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10년 화산 |
매우 위험하고 파괴적인 화산들 |
운젠 산 雲仙岳 | Mount Ulawun | |
울라운 산의 전경 | |
지도 | |
위치 | 일본 나가사키현 시마바라 반도 |
높이 | 1,483m |
분류 | |
형태 | |
지질학적 형성 | 신생대 제4기 50만년 전 |
외국어 표기 | |
한국어 | 운젠 산 |
일본어 | 雲仙岳(うんぜんだけ) |
영어 | Mount Ulawun |
1. 개요[편집]
운젠 산(雲仙岳, Unzen-san) 은 일본 나가사키현 시마바라 반도의 중앙부에 자리한 화산으로, 반도 중심부에 위치한 20개 이상의 산을 포함하는 총칭이다. 화산 중심부는 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운젠 지구곡(Unzen Graben) 내에 있으며, 화산학적으로는 운젠 화산(Unzen Volcano) 이라고 불린다.
운젠 산의 산세는 복잡하여, 과거에는 삼악오봉(三岳五峰), 팔엽(八葉), 이십사봉(二十四峰), 삼십육봉(三十六峰) 등 다양한 숫자를 이용한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넓은 의미에서 운젠 산은 동쪽의 마유 산(眉山, Mayuyama) 에서 서쪽의 사루바 산(猿葉山, Sarubayama) 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1934년(쇼와 9년), 운젠 산은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운젠아마쿠사 국립공원(Unzen-Amakusa National Park) 으로 확장되었다. 행정적으로는 시마바라시(島原市), 미나미시마바라시(南島原市), 운젠시(雲仙市) 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운젠 산은 ‘10년 화산(Decade Volcanoes)’으로 지정되었다. 반복적인 대규모 분화, 인구 밀집 지역과의 근접성, 그리고 복합적인 화산 재해 위험성 때문이다.
운젠 산은 1663년, 1792년, 1990년 등 여러 차례 대규모 분화를 일으켰으며, 특히 1792년 마유 산 산사태와 쓰나미는 약 15,000명의 사망자를 낸 일본 최대의 화산 재해로 기록되었다.
또한, 운젠 산 인근에는 시마바라시, 운젠시, 미나미시마바라시 등 도시가 밀집해 있어 분화 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1990~1995년 분화 당시 화산쇄설류로 인해 많은 가옥이 파괴되고 43명이 목숨을 잃었다.
운젠 산은 용암 돔 성장, 화산쇄설류, 산사태, 쓰나미 등 다양한 형태의 화산 재해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아 국제적으로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운젠 산의 산세는 복잡하여, 과거에는 삼악오봉(三岳五峰), 팔엽(八葉), 이십사봉(二十四峰), 삼십육봉(三十六峰) 등 다양한 숫자를 이용한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넓은 의미에서 운젠 산은 동쪽의 마유 산(眉山, Mayuyama) 에서 서쪽의 사루바 산(猿葉山, Sarubayama) 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1934년(쇼와 9년), 운젠 산은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운젠아마쿠사 국립공원(Unzen-Amakusa National Park) 으로 확장되었다. 행정적으로는 시마바라시(島原市), 미나미시마바라시(南島原市), 운젠시(雲仙市) 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운젠 산은 ‘10년 화산(Decade Volcanoes)’으로 지정되었다. 반복적인 대규모 분화, 인구 밀집 지역과의 근접성, 그리고 복합적인 화산 재해 위험성 때문이다.
운젠 산은 1663년, 1792년, 1990년 등 여러 차례 대규모 분화를 일으켰으며, 특히 1792년 마유 산 산사태와 쓰나미는 약 15,000명의 사망자를 낸 일본 최대의 화산 재해로 기록되었다.
또한, 운젠 산 인근에는 시마바라시, 운젠시, 미나미시마바라시 등 도시가 밀집해 있어 분화 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1990~1995년 분화 당시 화산쇄설류로 인해 많은 가옥이 파괴되고 43명이 목숨을 잃었다.
운젠 산은 용암 돔 성장, 화산쇄설류, 산사태, 쓰나미 등 다양한 형태의 화산 재해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아 국제적으로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2. 화산 활동[편집]
운젠 산의 화산 활동은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약 50만 년 전부터 분화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초기에는 강력한 폭발적 분화를 일으키다가 이후 용암 돔과 용암류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으로 변화해 왔다.
2.1. 선사 시대의 화산 활동[편집]
운젠 산의 초기 화산 활동은 크게 초기(前期)와 후기(後期) 로 구분된다. 운젠 산의 초기 활동은 주로 화산쇄설류(화산 이류)와 마그마-수증기 폭발을 동반한 강력한 폭발적 분화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다카다케(高岳), 기누카사다케(絹笠岳), 야다케(矢岳) 등의 화산이 형성되면서 큐센부다케 화산군(九千部岳火丘群) 이 만들어졌다. 이후 화산 활동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큐센부 산(九千部岳)과 아즈마 산(吾妻岳) 이 생성되었다.
이후 화산 활동의 성격이 변하면서, 폭발적인 분출보다 용암 돔과 두꺼운 용암류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약 10만 년 전부터 노다케 산(野岳), 묘켄 산(妙見岳), 부겐 산(普賢岳) 이 차례로 형성되었으며, 현재 운젠 산의 주요 지형이 갖춰지게 되었다.
이후 화산 활동의 성격이 변하면서, 폭발적인 분출보다 용암 돔과 두꺼운 용암류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약 10만 년 전부터 노다케 산(野岳), 묘켄 산(妙見岳), 부겐 산(普賢岳) 이 차례로 형성되었으며, 현재 운젠 산의 주요 지형이 갖춰지게 되었다.
2.2. 역사 시대의 화산 활동[편집]
운젠 산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분화를 일으켰으며, 특히 1663~1664년 분화와 1792년 대분화 및 산사태가 가장 큰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2.2.1. 1663~1664년 분화[편집]
1663년 12월, 부겐 산 북북동쪽 약 900m 지점에 위치한 한도이와(飯洞岩, Handō-iwa) 에서 용암이 흘러나와 주변 숲을 덮었다. 이 용암류는 총 1km에 걸쳐 확산되었으며, 화산 활동은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1664년 봄에는 부겐 산 남동쪽 산비탈(해발 600m) 츠쿠모 섬 화구(九十九島火口, Tsukumo-jima Crater) 에서 지하수가 솟아나면서, 안토쿠가와라(安徳川原) 지역에 홍수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3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1664년 봄에는 부겐 산 남동쪽 산비탈(해발 600m) 츠쿠모 섬 화구(九十九島火口, Tsukumo-jima Crater) 에서 지하수가 솟아나면서, 안토쿠가와라(安徳川原) 지역에 홍수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3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2.2.2. 1792년 운젠 산 대분화와 ‘시마바라 대변’[편집]
1791년 11월부터 운젠 산 주변에서는 지속적인 지진이 관측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792년 2월 10일, 부겐 산 정상부의 지고쿠아토 화구(地獄跡火口) 에서 분출이 시작되었다.
2월 28일에는 아나사코 계곡(穴迫谷)의 비와노쿠비(琵琶の首) 에서 화산재와 토사가 분출되었고, 3월 1일부터 용암이 흘러나오기 시작해 약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3월 22일에는 미네노쿠보(峰の窪) 에서, 3월 25일에는 코야케가시라(古焼頭) 에서 추가적인 분출이 발생했다. 부겐 산 북동부에서 흘러나온 용암류의 총 길이는 2.7km에 달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재해는 1792년 5월 21일(간세이 4년 4월 1일) 에 발생했다. 운젠 산의 마유 산(眉山) 이 대규모 산사태로 붕괴하면서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는 쓰나미가 발생했다.
이 재해는 ‘시마바라 대변(島原大変)·히고 피해(肥後迷惑)’ 로 불리며, 히젠국(肥前国)과 히고국(肥後国)에서 총 15,000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한 일본 역사상 가장 큰 화산 재해로 기록되었다. 그 이후에도 운젠 산의 분화는 계속되었으며, 6~7월에도 정상에서 간헐적인 화산재 분출이 이어졌다.
2월 28일에는 아나사코 계곡(穴迫谷)의 비와노쿠비(琵琶の首) 에서 화산재와 토사가 분출되었고, 3월 1일부터 용암이 흘러나오기 시작해 약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3월 22일에는 미네노쿠보(峰の窪) 에서, 3월 25일에는 코야케가시라(古焼頭) 에서 추가적인 분출이 발생했다. 부겐 산 북동부에서 흘러나온 용암류의 총 길이는 2.7km에 달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재해는 1792년 5월 21일(간세이 4년 4월 1일) 에 발생했다. 운젠 산의 마유 산(眉山) 이 대규모 산사태로 붕괴하면서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는 쓰나미가 발생했다.
이 재해는 ‘시마바라 대변(島原大変)·히고 피해(肥後迷惑)’ 로 불리며, 히젠국(肥前国)과 히고국(肥後国)에서 총 15,000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한 일본 역사상 가장 큰 화산 재해로 기록되었다. 그 이후에도 운젠 산의 분화는 계속되었으며, 6~7월에도 정상에서 간헐적인 화산재 분출이 이어졌다.
2.3. 헤이세이 신산의 형성과 운젠 산 분화[편집]
운젠 산의 분화는 1989년(헤이세이 원년) 타치바나 만(橘湾)에서 발생한 군발지진을 기점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연구를 통해 이미 1968년경부터 활동이 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첫 번째 군발지진이 발생했으며, 1973년에는 마유 산(眉山) 부근에서도 여러 차례 지진이 감지되었다. 당시 부겐 산 동쪽 오시가다니(板底, Oshigadani) 지역에서는 화산성 가스가 대량으로 분출되었고, 이로 인해 주변 나무들이 피해를 입었다. 1975년에는 지표 균열에서 고농도의 이산화탄소가 검출되었으며, 이 지역은 1792년 분화 당시에도 유독 가스가 분출했던 곳으로, ‘독석(毒石)’이라 불렸다.
이후에도 지진 활동은 불규칙하게 계속되었으며, 1979년 6월~9월 사이에는 마유 산 동쪽을 진원으로 하는 강한 지진이 발생했다. 1984년부터는 타치바나 만에서 군발지진이 자주 발생했고, 이와 함께 시마바라 반도 전체가 서서히 융기하는 현상이 관측되었다. 이는 타치바나 만에서 마그마가 상승하기 시작한 신호로 해석되었다.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첫 번째 군발지진이 발생했으며, 1973년에는 마유 산(眉山) 부근에서도 여러 차례 지진이 감지되었다. 당시 부겐 산 동쪽 오시가다니(板底, Oshigadani) 지역에서는 화산성 가스가 대량으로 분출되었고, 이로 인해 주변 나무들이 피해를 입었다. 1975년에는 지표 균열에서 고농도의 이산화탄소가 검출되었으며, 이 지역은 1792년 분화 당시에도 유독 가스가 분출했던 곳으로, ‘독석(毒石)’이라 불렸다.
이후에도 지진 활동은 불규칙하게 계속되었으며, 1979년 6월~9월 사이에는 마유 산 동쪽을 진원으로 하는 강한 지진이 발생했다. 1984년부터는 타치바나 만에서 군발지진이 자주 발생했고, 이와 함께 시마바라 반도 전체가 서서히 융기하는 현상이 관측되었다. 이는 타치바나 만에서 마그마가 상승하기 시작한 신호로 해석되었다.
2.4. 분화와 헤이세이 신산의 성장[편집]
운젠 산의 본격적인 분화는 1990년 11월 16일 시작되었다. 산 정상부의 신사 근처에서 분연이 솟아오르며 활동이 시작되었고, 초기에는 고온의 증기와 화산재 분출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1991년 2월 12일 다시 화산이 폭발하며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해 5월 15일, 운젠 산에서는 첫 번째 토석류(土石流) 가 발생했다. 5월 20일에는 지고쿠아토 화구(地獄跡火口)에서 용암이 분출되었고, 이 용암은 점성이 높아 멀리 흐르지 못한 채 화구 주변에 쌓이면서 용암 돔(Lava Dome) 을 형성했다.
형성된 돔은 무게를 이기지 못해 네 개의 덩어리로 붕괴되었으며, 이후에도 새로운 마그마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돔에서 흘러내린 용암은 제1~제13 로브(Lobe) 라는 명칭으로 구분되었고, 이 과정에서 경사면을 따라 빠른 속도로 화쇄류(메라피형 화쇄류)가 발생했다.
화쇄류는 시속 100km의 속도로 흘러내렸으며, 이는 운젠 산의 분화를 더욱 위험하게 만든 요소였다. 분화 활동은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1995년 3월까지 화산 활동이 이어졌다.
그해 5월 15일, 운젠 산에서는 첫 번째 토석류(土石流) 가 발생했다. 5월 20일에는 지고쿠아토 화구(地獄跡火口)에서 용암이 분출되었고, 이 용암은 점성이 높아 멀리 흐르지 못한 채 화구 주변에 쌓이면서 용암 돔(Lava Dome) 을 형성했다.
형성된 돔은 무게를 이기지 못해 네 개의 덩어리로 붕괴되었으며, 이후에도 새로운 마그마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돔에서 흘러내린 용암은 제1~제13 로브(Lobe) 라는 명칭으로 구분되었고, 이 과정에서 경사면을 따라 빠른 속도로 화쇄류(메라피형 화쇄류)가 발생했다.
화쇄류는 시속 100km의 속도로 흘러내렸으며, 이는 운젠 산의 분화를 더욱 위험하게 만든 요소였다. 분화 활동은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1995년 3월까지 화산 활동이 이어졌다.
2.5. 1991년 6월 3일 운젠 산 분화 참사[편집]
1991년 6월 3일, 운젠 산에서 대규모 분화가 발생하며 화쇄류(화산 이류)가 4.5km까지 확산되었다. 이 화쇄류는 용암 돔 붕괴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이 분화로 인해 화산학자 카티아·모리스 크라프트 부부와 해리 글리켄을 포함한 과학자, 언론인, 소방대원 등 총 43명이 목숨을 잃었고, 9명이 부상을 입었다.
2.5.1. 사전 조짐과 대피 상황[편집]
운젠 산은 5월부터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5월 15일, 운젠 산 기슭의 미즈나시 강(瑞穂川)에서 첫 번째 토석류(데브리 흐름)가 발생했으며, 5월 19일, 20일, 21일에도 잇따라 비슷한 현상이 보고되었다. 시마바라시는 미즈나시 강 유역 마을에 대피 권고를 발령했고, 신속한 대응 덕분에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5월 20일에는 부겐 산(普賢岳) 정상에서 용암 돔이 출현하였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성장했다. 결국 5월 24일, 돔의 일부가 붕괴되면서 첫 번째 화쇄류가 발생했다. 이후에도 화쇄류가 지속적으로 발생했으며, 5월 26일에는 2.5km, 5월 29일에는 3km까지 확산되었다.
5월 26일, 시마바라시는 기타카미코바(北上木場), 미나미카미코바(南上木場), 시라타키(白滝), 텐진모토마치(天神元町), 후다노모토마치(不田元町) 지역에 대피 권고를 발령했다. 이들 지역은 모두 미즈나시 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으며, 주민들은 별다른 충돌 없이 대피했다.
그러나 이 시기, 언론 매체들이 화쇄류를 촬영하기 위해 대피 권고 지역 내 특정 지점을 ‘촬영 거점’으로 삼아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 지점은 부겐 산에서 4km 떨어져 있었으며, 언론사들은 여기서 화산 활동을 직접 촬영할 수 있었다. 특히 5월 28일, 마이니치 신문이 야간 화쇄류 촬영에 성공하면서, 언론사 간의 경쟁이 더욱 심화되었다.
5월 20일에는 부겐 산(普賢岳) 정상에서 용암 돔이 출현하였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성장했다. 결국 5월 24일, 돔의 일부가 붕괴되면서 첫 번째 화쇄류가 발생했다. 이후에도 화쇄류가 지속적으로 발생했으며, 5월 26일에는 2.5km, 5월 29일에는 3km까지 확산되었다.
5월 26일, 시마바라시는 기타카미코바(北上木場), 미나미카미코바(南上木場), 시라타키(白滝), 텐진모토마치(天神元町), 후다노모토마치(不田元町) 지역에 대피 권고를 발령했다. 이들 지역은 모두 미즈나시 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으며, 주민들은 별다른 충돌 없이 대피했다.
그러나 이 시기, 언론 매체들이 화쇄류를 촬영하기 위해 대피 권고 지역 내 특정 지점을 ‘촬영 거점’으로 삼아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 지점은 부겐 산에서 4km 떨어져 있었으며, 언론사들은 여기서 화산 활동을 직접 촬영할 수 있었다. 특히 5월 28일, 마이니치 신문이 야간 화쇄류 촬영에 성공하면서, 언론사 간의 경쟁이 더욱 심화되었다.
2.5.2. 6월 3일 분화와 참사 발생[편집]
6월 3일 오후 3시 30분 이후, 운젠 산에서는 소규모 화쇄류가 빈번하게 발생하기 시작했다. 오후 3시 57분, 첫 번째 대규모 화쇄류가 발생했으나, ‘촬영 거점’까지는 도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가시성이 급격히 나빠졌으며, 화산재와 빗물로 인해 주변 환경이 더욱 혼탁해졌다.
오후 4시 08분, 두 번째 대규모 화쇄류가 발생했다. 이는 미즈나시 강 계곡을 따라 동쪽으로 3.2km까지 흐른 후, 계곡을 빠져나오면서 부채꼴 형태로 퍼지는 화쇄 서지(pyroclastic surge)를 동반했다. 이 화쇄 서지는 기타카미코바(北上木場) 지역까지 도달했으며, 5km 지점의 쓰쓰노(筒ノ) 버스 정류장 근처까지 확산되었다.
이날 ‘촬영 거점’에 있던 언론인들은 차량을 남겨둔 채 긴급 대피하려 했으나, 가시성 저하와 강한 화쇄류로 인해 대부분 탈출하지 못했다. 화쇄류에 휩쓸린 사람들은 고온의 화산재와 유독 가스를 흡입하면서 화상을 입거나 질식사했다. 이 참사로 인해 화산학자 3명(크라프트 부부, 해리 글리켄), 소방대원 12명, 언론인 16명, 경찰관 2명, 주민 4명 등 총 43명이 사망했으며, 일부는 여전히 실종 상태로 남아 있다.
이날 촬영된 사진 중에는 화산재에 의해 손상된 상태에서도 마지막 순간을 기록한 카메라가 발견되었으며, 요미우리 신문사의 한 사진기자가 니콘 F4 카메라를 손에 쥔 채 사망한 모습이 확인되었다. 해당 카메라에는 7장의 화쇄류 사진이 남아 있었으며, 고열로 인해 필름이 변색되었지만 일부 복구되었다.
2005년에는 일본 TV(NTV) 카메라맨이 사용했던 비디오 카메라가 화산재 아래에서 발견되었으며, 필름을 복구한 결과 당시 촬영된 최후의 순간들이 영상으로 남아 있었다. 이 영상에는 기자들이 첫 번째 화쇄류를 촬영하는 모습과 대피를 준비하는 과정이 담겨 있었으며, “저 소리는 뭐지?”라는 마지막 음성이 녹음된 채 종료되었다.
오후 4시 08분, 두 번째 대규모 화쇄류가 발생했다. 이는 미즈나시 강 계곡을 따라 동쪽으로 3.2km까지 흐른 후, 계곡을 빠져나오면서 부채꼴 형태로 퍼지는 화쇄 서지(pyroclastic surge)를 동반했다. 이 화쇄 서지는 기타카미코바(北上木場) 지역까지 도달했으며, 5km 지점의 쓰쓰노(筒ノ) 버스 정류장 근처까지 확산되었다.
이날 ‘촬영 거점’에 있던 언론인들은 차량을 남겨둔 채 긴급 대피하려 했으나, 가시성 저하와 강한 화쇄류로 인해 대부분 탈출하지 못했다. 화쇄류에 휩쓸린 사람들은 고온의 화산재와 유독 가스를 흡입하면서 화상을 입거나 질식사했다. 이 참사로 인해 화산학자 3명(크라프트 부부, 해리 글리켄), 소방대원 12명, 언론인 16명, 경찰관 2명, 주민 4명 등 총 43명이 사망했으며, 일부는 여전히 실종 상태로 남아 있다.
이날 촬영된 사진 중에는 화산재에 의해 손상된 상태에서도 마지막 순간을 기록한 카메라가 발견되었으며, 요미우리 신문사의 한 사진기자가 니콘 F4 카메라를 손에 쥔 채 사망한 모습이 확인되었다. 해당 카메라에는 7장의 화쇄류 사진이 남아 있었으며, 고열로 인해 필름이 변색되었지만 일부 복구되었다.
2005년에는 일본 TV(NTV) 카메라맨이 사용했던 비디오 카메라가 화산재 아래에서 발견되었으며, 필름을 복구한 결과 당시 촬영된 최후의 순간들이 영상으로 남아 있었다. 이 영상에는 기자들이 첫 번째 화쇄류를 촬영하는 모습과 대피를 준비하는 과정이 담겨 있었으며, “저 소리는 뭐지?”라는 마지막 음성이 녹음된 채 종료되었다.
2.5.3. 참사의 원인과 여파[편집]
6월 3일의 대규모 화쇄류가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로 확산된 원인은 명확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가설이 제기되었다.
- 마그마 칼럼 붕괴설: 화산재를 가득 품은 거대한 기둥이 분출 도중 붕괴되면서, 막대한 화쇄 서지를 발생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 용암 돔 붕괴설: 용암 돔이 붕괴하면서 약 50만㎥의 용암이 산 아래로 무너져 내렸고, 이로 인해 대규모 화쇄류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 지형 변화설: 이전의 토석류와 화쇄류가 미즈나시 강 계곡을 메우면서, 화쇄류가 계곡을 넘어서 주변 지역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 수증기 폭발설: 화쇄류가 계곡의 폭포를 따라 하강하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물이 만나 수증기 폭발이 발생해 화쇄류가 급격히 팽창했을 수 있다.
분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소규모 화쇄류가 발생했으며, 희생자 수색과 구조 작업은 계속 지연되었다. 27구의 시신은 수습되었지만, 4명의 희생자는 끝내 찾지 못했다. 일부 희생자는 화쇄류가 미치는 범위 바깥에서 구조되었지만, 중화상을 입고 결국 사망했다.
2.5.4. 교훈과 이후의 변화[편집]
운젠 산 참사는 화쇄류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 부족과 미흡한 대피 조치가 초래한 인재(人災) 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화쇄류의 위험성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으며,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를 단순한 먼지 구름으로 인식했다. 일부 과학자들과 당국은 5월 24일 첫 번째 화쇄류 이후에도 규모가 작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경계를 늦췄다. 언론 매체들은 경쟁적으로 취재를 시도하며 위험 지역 내에서 촬영을 강행했다.
이 사건 이후, 일본 기상청과 지방정부는 화쇄류 위험에 대한 경보 시스템을 강화하고, 위험 지역 접근을 엄격히 제한하는 조치를 도입했다. 운젠 산 참사는 이후 화산 재난 대응 체계 개선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 기상청과 지방정부는 화쇄류 위험에 대한 경보 시스템을 강화하고, 위험 지역 접근을 엄격히 제한하는 조치를 도입했다. 운젠 산 참사는 이후 화산 재난 대응 체계 개선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