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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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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도 |
2. 명칭[편집]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원래 이 도시는 본래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의 도시였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곳을 새 수도로 정하고 재건한 뒤 콘스탄티노스의 도시, 즉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리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 시기에는 공식적으로 새로운 로마 또는 로마로 불렸으며, 제국 내에서는 단순히 도시라는 뜻의 ‘폴리스’로 지칭되기도 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도시를 점령한 이후에도 외부에서는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이름이 병행되었으며, 오스만 제국 내부에서는 흔히 이슬람의 도시 또는 이스탄불이라는 명칭이 점차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20세기 초부터 공식화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로마 제국의 맥락에서 이 도시를 지칭할 때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명칭이 가장 정확하며, 비잔티움은 제국 이전의 고대 도시를, 이스탄불은 오스만 제국 이후와 현대에 해당한다.
동로마 제국 시기에는 공식적으로 새로운 로마 또는 로마로 불렸으며, 제국 내에서는 단순히 도시라는 뜻의 ‘폴리스’로 지칭되기도 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도시를 점령한 이후에도 외부에서는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이름이 병행되었으며, 오스만 제국 내부에서는 흔히 이슬람의 도시 또는 이스탄불이라는 명칭이 점차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20세기 초부터 공식화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로마 제국의 맥락에서 이 도시를 지칭할 때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명칭이 가장 정확하며, 비잔티움은 제국 이전의 고대 도시를, 이스탄불은 오스만 제국 이후와 현대에 해당한다.
2.1. 언어별 주요 명칭[편집]
2.1.1. 콘스탄티누스의 도시[편집]
- 라틴어: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
- 그리스어
- 코이네 그리스어: 콘스탄티누폴리스
- 중세 ~ 현대 그리스어: 콘스탄티누폴리(콘스탄디누폴리)
- 아랍어: 알-쿠스탄티니야(al-Qustantiniyah)
- 튀르키예어: 코스탄티니예(Kostantiniyye)
2.1.2. 새로운 로마(새 로마)[편집]
- 라틴어: 노바 로마(Nova Roma)
- 그리스어
- 코이네 그리스어: 네아 로메
- 중세 ~ 현대 그리스어: 네아 로미
- 영어: New Rome
2.1.3. (위대한)도시 [편집]
- 코이네 그리스어
- 메갈레 폴리스
- 폴리스
- 중세 ~ 현대 그리스어
- 메갈리 폴리
- 이 폴리
2.2. 상세[편집]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는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비잔티움(Byzantion)을 재건하여 330년에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한 도시이다. 이는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를 의미하는 명칭으로, 이후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로서 천 년 이상 유지되었다.
이 도시는 다양한 시대와 문화권에서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비잔티움(Byzantio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기원전 7세기경 메가라인들이 세운 식민 도시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 시대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곳을 재건하면서 ‘노바 로마(Nova Roma)’, 즉 ‘새로운 로마’라는 이름도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이는 일반적으로 널리 정착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 시기에는 ‘메갈레 폴리스(Megale Polis, 위대한 도시)’ 또는 단순히 ‘폴리스(Polis, 도시)’로 불리기도 했으며, 이는 당시 이곳이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음을 반영한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알-쿠스탄티니야(al-Qustantiniyah)’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이는 아랍어식 표현이다. 오스만 제국이 1453년에 이 도시를 정복한 이후에도 ‘코스탄티니예(Kostantiniyye)’라는 명칭이 공식 문서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시대에는 점차 ‘이스탄불(İstanbul)’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정착하였으며, 이는 ‘도시로 향하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표현 ‘εἰς τὴν Πόλιν(이스 틴 폴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 ‘이스탄불’이라는 명칭이 확정된 것은 1930년이며, 오늘날까지 이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랜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동서양을 잇는 중요한 교차로이자 제국의 심장으로서의 역할이 있었다.
이 도시는 다양한 시대와 문화권에서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비잔티움(Byzantio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기원전 7세기경 메가라인들이 세운 식민 도시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 시대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곳을 재건하면서 ‘노바 로마(Nova Roma)’, 즉 ‘새로운 로마’라는 이름도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이는 일반적으로 널리 정착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 시기에는 ‘메갈레 폴리스(Megale Polis, 위대한 도시)’ 또는 단순히 ‘폴리스(Polis, 도시)’로 불리기도 했으며, 이는 당시 이곳이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음을 반영한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알-쿠스탄티니야(al-Qustantiniyah)’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이는 아랍어식 표현이다. 오스만 제국이 1453년에 이 도시를 정복한 이후에도 ‘코스탄티니예(Kostantiniyye)’라는 명칭이 공식 문서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시대에는 점차 ‘이스탄불(İstanbul)’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정착하였으며, 이는 ‘도시로 향하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표현 ‘εἰς τὴν Πόλιν(이스 틴 폴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 ‘이스탄불’이라는 명칭이 확정된 것은 1930년이며, 오늘날까지 이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랜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동서양을 잇는 중요한 교차로이자 제국의 심장으로서의 역할이 있었다.
3. 주요 기관 및 시설 [편집]
3.1. 궁전[편집]
3.2. 원로원[편집]
3.3. 성당[편집]
- 하기아 소피아(아야 소피아)
3.4. 테오도시우스 성벽(삼중성벽)[편집]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 치세에 건설되었으며 '삼중성벽'이라고도 불린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로마 제국의 수도라는 그 정치적, 역사적 상징성에 더해 보스포루스 해협이라는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라서 수많은 제국 내부와 외부를 막론하고 수많은 세력이 노리는 도시였는데, 천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이를 굳건하게 지켜온 것이 바로 테오도시우스 성벽이었다.
동로마 제국 내부의 지방 반란 세력의 경우 성내 협력자들을 이용하여 문을 열거나 수비군의 쿠데타, 시민 봉기 등을 유도함으로써 별다른 교전 없이 입성하는 것도 가능했으나, 제국민들과 이질적인 정체성을 가진 이민족, 외국 세력은 삼중성벽을 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펼쳐야 했다.
역사적으로 훈족, 사산조 페르시아, 아랍, 불가리아, 키이우 루스(키예프 루스)[2], 4차 십자군, 오스만 제국 등이 직접적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시도한 외세였으며, 그 중 실제로 성공한 것은 1204년의 4차 십자군[3], 1453년의 오스만 제국[4] 둘 뿐이었고, 동로마 유민 국가 니케아 제국이 십자군 국가 라틴 제국으로부터 도시를 되찾아 제국 재건에 성공한 1261년의 공방전[5]까지 포함하면 도시 외부의 국가가 함락에 성공한 사례는 20회 가량 되는[6] 공방전 중 단 3회에 불과했다.
이와 같은 공방전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배하는 제국이 오스만으로 바뀐 이후에는 더이상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동로마 제국이 도시를 노리는 외부 세력을 견제할만한 배후지역인 트라키아[7], 마케도니아[8], 아나톨리아(소아시아)[9], 에게 해[10], 흑해[11] 등의 패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지 못한 시기가 길었던 반면 오스만 제국은 적어도 18~19세기 이전까지는 해당 지역들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기에[12]에 가능했다.
그나마 공방전에 근접했던 사례로는 20세기 초 1차 발칸 전쟁 시기에 불가리아군이 도시 근방인 차탈자 일대까지 남하해서 위협했던 일이 있으나, 당시 불가리아를 지원하던 러시아의 개입으로 인해 실제 성벽 일대까지 불가리아군이 도달하는 일은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로마 제국의 수도라는 그 정치적, 역사적 상징성에 더해 보스포루스 해협이라는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라서 수많은 제국 내부와 외부를 막론하고 수많은 세력이 노리는 도시였는데, 천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이를 굳건하게 지켜온 것이 바로 테오도시우스 성벽이었다.
동로마 제국 내부의 지방 반란 세력의 경우 성내 협력자들을 이용하여 문을 열거나 수비군의 쿠데타, 시민 봉기 등을 유도함으로써 별다른 교전 없이 입성하는 것도 가능했으나, 제국민들과 이질적인 정체성을 가진 이민족, 외국 세력은 삼중성벽을 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펼쳐야 했다.
역사적으로 훈족, 사산조 페르시아, 아랍, 불가리아, 키이우 루스(키예프 루스)[2], 4차 십자군, 오스만 제국 등이 직접적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시도한 외세였으며, 그 중 실제로 성공한 것은 1204년의 4차 십자군[3], 1453년의 오스만 제국[4] 둘 뿐이었고, 동로마 유민 국가 니케아 제국이 십자군 국가 라틴 제국으로부터 도시를 되찾아 제국 재건에 성공한 1261년의 공방전[5]까지 포함하면 도시 외부의 국가가 함락에 성공한 사례는 20회 가량 되는[6] 공방전 중 단 3회에 불과했다.
이와 같은 공방전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배하는 제국이 오스만으로 바뀐 이후에는 더이상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동로마 제국이 도시를 노리는 외부 세력을 견제할만한 배후지역인 트라키아[7], 마케도니아[8], 아나톨리아(소아시아)[9], 에게 해[10], 흑해[11] 등의 패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지 못한 시기가 길었던 반면 오스만 제국은 적어도 18~19세기 이전까지는 해당 지역들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기에[12]에 가능했다.
그나마 공방전에 근접했던 사례로는 20세기 초 1차 발칸 전쟁 시기에 불가리아군이 도시 근방인 차탈자 일대까지 남하해서 위협했던 일이 있으나, 당시 불가리아를 지원하던 러시아의 개입으로 인해 실제 성벽 일대까지 불가리아군이 도달하는 일은 없었다.
4. 역사[편집]
4.1. 전신: 비잔티움(비잔티온)[편집]
4.2.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편집]
330년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새로운 로마(Nova Roma)로서 제국의 동방 수도가 되어 번영하게 되었다.
처음 건설될 당시부터 원본인 서방의 로마와 버금가는 위상을 확보한 것은 아니었으나, 3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를 서방의 로마 교황 다응의 서열 2위 총대주교로 격상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의 정원을 늘리고 권한을 확대하는 등의 절차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위상을 강화했다.
5세기 테오도시우스 2세 시대에는 난공불락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테오도시우스 삼중성벽이 건설되었으며, 이후 몇 차례의 정치적 혼란과 이민족의 포위 공격을 겪으면서도 번영을 거듭하였다.
서로마 고토를 회복한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에는 지금까지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인 하기아 소피아(아야 소피아)가 건설되었으며, 예상치 못한 역병으로 타격을 입기도 했다.
7세기 사산 제국(사산조 페르시아)와 8세기 우마이야 왕조의 포위 공격 등을 겪기도 했는데, 이후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적인 대도시로서의 위상을 유지하여, 과거에 비하면 제국령이 크게 축소된 8~9세기 경에도 당나라 장안,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에 비견될 정도의 규모를 자랑했고, 콤니노스 중흥기에는 경제적으로도 절정의 부를 과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1185년 이후 앙겔로스 왕조 치하의 제국이 혼란을 거듭하며 퇴색됐고, 1204년에는 4차 십자군에 의해 약탈당하며 무수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고 십자군의 괴뢰국인 라틴 제국이 세워지는 치욕을 당하기까지 했다.
수많은 노력 끝에 1261년 팔레올로고스 왕조 치하의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함으로써 제국을 재건하는데 성공했으나, 이전과 같은 강대국의 위상까지 되찾는데는 실패했고 14세기의 내전과 오스만 제국의 발흥 등을 거치며, 유럽과 아시아 양쪽에서 오스만에 포위된 상태로 버티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의 역사를 마감했다.
처음 건설될 당시부터 원본인 서방의 로마와 버금가는 위상을 확보한 것은 아니었으나, 3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를 서방의 로마 교황 다응의 서열 2위 총대주교로 격상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의 정원을 늘리고 권한을 확대하는 등의 절차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위상을 강화했다.
5세기 테오도시우스 2세 시대에는 난공불락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테오도시우스 삼중성벽이 건설되었으며, 이후 몇 차례의 정치적 혼란과 이민족의 포위 공격을 겪으면서도 번영을 거듭하였다.
서로마 고토를 회복한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에는 지금까지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인 하기아 소피아(아야 소피아)가 건설되었으며, 예상치 못한 역병으로 타격을 입기도 했다.
7세기 사산 제국(사산조 페르시아)와 8세기 우마이야 왕조의 포위 공격 등을 겪기도 했는데, 이후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적인 대도시로서의 위상을 유지하여, 과거에 비하면 제국령이 크게 축소된 8~9세기 경에도 당나라 장안,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에 비견될 정도의 규모를 자랑했고, 콤니노스 중흥기에는 경제적으로도 절정의 부를 과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1185년 이후 앙겔로스 왕조 치하의 제국이 혼란을 거듭하며 퇴색됐고, 1204년에는 4차 십자군에 의해 약탈당하며 무수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고 십자군의 괴뢰국인 라틴 제국이 세워지는 치욕을 당하기까지 했다.
수많은 노력 끝에 1261년 팔레올로고스 왕조 치하의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함으로써 제국을 재건하는데 성공했으나, 이전과 같은 강대국의 위상까지 되찾는데는 실패했고 14세기의 내전과 오스만 제국의 발흥 등을 거치며, 유럽과 아시아 양쪽에서 오스만에 포위된 상태로 버티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의 역사를 마감했다.
4.3. 오스만 제국 이후[편집]
[1] 실제 영어 발음과는 차이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관용적으로 해당 표기가 쓰이고 있다.[2] 현 동슬라브 3국(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의 공통 조상.[3] 1203년부터 1204년까지 1년 동안 황제가 2명이나 교체되던 혼란기에 성벽의 취약지점인 금각만을 공략하여 성공했다.[4] 성내 수비 병력보다 20배 이상 많은 병력을 동원하고도 2개월간 고전하다가, 성 밖에 유격전을 펼치다 성 안으로 돌아가던 수비군이 미처 잠그지 못한 비밀 쪽문 '케르타포르타'를 통해 진입하여 가까스로 성공했다.[5] 당시 방어군의 주축이던 베네치아 공화국군이 타지 원정을 떠나느라 성을 비운 사이, 알렉시오스 스트라티고풀로스가 이끄는 소수 정예 병력이 잠입하여 시민 봉기를 유도함으로써 함락시켰다.[6] 정확한 횟수는 기록에 따라 다르다.[7] 지금의 불가리아 남동부(북트라키아)와 그리스령 트라키아(서트라키), 튀르키예의 유럽 영토(루멜리).[8] 지금의 북마케도니아 공화국과 그리스령 마케도니아(남마케도니아), 불가리아령 마케도니아.[9] 현재 튀르키예의 아시아 영토이자 튀르키예 국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10]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사이의 해역.[11] 남쪽으로는 튀르키예, 북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크림 반도, 서쪽으로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동쪽으로는 러시아와 조지아 등으로 둘러싸인 해역.[12]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아나톨리아, 에게 해 등은 수백년간 오스만 제국이 직접 장악했고, 흑해의 경우 봉신국인 크림 칸국을 이용해 러시아 등 주변국들을 견제할 수 있었다.[13] 이스탄불 역시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공식 석상에서 자주 사용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