는 의미에서 하는 것이라고 한다.
- 등장인물과 설정에 일제강점기 및 독립운동에 관련된 차용이 많다. 주인공 4인방의 이름은 모두 실제 독립운동가였던 김상덕, 고영근, 이화림[2], 윤봉길[3]과 같다. 화림의 동료 무당 두 명 또한 독립운동가 오광심[4], 박자혜와 같다. 보국사를 창건한 주지스님의 이름은 원봉 스님으로 의열단의 단장 김원봉과 같다. 상덕과 영근이 운영하는 사무실 '의열 장의사'는 의열단이 연상된다. 상덕의 차량 번호 '49 파[5] 0815'는 광복절을, 화림의 차량 번호 '19 무 0301'은 기미년(1919) 3.1 운동을, 영근이 운전한 운구차의 번호 '경기 40 바 1945'는 광복 연도인 1945년을 연상케 한다.
반대로 친일파 집안인 박지용 어머니의 이름은 일제강점기 여성 친일파였던 배정자와 같고, 아버지 박종순은 을사오적 박제순과 비슷하다. 박지용 역시 을사오적의 일원인 이지용과 이름이 같다. 주인공들이 맞서 싸우게 되는 적이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반민족행위자 악령과 일제 군부를 형상화한 오니라는 점에서 의미가 상통한다.
다만 작중 조선 땅에 박힌 쇠말뚝을 제거하던 단체 '철혈단'은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단체의 이름과 일치하지만, 장재현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를 의식해서 이름을 가져온 건 아니다"고 밝혔다. 쇠와 피가 이 영화의 주제와 맞아서 이름을 지었는데 나중에 후반 작업을 할 때 그런 단체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 전작부터 자동차를 캐릭터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자주 사용해 온 장재현 감독답게 이번 작품에서도 등장인물들이 타는 자동차에 디테일이 숨어 있다. 가장 비중의 큰 인물인 상덕의 자가용은 지프 그랜드 체로키 3세대인데, 영화를 통틀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차량이다. 일단 상덕이 지관이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한반도 구석구석의 산간 지역과 비포장도로를 돌아다닐 일도 많은 만큼 4륜구동 SUV 차량을 자가용으로 택한 것은 당연하다. 다만 국산차 중에도 렉스턴이나 모하비처럼 정통 SUV가 있고 랭글러가 아닌 이상 지프의 모델에 비해 오프로드 성능이 그리 모자라지도 않는데,[6] 굳이 기성세대인 상덕 입장에서는 생소하고 유지비에서도 손해인 미국 회사의 차량을 사용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지프의 근원이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에서 미군이 이용한 군용차이다. 윌리스 MB는 20세기 중반의 미군을 대표하는 차이며, 지프 또한 그 이미지를 후광삼아 성장해온 브랜드이다. 미국은 일제강점기에 마침표를 찍은 국가이기도 하며, 서울 진공 작전 등으로 독립군을 지원한 적도 있다. 즉 최종전인 오니와의 전투는 어떻게 보면 독립투사 4명이 일제의 수괴를 제거하러 미국제 지프를 타고 한반도의 허리로 향한다는 그림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 일본어를 잘 아는 관객이라면 묘지 인근을 돌아다니던 여우 떼 장면에 이어 '기순애'라는 스님에게 묫자리를 추천받았다는 말에서 'キツネ(키츠네, 여우)'를 연상할 수 있고 일본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후 "キツネが虎の腰を切った。(키츠네가 토라노 코시오 킷타;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는 대사로 한번 더 여우가 언급되고, 결국 기순애의 정체가 '여우같은 음양사' 무라야마 준지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 사실 일본어를 모르더라도 보통 동아시아의 스님들 법명이 2글자인 걸 생각하면 3글자인 기순애라는 법명은 무언가 기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중에서 상덕도 듣자마자 특이한 법명이라고 언급한다. 기순애가 스님의 속명(속세 시절 본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 스님의 법명은 알아도 속명을 아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 기순애가 한국식 가명으로 위장한 이름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이는 맞지 않다. 감독의 언급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문헌에 키츠네를 기순애로 표기한 경우가 있어 이를 가져 왔으며, 관객들 중 연배가 있으신 분들은 기순애라는 이름을 듣고 키츠네임을 바로 눈치 챘을 수 있을 거라고 봤다고 한다.
즉, 기순애는, 무라야마 준지가 한국인으로 위장한 게 아니라 그냥 일제강점기 당시 여우 음양사, 일본어로 キツネ陰陽師(키츠네 온묘지)라는 별칭으로 유명했던 무라야마 준지를 부를 때 '키츠네'라는 단어를 조선인들이 기순애라고 부르던 말임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상덕이 박지용에게서 '근처 절의 기순애라는 스님이 묫자리를 정해줬다.'라는 말을 듣고 당연히 한국인이겠거니 생각했을 뿐, 영화 상에서 무라야마 준지가 한국인으로 위장했다는 내용은 일체 나오지 않는다. - 상덕이 박지용의 말을 듣고 근처 풍수 표식이 있던 절인 보국사를 찾아갔을 때, 주지스님이 원봉 스님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박지용이 거짓말을 했거나, 진실을 모르고 그저 아버지에게 전해 들은 대로 말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매국노 박근현을 벌주기 위해 애국심 투철한 기순애라는 승려가 그를 악지에 묻은 거 아닌가' 추측하는 상덕에게 기순애의 정체가 일본인인 것을 알려준 사람은 박지용의 고모였다. 그리고 고모가 어린 시절에 박근현 일가를 찍은 사진에서도 사진 한켠에 일본 음양사 복식을 갖춘 무라야마 준지가 같이 있었다. 고모나 박종순은 처음부터 기순애가 일본인이고 승려가 아닌 음양사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한국의 야생 여우는 거의 멸종 상태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적으로 살던 여우는 멸종했다고 보는 게 맞고, 2010년대부터 행해져 온 복원사업으로 인해 풀려난 개체들이나 밀수꾼들이 들여온 여우가 무단으로 방생되었다가 야생화된 개체 정도로 매우 소수이다. 즉 야생 여우가 이상하리만치 모여있는 광경은 매우 기이하다 볼 수 있다. 특히나 상덕은 이런 쪽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므로 더더욱 큰 위화감을 느꼈을 것이다.
- 파묘 장면에서 등장하는 '대살굿'의 원래 명칭은 '타살굿'이다. 황해도 지방에서 행해진 동물을 죽여서 신에게 바치는 굿으로 '타살군웅굿'이라고도 불리운다.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동물을 대신 바치는 행위를 무속에서 '대살' 이라고도 불러서 '대살굿'이라는 명칭을 썼다고 한다.
- 파묘했던 자리에서 한 인부가 시커먼 털로 뒤덮혀 인간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기괴한 뱀을 삽으로 죽이는데, 이는 일본에서 전승되는 요괴인 누레온나로 사람을 끌여들여 죽이고 잡아먹는 요괴이다.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일본의 요괴인 누레온나가 한국의 묘지에 있는 이유는 원래 평범했던 뱀이 박근현의 관에 침범했다가, 그 밑에 있던 오니의 요기에 의해 누레온나가 되버렸다고.
한편 그런 요괴를 죽이고도 동티 정도로 끝난 이유로는 인부가 돼지띠라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돼지는 뱀의 천적으로 유명하며 12간지에서도 뱀띠는 음양오행 상으로 불, 돼지띠는 물로 분류되어 서로 상극으로 친다.
- 김상덕이 풍수지리와 우주공학 사이의 유사성을 설파하는 장면이 있다. 미신으로 치부되는 풍수지리도 곱씹어 보면 과거부터 오랜 경험으로 축적된 데이터를 근거 삼아 실생활에 적용한 학문이었기에, 조상들은 "상통천문 하달지리"라 하여 풍수지리학과 천문학 두 가지를 같이 배우는 것을 주력으로 삼았고 유학자들 중에도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자들도 많았다. 여기에 중찰인사(또는 중찰인의)라 하여 의술(또는 관상)까지 섭렵한 사람을 최고로 쳤는데 천문, 지리, 의술에 두루 능했던 대표적 인물로 토정 이지함이 있다. 비슷하게 서양에서 미신으로 볼 수 있을 연금술과 점성술도 훗날 화학과 천문학의 초석이 되었다.[7]
- 박지용의 갓난 아들에게 외국인 간병인이 자장가 Rock-a-bye Baby를 불러주는 장면이 있는데, 마더 구스이다 보니 멜로디는 달콤하지만 가사 내용이 무섭다. '바람이 불면 요람이 흔들리고, 나뭇가지가 부러지면 요람도 아기도 떨어진다'는 내용은 아기에게 닥칠 수 있는 위험을 암시한다.When the wind blows the cradle will rock,
When the bough breaks the cradle will fall,
And down will come baby, cradle and all.Rock-a-bye Baby 가사 중에서
- 망자의 혼령이 자기 아들을 찾아 미국까지 순식간에 날아갔다. 이에 대한 논쟁이 있다. 어떻게 지평좌표계로 고정을 하셨죠? 같은 류의 과학적 고찰을 하는 부류가 있고, 혼령은 자기 맘대로 바다를 건널 수가 없다고들 하는데, 혼령이 어떻게 바다 건너 땅인 미국까지 갈 수 있느냐는 의견도 있다.
반면, 육체가 없는 혼령에게 물리적인 속도를 따지는 것부터가 억지라는 의견이 있고, 미국 집에 고인의 위패가 있다면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장자계승제에 따라 막내인 박종순이 위패를 모실 수 있으려면 상위 계승자들이 모두 죽은 후라야 한다. 후에 나오는 고모의 가족사진으로 보건데, 박종순의 위로 형이 몇 더 있다. 아버지를 그 묫자리에 묻고 나서 묫바람이 시작됐다면 장손들이 줄초상을 치르면서[8] 결국 막내였던 박종순이 장손이 되어 위패를 받았다고 하면 말이 된다. 박지용이 장손이었던 친형이 죽었으니 본인이 장손이라고 하는 장면도 이런 탐구를 뒷받침하는 근거 중 하나다. 또, 상덕이 초반에 등장하며 말한 내레이션 중 "죽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공혈(共血)의 집단"이라는 문단이 이 부분을 암시했다는 추측도 있다.
- 중간 보스인 박지용의 친조부 악령은 악지 중의 악지에 매장되었던 수십 년 치의 한이 쌓인 탓인지[9] 아들과 며느리, 손자를 살해하고 갓난아기인 증손자까지 노리는 악령으로 돌아온다.[10] 살아서도 그토록 일본에 충성하고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는데, 결국 죽어서도 일본의 음양사한테 속아 쇠말뚝 오니의 위장 가림막 노릇을 하도록 이용당했다. 정작 후손들은 자신의 친일 행위로 얻은 부를 누리고 있으면서 자신의 묘는 단 한 번도 살피지 않아 오니에게 시달리도록 만든 후손들에게 분풀이를 한 셈이니 악령 입장에선 재산을 물려준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할만 하다. 결국 비오는 날 화장되는 바람에 극락왕생도 못 하게 된다.
- 특이하게도 박근현의 악령은 주인공 일행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물론 관에서 빠져나왔을 때 이화림이 코피를 흘리긴 하지만, 이 역시 악령이 이화림을 직접 공격한 것은 아니고 그냥 원령의 음기 때문이다. 주인공 일행이 박근현의 시신을 관째로 불태우려 하거나 주술을 통해 악령을 불러오려 하는 등, 악령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방해하는데도 오로지 직계 가족만을 노린다. 심지어 손자 박지용에게 빙의했을 때 김상덕과 호텔 여직원만 있었기 때문에 둘을 죽일 수도 있지만,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며 작중 흑막인 무라야마 준지의 계획을 암시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김상덕이 일본어를 못 알아먹자 친절하게 한국어로 다시 말해주기까지 한다. 이는 '원한을 가진 사람만 공격한다'는 한국 원령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 박근현의 악령은 직접적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사물에 비춰지는 방식으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아들 박종순과 손자 박지용을 해칠 때 창문을 열어달라고 유혹하는데, 감독에 따르면 이는 뱀파이어의 습성에서 따왔다고[11]. 그런데 처음에 아들을 찾아갔을 때는 원한에 가득 찬 상태의 굶주리고 앙상한 걸귀나 괴물처럼 보였는데, 식구들을 여럿 살해하고 더불어 맛난 식사와 식수 섭취까지 하다 보니 손자를 찾아갔을 때는 점점 신수가 훤해지고 일제 시대 복장을 걸치다가, 막판에 증손자를 살해하러 갔을 때는 마치 제삿밥이라도 먹으러 온 것처럼 때깔 고운 한복을 입고 건강해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
- 화장하는 장면에서 고영근이 부른 '명사십리 해당화야'로 시작하는 소리는 상엿소리의 한 부분이다. 지역마다 가사는 다르기는 하다.
- 기순애의 정체로 밝혀지는 '여우음양사' 무라야마 준지는 조선총독부의 관리로서 한국의 무속이나 토속신앙에 대한 저서를 여럿 남겼던 일제강점기 시절의 민속학자인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에게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일보는 외부 필진의 입을 빌어 굳이 무라야마 지준을 옹호하는 칼럼을 주말판에 실었다.# 해당 필진은 무라야마의 묘에 참배한 적도 있다고 한다.
- 오니에 살해당한 보살의 원혼이 봉길의 꿈에 나타나 배를 밟은 것은, 보살의 원혼이 주인공들을 도우려고 일부러 가위를 누른 것으로 보인다. 일부러 험한 모습으로 꿈에 나타나서 일행을 깨우고 위험을 알리려 했고, 처음에 영근에게 갔다가 일어나지 못하자 봉길에게 옮겨간 걸 보면 잠을 깨우는 게 목적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실제로 봉길이 보살의 원혼을 마주하자 보살은 봉길을 쳐다보며 빨리 일어나라는 듯 말이 점점 빨라지고 격해진다. 그 덕분에 상덕 일행은 무방비하게 잠든 채 오니에게 살해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보국사 보살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상덕 일행에게 선행을 베푼 셈.[12]
- 보살이 중얼거리던 말에서 '내 옷은 어디갔어?' 하며 옷을 찾았던 이유는 불교식 상례 중 착복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말 그대로 시신에 겉옷을 입히는 의식인데, 망자에게 부처의 옷을 입혀 모든 흉하고 추한 모습을 가리고 정화시켜 번뇌를 참고, 원한 없이 편히 잠들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스님은 원한을 갖지 않고 떠나고 싶으니 봉길에게 겉옷, 즉 부처의 옷을 찾아 입혀 달라는 말도 같이 한 것이다.
- 도깨비불을 보면서 상덕, 화림, 영근 세 사람이 마치 죽기 전 주마등처럼 과거의 기억들을 영상처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영근은 그저 영화 속에서의 행적이 그대로 나오는 것에 비해 상덕과 화림은 '영화에서 공개되지 않은' 더 과거의 시점들이 스쳐 지나간다.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하는 프리퀄을 기대하는 관객들이 제법 있다.
- '일본 귀신은 한국 귀신과는 다르게 사람을 무조건 죽이려고 해서 상대하기 힘들다'는 묘사가 나온다. 실제로도 한국 민담에서는 원령이라도 생자들이 '당신의 원수를 살아 있는 우리가 대신 갚아주겠다'고 하면 납득하고 생자들을 돕는 전개가 많은 데 반해, 일본의 민담에 나오는 원령은 지독한 원한의 결집체라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묘사된다. 한과 원한의 차이로도 볼 수 있다. 주온, 링 등의 일본 호러 영화에서도 이러한 점이 드러난다. 한편으론 이러한 조건에서 이화림과 오광심이 상대하고 살아남은 걸 보면 이 둘이 용한 무당이란 걸 알 수 있다.
- 손자 박지용에 빙의한 박근현이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고 말해 상덕에게 힌트를 주는데, 박근현이 이것을 어찌 알게 되었는가?
그에 대해선 박근현이 생전에 무라야마 준지와도 교류가 있었기에 그가 한반도에서 행한 주술 행사에 대해 알았을 가능성도 있고, 자신이 죽고 이 악지에 첩장된 이후, 혼령 상태에서 오니의 존재를 알게 됐을 가능성이 있다.- 상덕이 악지라 평했던 이 묫자리가 범의 척추 자리라면 산천의 정기가 모이는 혈처(穴處)일 곳이고, 명당이어야 하는데 왜 악지가 되었는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처음부터 이 자리가 악지가 아니었다는 것은 박근현의 묘에 처음 갔을 때 영근이 보인 반응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영근이 이 무덤에 처음 왔을 때, 주변 산세가 좋고 용이 흐른다고 말한다. 영화 초반에 영근이 오랫동안 상덕과 함께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 풍수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는데, 상덕이 김 회장네에 잡아준 묫자리가 아주 좋은 명당은 아님을 정확히 지적한 적도 있다. 이를 보면 이곳이 단순히 입지만을 고려하면 원래는 명당 축에 속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13] 이곳이 악지가 된 이유는 무라야마 준지가 오니를 묻는 주술 의식을 통해 백두대간의 정기를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오니의 살기와 함께 이곳에 음기가 쌓이고 쌓이게 된 것이다.
- 한편 처음부터 명당이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 때부터 명당은 씨가 말랐고 범의 허리에 위치해 있는 곳인데 기순애 말대로 최고의 명당자리라면 누가 벌써 묘로 안 썼을 리가 없다. 작중에서 상덕은 자기는 명당만 찾아다니기 때문에 이곳을 모른다고 했는데 지도로 배산임수만 봐도 명당의 후보를 추릴 수 있다는 성격상 40년 동안 지관으로 일한 상덕이 모른다는 건 오니와 관계없이 더욱 명당의 조건을 갖췄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또한 후반부에 큰 나무와 각종 엮여있는 것으로 봐서 그곳은 신령들을 모셨던 곳으로 볼 수 있는데 너무 신성하고 영엄한 곳은 풍수적으로 묫자리로 쓰기에 좋은 자리는 아니다.
- 봉길의 병실에 부적으로 결계를 친 후 산닭을 준비한 것은 만일의 경우 봉길 대신 닭으로 목숨을 대신하려는 대수대명(代壽代命) 의식을 준비하는 것이다. 대수대명 의식은 다른 생명에게 인간의 횡액을 전가하는 것이라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의식으로 꼽힌다. 저주나 마찬가지라서 의식을 한 사람에게 반대로 화가 미칠 수 있다. 그만큼 오니와 맞서는 화림, 자혜, 광심 셋의 상황이 절박한 것을 표현한다. 이렇게 보면 닭이 안 죽었으면 좋겠다는 자혜에게 광심이 핀잔을 주는 장면도 단순한 개그성 장면이 아닌, 대수대명 의식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동시에 화림 못지않은 베테랑 무당인 광심과 아직 어린 아기무당인 자혜의 정신력 차이를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 종교 의식에 희생될 동물과 그것을 안타까워하는 이가 있다는 점에서 감독의 전작 검은 사제들에 등장한 돼지와 비슷하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돼지는 악마를 담을 그릇이기에 무조건 죽어야 할 운명이고 닭은 일이 잘못됐을 때, 봉길의 목숨을 대신할 수단이라 일의 성공 여부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는 입장인 것. 즉 자혜는 닭이 안 죽었으면 좋겠다=화림 일행이 무사히 성공하기 바란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 고영근이 김상덕을 위해 읊어준 성경 구절은 전도서 4장 12절이다. 성경 구절로 볼 때 무엇인가 힘을 합쳐서 적에게 맞선다는 영화의 다음 내용에 대한 복선을 담고 있다.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 4장 12절
- 1장에서부터 친절하게 각 인물의 직업과 속성을 깔아준 이유는 후반부 오니와의 대결에서 적의 속성에 맞춘 대응 방법이 있었음을 묘사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볼 수 있다. 얼핏보면 무당 화림과 법사 봉길이 악당에 맞서 싸우기 적합하지만 이들은 주로 귀신 등 영혼을 상대해왔지, 정령에 가까운 오니에 맞서는 방법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화림이 오니를 죽일 수 없지만 시간을 끌 수 있다고 말한 것과 백마의 피로 오니를 약화시키는데 그친 건 무속의 사고방식으로 접근한 결과다. 한국 무속에서 귀신은 굿으로 어르고 달래거나 정 안 되면 멀리 쫓아낼 뿐, 때려잡는 존재가 아니다.[14] 기존의 신성한 방법들(소금, 말피, 법경, 할매신 등)이 아주 효과가 없지는 않지만, 오니는 실체가 있기에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오니를 완전히 없애는 방법은 한국식으로 발전한 무속보다 동양에서 전체적으로 통용되는 음양오행으로 공격하는 방법[15] 밖에 없었고 음양오행 사고방식에 더 익숙한 지관 상덕이 최종 보스를 죽이는 주인공이 된 것이다. 여우음양사는 침략 목적에 맞게 전쟁광을 베이스로 한 오니를 한반도의 중추에 심어 소기의 성과를 거뒀음에도 음양오행의 우주적 질서를 이용한 상덕에게 무너진다.
- 김상덕이 오니가 쇠말뚝 이었음을 깨달은 것[16]에 대한 또 다른 탐구가 있다. 이 영화는 한국 귀신과 외국 요괴를 모두 아우르는 이중 구조를 취하고 있다. 초반에 나오는 파묘와 묫바람은 한 맺힌 한국 귀신을 다루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첩장이 발견되면서부터 등장하는 오니는 일본 요괴다. 검은 사제들에서 나온 것처럼 악마의 사령으로 토속 귀신을 두고 진 최종 보스가 외국 악마인 구조다. 감독이 일본과 연결시킨 이유는 일본이 호러와 관련해 동양 오컬트에서 차지하는 영역이 크기 때문이고 한국의 불행한 과거사와도 연결 짓기에 알맞기 때문이다. 그리고 음양오행은 후에 설명되듯이 여우음양사와 연결된다.
- 장재현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
- 본 작품의 최종 보스인 다이묘 오니는 장재현 감독의 전작인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의 최종 보스와는 달리 '능동적이지 않은 적대자'라는 차이점이 있다. <검은 사제들>의 악마 마르바스는 기독교적 악마이기에 능동적으로 인간에게 해를 끼치려 하는 존재이고, <사바하>의 김제석은 자신의 적대자에 대한 예언에 사로잡힌 나머지 수많은 여자아이들을 의도적으로 학살했다. 하지만 다이묘 오니는 “일본의 귀신은 거리낌 없이 가리지 않고 죽인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무라야마 준지가 그를 쇠말뚝으로 삼아 한반도에 가져다 놓은 게 원흉이었을 뿐이다.[17]
- 또한 최종 보스 중 가장 격이 가장 낮은 존재이다. <검은 사제들>의 경우 대악마였고 <사바하>에서는 미륵으로 추정되는 그 존재와 운명론적 시련이라는 거창한 설정을 내세운 반면, 파묘에선 그냥 이름난 장수가 대음양사의 저주를 받아 변한 오니다. 물론 물리적인 전투력은 오히려 세 작품 중에서 가장 강하게 묘사되지만, 존재만으로 재앙을 가져오는 대악마나 불사의 존재인 미륵에 비하면 그냥 세기만 한 일본 귀신이라 아무래도 위엄이 떨어진다. [18]
2.1. 쇠말뚝과 철혈단, 무라야마 준지와 풍수지리[편집]
- 오니를 만난 후 상덕이 보국사 창고에 갔다가 묘 바닥에서 또 땅을 파는 이유.
오니에게 봉길이 부상을 입어 큰 수술을 위해 서울로 향한 일행과 달리 상덕이 홀로 보국사로 향한 것은, 쇠말뚝이 박근현의 묘에 박혀 있으리란 것을 직감했고 그 추측에 좀 더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상덕은 수술실 앞에서 봉길이 척추에 손상을 입었다는 것을 듣는데, 마침 수술실 앞에 걸린 사진 액자가 눈에 들어 오고 '한반도의 척추 <백두대간>'이라는 사진을 보면서 박지용이 죽기 전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고" 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보국사에 도착한 상덕이 박지용이 '조부의 묘를 도굴꾼들이 모르게 소박하게 모셨다'고 했던 말과 보살이 '도굴꾼들이 두고 간 장비가 여기 다 남아있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면서 창고에서 봤던 쇠말뚝을 유심히 다시 보기 시작한다. 상덕은 사실 처음부터 도굴꾼들이 묘를 파는데, 삽과 곡괭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그 많은 쇠말뚝들이 왜 필요했을까?라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고에서 발견한 철혈단의 책 안에는 '우리의 땅 나의 동지들 철혈단'이라고 적힌 그들의 단체사진과 한반도의 혈맥이 표시된 지도, 철혈단의 활동에 대한 것이 적혀 있었다. 이후 창고 내부를 더 탐색해보다가 마침내 철혈단의 곡괭이를 찾아내는데, 그 하나하나마다 철혈단 단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도굴은 범죄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날 수 있는 사진을 찍거나 도구에 자신들 이름을 적을 리 없다. 즉 이들이 단순한 도굴꾼이 아니라는 증거인 것이고, 상덕은 철혈단의 사진에 있던 사람들이 도굴꾼들 치고는 너무 비장하다는 것을 깨닫고 확신을 가진다. 또한 사진 안에 철혈단들의 발 아래 쇠말뚝들이 마치 전리품과 같이 찍혀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6장 쇠말뚝의 시작 부분에서 상덕이 철혈단의 삽과 곡괭이를 들고 박근현의 묘로 다시 오르는 것은 상술한 이유에 의해 쇠말뚝을 뽑기 위한 것이다. 철혈단이 도굴꾼들이 아니라 사실은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박은 쇠말뚝을 뽑으러 다녔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신했고, 그들이 못 다한 그 과업을 상덕 자신이 대신 해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 철혈단의 정체
- 작중 철혈단이 독립군 단체인가는 명확하지 않다. 감독의 언급에 따르면 영화 제작 이후 우연히 이름이 같은 실존 독립단체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라 했고, 작중 행적을 봐도 독립 활동에 연관한 정보가 일체 나오지 않아 단순한 지관 단체일 가능성이 더 높다. 철혈단의 사진을 봐도 독립이라는 글이 적힌 뭔가가 있다든지, 하다 못해 태극기를 들고 있다든지 하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철혈단이 독립군 단체라면 무라야마 준지는 오니가 묻힌 땅에 박근현의 묘를 첩장하기 보다는 차라리 조선총독부에 신고해서 그들의 활동을 탄압하는 게 더 쉬운 방법이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박근현의 묘를 오니가 묻힌 자리에 첩장한 것인데, 이는 음양사 무라야마 준지가 자의적으로 공권력을 동원할 수 없는 상태임을 보여준다. 무라야마가 자신이 몰래 박은 오니의 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철혈단을 잡아 달라고 일본 제국 경찰에 요청을 하였다 하더라도, 독립군 잡기 바쁜 제국 경찰이 일본 전통 신앙도 아닌 조선 풍수같은 미신을 믿고 토지측량용 쇠말뚝이나 뽑으러 다니는 철혈단을 잡기 위해 이런 산간벽지에까지 경력을 파견할 이유가 없다. 철혈단이 정말 독립단체였다면 무라야마가 나서기 전에 이미 제국 경찰이 체포하려 다녔을 것이다.
따라서 무라야마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낼 정도로 거물인 친일파 박근현의 묘를 오니가 묻힌 자리 위에 첩장하는 방법으로, 이 일대를 쉽게 출입하지 못하게 해 철혈단의 활동을 방해한 것으로 보인다. 보국사 보살이 증언한 대로 어느 높으신 분이 묻혀서 경비가 삼엄해져 접근하기도 어려웠다며, 어느 날 갑자기 도굴꾼들이 다 잡혀가서 북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도굴 혐의로 철혈단원들을 체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단원들이 실제 도굴을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풀려난 이후, 이들이 후에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군에 투신했을 가능성은 있다. - 철혈단이 해방 이후 활동한 단체인가에 대해서는 그 가능성이 낮다. 무라야마가 이들을 방해하기 위해 박근현을 첩장했다면 이래저래 논리가 맞지 않는다.
- 해방 이후 일본인과 친일파들 대다수가 대한민국 땅을 떠나거나 조용히 살았다. 무라야마가 해방 이후에 기순애라는 법명으로 정체를 숨기고 한국 땅에 살았는지에 대해선 정보가 없지만, 근처 절의 기순애라는 유명한 스님에게서 묫자리를 받았다는 말은 후에 거짓으로 드러났고 화림의 스승이 일본에서 무라야마를 만났었다는 얘기를 통해 그가 해방 이후 조선을 떠났을 가능성을 높혀 준다.
- 또한 유명한 친일파 박근현이 해방 이후에도 어떠한 사적 응징이나 형사 처벌을 받지 않고, 당시 많은 친일파들이 그러했듯이 이승만 정권 유지에 적극 동참하여 권력을 유지하던 중에 사망한 것인지는 영화 상에서 제공한 정보가 없어서 모르는 일이다.
만약 박근현이 해방 이후 사망했다고 한다면 손자 박지용에 빙의했을 때, 일제 찬양을 하는 연설이 아닌 일제에게 승리한 미군에 대한 찬양이나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연설, 또는 반공 연설 등을 했을 가능성이 더욱 높다. 이승만 정권 하에 살아남은 친일파들의 모습을 봐도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 더 이상 일본에게 충성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근현이 해방 후에 묻혔다는 가정은 무리가 있다.
- 이 영화는 쇠말뚝과 일제풍수모략설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사실 이 가설은 이미 학계에서도 논리를 뒷받침하는 논거가 거의 타파돼서 도시전설로 치부되고 있다. 이에 영화는 "99퍼센트는 가짜" 라는 고영근의 대사와 물리적인 말뚝 형태의 쇠말뚝은 없었다는 결론으로 표현하면서 영화적 판타지임을 십분 밝히고 있다. 일제의 쇠말뚝설을 역사 왜곡 내지는 도시전설로 인정하는 동시에, "그럼 1%는!" 했던 상덕의 말과 철혈단이라는 설정을 추가하면서, 영화적 상상력으로서 쇠말뚝의 개연성을 살렸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쇠말뚝 같은 것이 있긴 있었으나, 일본 제국의 공식적인 행사라기 보다는 무라야마 준지의 사적 행사였고, 이 작업을 되돌리려는 철혈단의 활동 역시 일본제국이 공식적으로 손을 대려 하지 않았기에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은 채 도시전설이 되었다.'라고 볼 수 있다.
- 일본의 풍수지리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을 위해 쇠말뚝 박았다'는 설을 논파하는 근거로서 많이 쓰이는 것이 일본에는 풍수지리 개념이 약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중국은 자금성을 만들 때, 풍수지리적 요소를 고려하여 인공산인 경산(景山, 징샨)을 따로 쌓기도 할 정도였으며, 한국의 왕릉은 빠짐없이 강산의 명당을 차지한 반면, 일본은 일왕이 기거하는 황거가 큰 산이 없는 평야지대에 큰 물길도 없는 곳에 위치하며 한국적 풍수지리로 해석하면 결코 길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에 의한 강제 개항 이후, 일본 제국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국가의 모든 것을 뜯어 고치는데,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민속 신앙도 천황의 아래로 정비해 국가신토를 지향한다. 오랫동안 일본에 뿌리내린 신토는 건재했으나, 신의 힘으로 믿어졌던 자연 현상들이 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해지고, 국가적 차원에서 음양도는 미신으로 치부되어 음양사들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원래도 위세가 강하지 않았던 일본의 풍수지리가 더욱 위축되었으리라 추측된다.
과거 일본의 풍수지리는 후수이(風水)라 부르고 <北木山風水記> 같은 유명한 풍수지리서가 있다. 작품 내 중요한 키워드인 음양사는 고대 일본 헤이안 시대에 풍수를 살피는 지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국은 음택 풍수(묘지 등 죽은 자를 위한 풍수)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일본은 양택 풍수(주택 등 산 자를 위한 풍수)를 우선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지진이나 태풍 등 자연재해와 맞서야 했던 역사, 환경적 맥락과 연관이 있다.
앞서 언급한 황거 역시 양택 풍수 측면에서 길지는 아니지만 악지로도 볼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 요약하면, 일본은 개인이나 한 가족 단위의 운수를 틔워주기 위해 집이나 방의 물건 배치등을 조절하는 '양택 풍수' 위주로 훨씬 범위가 좁은 내용[21]을 다룬다. 어떤 면에선 일본의 풍수가 실생활에 있어선 조금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 지금도 일본은 한국과 중국만큼 풍수지리를 중시하진 않는다. 타 동아시아 국가와 비교해서 눈에 띌 정도로 영향력이 적다. 현대 일본 대중 다수가 인지하는 풍수지리는 1990년대 소설, 영화, 만화, 방송 등으로 유행했던 음양사, 풍수지리 붐에 기인한다. 그 이전에는 '그런 것이 있었다' 정도의 민속 문화로 치부되었다.
여담으로 현대 일본에서 풍수지리로 유명한 사람도 있다. 일본 경주마 코파노 리키의 마주로 유명한 Dr. 코파도 유명한 풍수지리사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재일조선인으로부터 한국의 풍수지리를 배웠고, 이를 홍콩의 사물 풍수와 짬뽕시킨 자신만의 풍수지리를 만들어 냈다.
- 무라야마 준지의 입지
상술한 대로 풍수에 대한 개념이 옅었고, 음양사나 풍수학을 미신 취급했던 일본 제국의 기풍을 보건데, 일본군부 고위 장교, 중추원 부의장 같은 권력자들과도 줄이 있을 정도로 입지전적인 인물로 보인다. 일본인 임에도 조선 팔도 강산을 다 꿰뚫고 있다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하고, 화림의 스승이 일본에서 만났을 때, 주(呪)가 강해 사람이 아닌 여우가 둔갑한 것이라는 식으로까지 불렸던 것을 보면 그의 도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권력자들에게 그 실력을 증명하여 신용을 얻지 않았나 추정된다.
영화 후반부 오니가 보여주는 환상을 보면, 무라야마가 주술을 펼칠 때, 무덤 주위에 일본제국군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대여섯 명 정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즉, 일본군 일부 고위급 관료의 협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니의 대사에서도 남산의 신궁에 모셔져야 할 자신이 이곳에 묻힌 것이 '마코토의 짓인가'는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언급한다.
이를 보면, 실제 역사에서 풍수지리를 미신 취급한 조선총독부의 성향과 달리, 영화 상에서는 권력의 최정점인 조선 총독부터 일본 제국의 고위 관료들에게 무라야마가 개인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일본 제국 관료들이 무라야마가 하는 일에 편의를 봐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단, 배석한 군장교와 동원된 군인들의 수가 매우 적었던 점을 보면, 일본 군부의 공식적인 행사라기 보다는 무라야마의 개인적 행사에 상당한 지위의 군인 몇 명이 참석하면서, 자기 권한 내에서 비공식적 협조를 해준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 무라야마 준지의 모티브
무라야마가 여우 음양사로 불릴 정도로 여우의 느낌을 풍긴다는 점을 보면 반인반요 출생 설화를 가진 일본 대표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2.2. 최종 보스[편집]
- 최종 보스인 오니는 생전에 다이묘 중 하나로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했다가 패배해 사망했지만 1만 명을 넘게 죽이는 전공을 세워 신이 됐다고 말한다. 단순한 요괴가 아니고 일종의 신통력이 있는지 금강경으로도 제압할 수 없고, 물리적 실체가 존재하지만 자신에게 박혀 있는 칼이 주물이자 본체가 되어버려 음양오행을 따르지 않으면 물리적 타격이 먹히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 귀문이 열리는 축시(AM 1~3시)부터 활동하는 것으로 나온다. 영혼이나 귀신과 달리 영(靈)과 육(肉)이 있는 정령이 되었으나 해가 떠 있는 낮에는 활동하지 못한다.[22]
- 자신을 여기에 묻은 음양사가 본래는 남산의 조선신궁에 봉안해줄 거라고 속였다는 언급도 나온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오니는 자신이 본래 다이토쿠[23]에 묻혔었다가 조선 남산의 신궁으로 깄어야 할 몸인데 여기에 묻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렇게 된 건 가타히토와 마코토 짓일 거라고 하는데, 가타히토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천황인 고요제이 천황의 휘(諱, 군주의 이름)이고, 마코토는 일제 강점기 총독 사이토 마코토로 보인다. 즉, 신궁은커녕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 천황의 명에 의해 다이토쿠에 묻혔다가, 일제 강점기 사이토 마코토 재임 당시 한반도의 허리를 끊기 위해 쇠말뚝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의미인 듯하다. # 여기에 여우 음양사 무라야마 준지가 오니에게 묘비에 쓰인 위도와 경도를 외우게 함으로서 한반도의 허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것.
- 일본 신토 쪽으로 보면 나무위키에 단독 문서가 있는 전국시대 일본 장수 대다수가 일본 어딘가의 신사에서 신(카미)로써 모셔지고 있다. 적어도 다이묘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으며 1만 명 이상의 적병이나 민초를 벤 장수는 당연히 일본 전역에서 막대한 인지도가 있었을 테니 신사의 신으로써 추앙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동아시아 3국의 민간 신앙에서 유명한 역사적 인물을 신으로 섬기는 신앙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장수가 신으로 모셔졌단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긴 하다. 관우, 제갈량 신앙 등은 너무 유명한 사례고, 한국에선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는 현충사가 있으며 심지어 서양의 인물인 맥아더를 장군신으로 모시는 무당의 사례도 있을 정도다. - 거기에 더해 일본 신토에서는 단순히 이름난 인물을 신으로 모시는 것을 넘어서, 숭배되는 신의 선악을 따지지 않고 원령이나 악령, 요괴라도 숭배하는 것으로 달래서 저주와 재난을 피하고자 하는 어령 숭배가 존재하기 때문에 설령 오니가 전공으로 유명한게 아니라 민간인 학살 등으로 악명을 떨친 존재라도 신으로 숭배받았다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대표적인 예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있다.
- 최종 보스 오니의 모티브는 여러 인물을 섞은 것으로 보인다.
- 참고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처형되지 않고 전사한 다이묘급 인물은 1만 2천석의 히라츠카 타메히로, 2만석의 토다 시게마사 등이 있다. 시마 사콘은 2만석의 영지를 가졌지만 이시다 미츠나리의 가신으로 다이묘에 해당되지 않는다.
- 오니가 은어와 참외를 요구하는데, 기존의 해석 중 요괴의 이 질문이 '상대가 동군(참외)인지 서군(은어)인지 확인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는 해석도 있었지만 윤성은 평론가 유튜브에서 감독피셜로 '참외'로 직역되는 '마쿠와'는 현재의 일본에는 거의 생산되지않는 농작물이라 일반인들은 잘모른다 한다. 그래서 화림이 단어를 이해못하고 은어만 가져간 것이라 연출의도를 밝혔다. '마쿠와'또는'마쿠와우리'는 참외의 종류이지만 일반적인 노란색 참외보다는 개구리 참외처럼 생겼다 마쿠와우리 현재의 일본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참외를 도태시키고 메론만을 주력으로 생산한다
그리고 동군과 서군의 상징이라던 은어,참외는 은어의 경우는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근거지였던 기후성 아래 나가라강에서 잡힌 은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참외의 경우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들(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부 좋아했다 알려있다 일본자료
감독의 인터뷰에 의하면 은어와 참외 대사는 즐겨 봤던 만화 '음양사'에 은어와 참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 당시 다이묘들이 좋아했을만한 음식으로 생각되어 가져온 설정이라고 한다. 또한 오니의 체형 연기를 담당한 김병오의 인터뷰에 따르면 무덤에서 나와 은어를 산 채로 씹어먹는 장면에서 나온 은어는 미술팀에서 젤리로 만든 소품이라고 한다.
- 승탑을 보자마자 합장하며 기도하는 모습은 가토 기요마사를 연상시킨다. 가토는 열렬한 불교 신자였으며, 임진왜란 선봉장으로서 함경도 방면으로 가장 먼저 북진해 호랑이를 자주 사냥한 걸로 유명하다. 심지어 두만강을 넘어 만주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영화 후반부에 북진을 외치는 장면과 함께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여담이지만 불교는 오랫동안 일본의 국교였기 때문에 가토 외에도 불자를 자처한 장수가 많았으며, 아예 승려를 대동하기도 했다. 이런 일본 불교의 참전의 역사는 임진왜란 뒤 명치유신 이후로 일부 불교인들이 자진해서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행보로도 이어진다. 한 예로 1904년 러시아와 일본이 싸운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의 대문호였던 톨스토이는 이 전쟁을 강력히 비판했으며, 당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인들한테 불교를 가르치던 일본인 승려인 샤쿠 소엔한테 같이 손잡고 반전투쟁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샤쿠 소엔은 "이 전쟁(러일전쟁)은 정의롭다"며 거부했다. 또한 일본 불교계는 러일전쟁을 '사악한 기독교 국가'인 러시아를 상대로 하는 정의로운 전쟁으로 간주하여 일본의 여러 불교 종단에서 종군승려 파송 제안이 하도 쇄도해 일본 정부 당국이 아예 종군 승려 수를 제한해야 할 지경이었다.백인이여, 불교가 그렇게 평화적인가[27] 이렇게나 열렬한 불교 신자면서 보국사의 보살을 잔혹하게 죽이는 모순적인 행동을 하는데, 이는 당대 무사들이 무력을 갖춘 이익 집단인 사찰과 자주 충돌했다는 사실과 일본 귀신은 접촉하는 누구든 무조건 죽이려 든다는 광심의 대사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오니 자신이 있는 곳이 살생이 금지된 절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어차피 새벽 닭이 우는 시간이기도 하니, 더이상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조용히 물러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논리에 의하면 보살도 계속 법당 안에 있었다면 화를 피할 수 있었겠지만 소란을 쫒아 밖으로 나갔다가 변을 당하게 된 듯 하다. 혹은 보살의 모습이 일반적인 출가 승려와는 달랐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 여기에 첨언하자면, 풍수지리는 불교의 근본 교리와는 관계가 없지만 그렇다고 불교와 아예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후기의 선종 승려 도선이 한국에 처음으로 풍수지리를 전파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 작중 오니는 감독의 해설에 의하면 약 8척(240cm) 정도의 거한인데, 일본 전국시대 당대에 대표적인 장신이라고 평가받던 토도 타카토라가 190cm(6척 2촌), 오다 노부나가가 170cm였기에 체형을 모티브로 따온 실제 인물은 없다. 아마도 사후 정령화의 영향으로 신체가 거대해진 것이거나, 또는 시신을 쇠말뚝 역할로 가공하는 주술 의식을 치를 때, 몸에 칼을 박아넣고 삐져나온 칼날에 다이묘의 머리를 꽂아 합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이묘의 혼이 깃들어 있는 칼을 주축으로 하여 다른 무사의 시신을 모아서 만들어낸 프랑켄슈타인 같은 존재가 아닌지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일본은 불교의 영향으로 시신을 화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데다, 설령 매장했다 하더라도 300여 년이 지난 뒤라면 썩어서 뼈만 남은 상태여야 정상이며 토질에 따라 뼈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오니의 신체를 이루는 시신은 전국시대 무사의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 인간만 보면 무작정 죽여버리려 하던 살인귀 오니가 특이하게 상덕에게는 '나의 부하가 될 생각이 있는지' 회유를 제안한다. 이에 대하여 흥미로운 해석이 있는데, 초반부에 상덕은 지용의 조부의 묫자리를 파묘하고 난 후에 (비록 악지지만) 땅에게 예를 갖춘다는 의미로 묫자리에 100원 동전을 건네주고 떠났다.[29] 그리고 사실 그 밑에는 오니가 잠들어 있었다는 게 후에 밝혀지는데, 이 오니가 상덕이 던진 동전을 자신에게 바친 공물로 인식했다는 것. 즉, 방금까지 은어를 맛있게 먹고 온 데다 자신에게 아주 오랜만에 공물을 바쳐준 인간까지 마주했으니 기분도 좋은 겸 잠깐이나마 살려줄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30] 100원이란 동전의 가치가 현대인에게는 푼돈이지만 400년 전의 인물이라 반짝거리는 것만 보고 금은품이라 생각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다만 굳이 금은품일 필요는 없을것이다. 현대 신사(신토)의 새전도 5엔, 50엔 정도가 보통이다. 신으로서 대접받고 있는 상황에 만족하는 것으로 보이니 신으로 여기고 대접해주기만 하면 좋아하는 비교적 단순한 타입인듯.물론 그 100원 동전에 박혀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좀 묘하긴 하다.[31] 이 오니가 임진왜란(1592~98)에 참전했음이 암시되고, 사망한 시점도 임진왜란 이후인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이니 이순신의 이름 정도는 당연히 알 것이고 단순히 이름을 들어본 것을 넘어 실제로 봤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오니가 생전에 이순신을 실제로 봤다 하더라도 실제의 얼굴이 아닌 상상에 기반한 표준영정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100원화를 보고 실제 이순신을 연상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거니와,[32]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하더라도 작중 오니의 발언이나 행보를 보면 육전에서 날뛰면 날뛰었지 수군으로써 이순신을 마주했을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33]
위의 주석에서도 언급되듯 묫값으로 100원을 쓴것도 현장에서 결정된 내용이고, 이순신 장군의 얼굴이 하늘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묻힌것은 완전한 우연이라고 감독이 놀러와에서 언급했다.
- 오니가 상덕의 얼굴에 쓴 금강경을 비웃는 장면은 마치 기독교 성경 사도행전 속에 나오는 악귀가 구마의식을 시도하는 어설픈 자를 보고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라고 놀리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세간에 떠도는 괴담 중에 귀신에게 가위 눌린 사람이 가위에서 벗어나려고 주기도문을 외우니까 그걸 다 들은 귀신이 비웃듯이 주기도문을 거꾸로 외우더라는 이야기와 같은 맥락의 장면이다. 상당한 수준에 오른 악귀는 선의 세력이 어떻게 대항하는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34]. 검은 사제들에서도 마르베스는 사제들의 기도문을 따라하며 조롱하고, 주님의 기도를 외는가 하면, 여러 부하들로 하여금 자기를 보호하며 사제들이 영신의 육체에서 자신을 꺼내지 못하도록 방해했으며, 사바하에서 김제석은 불교 교리를 왜곡해 예언을 피하기 위한 살인을 목적으로 사이비 종교를 설계했다.
- 한편 금강경을 외운지 500년이 되었다는 언급이 있으나 중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고 해도 1,600년에 벌어진 사건임을 생각하면 정확히 500년이 되기는 힘들다. 물론 오니가 착각했거나, 1,500년대 초중반에 태어났다고 치고 반올림을 하면 충분히 긴 세월이라서 그냥 500년이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고, 자신에게는 금강경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과장되게 표현한 것으로도 설명이 되니 설정 오류라고까지 할 사안은 아니다.
- 본작의 최종 보스인 오니는 사실 수동적인 측면이 강한 악역이다. 물론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죽여버리고 다니는 것은 맞지만 자기가 나서서 악행을 저지르려 하기 보다는 그냥 가만히 있다가 다가오면 공격하는 측면이 부각되기 때문. 물론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될 보국사 보살이나 돼지 축사 직원을 머리를 따서 죽여버리는 걸 보면 잔인하고 흉포한 성정임은 확실해 보이지만, 나서서 악행을 하려고 한다기 보다는 그냥 시키는 대로 얌전히 땅에 박혀있다가 건드리면 그때서야 공격하니 음모를 꾸미는 사악한 악역이라기 보다는 괴수물의 크리쳐에 더 가까운 캐릭터이다.
3. 현실 반영 오류[편집]
- 관 관련
- 작 중 "왕실이나 고관대작들이나 쓰던 향나무 관" 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러나 전통적인 관의 재료는 소나무·오동나무·가죽나무·버드나무·뽕나무 등이며, 향나무는 관의 재료로 쓰이 않는다. 왕실과 고관대작뿐만 아니라 서민들조차도 소나무 관을 사용했는데 이게 어르신들이 흔히 말하는 "소나무 진내 푹푹한 육송관"[35]이다. 향나무 관은 잘 썩지 않는다 하여 현대에 와서야 쓰이기 시작한 관이다.
- 관의 구조도 관 뚜껑을 쇠못을 박아 고정시키는 서양식 구조로 되어있는데, 이 역시 과거 조선이나 일제강점기 당시 고관대작이 쓸 법한 전통적 관의 구조와는 차이가 있다. 전통적인 관은 나비장(袵, 나비 모양의 나뭇조각)을 끼워서 고정시키는 형식이라 영화처럼 쇠지렛대 등으로 한번에 열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 파묘하는 장면에서 땅을 팠더니 바로 나무 관이 나오는데, 이 역시 실제 왕족이나 고관대작의 묘와 차이가 있다. 왕족이나 고관대작의 묘는 회곽묘(灰槨墓)라고 해서 묘광 안에 관과 곽을 보호하기 위한 석회층을 만들어 관과 곽을 안치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즉, 나무 관 바깥에 석회로 된 또 다른 관이 감싸는 구조. 이 회곽묘 관련 대표적 사건으로는 오페르트 도굴 사건 당시 이 회곽묘 구조로 인해 오페르트 일당의 남연군 묘 도굴 시도가 실패한 바 있다. 박가의 묘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회곽묘가 아닐 가능성도 있고, 1917년에 죽은 이준용의 묘처럼 회곽묘일 가능성도 있다.
- 극중 영근의 실제 모델인 장의사에 따르면, 오래된 관은 꺼내기 힘들어서 일반적으로는 관이 땅에 묻힌 상태에서 뚜껑만 열고 유골만 모셔서 옮기기 때문에 관까지 가져오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관째로 화장하는 모습은 영화 한정의 설정인 듯. <파묘> 유해진 실제 인물 염장이가 본 영화 속 팩트체크 이는 인트로 파트에서 나온 다른 집안의 파묘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묘소에서는 관을 꺼내지 않고 유골만 밖으로 모셨는데, 대조적으로 박근현 묘지에서는 유족 측의 요구로 관까지 파서 화장터로 운구하는 전개가 된다. 이는 화장 당시 관 안에서 녹아내리는 훈장 탓으로 볼 수 있는데, 즉 유족 측에서는 조부가 친일파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개관을 하게 되면 함께 묻혀 있던 훈장이 드러나서 친일파였던 사실이 들통날 터이니) 개관을 거부한 것.
- 첫번째 빌런 박근현 관련
- 작 중 "100년도 더 된 묘", "100년이 지난 묘" 라는 대사가 자주 등장하는 걸로 봐서 박근현의 사망 시기를 1920년대 즈음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1920년대에 사망한 귀신이 1940년대에나 등장하는 단어인 대동아공영권을 말하는 것은 오류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해당 연설의 내용은 태평양 전쟁 당시 학생과 젊은이들에게 전쟁에 참여하라 선동하는 연설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런 종류의 연설 형식은 작 중 박근현과 같은 이미 민족 반역자인 1세대 친일파들보다는 한때 민족 지도자로 존경받다 변절해 버린 지식인, 문학가, 교육자, 언론인 등 학생과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던 계층들이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주로 하던 연설 형식이다.
- 다만, 박근현과 아들 박종순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실제 박근현의 사망시기는 1940년대쯤일 가능성이 더 높다. 위의 "100년도 더 된 묘", "100년이 지난 묘"라는 대사도 그저 박근현의 묘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진짜 100년이 지난 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면 조부의 귀신이 빙의된 박지용이 대동아공영권에 관한 연설을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무라야마 준지가 굳이 한국식 이름인 기순애를 써가며 위장한 것을 보면 박근현의 사망시기가 해방 이후일 가능성도 있다.
- 그러나 감독의 인터뷰에 의하면 기순애는 일본어 키츠네를 한글 기순애로 표기한 일제강점기 당시 문헌들에서 가져왔으며 일제강점기 당시 살았던 분들이라면 기순애라는 이름만 듣고도 키츠네임을 눈치를 챘을수도 있다고 인터뷰 한 것을 보면 무라야마 준지가 기순애라는 한국인으로 위장한게 아닌 그냥 일제강점기 당시 키츠네라는 단어를 일반적으로 조선인들이 부르던 말일 가능성이 높다. "박근현이 매국노라서 기순애라는 승려가 애국심으로 악지에 묻은 거 아니냐?" 물어보는 상덕에게 기순애의 정체가 일본인인 것을 알려준 사람은 박지용의 고모였다. 그냥 "기순애라는 승려가 묫자리 정해줬다"라고 말한 손자인 박지용은 어른들에게 이름으로만 들은 승려 기순애가 당연 우리나라 승려인 줄 알았겠지만, 최소 고모나 박종순은 처음부터 기순애가 일본인임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박근현에 빙의된 박지용이 한 연설 내용이 해방 후 새로운 권력으로 등극한 미 군정이 아닌 일제 찬양 내용이라는 점에서 박근현이 해방 후 사망했다는 추측은 무리가 있어보인다.
- 박근현과 아들 박종순의 나이 차이가 심하게 나서 이질감이 든다. 박근현이 사망한 1920년대에 유복자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박종순과 그의 누이는 80대로[36] 보이며, 손자 박지용도 40대로 추정돼 몰입도가 낮아진다는 평이 있다. 박종순과 그의 누이를 80대로 잡고 박근현의 사망 시기를 1940년대로 잡아도 박근현이 노령으로 사망하기 바로 직전에 자식을 본 셈이니 이 또한 이상한 설정이 된다. 파묘의 실제 모티브가 된 이완용의 증손자가 이완용 묘를 파묘한 일처럼 파묘를 의뢰한 박지용이 박근현의 증손자, 박종순과 그의 누이는 박근현의 손자, 손녀 설정이었다면 얼추 나이대가 맞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 다만, 박근현의 사망 시기를 1920년대가 아닌 1940년대 초중반으로 보면 박종순과 박지용 등의 나이도 맞는 나이가 된다.
-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던 다이묘라는 오니가 입고 있는 갑옷의 양식은 투구 양식이나 떡 벌어진 오오소데에서 볼 수 있듯 전형적인 헤이안 시대의 갑옷인 오오요로이이며, 세키가하라 전투 시대인 전국시대의 양식과는 다르다. 전국시대의 갑옷은 당세구족으로 오오요로이가 대중적으로 유명하고 멋있기도 하다 보니 불멸의 이순신 등 한국 영상매체에서 자주 벌어지는 소품 오류이기도 하다.
- 다만, 전국시대에도 오오요로이가 제작되어 봉납품이나 선물용으로 쓰였기에 신사에 모셔지게 된 오니에게 신사측이 봉납품으로 갖고 있던 오오요로이를 입혔다고 하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신으로 모셔졌다는 오니의 발언을 생각해보면 오오요로이를 입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오니에 대한 호칭도 다이묘라고 했다가 쇼군이라고 했다가 뒤죽박죽이다. 원래 쇼군은 장군의 일본어 발음일 뿐이지만 일본사에서는 명목상으로 천황 다음가는 실질적으로 최고 권력자인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한다. 정이대장군은 1185년부터 1867년까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제외하면 사실상 전일본의 최고지도자였다. 즉, 전근대 일본 율령제에서의 영외관/국정 최고 권력자이자 무가정권의 최고 통치자다. 본 작에선 장군의 일본어 발음 용도로 쓴 듯 하지만, 그 쇼군이라는 말을 하는 귀신의 본체가 일본인임을 생각해볼 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 자리에 오르게 되므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해 목이 잘린 작 중 오니는 쇼군이라는 명칭을 쓸 수 없다.
- 작중 박근현의 악령이 언급하는 대사에서 미루어볼 때 자손들은 묘소에 찾아온 적도 없고 제사를 지내거나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문제의 무덤은 긴 시간 방치된 것 치고는 외외로 멀쩡하다. 무덤은 완전히 정돈되진 않았으나 묘소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누군가 벌초를 한 것처럼 긴 잡초나 나무들도 없이 매우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벌초를 해본 이들은 알겠지만 그 정도로 깊은 산 속에 있는 묘소들은 여름철 한두달 사이에도 엄청나게 길고 많은 잡초와 나무들이 자라나서 이를 헤치고 올라가는 것 부터가 엄청난 난관이며 심하면 위치를 알아보기도 어려운 상태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무덤의 삿된 기가 매우 강해서 잡초가 자라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그러려면 풀 하나 없는 흙무덤 같이 되어야 한다. 무덤의 상태와 계절(초가을)적 배경으로 봤을 때 최소 3주 전이나 4주 전에 벌초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 다만, 이 부분은 장손과 지관이 방문할 예정이니 먼저 사람 써서 벌초 대행을 했다고 보면 된다. 화림이 미국에서 의뢰인을 만난 뒤 한국으로 와서 김상덕을 섭외하는 장면이 있고 그 시간에 박지용 일가에게도 벌초가 가능하다. 혹은 박지용의 고모가 나름 아버지를 생각하는 모습이 보이니 매해 해왔을 수도 있다. 또는 민통선에 가까운 전방부대에 근무한 경험이 있다면 진지공사때나 추석을 앞두고 종종 무연고묘지를 군 부대에서 관리해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민통선에 가깝기도 하고, 여러 작계에 있어서 성묘객들이 부담이라 대신 관리해주는 경우도 있고, 또는 지역 특성상 후손이 찾아올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문화에서는 아무리 이름 없는 묘라도 어련히 누군가의 조상님이겠지 하며 그냥 못 지나치는 것도 없잖아 있다.
- 이장이나 화장하게 되어 파묘하면 파헤친 봉분에 묘비를 묻고 다시 구덩이를 메워야 한다. 작중 보면 파묘 작업 이후 며칠이 지나도록 무덤은 파헤쳐진 상태 그대로다.
- 이 경우는 인부들이 남아서 마저 작업할 예정이었지만 갑자기 내린 폭우로 일단 물러났다가 박지용 집안에 줄초상 터지고 뱀을 죽인 인부에게 동티까지 나자 다른 인부들에게도 소문이 퍼져 다들 손절하고 박지용 집안도 줄초상 수습하느라 신경 못썼다고 볼 수 있다.
- 무라야마 준지가 백면금모구미호를 신으로 모셨다고 하는데 실제로 백면금모구미호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는 없다.
4. 오행 관련[편집]
오행과 관련해 상덕이 금(金)인 오니를 목(木)으로 무찌르는 장면이 오행의 원리상 가능한 것인지를 두고, '상극의 원리에 위배돼 오류이다' vs '상모가 발생하면 가능한 일이다'라며 명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4.1. 오류가 아니라는 입장[편집]
오행에는 상극 이외에 상모(相侮), 상승 관계도 존재하는데, 이는 마치 너무도 큰 불에는 물을 끼얹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듯이 '본래 약해야 하는 쪽의 기세가 너무 강해서 본래 강해야 하는 쪽을 오히려 모멸한다'는 뜻이고, 상극 관계의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목모금(木侮金)이 성립한다. 당시 정황을 따져보면 작정하고 목기의 기운이 충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목모금(木侮金)이 발생한 것이다.
- 오니는 음기를 가진 요괴이고, 오행으로 보면 불타는 칼. 즉, 화극금(火剋金)된 상태인데, 거기에다가 백마의 피, 양기가 충만한 오화(午火)를 뒤집어 써서, 금의 기운이 몹시 약해진 상태다.
- 오니를 공격한 나무는 물에 젖은, 즉 수생목(水生木)의 상생 관계로 목기가 더욱 강해진, 쉽게 말해 버프 나무 말뚝이다.
- 극중 최민식이 "물에 젖은 나무는 불에 달궈진 쇠보다 질기다"고 친절히 설명한 것으로 미루어 역극을 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기본적으로 지형이 목(木)기가 강하다.[37]
- 명리학에서 인간을 갑목(甲木)으로 보는데, 나무를 쥔 최민식이 곧 목기이기도 하다.
- 작중 시간대가 땅을 파기 시작한 축(丑)시 뒤에 바로 인(寅)시가 이어지는데, 오니를 제거한 뒤 첫 닭 우는 소리가 들린 것으로 보아 축시와 인시 사이, 즉 목기가 강해지는 시간으로, 천지인이 전부 목기가 충만해진 상태라서 목모금이 성립할 정도로 목기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 게임으로 비유를 하자면 게임 속 아이템이 다른 속성의 것을 1+1로 조합하여 사용하는 것처럼 극 중 오니와의 싸움에서도 그러하다. 오니는 '금+화'의 존재로 설정되고 상덕이 사용한 무기는 '수+목'의 무기가 되었다. 금과 목의 전투였기에 오류가 났다는게 아닌 것이다.
- 음양오행에서는 상모 외에도 상승이 존재하는데, 오행 중 어떠한 상극의 힘이 지나치게 강하면 그 상극의 힘을 완전히 쓰지 못하게 되는 것으로 작중 오니의 상황을 보고 추정하면 오니는 불과 금속의 힘을 가졌지만 작중 오니가 보인 도깨비불의 크기를 보아서 상승의 힘을 따르면 화승금(불이 지나치게 강하면 쇠는 녹아서 못 쓰게 된다)의 원리가 적용될 수도 있다.
4.2. 오류라는 입장[편집]
오행의 상극관계에 의하면 금극목(金剋木)이라 목(木)을 제압하는 것은 금(金)이고 결국 목(木)은 금(金)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오류라고 보는 입장이다.
- 상모관계로 역극이 발생했다는 의견에서는 목모금이 발생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수생목 강화를 받은 나무와 주변 정황이 목기 충만한 상황임을 근거로 들고 있으나, 이는 결과에 주변 정황을 끼워맞춘 설정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상덕의 나무에 대한 버프를 인정한다면 목모금이 발생하기 힘들만큼 금기운이 버프를 받을 정황 또한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화극금이면 금이 약해진 상태라 보일 수 있으나, 금을 제련하는 것은 화이므로 금은 거친 원석에서 더 날카로운 귀물이 되었다.[38]
- 화극금된 오니는 하필 땅 속에 매장돼 있다. 이에 토의 기운이 화와 금을 통관하여 화생토->토생금이 되었으니 금기운 역시 강화를 받았다.
- 주변에서 강해진 목기는 오니의 화기를 생하므로, 강화된 화기는 위의 토기운의 통관을 받아 다시 금을 생하는 역할을 한다.
- 작중 백말피에 오니가 약해진 것은 무속(민간설화)에 기반한 장치로 도깨비가 원래 백말피를 무서워 한다는 믿음에서 가져온 것이다.[39] 그럼에도 굳이 여기에 명리 이론을 가져다 붙이면 백말은 庚午에 해당하므로 화+금 속성이고 이는 오니와 완전히 같은 속성이라 오니에 영향을 주지 말아야 하고 화토 통관에 의해 오히려 오니의 금을 강화하는 속성이 되어버린다.
- 명리에서 인간을 갑목으로 보기 때문에 나무를 쥔 상덕이 목기가 되어 상모가 발생한다면, 상덕이 나무를 손에 쥐기만 해도 오니는 상덕을 공격할 때마다 스스로 파괴돼야 한다.[40]
- 한반도의 방위가 동쪽이니 목기가 강하다고 보는 입장도 단식 판단이다. 오행의 방위란 현재 위치를 기준으로 상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니가 살다 죽은 곳은 한반도보다 더 동쪽인 일본이며, 일본을 기준으로 본다면 더 서쪽인 한반도로 왔으니 상대적으로 금 기운이 더 강한 땅으로 왔다는 논리 또한 성립한다. 단순히 동쪽이라는 이유로 어느 나라의 목기가 강하다고 전제하면 일본보다 더 동쪽은 태평양 건너 미국이며 미국보다 더 동쪽은 대서양 건너 유럽이라 동쪽으로 갈수록 나라마다 점점 목기가 강해지는 기이한 현상이 생긴다. [41][42]
- 목모금 관계는 목의 기운이 너무 강해 금이 목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지 금을 극하는 역극관계는 일어날 수 없다고 보는 학자들 의견도 있다.
- "물에 젖은 나무는 불에 달궈진 쇠보다 질기다"라는 대사 이전에 "불과 물은 상극이다. 쇠의 상극은 나무다."라는 대사가 먼저 나온다는 점으로 볼 때 해당 대사는 상모 관계를 암시한다기보다는 앞의 (작가가 잘못 이해한) 상극 관계를 일반 대중들의 눈높이에서 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오니에게 몸을 찔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서 지금이 상모 혹은 역극이 발생할 정도로 특수한 상황인지,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평생 오행과 풍수로 밥 벌어 먹고 산 사람이 상모 관계를 무기로 선택한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발상이다.
- 시나리오 작법의 관점에서 상극의 매우 특수한 관계인 상모를 사건의 해결 방법으로 제시하면서도 관객들을 납득시키려면, 이에 대한 사전설명과 빌드업이 반드시 필요하며, 관객들의 눈높이에서 왜 하필 지금이 그런 상황에 해당하는지 설명해 줬어야 하나 극중 이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 상극 관계도 잘 모르는 일반 대중들에게 상모 관계까지 구구절절 설명해야 한다면 이미 대중영화에서 사용할만한 장치로는 실패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목으로 금을 격파한다는 설정을 두고 온갖 설정놀음이 있었다고 보는 것보다 그냥 시나리오 작가가 실수했다고 보면 이 오류는 간단하게 설명이 된다.
- 작가의 착오가 아니라면, 극의 진행을 위해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더라도 의도적으로 상극 관계를 뒤집어야 했을 가능성도 있다. '오니가 쇠말뚝이다'라는 기본 전제가 너무 확고한데다, 도깨비 불로 변해 휙휙 날아다니는 등 이미 불(火)붙은 쇠(金)로 속성을 설정해 버려서 본래 상성인 불에 내성이 생겨버린(…) 상황이라 화를 이용하는것도 애매하게 돼버렸기 때문에 이런 전개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필 클라이막스에서 핍진성을 놓쳤다는 면에서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 다만 어디까지나 이는 동양철학을 어느정도, 최소한 약간이라도 아는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아쉬움일 뿐 대부분의 관객은 ’금은 목에 약하다‘하면 ’그렇구나‘하고 넘어갈 테니 큰 문제까지는 아닐 것이다.
5. 로케이션 정보[편집]
- 영화의 시작은 미국 LA에서 하지만 장소 협찬 받은 곳 중에 미국이 전혀 없다. 즉, 모든 촬영을 한국에서 한 것.
- 미국 LA의 박지용의 저택은 제주특별자치도의 신화빌라스라는 곳에서 촬영하였다. LA의 야자수 해변은 사실 제주도 해변 도로였던 것.
- 파묘한 묘와 차량이 이동하는 산길은 실제 여러 장소에서 촬영되었다. 부산, 파주, 고성, 춘천, 무주, 충주 등 전국의 각기 다른 곳에서 촬영한 후 하나의 공간으로 완성했다.#
- 소나무로 둘러싸인 음산한 묘는,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있는 도예관광 힐링촌 부지에 700여 평의 오픈세트를 만들어 촬영했다. CG 작업을 선택하지 않고 흙의 색 하나하나 세팅하는 등 현장감 있는 분위기를 내기 위한 고된 제작 과정이 있었다. 장재현 감독은 삼면이 나무로 둘러싸인 땅을 구현하길 원했기 때문에, 소나무를 옮겨 심어와서 조성했다고 한다. 당시 소나무재선충의 유행으로 소나무를 수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주변 잡목을 수십 그루를 옮기고 트럭으로 흙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오픈세트장은 원상 복귀되어 더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 포스터에 등장하는 거대한 나무는 담양군 가사문학면에 있는 당산나무이며 '경상리 느티나무'라 불린다. 약 500년 정도 산 것으로 추정된다고. 매년 정월에 마을[43]에서 제사를 지낸다.[44] 인근에 큰 나무가 두 그루가 있는데 가장 접근성이 좋은 마을회관 근처의 나무는 영화에 등장한 나무의 절반도 안 되는 크기고 당산나무로 향하는 길 중간에도 한 그루 있다. 두 나무 다 큰 줄기가 두 개로 나뉘어 자라고 있는 것도 특징. 느티나무가 들판이 아니라 산등성이에 있고 주변이 큰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나무의 형태 또한 줄기가 높고 곧은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라 엄청난 굵기의 낮은 줄기에서 웬만한 나무 덩치의 거대한 가지들이 넓게 펼쳐져 있어 나무 주변에 해가 잘 들지 않아 으스스한 분위기가 강하다.
최근 방문한 영상에 따르면, 무속인들이 요즘도 신력을 얻기 위해 방문한다고 하며, 제사상을 치우지 않아 산짐승들이 내려와서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고 한다.
- 고성군립병원 장례식장으로 나온 곳은 양산의 형주 요양 병원이다.
6. 관련 인터뷰[편집]
[1] 묫자리를 잘못 써서 후손들에게 불운이 닥치는 일. 산소탈이라고도 한다.[2] 李華林.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했던 여성 독립운동가. 위키피디아[3] 화림과 마찬가지로 한인애국단이다. 봉길은 후반부인 5장에서 도깨비 놀이를 할 때 무당들이 '윤 서방'이라고 부르는 장면을 통해 성이 뒤늦게 밝혀진다. 전체 이름이 나오는 장면은 영화 통틀어서 없다. 일반인들한테 가장 인지도 높은 독립운동가이기에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이름을 숨긴 것으로 추측된다.[4] 吳光心. 위키피디아 [5] '파'는 실제 대한민국 차량 번호판엔 쓰이지 않는 글자이다.[6] 오히려 실사용에선 국산차답게 더 편하고 좋은 부분도 많다[7] 공교롭게도 최민식은 천문에도 능했던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을 다룬 영화인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도 타이틀 롤로 출연한 바 있다.[8] 혹은 혼령을 매장하여서 봉인되었기 때문에 묫바람과 관련없이 당대에 있었던 태평양 전쟁이나 6.25 전쟁등 외부요인으로 사망하였을 수도 있다.[9] "이곳은 젖과 꿀이 흐르지만 자신은 춥고 배고팠다"는 대사를 통해 악지에 묻힌 원한을 드러낸다.[10] 정작 후손들은 재산을 물려받긴 했어도 본인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모습은 없고, 조상의 죄를 부끄럽게 여기고 인정하는 정도의 개념은 가진 걸로 나온다.[11] 서양의 요괴인 뱀파이어, 즉 흡혈귀도 처음 보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집 사람이 창문을 열어주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전승이 있다.[12] 실제로 영화의 삭제장면 중에는 상덕이 보살의 시신을 보고 오열하는 장면이 있다고 한다.[13] 사실 박근현의 묫자리는 산꼭대기라서 완전한 명당은 아니다. 흔히 금계포란(金鷄抱卵)형 같은 배산임수가 되어야 한다.[14] 전반부에서 화림이 봉길의 몸에 빙의한 박근현의 악령에게 "원한이 있으면 여기서 다 풀고 가소"라고 달래는 장면도 이런 특성에 기인한다.[15] 이것은 한때 유행한 홍콩의 강시영화들을 연상시킨다.[16] 후반부의 핵심 소재는 쇠말뚝이지만, 정작 쇠말뚝이라 할 만한 물건은 나오지 않고 결국 김상덕이 도달한 진실은 오니가 쇠말뚝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고영근의 말대로 한반도 쇠말뚝설이 과도하게 부풀려진 점을 고려해 좀 더 관념적인 존재로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17] 이와 대비되는 것이 본작에 나오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박근현의 귀신으로, 흉한 땅에 묻힌 고통 때문에 핏줄을 죽인다고 미국까지 날아가는 집착을 보였다.[18] 다만, 일본의 신사에서 모시는 신격의 존재 정도는 된다.[19] 그래도 작중 김범신 신부는 저분들도 실력 있으신 분들인데 너무 상대가 강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존중해준다. 서양귀신 그것도 지옥에서 온 대악마이니 한국의 무속으로는 상성상(?) 밀릴 수 밖에 없기도 하고.[20] 사바하의 무당들 또한 울고 있는 자의 신위를 알아보는 꽤나 신통력을 지녔지만, 운명의 존재가 아니라서 쫓겨났다.[21] 실제 유튜브 등에서 풍수를 검색하면 한국은 묫자리나 지형 위주의 이야기를 하지만 일본은 '집의 방향이니, 방에 놓아두면 좋은 식물이니, 가구 위치가 어쩌니' 하는 이야기들이 주로 나오며, 심지어 점을 봐 주는 경우도 있다. 일본의 주류 풍수는 '삼합유파'로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해 전통적 풍수와는 결이 다르다는 설명을 한다.[22] 오니가 첫 등장했을 때, 새벽 닭 울음소리가 들리고 얼마 안가 물러난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이후에 상덕이 쇠말뚝을 찾으러 갔다가 묘 구덩이에서 오니를 발견했을 때, 땅 속에 잠들어 있었다.[23] 역사 깊은 쿄토 대덕사에는 전국시대 유명 무장들의 탑두가 많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명복을 비는 사당인 탑두 중에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것도 있다. 그 중 코토인(高桐院)이라고 하는 탑두에는, 오니의 모티브 중 하나로 여겨지는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에서 가져온 문화재가 여러 점 있다고 한다.[24] 이쪽은 전사가 유력하나 생존설도 있다.[25] 고니시는 자결이 금기시되는 가톨릭 신자라 할복 대신 참수형을 받았다.[26] 한국사 강사이자 유튜버 황현필은 이 오니가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것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죽었다는 것을 토대로 고니시 유키나가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는 위에서 언급됐다시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승탑을 보고 불경을 읊고, 금강경을 외우는 오니와 연결할 수는 없다.[27] 물론 정유재란 때 종군승으로 와서 일본의 잔인무도한 행각과 조선 백성들의 고통을 기록하여 참상을 전하기도 한 일본 안죠지 초대 주지 쿄넨(慶念)처럼 등 훌륭한 이들도 있었다.[28]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승탑, 곧 부도는 스님의 사리가 있는 곳이고 그래서 신성하다는 의미로 설정했다고 한다.[29] 원래 파묘를 하고 나서 지관들이 땅을 잘 빌렸썻다는 의미로 동전을 주는데 좋은 땅이면 500원을 준다고 한다. 원래 시나리오에선 악지였기 때문에 10원을 주는 것으로 하였으나 땅 색깔과 너무 비슷해서 현장에서 100원으로 변경하였다고 한다.[30] 물론 상덕은 도깨비불에 넋이 나가있던 상태였기에 묵묵부답이었고 오니 역시 상덕의 얼굴에 적힌 금강경을 보곤 이놈이 날 퇴치하려고 왔나보다 싶었는지 가차없이 공격해버린다.[31] 최민식이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역을 맡은 걸 생각하면 배우개그가 되기도 한다.[32] 오니가 동전의 얼굴을 이순신으로 인식했다면 오히려 대단한 장수의 얼굴이 박혀있는 귀금속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33] 의외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 본토 내에서 이순신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다. 지상전은 생존자들이 비교적 살아돌아와 이야기를 전하기 쉽지만 해전은 전투의 특성상 생존자가 살아남아 복귀하기 더 어려워 적에 대한 정보는 복귀한 이들의 증언보단 당시의 원시적인 첩보전, 휴민트에 의존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북선 내지 판옥선의 거대한 규모 탓에 거기에 탑승한 이순신을 제대로 목격하고 인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육지의 김시민이 더 유명했으며 그를 악역, 요괴로 등장시킨 가부키가 성행할 정도였다. 다만, 현대의 일본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매우 유명한 편이다. [34] 그런 의미에서 서양에도 "악마가 성경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라는 격언이 전해져 온다.[35] 가난한 사람 장례를 치를 때는 아무 마감도 되지 않은 생선상자 같은 관에다 칠성판만 놓고 묻는다.[36] 연기한 배우들도 1940년대 생이다.[37] 오행을 방위로 따졌을 때 한반도는 동방, 즉 목기가 성립하며 그 중에서도 호랑이 지형이라 지지로 치면 寅木으로 양기가 강한 목방이다. 그 중에서도 허리에 해당하는 강원도 향로봉 부근, 즉 한반도에서도 더더욱 동쪽이다. 그런 곳이었기 때문에 무라야마 준지가 허리를 끊을 때 굳이 '금의 기운'으로 내리 누르려 했을 것이고.[38] 상극관계는 누르고 파괴하는 관계인 것만은 아니며, 제어하고 정련해서 귀물로 만들어 주는 역할 역시 있다.[39] 화림이 준비하라고 한 점[40] 굳이 나무로 두들겨 팰 필요 없이 나무를 손에 쥔 상덕이 몸통박치기만 해도 오니를 파괴할 수 있어야 한다.[41]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42] 명리에서는 한반도를 갑목, 일본을 을목(학자들에 따라서는 화, 혹은 수 기운이 강한 토로 보기도 한다)에 해당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이론을 따른다고 가정하더라도 원래 목 기운 강한 땅에서 서쪽으로 건너온 셈이 된다.[43] 경상리 마을은 원래 이 느티나무와 더 가깝고 나무 위 지역에 있었는데,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없어지고 조금씩 내려온 것이 현재의 마을이다. 이 마을 역시 시간이 지나며 거주민들이 세상을 떠나거나 도시로 가면서 남아있는 집은 얼마 남아 있지 않고 귀농이나 별장 개념으로 지어진 주택들 몇 채가 더 생긴 것 외엔 없는 정말 조용하고 작은 마을이다.[44] 이런 당산나무 정월 대보름 굿은 남부지방에 널리 퍼져있는 민속 신앙으로, 개중에는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의 동제가 유명하다. 군북역 문서 참조.[45] 대한제국 황제가 즉위한 원구단 터이기도 했고, 이후 이 자리를 차지한 화교들은 가장 알짜배기 땅에 화교 회관을 세우려고 했다가 1970년대에 파토났다. 이 때문에 당시 양택식 서울시장은 타이베이까지 직접 날아가 사죄를 해야 했을 정도. 그리고 이 자리를 대토받아 세운 게 한화 그룹의 현재 더 플라자 호텔이다.[46] 다만 사바하 때 일부 논란이 있었고 리뷰에서 악평을 보고 힘들었던 경험 때문에 몇몇 부분에서는 의도적으로 노코멘트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