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1. 개요[편집]
산마리노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2. 고대[편집]
고대에는 갈리아인과 에트루리아인이 거주했다가 고대 로마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오랫동안 로마 제국의 일개 촌락으로 존재했다.
산마리노라는 지명이 생기고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시기는 4세기 초였는데, 은수자 성 마리노(성 마리누스)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티타노 산 일대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신앙 생활을 유지한 것이 시초였다.
성 마리노는 본인이 살아있을 때 콘스탄티누스 1세의 메디올라눔 칙령(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합법종교로 공인받는 것을 볼 수 있었지만, 이후로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신도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지속하여, 그의 이름이 곧 지명이 되고 더 나아가 산마리노 공화국이라는 국호의 기원이 되었다.
산마리노라는 지명이 생기고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시기는 4세기 초였는데, 은수자 성 마리노(성 마리누스)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티타노 산 일대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신앙 생활을 유지한 것이 시초였다.
성 마리노는 본인이 살아있을 때 콘스탄티누스 1세의 메디올라눔 칙령(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가 합법종교로 공인받는 것을 볼 수 있었지만, 이후로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신도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지속하여, 그의 이름이 곧 지명이 되고 더 나아가 산마리노 공화국이라는 국호의 기원이 되었다.
3. 중세[편집]
4. 근세[편집]
산마리노는 15세기에 주변 도시들을 병합하며 현재의 국토를 완성했고, 16세기에는 체사레 보르자[3]의 침공을 비롯한 몇 차례의 위기를 겪었으나, 17세기에 교황령으로부터 공식적인 독립을 승인받았다.
5. 근대[편집]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시기 산마리노는 나폴레옹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국토를 보존하면서도, 나폴레옹의 영토 확장 권유를 정중히 거절하며 나폴레옹 몰락 이후의 정세에도 대비하는 유연한 외교를 선보였고, 이를 통해 1815년 빈 회의에서 전유럽의 독립국 승인을 받아냈다.
1849년에는 교황령 로마에서 혁명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도피한 이탈리아 통일운동가 주세페 가리발디의 망명을 받아줬는데, 이는 이탈리아 왕국이 주도하는 통일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산마리노가 이탈리아에 병합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는 계기가 된 신의 한 수였다.
1861년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통일한[4] 이탈리아 왕국은 산마리노 조약을 체결하여 산마리노의 독립을 인정했고, 1870년 로마 병합으로 통일을 완수한 이후에도 이는 지켜졌다.
1차 대전 시기 산마리노는 이탈리아를 따라 독일 제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선전포고하고 일부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다.
1차 대전 직후의 산마리노는 스페인 독감으로 괴멸 위기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났고, 1920년에는 산마리노 역사상 최초로 정당 공천에 따른 총선이 치러졌다.[5]
1922년 이탈리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자, 1923년 산마리노에서도 1차 대전 참전용사 출신 줄리아노 고치가 산마리노 파시스트당을 창당한 후 외무-정무장관[6]으로서 집권했고, 1926년부터는 이탈리아가 국가 파시스트당 이외의 정당을 금지하고 일당제를 실시한 것을 본받아 산마리노 파시스트당 이외의 정당을 금지하는 일당제를 실시했다.
산마리노 파시스트당은 2차 대전 시기까지 정권을 유지했으나 정작 추축국으로 참전하는 것은 거절했고[7], 1943년 이탈리아 왕국이 항복하고 무솔리니가 실각하자 줄리아노 고치 역시 외무-정무장관에서 사퇴했는데 바로 그 해에 무솔리니를 국가원수로 한 나치 독일의 괴뢰국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살로 공화국)이 수립되자 사퇴를 취소하고(...) 다시 집권했다.
그러나 바로 1년 후인 1944년 연합군이 로마를 비롯한 중부 이탈리아 일대를 해방시키자 줄리아노 고치는 다시 사퇴했고, 이로써 산마리노는 20여년에 걸친 파시스트의 지배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1849년에는 교황령 로마에서 혁명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도피한 이탈리아 통일운동가 주세페 가리발디의 망명을 받아줬는데, 이는 이탈리아 왕국이 주도하는 통일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산마리노가 이탈리아에 병합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는 계기가 된 신의 한 수였다.
1861년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통일한[4] 이탈리아 왕국은 산마리노 조약을 체결하여 산마리노의 독립을 인정했고, 1870년 로마 병합으로 통일을 완수한 이후에도 이는 지켜졌다.
1차 대전 시기 산마리노는 이탈리아를 따라 독일 제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선전포고하고 일부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다.
1차 대전 직후의 산마리노는 스페인 독감으로 괴멸 위기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났고, 1920년에는 산마리노 역사상 최초로 정당 공천에 따른 총선이 치러졌다.[5]
1922년 이탈리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자, 1923년 산마리노에서도 1차 대전 참전용사 출신 줄리아노 고치가 산마리노 파시스트당을 창당한 후 외무-정무장관[6]으로서 집권했고, 1926년부터는 이탈리아가 국가 파시스트당 이외의 정당을 금지하고 일당제를 실시한 것을 본받아 산마리노 파시스트당 이외의 정당을 금지하는 일당제를 실시했다.
산마리노 파시스트당은 2차 대전 시기까지 정권을 유지했으나 정작 추축국으로 참전하는 것은 거절했고[7], 1943년 이탈리아 왕국이 항복하고 무솔리니가 실각하자 줄리아노 고치 역시 외무-정무장관에서 사퇴했는데 바로 그 해에 무솔리니를 국가원수로 한 나치 독일의 괴뢰국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살로 공화국)이 수립되자 사퇴를 취소하고(...) 다시 집권했다.
그러나 바로 1년 후인 1944년 연합군이 로마를 비롯한 중부 이탈리아 일대를 해방시키자 줄리아노 고치는 다시 사퇴했고, 이로써 산마리노는 20여년에 걸친 파시스트의 지배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6. 현대[편집]
1945년 이후 산마리노에서는 산마리노 기독교민주당(기민당), 산마리노 공산당, 산마리노 사회당이 각각 원내 1, 2, 3당을 차지했는데, 원내1당은 기민당이지만 단독 과반에 미달하여 공산당과 사회당이 연립내각을 구성함으로써 세계 역사상 최초로 폭력 혁명이나 내전, 부정선거가 아닌 민주적 선거를 통한 공산당 주도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원내2당으로서 집권해서 연정 파트너인 사회당의 눈치를 봐야 했던데다, 국토 전체가 NATO 회원국 이탈리아로 둘러싸인 특성상 이탈리아와 이탈리아 주둔 미군이 수틀리면 언제든지 밟아버릴 수 있는(...) 상태였기에, 당시 산마리노는 공산당 정권이었음에도 실제 정책은 공산주의보다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웠다.
1957년에는 사회당 내에서 탈당한 파벌이 중도좌파 성향의 군소정당인 산마리노 민주사회당(민사당)[8]과 함께 산마리노 독립민주사회당(독립민사당)을 창당하고 기민당과 연정을 구성하면서 총선 없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1959년 총선에서는 기민당-독립민사당 연합이 공산당-사회당 연대를 꺾고 승리하면서 민주적 정당성 역시 확보했다.
이후 산마리노는 냉전이 끝날 때까지 이탈리아처럼 기민당이 장기집권하고 만년 제1야당 공산당이 견제하는 구도가 이어지다가, 1990년 공산당이 해체되면서부터 좌파 정당들의 이합집산이 시작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민당이 좌파 정당연합[9]에 밀려 정권을 상실한 적도 있고, 2016년 총선에서는 아예 원내 3당[10]으로 밀려나는 치욕을 당했다가 2019년에 다시 원내 1당으로 올라서기도 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는 별개로 산마리노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룩셈부르크나 모나코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작지만 잘 사는 유럽의 미니 선진국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원내2당으로서 집권해서 연정 파트너인 사회당의 눈치를 봐야 했던데다, 국토 전체가 NATO 회원국 이탈리아로 둘러싸인 특성상 이탈리아와 이탈리아 주둔 미군이 수틀리면 언제든지 밟아버릴 수 있는(...) 상태였기에, 당시 산마리노는 공산당 정권이었음에도 실제 정책은 공산주의보다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웠다.
1957년에는 사회당 내에서 탈당한 파벌이 중도좌파 성향의 군소정당인 산마리노 민주사회당(민사당)[8]과 함께 산마리노 독립민주사회당(독립민사당)을 창당하고 기민당과 연정을 구성하면서 총선 없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1959년 총선에서는 기민당-독립민사당 연합이 공산당-사회당 연대를 꺾고 승리하면서 민주적 정당성 역시 확보했다.
이후 산마리노는 냉전이 끝날 때까지 이탈리아처럼 기민당이 장기집권하고 만년 제1야당 공산당이 견제하는 구도가 이어지다가, 1990년 공산당이 해체되면서부터 좌파 정당들의 이합집산이 시작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민당이 좌파 정당연합[9]에 밀려 정권을 상실한 적도 있고, 2016년 총선에서는 아예 원내 3당[10]으로 밀려나는 치욕을 당했다가 2019년에 다시 원내 1당으로 올라서기도 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는 별개로 산마리노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룩셈부르크나 모나코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작지만 잘 사는 유럽의 미니 선진국 중 하나가 되었다.
[1] 엄밀히 말하면 서로마와 같은 로마 제국이며 동서 로마는 어디까지나 후대인들이 편의상 나눈 구분이다.[2]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 중 하나로 사보이아 왕조의 통일 이탈리아 왕국과는 별개의 나라다.[3]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조카이자 우르비노 공국 등 여러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을 지배한 군주.[4] 아직 로마를 비롯한 교황령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국인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오스트리아 연해지대 등이 남아있었다.[5] 이전까지는 무소속 후보들만이 경쟁했다.[6] 산마리노의 외무장관이자 실질적인 총리.[7] 무솔리니와 달리 히틀러를 불신한 것도 있고, 미니 국가인 산마리노가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기엔 체급이 지나치게 작았다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무솔리니 역시 산마리노의 참전 여부는 전황에 큰 영향이 없을 거라 생각하여 참전을 강요하지 않았다.[8] 이 정당도 사회당 탈당파들이 만들었다.[9] 구 공산당 및 사회당 세력이 통합한 사회민주당이 주도했다.[10] 당시 원내1당은 구 공산당 세력의 후신인 좌파연합이, 원내 2당은 중도 정당인 미래공화국이 차지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