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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朴
박(朴)씨는 대한민국의 성씨 중 하나이며, 김씨, 이씨에 이어 인구 순위 3위이며, 2015년 인구 4,192,074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인구(2015년 당시 51,069,375명) 중 약 8.2%를 차지하였다.
신라시대 초기 220여년[1], 통일신라 말기 15년[2] 동안 왕족의 성이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들로 사실상 순수 토착 성씨이다. 그야말로 한국인이나 한민족만의 성씨라고 여겨지는 순수한 한국 순혈 성씨이다.[3]
그래서, 한국의 박씨는 순수 토착 한국인의 순혈 성씨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한국인들을 지칭하는 별명으로 박씨 성을 가진 '박가네' 라는 단어가 쓰인다. 일본에는 나까무라, 중국에서는 왕서방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박(朴)씨는 대한민국의 성씨 중 하나이며, 김씨, 이씨에 이어 인구 순위 3위이며, 2015년 인구 4,192,074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인구(2015년 당시 51,069,375명) 중 약 8.2%를 차지하였다.
신라시대 초기 220여년[1], 통일신라 말기 15년[2] 동안 왕족의 성이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들로 사실상 순수 토착 성씨이다. 그야말로 한국인이나 한민족만의 성씨라고 여겨지는 순수한 한국 순혈 성씨이다.[3]
그래서, 한국의 박씨는 순수 토착 한국인의 순혈 성씨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한국인들을 지칭하는 별명으로 박씨 성을 가진 '박가네' 라는 단어가 쓰인다. 일본에는 나까무라, 중국에서는 왕서방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2. 역사[편집]
신라 초기 왕들에 대해 기록이 있다 보니 박씨들의 시작은 박혁거세 및 신라 왕기를 반드시 참고할 수밖에 없다. 신라가 생기기 전에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일대 여섯 개의 마을(6부)에서 각각 촌장이 있었다.
손(孫)씨의 조상인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의 구례마(俱禮馬) 정(鄭)씨의 조상인 취산 진지촌(嘴山 珍支村)의 지백호(智伯虎) 배(裵)씨의 조상인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의 지타(只他) 설(薛)씨의 조상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의 호진(虎珍)기원전 69년 이들 여섯 촌장들이 아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을 추대할 것을 의논하였다. 그러자 나정 우물가에 번개 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하늘에서 땅으로 비쳤고, 흰말 한 마리가 꿇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였다. 그곳에 가서 보았더니 박처럼 생긴 알이 있었으며, 그 알을 깨어 보니 그곳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아이를 혁연히 세상에 나왔다고 해서 혁거세(赫居世)라고 하고, 박 모양의 알에서 나왔다며 성을 박이라고 해서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알에서 태어난 이후 고허촌장인 소벌도리가 10대까지 혁거세를 키웠고 이후 6촌장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기원전 32년 신라 3대 왕위에 오른 유리왕(유리 이사금, 新羅 儒理王 8)은 이들 6촌장의 공로를 기려 각각에게 성을 하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李, 崔, 鄭, 孫, 裵, 薛 신라 건국의 6촌장의 씨(氏)들이 되었다.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를 시조로 한다.[4] 李씨(중국 1위, 대만 5위), 金씨(중국 69위, 대만 94위), 崔씨(중국 74위), 鄭씨(중국 23위, 대만 12위), 姜씨(중국 60위, 대만 80위)인 것에 비해 박(朴)씨는 중국 성씨 순위권 밖이다.
朴이라는 글자는 소박할 박, 혹은 팽나무 박이며, 유래에 대해선 정설이 없으며 의견이 분분하다. 박혁거세의 난생설화 때문에 표주박을 뜻하는 瓢(표)에서 갈라져 나와 朴이 되었다는 등 이설이 많다.
박씨는 300여 개의 본관이 있는데 밀양 박씨가 3,168,084명으로 본관별 인구로는 김해 김씨 다음이다. 2위 반남 박씨가 역시 경명왕의 장남 언침을 시조로 하고 있지만 밀양 박씨와 직접 관련성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고. 그외에 함양 박, 순천 박, 무안 박, 죽산 박, 고령 박, 충주 박 등 벌열이 컸던 순으로 따로 8박이라고 한다.
한편 한국이 근원인 특유의 성씨인지라 의외로 고구려사, 발해사 연구에도 대단히 도움이 되는 성씨다. 엄연히 고구려인인데 박씨성을 쓰는 사람들이 기록에 나타나고, 또 발해에서 고려로 귀순해오는 유민들 중에도 박씨들이 상당수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구려인 박씨들은 신라가 고구려의 신하국 및 동생나라였던 4세기 말~5세기 중반 시기에 고구려로 이주하거나, 이후 눌지 마립간의 고구려 공격 후 고구려와의 전쟁 중에 끌려간 이들로 추정된다. 한편 발해인 박씨들은 앞서의 고구려인 박씨들이 고구려 정체성을 가지게 된 이후 발해 건국에 참여한 이들의 후손이거나 통일신라에서 어떤 이유로 발해로 이주한 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인들 중에서도 간혹 '朴'씨(박씨)가 존재하는데, 신라방 출신 같이 전근대에 중국으로 무역 등을 이유로 이주해갔다가 그대로 현지에 정착한 경우이거나, 조선인이었다가 청나라(주로 사르후 전투 또는 병자호란 시기)에 끌려갔다가 강제로 정착한 조선인들의 후손들이 아닐까하고 짐작만 할 뿐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무려 400년전 만주에 정착한 랴오닝성 번시시의 '번시 박씨'가 있는데, 이들의 조상들은 1619년 후금(後金)을 정벌하기 위해 명나라와 연합전선을 펼쳤던 조선시대 강홍립(姜弘立.1560-1627년) 장군을 따라 압록강을 넘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부차(富車.현재의 랴오닝 푸순(撫順)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인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 후금의 포로가 됐던 강홍립의 부하였던 그들이 번시 일대에 정착하면서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강홍립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갔지만 번시 박씨의 시조는 만주에 그대로 남아 계보를 계속 이어갔다는 것이다. 中서 400년 혈통 지켜온 '번시 朴씨' 조선족 시조 '번시 朴씨'…400년 혈통 지켜낸 비결은?
이후 팔기군에 합류한 조선 출신 박씨 형제들의 후손들은 청나라 때 만주족으로 분류되었다가 1958년에는 한족으로 분류되었고 다시 1982년에서야 조선족으로 재분류되었다. 특히 이중에서 번시 박씨가 만주족으로 분류되었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청나라 때 편찬된 <팔기 만주 씨족통보>에는 ‘팔기’에 속한 1266개의 성씨가 수록돼 있는데, 그 다수는 만주족·몽골인·한족이지만, 조선인 출신의 성씨들도 43개나 포함돼 있었다. 다시 말해서 만주 지역에 잔류 혹은 이주했던 한민족 상당수가 만주족으로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5] 상술한 번시 박씨의 경우도 집성촌을 중심으로 모여살면서 외부인들과의 통혼을 최대한 제한하면서 혈통을 보존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조선어는 거의 대부분 잊어버린 상태였고 조선족으로 인정받고 나서야 다시 조선어(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즉, 번시 박씨 집성촌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전근대 만주 지역의 한민족 이주민들은 대부분 만주족이나 한족 등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다는 설명이 가능하다.[6]
실제로 중국인들 중에서는 이 조선족 출신의 박씨가 숫자로는 가장 큰 비율이다. 박씨 성을 고집하는 조선족들은 한족이나 만주족 등의 어머니를 가졌더라도 중공 성립 후 조선족을 자처해 인정됐다고 한다. 그외 한족이나 만주족이어도 박(朴)씨 성씨를 가지고 있다면 한민족의 후예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겠다. 중국어 위키백과에도 박(朴)씨는 조선인 특유의 성씨라고 서술되어 있다. 참고로 중국에는 다른 박(薄, 보)씨가 있고 유명인으로는 보시라이(薄熙來, 박희래)가 있다.
로마자 표기는 대부분 Park을 쓴다. 그러나 Bak, Bahk[7], Pak[8], Bag, Bark등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이씨도 마찬가지인데, 대부분이 Lee를 쓰지만, Rhee[9], Rhie[10], Ri[11], Li[12], Yi[13] 등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Bak으로,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 따르면 Pak이 된다.
2.1. 본관별[편집]
2.1.1. 경명왕 계열[편집]
경명왕은 통일신라 말기의 왕으로 김씨에서 박씨로 다시 왕좌를 되찾은 신덕왕의 아들이다. 그런데 신덕왕은 아달라 이사금의 원손임을 자처한 바 있다. 아달라이사금은 일성왕의 아들로, 일성왕은 다시 유리왕의 장남이다. 그래서 유리왕의 차남인 파사왕계와 갈라진다.
참고로 아래 8왕자는 그 실존성을 의심받고 있다. 애초에 해당 인물에 대한 기록이 박씨 종친회 등에서만 나오는 것이니...
참고로 아래 8왕자는 그 실존성을 의심받고 있다. 애초에 해당 인물에 대한 기록이 박씨 종친회 등에서만 나오는 것이니...
- 장남인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忱)의 후손
- 창원 박씨: 밀양 박씨에서 분적한 집안으로, 고려 후기 창원도호부사를 지낸 박령을 관향조로 한다. 2000년도 조사 결과 1897가구, 6,12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 영암 박씨: 밀성대군 언침의 10세손 박항을 시조로 한다. 밀양 박씨에서 분적한 것은 아니다.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 1명, 무과 급제자 12명을 배출한 무골 집안이다. 1,954가구 총 6,120명(2000년)
- 태인(태산) 박씨: 밀양 박씨 도평의사공파 돈재공파라고도 한다. 총 456명(2000년). 고려 때 밀직부사 박언상을 시조로 하며, 전 KBS 사장 박권상을 배출했다. 조선시대 문과급제자는 1명이다.
- 선산(구미) 박씨: 조선 때 박선민이 시조이며, 음서로써 관직에 천거되어 목민관을 지낸 인물이다. 후손 중에 세조의 후궁인 근빈 박씨가 있다.
- 2남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의 후손
- 3남 속함대군(速咸大君) 박언신(朴彦信)의 후손
- 함양 박씨: 박씨 본관 중 현대 남한의 박씨 본관별 인구로는 2번째이다. 69명의 문과 급제자와 50명이 넘는 무과급제자를 배출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는 본관이다.
- 군위 박씨
- 4남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의 후손
- 평산 박씨: 평주 박씨라고도 한다. 죽산 박씨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한다.
- 5남 사벌대군(沙伐大君) 박언창(朴彦昌)의 후손
- 상주(상산) 박씨: 조선 문과급제자 수는 11명, 무과급제자가 30명이었다.
- 평택 박씨
- 6남 완산대군(完山大君) 박언화(朴彦華)의 후손
- 무안 박씨: 박씨 중 5번째 크기를 자랑하는 집안으로 완산군 박언화의 후손들이다. 충렬왕 때 홍건적을 토평한 공으로 면성(지금의 무안)부원군에 봉해진 박문오, 팔만대장경 창제 공신 박문정, 한글 점자를 창안한 박두성을 배출했다. 무안(務安) 박씨는 본관 면성 박씨(綿城 朴氏)와 본관 무안 박씨(務安 朴氏)의 족보를 통칭하여 무안 박씨(務安 朴氏)로 불리며, 조선시대 25명의 문과급제자와 63명의 무과급제자를 배출했다. 통계청 "2015 인구주택총조사"의 우리나라 성씨본관별 인구 현황에 따르면, 무안 박씨(務安 朴氏)는 90,785명이고, 면성 박씨(綿城 朴氏)는 7,666명이다.
- 7남 강남대군(江南大君) 박언지(朴彦智)의 후손
- 춘천 박씨: 1만 6천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집안으로,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6명을 배출했다. 퇴계 이황의 어머니가 이 집안 출신이다.
- 8남 월성대군(月城大君) 박언의(朴彦儀)의 후손
2.1.2. 경애왕 계열[편집]
경애왕은 경명왕의 동생으로, 그의 후손들은 경명왕계와 갈라진다.
- 장남 금성대군(金城大君) 박교순(朴交舜)의 후손
- 울산 박씨: 고려 개국공신(벽상공신) 박윤웅을 시조로 한다. 박윤웅은 경애왕의 장남 교순의 후예로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할 때 자신이 다스리던 울산도 함께 고려에 귀부시킨 공으로 흥려백에 오르고 장무공이란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2000년 인구는 2만 2천 명. 족보(로그인 필요)
- 차남 계림대군(鷄林大君) 박순현(舜玄)의 후손
- 계림 박씨: 경애왕의 아들 순현(舜玄)을 중시조로 한다. 족보(로그인 필요)
2.1.3. 파사 이사금 계열[편집]
신라 때 외교관 박제상은 파사왕의 자손이다.
- 경주 박씨: 파사왕의 38세손이자 박제상의 33세손인 박앙(朴盎)을 시조로 한다. 족보(로그인 필요)
- 영해 박씨: 시조는 박제상이며, 중시조는 박제상의 26세손 박명천(朴命天).# 후일 신라가 망할 때 고려 왕건이 신라를 도우러 갔다가 견훤에게 털리고 경북 포항 쪽으로 도주할 때 왕건을 호종한 공이 있다. 왕건이 영덕 대게를 먹었던 것이 영해 박씨들 덕이라고. 신라 외교관 박제상의 후손답게 조선 조에 역관을 많이 배출한 가문이다.
2.1.4. 기타[편집]
- 순천 박씨: 견훤의 사위로 후백제에서 장군을 한 박영규를 시조로 한다. 사육신 박팽년과 중종반정 일등 공신 박원종을 배출했다. 남한 내 인구가 10만에 달하는 박씨 중 4번째로 큰 집안이다. 35명의 문과급제자와 1명 상신이 있다. 무과급제자가 29명이다. 강남대군 박언지의 후손이라는 말도 있는데, 애초에 박언지라는 인물의 실존여부가 불분명할뿐더러 실존했다 쳐도 박영규보다 아들~손자뻘의 인물이므로 맞지 않는다. 현재 순천 박씨 종친회측에서는 가문의 뿌리를 소개할 때 박언지와 박혁거세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박영규부터 언급한다. 박영규의 출자도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진원 박씨: 장성군 진원면을 본관하고 고려시대 대장군 박진문을 시조로 한다.
3. 지역별 분포율[편집]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주로 영남 동남부, 전남에서 총인구 대비 박씨 비율이 높다고 한다. 인구의 10% 이상이 박(朴)씨로 전국 평균 8.43%보다 높다. 목포시, 해남군, 진도군, 완도군, 신안군 등 전남 서부의 박(朴)씨 비율이 특히 높은 편. 충북 남부나 강원 영서 일부 지역도 박(朴)씨 비율이 높다. 제주도는 예외.[16]
전라남도 진도군은 무려 18.87%가 박(朴)씨다.[17] 그 뒤를 경상북도 청도군(14.25%), 경상남도 남해군(13.19%), 경상북도 군위군(12.94%), 전라남도 해남군(12.81%)이 이었다.
반대로 박(朴)씨 비율이 가장 낮았던 지역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로 5.23%. 그 뒤를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5.97%), 충청남도 청양군(6.63%), 인천광역시 강화군(7.11%), 강원도 정선군(7.12%) 순이었다.
전라남도 진도군은 무려 18.87%가 박(朴)씨다.[17] 그 뒤를 경상북도 청도군(14.25%), 경상남도 남해군(13.19%), 경상북도 군위군(12.94%), 전라남도 해남군(12.81%)이 이었다.
반대로 박(朴)씨 비율이 가장 낮았던 지역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로 5.23%. 그 뒤를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5.97%), 충청남도 청양군(6.63%), 인천광역시 강화군(7.11%), 강원도 정선군(7.12%) 순이었다.
4. 실존 인물 혹은 가상인물[편집]
자세한 내용은 박(성씨)/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
5. 여담[편집]
- 한자로는 한국에서는 朴을, 중국과 대만에서는 번체자인 '樸'과 간체자인 '朴'을 같이 쓴다. 중국 대륙에서는 朴과 樸을 섞어 쓰는데, 이는 朴이 樸의 간체자로 쓰이기 때문이다.
- 현재 중국어로 발음은 Piao인데, 혹자는 원래 Po, Pu가 중국 동북지역의 방언인 -iao를 붙여 piao로 읽게 됐다는 썰도 있다. 朴을 Piao로 발음하는 이유 朴 글자 자체의 중국어 음가는 Piao, Po, Pu 등이지만 사람 성씨에는 Piao로 읽는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Pu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고. 현재로서는 대륙은 성씨로 쓰일때는 Piao로 대만은 성씨로 쓰여도 Pu로 발음한다.朴 Pu 발음
- 아랍어권에서는 주로 بارك 로 쓰는 듯 하다. 예시
[1] 기원전 57년 4월 ~ 57년 10월, 80년 9월 ~ 184년 3월[2] 912년 4월 ~ 927년 11월[3] 물론 극소수 사례지만 박연의 사례 같은 귀화 박씨의 사례도 존재하기는 했었다. 다만 박연은 조선으로 귀화한 이후 하사받은 성씨가 단지 박씨였던거지 처음부터 박씨 성씨를 사용한것은 아니었다.[4] 의흥 박씨의 경우는 시조가 고려왕족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5] 청나라 시대 만주족은 엄연히 귀족이었고, 만주족이 아닌 이상 만주에 체류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팔기군에 소속된 조선인들이 만주족에 편입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청나라 치세 당시에는 한족 중 청나라 황실의 총애를 받은 경우나 벼슬을 받은 사람들이 종족을 한족에서 만주족으로 바꾸는 경우에서 보듯, 청나라 당시 만주족은 민족 집단이라는 혈통적 개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가진 지배 계급이라는 신분적 개념 또한 함께 포함하고 있기도 했었다.[6] 번시 박씨들이 만주족에서 한족으로 그리고 한족에서 조선족으로, 그 뿌리를 확실하게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에게만 있고 중국에는 없는, 박씨라는 성(姓) 때문이기도 했지만 박영강을 시조로 지금까지 16대를 이어오며 간직해온 자신들의 족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만약 족보가 아예 없었더라면 자신들의 뿌리를 되찾기란 그 만큼 더 힘들었을 것이다.[7] 이명박 정부시절 기획재정부와 노동부 장관을 지낸 박재완씨는 Bahk을 쓴다. 사실 이쪽 철자(Bak, Bahk)는 성씨 박보다는 이름에 박이 들어갈 때 주로 쓰는 편. 한자도 당연히 다르게 사용.[8] 박세리 골프 선수.[9] 이승만 전 대통령, 야구선수 이대은, 이근.[10] 먼나라 이웃나라의 이원복 작가.[11]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는 북한의 로마자 표기.[12] 중국인 이씨 로마자 표기.[13] 조선 이씨 왕조 로마자 표기. 이왕가를 제외하면 주로 이름에 '이'가 들어갈 때 혹은 처음부터 발음이 '이'인 성씨를 가진 본관에서 사용.[14] 참고로 1930년 일제강점기 때 실시한 국세조사에 의하면 대부분이 북한에 몰려 살고 있었다.[15] 밀양 박씨 난계문헌공파[16] 제주도의 상위 3개 성씨는 '김이박'이 아니라 '김이고'다. 고(高)씨, 강(姜)씨 등에 밀려 5위다.[17] 진도군의 상위 3개 성씨는 '김이박'이 아니라 '김박이'다.