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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법적 지위[편집]
로마는 국가적으로는 이탈리아의 수도이며, 행정적으로는 라치오 주의 주도이자, 수도 로마 광역시의 중심도시인 코무네(Comune)다.
여기서 이탈리아의 광역시(Citta Metropolitana)는 대한민국의 광역시와 엄연히 다른 개념인데, 한국의 광역시가 도시 자체를 광역 행정구역으로 승격시킨 개념인 반면, 이탈리아의 광역시는 하나의 도시를 중심으로 하고 주(Regione)에 속해있는 도(Provinza)를 재편성한 것이다.
즉 로마 시가 광역시로 승격된 게 아니라 로마 광역시 내부어 로마라는 도시가 있는 것이 현 이탈리아의 행정체계이다.
여기서 이탈리아의 광역시(Citta Metropolitana)는 대한민국의 광역시와 엄연히 다른 개념인데, 한국의 광역시가 도시 자체를 광역 행정구역으로 승격시킨 개념인 반면, 이탈리아의 광역시는 하나의 도시를 중심으로 하고 주(Regione)에 속해있는 도(Provinza)를 재편성한 것이다.
즉 로마 시가 광역시로 승격된 게 아니라 로마 광역시 내부어 로마라는 도시가 있는 것이 현 이탈리아의 행정체계이다.
3. 위상[편집]
3.1. 역사적, 정치적 위상[편집]
3.2. 종교적, 문화적 위상[편집]
종교적으로 로마는 13억 인구를 자랑하는 거대 기독교 교단인 가톨릭 교회의 성지이자 총본산이며, 교황의 가장 기본적인 직함은 바로 로마의 주교다.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을 통해 행정적으로는 로마와 바티칸 시국의 분리가 이루어졌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교황청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일 뿐, 교황의 로마 주교 지위에 변동이 생기거나 바티칸이 로마 교구에서 이탈한 건 아니라서, 종교적으로는 여전히 바티칸도 로마의 일부에 해당된다.
또한 로마에는 고대 로마의 유산과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유산도 상당수가 잘 보존되어 있어, 종교가 아닌 문화적인 관점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도시다.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을 통해 행정적으로는 로마와 바티칸 시국의 분리가 이루어졌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교황청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일 뿐, 교황의 로마 주교 지위에 변동이 생기거나 바티칸이 로마 교구에서 이탈한 건 아니라서, 종교적으로는 여전히 바티칸도 로마의 일부에 해당된다.
또한 로마에는 고대 로마의 유산과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유산도 상당수가 잘 보존되어 있어, 종교가 아닌 문화적인 관점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도시다.
4. 역사[편집]
4.1. 고대 로마[편집]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로마을 세웠다 하는데, 해당 연도의 정확성은 신뢰하기 어렵지만 대략 기원전 8세기경에 도시국가가 형성된 것 자체는 인정받고 있다.
공화정 시대에 들어 로마는 본격적으로 팽창하여 이탈리아 중부 도시국가들의 맹주가 되었고, 기원전 390년 갈리아 세노네스족에게 약탈당하는 위기도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기원전 3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맹주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속적인 로마 시민권의 확대도 이루어졌는데, 기원전 1세기 동맹시 전쟁 이후에는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로마 시민권이 확대되면서, 마침내 로마는 도시국가로서의 체제를 탈피하셔 국가로서의 로마와 도시로서의 로마는 구분되는 개념이 되었다.
다만 이후로도 도시 로마의 위상은 다른 지방도시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이라서 로마 시내 중심부의 포룸 로마눔(포로 로마노)을 장악한 세력이 중앙정계를 장악하거나, 도시 로마에 거주하는 시민들에게 다른 도시에선 받기 힘든 이른바 '빵과 서커스'로 일컬어지는포퓰리즘복지를 제공하는 등의 정치 풍토는 공화정을 넘어 제정 초기 원수정 시대까지 이어졌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라 불린 최전성기에 도시 로마의 인구는 100만에 달했고, 전한의 수도 장안을 제외하면 범접할만한 도시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었는데, 이러한 위상 덕분에 제국 내에서 다른 설명 없이 그냥 도시(Urbs)라고 하면 도시 로마를 가리키게 되었고, 로마 제국은 세계(Orbis) 그 자체로 비유되었다.
그러나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군인 황제 시대에 이르러 로마는 잦은 내전으로 인해 인프라가 망가지고 인구가 감소하며 쇠퇴했고, 후대로 갈수록 로마가 아닌 지방도시를 실질적 수도로 삼아 통치하는 황제가 늘어났는데,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아예 동방에 노바 로마(Nova Roma)라 불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하여 원래의 로마와 비슷한 법적 지위와 위상을 부여하기까지 했다.
동방의 노바 로마 건설 이후로도 제국 서부에서만큼은 도시 로마가 법적 수도의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으나, 동서 분열 시기[1]의 서로마 제국에서도 메디올라눔(밀라노), 라벤나 등 북부 지방도시를 실질적 수도 삼아 통치하는 일이 잦아졌고, 410년과 455년에는 각각 서고트족과 반달족에게 약탈당하는 수모를 겪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교황을 위시한 가톨릭 교회가 각종 전란으로 피폐해진 로마 시민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성 레오 1세를 비롯한 몇몇 교황들은 이민족과의 정치적 협상에 참여하기도 했다.
공화정 시대에 들어 로마는 본격적으로 팽창하여 이탈리아 중부 도시국가들의 맹주가 되었고, 기원전 390년 갈리아 세노네스족에게 약탈당하는 위기도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기원전 3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맹주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속적인 로마 시민권의 확대도 이루어졌는데, 기원전 1세기 동맹시 전쟁 이후에는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로마 시민권이 확대되면서, 마침내 로마는 도시국가로서의 체제를 탈피하셔 국가로서의 로마와 도시로서의 로마는 구분되는 개념이 되었다.
다만 이후로도 도시 로마의 위상은 다른 지방도시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이라서 로마 시내 중심부의 포룸 로마눔(포로 로마노)을 장악한 세력이 중앙정계를 장악하거나, 도시 로마에 거주하는 시민들에게 다른 도시에선 받기 힘든 이른바 '빵과 서커스'로 일컬어지는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라 불린 최전성기에 도시 로마의 인구는 100만에 달했고, 전한의 수도 장안을 제외하면 범접할만한 도시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었는데, 이러한 위상 덕분에 제국 내에서 다른 설명 없이 그냥 도시(Urbs)라고 하면 도시 로마를 가리키게 되었고, 로마 제국은 세계(Orbis) 그 자체로 비유되었다.
그러나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군인 황제 시대에 이르러 로마는 잦은 내전으로 인해 인프라가 망가지고 인구가 감소하며 쇠퇴했고, 후대로 갈수록 로마가 아닌 지방도시를 실질적 수도로 삼아 통치하는 황제가 늘어났는데,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아예 동방에 노바 로마(Nova Roma)라 불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하여 원래의 로마와 비슷한 법적 지위와 위상을 부여하기까지 했다.
동방의 노바 로마 건설 이후로도 제국 서부에서만큼은 도시 로마가 법적 수도의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으나, 동서 분열 시기[1]의 서로마 제국에서도 메디올라눔(밀라노), 라벤나 등 북부 지방도시를 실질적 수도 삼아 통치하는 일이 잦아졌고, 410년과 455년에는 각각 서고트족과 반달족에게 약탈당하는 수모를 겪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교황을 위시한 가톨릭 교회가 각종 전란으로 피폐해진 로마 시민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성 레오 1세를 비롯한 몇몇 교황들은 이민족과의 정치적 협상에 참여하기도 했다.
4.2. 중세 로마시[편집]
4.2.1. 중세 초기 게르만 왕국[편집]
4.2.2. 동로마 제국과 로마 공국[편집]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하의 동로마 제국(로마 제국)은 대대적인 고토 수복 전쟁을 전개하여 동고트 왕국을 정벌하며 도시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를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로마군과 동고트군이 몇 차례에 걸쳐 도시를 뺏고 빳기는 공방전을 벌여 로마는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인구 역시 크게 감소하여 폐허나 다름없는 지경까지 전락했는데, 로마가 다시 고대와 같은 대도시의 위상을 회복하는데는 훗날 교황령이 성립되고도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이루어졌다.
이 무렵 로마는 정치적으로 이탈리아 북부 라벤나에 치소를 둔 총독의 통치를 받았으나, 종교적으로는 교황의 권위 역시 막대했고, 동로마 제국 및 라벤나 총독의 통치력이 약화되면서 교황은 점진적으로 권력을 강화하여 사실상의 자치령인 로마 공국을 다스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로마군과 동고트군이 몇 차례에 걸쳐 도시를 뺏고 빳기는 공방전을 벌여 로마는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인구 역시 크게 감소하여 폐허나 다름없는 지경까지 전락했는데, 로마가 다시 고대와 같은 대도시의 위상을 회복하는데는 훗날 교황령이 성립되고도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이루어졌다.
이 무렵 로마는 정치적으로 이탈리아 북부 라벤나에 치소를 둔 총독의 통치를 받았으나, 종교적으로는 교황의 권위 역시 막대했고, 동로마 제국 및 라벤나 총독의 통치력이 약화되면서 교황은 점진적으로 권력을 강화하여 사실상의 자치령인 로마 공국을 다스렸다.
4.2.3. 교황령의 성립과 발전[편집]
4.3. 르네상스 로마[편집]
4.4. 근현대 로마[편집]
4.4.1. 교황령의 위기와 이탈리아 통일[편집]
혁명의 시대인 18세기 말~19세기 초에는 몇 차례에 걸쳐 프랑스 제1공화국 및 나폴레옹의 제1제국이 교황령을 멸망시키고 괴뢰국[3]을 세우거나 프랑스령으로 병합하기도 했으며[4], 1848년 혁명이 전유럽을 휩쓸던 시기에는 일시적으로 이탈리아 통일운동가들이 교황을 축출하고 로마 공화국을 선포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혼란을 겪으면서도 교황령은 어떻게든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1861년 이탈리아 대부분을 통일한 이탈리아 왕국이 세워지며 위태로워졌고, 교황령에 주둔하면서 보호해주던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국 군대가 1870년 보불전쟁으로 인해 철수하자, 이탈리아 왕국군이 로마에 진주, 형식적인 주민투표를 거쳐 합병을 선언하며 교황령은 멸망했다.
이러한 일련의 혼란을 겪으면서도 교황령은 어떻게든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1861년 이탈리아 대부분을 통일한 이탈리아 왕국이 세워지며 위태로워졌고, 교황령에 주둔하면서 보호해주던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국 군대가 1870년 보불전쟁으로 인해 철수하자, 이탈리아 왕국군이 로마에 진주, 형식적인 주민투표를 거쳐 합병을 선언하며 교황령은 멸망했다.
4.4.2.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편집]
5. 지리[편집]
5.1. 행정구역: 무니치피오[편집]
5.2. 역사 중심부의 전통적 구역: 리오니[편집]
6. 문화[편집]
6.1. 언어[편집]
이탈리아의 수도답게 주로 사용되는 언어는 이탈리아어다.
그러나 이탈리아어의 표준은 로마 방언이 아니라 토스카나 지방에서 쓰이는 피렌체 방언인데, 이는 르네상스 초기에 활동한 피렌체인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가 피렌체 방언으로 작품을 저술하여 라틴어와 구분되는 이탈리아어의 기초를 닦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어의 표준은 로마 방언이 아니라 토스카나 지방에서 쓰이는 피렌체 방언인데, 이는 르네상스 초기에 활동한 피렌체인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가 피렌체 방언으로 작품을 저술하여 라틴어와 구분되는 이탈리아어의 기초를 닦았기 때문이다.
6.2. 관광[편집]
6.3. 스포츠[편집]
6.3.1. 축구 클럽[편집]
- AS 로마
- SS 라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