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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에서 넘어옴
1. 개요2. 역사
2.1. 테오도시우스 왕조
2.1.1.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망과 동서 분할2.1.2. 호노리우스2.1.3. 호노리우스 사망 직후의 혼란2.1.4. 발렌티니아누스 3세
2.2. 최후의 순간
2.2.1.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2.2.2. 아비투스2.2.3. 권신 리키메르2.2.4. 권신 군도바두스(군도바트)2.2.5. 율리우스 네포스2.2.6.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와 제국의 멸망
2.3. 멸망 이후
2.3.1. 구 서로마 세력의 부흥운동
2.3.1.1. 율리우스 네포스2.3.1.2. 시아그리우스의 수아송 왕국2.3.1.3. 로만 브리튼계 소왕국(웨일스)2.3.1.4. 무어-로마 왕국
2.3.2. 동로마 제국의 고토 수복 운동
2.3.2.1. 테오도리쿠스와 동고트 왕국2.3.2.2.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

1. 개요[편집]

395년 동서 로마 분열 이후부터 476년까지 로마 제국 서부를 지배하며 존속했던 제국.

엄밀히 말하면 당대에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라는 국호는 사용된 적 없고, 당대인들은 하나의 로마 제국이라고 인식했으나 오늘날에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굳어진지 오래인데다 시대 구분상 필요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2. 역사[편집]

2.1. 테오도시우스 왕조[편집]

2.1.1.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망과 동서 분할[편집]

2.1.2. 호노리우스[편집]

2.1.3. 호노리우스 사망 직후의 혼란[편집]

2.1.4. 발렌티니아누스 3세[편집]

2.2. 최후의 순간[편집]

2.2.1.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편집]

2.2.2. 아비투스[편집]

2.2.3. 권신 리키메르[편집]

아비투스를 살해하고 집권한 서로마판 최충헌권신 플라비우스 리키메르는 자신이 직접 제위에 오르지 않고 태생적 로마 시민인 허수아비 황제들(마요리아누스, 리비우스 세베루스, 안테미우스, 올리브리우스)를 차례로 옹립하며 전횡을 일삼았다.

2.2.4. 권신 군도바두스(군도바트)[편집]

리키메르 사후에는 그의 조카 군도바두스(군도바트)가 정권을 승계했는데, 군도바트는 서로마 군부의 수장인 동시에 갈리아 남부의 게르만 왕국인 부르군트 왕국의 군주이기도 했다.

군도바트는 삼촌이 옹립했던 황제 올리브리우스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허수아비 황제 글리케리우스를 옹립하며 전횡을 일삼았으나,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하자 서로마에서의 정권 유지를 포기하고 본거지인 부르군트 왕국으로 철수했다.

2.2.5. 율리우스 네포스[편집]

동로마 장군 출신인 율리우스 네포스는 20년 가까이 허수아비 황제만 존재했던 서로마 제국에서 오랜만에 실권을 가진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리키메르와 군도바트에게 부역했던 서로마군 수뇌부 인사들과 중신들을 완전히 숙청하는데는 실패했고, 오레스테스가 그들을 규합하여 반격을 감행하자 네포스는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달마티아로 철수했다.

2.2.6.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와 제국의 멸망[편집]

475년 율리우스 네포스를 축출한 오레스테스는 자신이 직접 제위에 오르지 않고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오레스테스는 자신이 고용한 게르만족 용병 오도아케르와 갈등을 빚다가 집권 1년만인 476년 쿠데타에 직면했고, 수도 라벤나가 오도아케르군에 함락당하며 본인은 패사하고 아들은 폐위당했다.

이때 오도아케르는 이전의 게르만족 권신들이나 오레스테스처럼 허수아비 서로마 황제를 옹립하지 않고 이탈리아의 왕을 칭했기에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다만 아직 건재한 동로마 제국까지 상대할 힘은 없었기에 서로마 황제의 관과 예복을 동로마 황제 제노에게 바쳤는데, 제노는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며 확답을 내리지 않았다.

2.3. 멸망 이후[편집]

2.3.1. 구 서로마 세력의 부흥운동[편집]

2.3.1.1. 율리우스 네포스[편집]
이탈리아의 서로마 제위에서 축출된 이후에도 달마티아 일대에서 세력을 유지하던 율리우스 네포스는 오도아케르 정권에 맞선 항쟁을 지속했으나 481년에 암살당했고, 그 직후 오도아케르는 달마티아 원정을 단행하여 네포스의 부관 오비다가 이끌던 서로마 잔존 세력을 격파했다.
2.3.1.2. 시아그리우스의 수아송 왕국[편집]
갈리아 북서부의 노비오두눔(수아송) 일대에서 잔존 서로마군을 규합한 시아그리우스 세력, 이른바 수아송 왕국은 제국 본토가 멸망한 476년 이후에도 10년 가까이 버텼으나 486년 수아송 전투에서 클로비스 1세의 프랑크 왕국에 패하며 멸망했다.

이후 시아그리우스는 서고트 왕국 치하의 갈리아 남부로 도주했으나, 서고트 왕실은 그를 프랑크 왕국으로 송환하여 487년 프랑크인들에게 살해당하게 했다.

이렇게 시아그리우스 본인은 비참하게 사망했으나 그의 일가족만큼은 멸족을 피하고 프랑크 왕국에서 귀족 신분을 인정받아 8세기까지 대를 이어갔다.
2.3.1.3. 로만 브리튼계 소왕국(웨일스)[편집]
로마 제국의 북서쪽 변방인 브리타니아 속주(로만 브리튼)은 서로마 초기인 호노리우스 시대에 이미 로마군이 철수한 상태라 히베르니아(아일랜드) 및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 일대에서 쳐들어온 게일인의 침공에 시달렸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불러온 앵글로색슨족이 독자적인 왕국을 세우고 눌러앉기까지 했다.

이때 브리타니아 속주의 켈트계 로마인들, 이른바 로만 브리튼인들은 자신들의 영토 대부분을 빼앗기고 지금의 웨일스 일대까지 영역이 축소되긴 했으나 귀네드 왕국, 더베드 왕국, 포이스 왕국 등의 국가를 세우며 끈질기게 저항을 이어갔고, 앵글로색슨계 국가들을 통합한 잉글랜드 왕국도 이들을 정복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로만 브리튼인들 대부분은 로마 시민으로 살던 시절에도 완전히 라틴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모어인 브리튼어를 보존하고 있었고, 다른 서로마 부흥 세력이나 동로마 제국과 접촉할 기회도 거의 없었기에, 독립은 유지했음에도 로마계 국가로서의 정체성은 시간이 갈수록 옅어져서 로마 계승 의식을 드러내는 칭호가 아닌 브리튼인의 왕, 웨일스 공 등의 칭호를 사용했다.
2.3.1.4. 무어-로마 왕국[편집]
로마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인들이 세운 여러 국가 또는 정치 집단을 총칭한다.

이들은 서로마의 북아프리카 영토를 재패한 반달 왕국에 맞서 끈질기게 저항을 이어갔고, 동로마 제국의 고토 수복에도 협력하여 자치권을 인정받았으나, 지방 통제권을 강화하려는 동로마 중앙정부와 대립하다가 강제 합병되었다.

2.3.2. 동로마 제국의 고토 수복 운동[편집]

2.3.2.1. 테오도리쿠스와 동고트 왕국[편집]
오도아케르 정권에 대한 승인을 차일피일 미루던 제노는 489년, 자국에 귀화하여 시민권자가 된 동고트족 출신 무장 테오도리쿠스에게 이탈리아 수복을 지시했다.

테오도리쿠스는 4년에 걸친 전쟁 끝에 493년, 라벤나에서 농성하던 오도아케르의 항복을 받아낸 후 참살함으로써 이탈리아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이때 테오도리쿠스가 동원한 병력은 대부분 그와 같은 동고트족 출신들로 구성된 사병이지 동로마 중앙군이 아니었기에, 제노는 테오도리쿠스가 오도아케르처럼 이탈리아의 왕을 칭하며 자립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이후 테오도리쿠스는 왕위 세습까지 성공하며 60년 가까이 이탈리아는 형식적으로만 동로마에 칭신한 동고트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2.3.2.2.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편집]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동로마 제국은 본격적인 국토 수복을 진행하여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정벌하고, 그 여세를 몰아 동고트 왕국 치하의 이탈리아와 서고트 왕국 치하의 이베리아 남부 안달루시아까지 수복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역병으로 인해 이탈리아 수복 과정이 20년이나 되는 긴 시간을 쏟아부으며 고전했고,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랑고바르드족의 남하로 인해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이에 동로마 정부는 남은 이탈리아 영토를 라벤나 총독부로 재편하며 방어선을 유지하려 했고, 안달루시아 일대에 설치한 스파니아 속주와 북아프리카 일대에 설치한 아프리카 총독부도 악착같이 유지했으나, 7세기에 스파니아는 서고트 왕국에게, 북아프리카는 이슬람 제국에게 정복당했고, 이탈리아에서는 751년에 라벤나 총독부가 함락당하여, 남이탈리아 영토만이 1071년까지 동로마령으로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